<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1,1-8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사회를 향한 교리, 사회를 위한 교리
2020년 12월 6일 대림 제2주일 (인권주일, 사회교리주간) 나해
천주교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6개월 이상의 교리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예비자 교리"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떠하며, 예수님은 누구이시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미사가 왜 중요하며,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고, 십계명과 사랑의 계명을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가?
이런 내용들을 공부하고, 배우고, 외워야 비로소 신자가 됩니다. 비로소 신자로서, 신자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긴 시간동안 상당히 많은 내용들을 공부해야 하고, 외워야 하는데, 다들 그 어려운 걸 해내셨으니 장하십니다.
우리는 2천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하느님-예수님에 대해 배우고, 배운대로 살며, 그렇게 2천년을 지내왔죠.
교회도 2천년 동안 그런 말만 하고 살아왔습니다. 하느님이 어떻고, 예수님이 어떻고, 사랑이 어떻고.
교회의 교리는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해 신자들과 예비신자들에게 가르치고, 그렇게 살도록 말하는 교리였습니다.
그런데 130년 전, 교회는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1891년 레오 13세 교황님은 2천년 동안 한번도 없었던, 새로운 교리를 발표하셨습니다.
왜 새로운가 하면, 지금까지는 신자들을 향해 하느님에 대해 말해주는 교리만 있었는데,
이 회칙은 신자가 아닌 모든 세상 사람들을 향해, 세상은 이래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새로운 교리였던 것입니다.
제목 자체도 "새로운 사태"였습니다. 세상에는 지금 새로운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구요.
당시 유럽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기계로 움직이는 공장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단지 그 기계들을 도와주는 역할만 하면 되었죠. 따라서 월급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공장주들은 더 싸게 사람을 쓰기 위해, 남자 대신 여성을 고용하고, 아예 여성도 빼고 어린이를 고용했죠.
주일학교도 그래서 생겨난 겁니다. 주일 만큼은 아이들 공장에 보내지 말아달라.
우리가 주일날, 밥도 주고, 교육도 시켜줄 거니까, 제발 아이들이 하루라도 쉴 수 있게 해줘라. 그게 주일학교였죠.
그렇게 노동시간은 극도로 길게, 임금은 쥐꼬리만큼, 결국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져, 극빈자들이 늘어만 갔습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이렇게 제시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러해야 한다고.
어린이와 여성에게 중노동을 시키지 않아야 한다. 가혹한 노동시간을 줄여주어야 한다.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그 가족들이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정당하게 지불해 주어야 하며,
통치자들과 공권력은 이 상황을 방치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약자들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사회는 그런 모습으로 움직여야 하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제시했습니다.
130년 전 교황님의 새로운 교리는 정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사회가 변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130년 동안, 교회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 이 사회를 움직이고 변화시키기 위해
세상의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하여 새로운 교리들을 발표해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새로운 교리들을 사회를 향한 교리, 사회를 위한 교리라고, "사회교리"라 부르고 있습니다.
교회가 발표한 사회교리 문헌만 나열해도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인권, 노동, 경제, 정치, 국제공동체, 평화, 가정, 환경 등, 여러 사회 문제점들에 대해 사회교리를 말해왔고,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나왔던 것은,
5년 전에 기후위기와 환경문제를 경고했었던 "찬미받으소서",
그리고 올해 코로나 사태 속에서 국가 이기주의를 멈추고, 세계가 함께 연대하자는 "모든 형제들"이 있습니다.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해, 분명한 방향들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개별적인 각각의 문제점에 대해 즉흥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교회가 제시하는 사회교리들은 분명한 원칙과 원리들을 바탕으로 해결책을 찾아 제시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제시하는 사회교리의 원칙과 원리들을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설명하자면 이렇게 됩니다.
출발점은 가장 아랫쪽에 위치하고 있는 "참여의 원리"입니다.
사회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도 중요하지만, 모두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 문제랑 상관없어, 상관하지 않을래. 그렇게 따로 떨어질 수도 없고, 따로 떨어져서도 안 됩니다.
모든 문제들은 함께 참여하고, 또 참여할 수 있어야, 해결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싫어도 좋아도 공동체이니까요.
국민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노동자도 기업 활동에 참여하고, 시민들도 사회활동에 참여해야 올바른 사회가 됩니다.
참여를 바탕으로 해서 여러 가지 사회활동들을 우리가 함께 실천해 나가야 하는데, 중요한 원칙이 2가지 있습니다.
첫번째로는 연대성. 우리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손가락이 아프면, 온몸이 다 아픈 것처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 폭력, 빈곤, 불의들은 곧 나의 아픔입니다.
따라서, 강력하게 서로 연대해서, 공동으로 대처해야, 고통과 불행을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보조성. 개인이나 어떤 단체가 자기 역할을 잘 해내고 있지 못하면 국가나 상급단체가 도와줘야 합니다.
모두가 자기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죠.
하지만 이 보조성 안에는 중요한 원칙이 또 있습니다. 이름하여 "팔 길이 원칙"이라고 합니다.
팔 길이 만큼 거리를 두라는 거죠. 쉽게 말해서, 지원은 해주되 간섭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지방자치제가 대표적인 예죠. 국비를 지원해주되, 이거 해라, 이렇게 해라, 간섭하지 않는 겁니다.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용돈을 주면서, 이거 해라, 저거 사야한다,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보조적이어야 합니다. 각자의 자율성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거죠.
특히 약자들에게는 더욱 그래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연대성과 보조성이라는 원칙을 지키면서, 사회활동들을 해나가는 지향점은 공동선입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의 선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자기만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의 선에 부합하는 일들을 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국가 역시도 어느 특정 집단의 편익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이익과 공동의 선을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거죠.
이 모든 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고, 하느님에 의해 구원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존엄합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생명을 지키고, 자유를 누리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 즉 인권이 보장되고 지켜져야 합니다.
교회가 제시하는 사회교리들은 모두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방법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인권주일이며, 사회교리주간 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외쳤던 것처럼,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해, "주님의 길을 곧게 마련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사회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올바른 사회가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나는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 주변에는 아직도 올바르지 않은 일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굽은 길을 올곧게 펴나가면서, 구세주를 맞이할 준비를 함께 해나가는 대림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