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인들의 성황신, 무등산
무등산에 대한 최초의 이름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이는 무진악이다. 이는 백제시대부터 광주가 무진주라 불렀던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오늘 대표 이름이 된 무등산은 고려사 악지에 처음 등장한다. “무등산은 광주의 진산이다. 광주는 전라도에 있는 큰 고을이다. 이 산에 성을 쌓았더니 백성들은 그 덕으로 편안하게 살며 즐거이 노래를 불렀다.” 라는 기록에 나오는 무등산이 그것이다.
그런데 무등산은 서석산이란 별칭으로도 불렸다. 고려사 지리지에 “무등산이라 적고, 혹은 무진악이라 하고, 혹은 서석산이라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고려시대에 이미 서석이란 별칭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서석이란 별칭은 조선시대 여러 사서에도 등장한다. 동국여지승람은 고려사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한 후 “이 산 서쪽 양지바른 언덕에 돌기둥 수십 개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높이가 가히 백 척이나 된다. 그래서 산 이름을 서석이라 했다.”라고 적고, 서석으로 불린 유래를 밝히고 있다. 송강 정철은 성산별곡에서 “천변에 뜨는 구름 서석에 집을 삼아”라고 노래하고 있고, 고경명도 무등산 등반 후 유서석록을 남기고 있다. 육당 최남선은 서석산이라 불리우게 된 서석대를 “좋게 말하면 수정병풍을 둘러 쳤다 하겠고, 박절하게 말하면 해금강 한 귀퉁이를 떠 왔다 하고 싶은 것이 서석”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무등산은 무정산이라고도 불렸다.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 여러 명산을 찾아 왕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무등산 산신만은 그 소원을 거절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나라에 가뭄이 계속되자 왕명으로 남쪽의 명산 무등산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했으나 무등산 신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왕명에 불복한 산신을 멀리 지리산으로 귀양 보내고 이 산을 왕명도 거부한 무정한 산이라 하여 무정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민간 사이에 전해오는 설화일 뿐 동국여지승람에 “무등산신사 신라위소사 고려치국제 본조춘추령 본읍치제(無等山神祠 新羅爲小祀 高麗致國祭 本朝春秋令 本邑致祭)”라 적고 있어, 무정산이라 불린 저간의 배경을 알려준다. 즉, 고려시대에는 나라의 제사를 모시다가 조선조에 와서는 산신의 격을 낮추어 고을제사로 지내게 한 서운함에서 생겨난 설화로 보인다.
무진악, 무정산, 서석산 등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무등산은 남도인들을 지켜 준 성황신이었고 포근한 힐링처였다. 무등산이 남도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산이었는지는 최부의 다음 사례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나주 출신인 최부(1454~1504)는 1487년 제주도에 추쇄경차관으로 갔다가 부친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뭍으로 나오던 중 폭풍을 만나 중국까지 떠밀려간다. 그리고 우여곡절을 겪다 반 년 만에 귀국한다. 이 때의 내용을 기록한 책이 표해록이다. 이 책에는 폭풍을 겪은 선상에서 수행원들이 쑥덕거리는 말을 우연히 엿듣게 되는 대목이 나온다. 제주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무등산 신사와 금성산 신사에, 제주를 떠나는 사람들은 제주 일원에 있는 여러 신사에 제사를 지냈어야 하는데, 최부가 그렇게 하지 않아 결국 바다의 노여움을 사 낭패를 당했다는 쑥덕거림이었다. 이는 무등산과 금성산(나주)이 당시 남해바다를 관장하고 항해자의 안전을 살피는 수호신이었다는 증거다. 그런데 바다로부터 수십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무등산이 남해 바다의 항로를 관장한다고 믿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믿음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렬왕 7년(1281), 제 2차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을 앞두고 광주 출신의 동정원수 김주정이 제사를 지냈을 때 무등산 산신만이 세 번이나 방울을 울려 승리를 기원했고, 이를 알게 된 고려 조정에서는 무등산 성황신에게 벼슬을 내린다. 이 이야기는 조선초기에 쓰여진 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그런데 이때의 일이 조선시대까지 지역민들의 기억에 남아 최부와 같은 배를 탔던 동승자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민중들의 무등산 신앙은 옛 광주의 치소를 에워싸고 있던 길이 2킬로미터 남짓한 석성인 광주읍성에도 묻어있다. 고려 말 축조된 후 1910년 무렵 일제에 의해 철거된 광주읍성을 축성한 돌이 바로 무등산의 특징적인 암석인 안산암이었다. 무등산의 안산암을 날라 쌓았던 것은 안산암의 절리가 뚜렷해 가공의 번거로움을 덜고 단기간에 성을 축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지만, 광주의 진산으로 여겨 온 무등산의 석재를 사용함으로써 산의 영험함을 얻어 왜적을 방어하려 했던 심리도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등산은 광주를 지켜 낸 요새지요, 외침을 당한 수난지였으며, 독립운동가의 활동지였고, 이념의 아픔이 밴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이미 소개한 동국여지승람에 “백제 때 이곳에 옛 성이 있었고 무등산곡이라는 노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바로 옛 성이 지금의 산수 5거리에서 무등산 전망대쪽으로 오르면 만나는 무진고성인지 별도의 성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후백제 진훤군과 왕건군의 치열한 싸움이 이 옛 성을 에워싸고 벌어졌음은 분명하다. 진훤은 892년 무진주에서 신라서남도총지휘병마를 자칭하다가, 900년 완주(지금의 전주)에 후백제를 세운다. 903년 왕건이 서해로 내려와 나주를 쳐 함락시켰으나 광주를 빼앗지 못했으며, 그 뒤 909년 진도를 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광주의 성주는 진훤의 사위 지훤이었는데, 936년 신검이 고려에 항복할 때까지 무등산의 옛 성은 난공불락이었다.
고려 때 몽골과 왜의 외침이 잦아지면서 무등산도 수난을 당한다. 고려 고종 43년(1256) 6월, 몽골의 차라대군 천 여 명이 무등산에 진을 친 일이 있었고, 고려 우왕 7년(1381) 4월에는 지리산 전투에서 패한 왜구들이 무등산 규봉암으로 들어 와 바윗돌 사이에 목책을 세운다. 전라도 도순문사 이을진이 결사대 100여 명을 모집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 돌을 굴러 내리고 불화살을 쏘아 목책을 불사르고 왜구를 쫓아낸다. 왜구가 물러난 후 200여년 뒤 또 왜군이 들이닥쳐(정유재란) 증심사를 불태운다.
무등산은 어등산과 더불어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 중 하나였다. 무등산 자락은 광주 출신인 김원국·김원범 형제 의병장의 거병장소였고, 왜군과 수십 회에 걸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현장이다. 1908년 음력 설날에 벌어진 창평군 외남면 무동리(현 담양군 남면 무동리) 전투도 그 중 하나다.
또한 무등산은 항일 구국열사들의 비밀 집회 장소였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조직적으로 이끌었던 것은 독서회였다. 그 중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의 독서회가 무등산 중머릿재와 약사암 앞 세인봉에서 결성된다(1929. 6). 1928년 8월 5일 광주 소년회관에서 열릴 예정이던 전남 소년 연맹 창립대회가 일제의 금지로 좌절되자, 그날 밤 대표 60여 명은 무등산 증심사로 옮겨 집회를 열다 일경의 습격을 받아 피검되기도 했다. 증심사 앞 춘설헌은 의재 허백련의 작업 공간이었지만, 이전에는 김구가 찾은 광주의 어른 최흥종 목사의 오방정이었고, 2·8독립 선언의 주역이었던 석아 최원순의 은거지였다.
무등산에는 6·25전쟁의 아픔도 배어 있다. 6·25전쟁으로 증심사를 비롯하여 원효사, 규봉암 등의 주요 건물이 전소된다. 특히 1933년 증심사 5층 석탑 해체 수리시에 발견 된 금동석가여래입상(옛 국보 제 211호)과 금동보살입상(옛 국보 제 212호)도 광주경찰서 금고에 보관 중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국보에 옛 자가 붙은 이유다. 6·25전쟁 이후 한 동안 무등산도 지리산처럼 빨치산의 은신처가 된다. 광주가 수복된 직후인 1950년 10월 29일, 서석초등학교에 주둔중인 국군 제 20연대가 무등산 빨치산의 습격을 받았고, 학교 건물 일부는 불에 타 버린다. 지금의 산수동~원효사 간 관광도로도 6·25전쟁이 낳은 산물이다. 무등산에 은신중인 빨치산에 대한 작전 수행을 위해 1950년 12월부터 경찰이 주민들을 동원, 계림동에서 원효 계곡에 이르는 12킬로미터 구간에 도로를 개설한다. 그 후 이 도로를 확장하고 포장한 것이 현재의 관광도로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제는 부족한 군수용 목재 조달을 위해 나무를 베어내고, 비행기의 대체 기름을 얻기 위해 다년생 적송을 뿌리 채 캐낸다. 연료 채취 때문이기도 했지만 해방 직후 무등산이 벌거숭이가 된 또 다른 이유였다.
광주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무등산 아래에 있다고 대답한다. 또 무등산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광주에 있다고 대답한다. 이처럼 광주와 무등산은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광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할 때부터 무등산은 광주 지킴이였고 안식처였다. 때론 외침으로 아픔을 당하기도 했지만, 오늘 무등산은 다시 국립공원이 되어 광주시민들의 힐링 장소가 되었다. 오늘도 무등산은 어느 때처럼 남도인들의 성황신이고 지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