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수레바퀴 (隨筆)
예진당 / 황해숙
가을이 오는 길목에 들어섰다. 먹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햇살이 후텁지근하게 다가오더니 하오 한때 소나기를 퍼부었다. 아침 일찍부터 푹푹 찌는 기온은 영락없은 한여름이었다. 한가위 명절이 코앞으로 바짝 다가왔는데도 기온은 선선해질 기미가 없다. 사람들이 향방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천태만태 하고 시간도 엉거주춤하고 있다.
올여름은 초유의 고온, 가장 긴 열대야라는 기록을 새로 썼다. 해마다 여전하지 않다고 이구동성이었지만 올여름은 유난했다. 무던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내가 ‘너무 덥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지냈다. 그나마 거실 구석에 말없이 서 있는 에어컨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에어컨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가동했다. 어쩌다 외출할 때만 멈추었을 뿐 외출에서 돌아오면 우선 에어컨을 켜는 습관이 생겼다. 더러 전기요금이 많이 나올 것을 예상하고 적정 시간을 정하고 에어컨을 꺼야 하나 망설였다. 더워도 너무 더워서 전기요금을 많이 내는 한이 있더라고 시원하게 지내자고 생각을 바꾸었다.
애써 생각을 전환하여 과거로 돌려보았다. 기억의 저편에 있는 유년 시절을 소환했다. 부모님 품 안에서 철없이 지내던 그때, 무엇 하나 넉넉하지 않았으나 아이러니하게 내 기억 속에는 풍족한 것만 남아있다. 아버지의 넓은 품과 어머니의 다정한 얼굴이 모든 결핍을 삭제하고 넉넉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유년 시절에는 시간이 더디다고 불평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훌쩍 크고 싶었고 중고등학생 언니들처럼 머리를 양쪽으로 땋고 교복을 입고 멋지게 등교하고 싶었을 게다. 흰 눈보다 더 흰 깃을 자랑하면서 검정 플래어 스커트를 입고 순수한 소녀가 되고 싶었을 게다. 시간이 흐르고 그 시절을 맞았지만 바람에 스쳐 쏜 화살 같이 지나갔다.
성인이 되고 성가 하여 4남매의 어머니가 되었다. 올망졸망 아이들을 키우면서 시부모 모시랴 친정 부모 걱정하랴 보낸 세월이 도둑맞은 것과 다름없다. 하루가 멀다고 일어나는 일들을 어찌 감내하고 지냈는지 기억조차 없다. 집안일에 시달리며 지내느라 나를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가정이 평안하고 자녀들 착하게 성장하면 그만이라고 스스로 자위하면서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행동을 삼가면서 살아왔다.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출가하여 가정의 주인이 되고 한숨 돌리게 되었다. 평생 처자식을 어깨에 올려놓고 묵묵하게 걸어온 남편과 어미의 바람대로 착하게 성장한 자녀들이 보상이라고 여기고 있다. 애당초 따로 욕심이 없었다. 내 좁은 소견으로는 그마저도 벅찼다. 눈코 뜰 새 없는 고단한 여정에서도 시간의 수레바퀴는 공평하게 굴러갔다. 내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을 때는 빨리 갔으면 좋았으련만, 어쩌다 쥐구멍에 볕 드는 것처럼 찾아온 황홀한 시간은 더디 갔으면 좋았으련만 시간은 한 치 오차 없이 정확하게 흘렀다.
세월이 흘러 뒤안길에 다다랐다. 어느 날 몽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누구인지, 내 꿈은 무엇이었는지 방황하게 되었다. 한 시절 가정을 평안하게 가꾼 안주인이란 건 만족이 없었다. 동시대 살았다면 누군들 그만큼 일궈놓지 않았으랴. 그 외의 무언가가 간절해졌다. 유년 시절 까치발을 들면서 성큼 성숙하기를 바랐던 것처럼 가슴속에서 용암이 끓듯 뜨거워지는 열을 감지했다. 시간의 수레바퀴는 이순의 중턱을 향하여 속력을 내고 있었다.
늦은 공부를 시작하기로 작정하고 열심히 노력했다. 지역사회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봉사에도 헌신했던 공로로 보건복지 장관상을 받았다. 지금은 평생교육사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처럼 빠르게 대응하지 못해도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다 보니 그들 못지않게 되었다. 자녀들이 응원해 주는 힘과 남편의 말 없는 외조도 한몫했다.
늦은 나이에 힘들게 공부를 왜 하나. 더러 받는 질문에 유쾌하게 웃는다. 꽃나무를 보면 일제히 꽃을 피우는 것 같지만 더러 늦게 피는 꽃이 있게 마련이다. 과일나무에 매달린 과일도 한날한시에 영글어 가지 않게 마련이다. 늦게 익어가는 열매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시간의 수레바퀴는 공평하게 굴러가고 있다. 누군가 빨리 목표에 도달했을 것이며 나 같이 늦게 정상에 도달한 사람도 있다. 정상에 다다른 것만 꼬집어 말하라면 일찍 도달한 사람이나 늦게 도달한 나나 모두 정상에 도달했다. 지금은 시간의 속도를 탓하지 않으련다. 가라면 가라지. 오려면 오라지. 나답게 시간의 수레바퀴 따라 흘러가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