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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는 방랑자였다
한국문인협회 알버타지부 이정순
나는 종교의 방랑자였다.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언저리에서만 서성이는 방랑자. 갈 곳이 없어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 여행은 ‘돌아갈 내 집이 있기 때문에 여행’이라 한다. 하지만 나는 돌아갈 내 집이 없었다. 그렇게 이십여 년 떠돌이 생활에서 이제 내 집을 찾아 안주하는 중이다. 하지만 아직도 한발은 대문 안에, 한발은 대문 밖에서 서성인다.
내가 그동안 방랑자로 떠돌며 기웃거리던 집은 절집이었다. 부처님을 믿는다며 절 문턱이 닳도록 넘나들었고, 108배를 올리며 간절히 내 앞일을 떠맡기며 “내 종교는 불교다!” 하고 선언했던 시절, 그것도 어찌 생각하면 한발은 대웅전 안에 들여놓고, 한 발은 대웅전 바깥에 머물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이민을 왔다. 이민을 오고 보니 내가 소속된 곳이 전혀 없었다. 이민자라면 모두가 겪는 물 위에 뜬 기름 같은 이질감. 사방에는 낯선 것들, 문화, 언어, 생김새. 하나도 나의 옷이 아니었다. 마음의 공허함으로 스트레스로 두통을 앓기 시작했다. 공황장애까지 겪으며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나는 지옥이라 표현했다.
이민 오기 전, 내가 제일 싫어하던 곳이 교회였다. 오죽했으면 명성교회 구역장을 맡고 있는 여고 동창이자 제일 친한 친구가 입만 열면 하나님을 외치던 그가 내 앞에서는 하나님 ‘하’자도 꺼내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내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자, 자신도 이민을 가겠다며 연락이 왔다. 한국은 한참 IMF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보다 5년을 늦게 캐나다 이민을 왔다. 우리가 정착한 사스캐츠완 리자이나에 그도 정착했다.
그들이 우리 집에 8개월을 함께 살며 남편이 그들에 맞는 사업체를 찾아주었다. 한 가족처럼 8개월을 한집에 사는 동안 사업체 오픈하는 날을 기다렸다.
그들은 주일만 되면 자신들이 가진 최고의 멋진 옷을 입고 교회에 가는 것이었다.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청바지에 유니폼을 입고 부스스한 얼굴로 일을 하고 있는데 교회에 간다며 인사를 하러 가게에 온 것이다. 그때 나는 초라한 내 모습에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개스 스테이션을 하는 나는 가게 물건을 사러 갈 때마다 코스코, 홀세일 클럽 등등 친구를 데리고 다녔다. 그들도 개스바를 하기 위해 연습을 시킨 것이다.
나는 이민 5년 차, 그들은 이제 5개월, 어느 날, 가게 물건을 하기 위해 커다란 카터를 둘이서 밀고 좀 더 싼 물건이 없나? 아니면 세일하는 품목을 찾아 눈을 크게 뜨고 그 넓은 코스코 매장을 헤집고 다녔다. 이미 물건은 반대편에서 우리가 안 보일 정도로 실었다. 그때 매장에서 한국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친구에게 “권사님, 비즈니스 오픈하셨어요?” 하고 인사를 했다. 사실 나는 권사가 뭐하는 사람인지. 집사가 뭔지도 몰랐다. 이민온 지 5년이나 된 나는 한국 사람 한 사람도 모르고 있었는데, 5개월밖에 안 된 그는 한국 사람 모르는 이가 없었다. 나는 거기서 또 한 번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이민 와서 적응하지 못해 스트레스로 인해 두통을 앓고 있었고, 몸은 말이 아니게 말라 있었다. 남편이 “당신 너무 말랐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을 해야만 했다. 내가 그에게 내세울 것은 문학을 한다는 것과 서예가라는 것이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서예가로서 명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서예계에서는 이름 정도는 알 정도로 계도에 올라 있었다.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에서 작품 전시회를 할 때면, 그 또한 꽃을 한 아름 안고 축하한다며 찾아오기도 했었다.
캐나다 이민을 오고 보니 그 또한 여의치 않았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들어와 밤중에 서예 도구를 꺼내 붓을 잡는다는 것은 언감생심, 온종일 서서 노동한 다리에 휴식조차 주지 못하는 생활이었다. 전날 부은 다리가 그다음 날, 그 위에 다시 붓기를 반복하는 날이었지만, 내 자존심을 세워줄 서예가라는 타이틀과 문학인이라는 타이틀이 있어 그나마 견딜만했다. 또한 문학을 사랑한 나는 그들이 오기 전 캐나다의 시베리아라 불리는 곳, 문학의 불모지 같은 곳에 이미 문학회를 창립하고 회원을 모집중에 있었다. 하지만, 교민이 많지 않은 그곳에서 회원을 늘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주일, 친구 부부가 교회에 간다며 또 인사를 하려고 가게에 왔다. 그들이 가게에 왔다가 가는 날에는 하루 종일 허탈했다. 가게는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장사가 잘되었다. 모르긴 해도 그는 오히려 내가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매주 멋진 옷을 차려입고 교회에 갔지만, 그날 따라 내 모습이 왜 이리도 더 초라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너는 매주 교회에 가면서 왜 나보고 가자는 말을 안 하니?”
나도 모르게 불쑥 뱉은 말, 친구는 갑자기 나를 끌어안으며 우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하여 어리둥절했지만, 이 친구가 왜 우는지 몰랐다. 그는 “은혜받았다” 는 말을 수없이 하고 그의 남편은 “죽사이가 정말 교회에 간다고?” (제 호가 죽산인데 그는 그렇게 불렀다) 그렇게 나는 교회에 한발을 들여놓았다. 교민이 얼마 되지 않은 곳에서 1년에 한 사람 문학회 회원 늘리기도 어렵던 것이 내가 교회에 나가고부터 회원이 늘었다.
그는 또 ‘니가 은혜받아 문학회 회원이 늘었다.’ 라며 하나님을 불러왔다. 그 역시 강제로 문학회 회원이 되었다.
그렇게 또 십 년을 나의 목적 문학회를 연맹해 나가는 방편으로 교회 문에 한발을 들이고, 한발은 문밖에서 문안으로 들여놓지 못하고 서성였다. 하지만, 그 10년 동안 주일날 한 번도 교회에 빠지지 않고 다녔다. 3년 만에 개근상이라며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고, 그래서 그런지 두통도 공황장애도 없어졌다. 물론 스트레스 방편용으로 강아지를 키웠다.
그는 또 하나님을 믿어 치유되었다고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하나님보다 우리 해피(강아지) 덕이라 말하며, 하나님을 내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나는 몸은 교회에 가면서 마음은 철저히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그 방랑의 세월이 또 십 년.
우리는 계획에도 없는 캘거리에서 리타이어를 했다. 문학회 문우의 인도로 성당에 발을 들여 놓았다. 나는 한국에서 절에 다니면서도 만약 내가 절에 가지 않으면 성당에 나가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자연스럽게 캘거리에서 한인 성당에 입문하게 된 것이다. 만약 사스캐츠완에 한인 성당이 있었다면 정작 입문했을지도 모른다.
남편과 나는 6개월 동안 열심히 영세 받을 준비를 하고 2023년 12월 크리스마스 날 영세를 받았다. 남편은 바오로, 나는 에스델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우리 부부는 주변의 좋은 분들 덕분에 영세 받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느님을 제 안에 모시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뻤다. 특히 대부 대모님을 좋은 분으로 모시게 되어 더 기뻤다.
영세 받는 날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나는 이제야 방황을 끝내고 하느님 집에 안주했다. 한발을 성전 안에 들이고, 한 발은 성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호를 그으며, 묵주를 돌리며, 어느 순간 두 발이 온전히 성전 안에 머물기를 기도하며, 방랑을 끝내고, 돌아갈 집을 마련하기 위해 견진성사 교육을 신청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이제 열심히 내 집을 보수하고 다듬어서 주님의 따뜻한 빛으로 빛나는 집과 정원을 가꿀 것이다.
*요한복음 15장 4절: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마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첫댓글 죽산이사님 체험적 수필 감사합니다.
멋진 여름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수필을 잘 안 써 서툰 부분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