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시세끼 배불리 먹어도 커가는 어린이들은 간식을 먹어줘야 한다.
세 끼 밥만 먹어서는 항상 배가 고프다.인간도 동물이기에 일단 배를 채울려는 본능이 있다.
이는 곧 활동에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하기위한 본능이다.
그러기에 먹을 것만 있으면 우선 먹고 봐야 했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간식거리를 확보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이른 봄에는 잔디 뿌리를 캐 먹는다.'짠두박'이라
불리는 풀의 뿌리인데 껍질을 벗기면 하얀 뿌리가
마디로 되어 길다랗게 나온다.그것을 씹으면
단 물이 많이 나온다.
새 싹이 나기 시작하면 찔레나무 줄기를 벗겨 먹는다.’찔구리’라는 것이었는데 새로 나온 어린 새 줄기를
꺽어 껍질을 벗기고 먹으면 부드러우면서도 상큼한
향기가 좋았다.
산에 가면 흐드러진 진달래 꽃을 따 먹는다.
어른들이야 술 담궈 먹는다지만 어린이들은
그 자리에서 따 먹는다.
약간 상큼하면서 시큼한 끝부분이 맛이 진하지만 빨간 꽃잎은 덤덤하다.
'나순개'라 불리던 지금의 냉이 종류인 식물의 뿌리를 씻어 먹기도 했는데 맛은 매웠다.
또 쑥을 캐 와서 있는 집에서는 쌀가루를, 없는 집에서는 밀가루를 버물러 쪄 먹는 '쑥버무리기'도 좋은 간식이었다, 괭이밥이라 하는 풀도 씹어 먹으면 신맛이 나며 먹을만 하다.
쉰 막걸리처럼 신 맛이 나서 ‘술나무’라고 하며 소꿉장난할 때는 아버지 역할을 하는 남자에게
여자 친구들이 먹였다.
봄철 간식은 뭐니뭐니 해도 '삐비'이다.
'삐비'란 벼가 나올 때 어린 싹을 줄기속에 품고
있다가 늦여름에 밖으로 나와 익은 후 여물이 들듯이 풀이 씨를 만들기 위해 봄에 어린 꽃을 줄기 속에
품게 되는데 가만히 두면 여름에 갈대꽃 처럼 피어나 씨를 만들어 종자를 퍼뜨릴 부분인데 그 부분을 뽑아 까보면 수염처럼 허여면서도 보드랍고 맛이 있다.
학교를 오갈 때 논두렁,밭두렁에서 한 움큼씩 뽑아
까먹으면 시간과 거리감을 잊을 수 있었다.
해가 긴 여름엔 더위에 지치고 먹을 것은 못먹으니
영양실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학교 조회시간에 빈혈로 쓰러지는 친구가 생기고
영양실조 병인 소병도 생긴다.어렸을 적 부스럼이나 버짐이 많이 나는 이유도
영양 부족 때문이었다.특히 마른 버짐이 많은 애들은 대개 끼니를 제대로 못먹는 얘들이었다.
이른 여름엔 뭐니뭐니 해도 막 익어가는 보리를 구워 먹는 일이다.
24절기중 “망종”에는 햇보리를 베어 구워 먹는 날로 아예 전통 풍습이 있다.
열심히 구운 보리를 손바닥으로 비벼 껍질을 후후 불어 날린 후 익고 벗겨진 보리 알맹이를
입으로 탁 털어 넣고 씹으면 왜그리 고소한지.맛에 흡족해 웃으면 이미 손바닥에서 입주위
볼로 전해진 검정은 서로를 보며 웃게했다.
망종은 자기 논에서 베다가 가족간에 구워 먹는 풍습이었고 어린 친구들끼리 남의 밭이나 논에서 몰래 베다가 후미진 곳에 모여서 구워먹는 보리가 더더욱 맛이 있었다.
여름엔 주로 주인 몰래 밭곡식에서 간식을 섭취한다.
우선 제일 맛있는 것이 무명밭에서 따먹는 ‘다래’이다.무명 실을 뽑는 목화나무를 전라도에서는
미영이라 했다.목화밭을 ‘미영 밭’이라 불렀던 것이다.그 어린 열매는 달콤하면서 부드러워
어느 과일 못지않게 맛있었다.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져서 가장 어린 열매를 따 먹어야 맛있지
잘못하다간 이미 솜이 되려고 세어버린 열매를 따게 되는데 그것은 솜을 씹는 것 처럼 맛이 없다.
밭에 보이는 오이나 가지도 주인 몰래 슬쩍 따서 먹었고 아직 여물이 채 들지 않은 고구마도 캐
먹었다.꽁무니를 빨면 단맛이 나오는 사루비아 꽃도 심심풀이 간식 거리 였고 나락(벼)이 품고
있는 아직 바깥세상을 보지 못한 어린 벼싹도 맛잇는 간식이었다.하지만 어린 맘에도 쌀이 될
어린 벼싹은 아까와서 많이 먹지 못했다.
난 어머니가 외지로 장사를 나가시면 아버지가
내 어린 동생에게 간식으로 쪄 주던 빵 만드는 법을 어깨 너머로 배웠다.밀가루를 알미늄 도시락 통에다 당원과 소다(이스트)를 넣고 버무려 솥에다 물을
붓고 도시락을 띄워놓고 불을 때면 부풀어 서 익은
밀가루가 도시락으로 하나 가득 빵으로 변해 있다.
당원은 설탕을 대신한 식품이었는데 비닐봉지에
포장되어 하얀 백색가루로 판매 됐었다.
설탕가격이 비싸서 서민들은 당원을 주로 썼다.
한 여름에는 더위를 잊기위해 정씨 어르신네 가서
물을 금방 떠 온 후 당원을 타서 마시면 시원한
냉차가 되었다.
이렇게 밀가루로 대강 만든 빵을 개떡이라고 했다.
애들 간식용으로 가끔 어머니들이 큰 맘먹고 쪄주면 동네 애들에게 자랑하러 나갔다가
동네 형들이나 친구들의 감언 이설에 속아 다 뺏겨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고 먹겠다고 덤비는데야 주지 않고 배겨날 도리가 없는 것이 세상 이치인 것같다.이런 개떡에 팥을 몇 개씩 밖아서 만들면 고급스러워 지는데 여름철 명절인 유두나 백중에
좀 있는 집에서 해 먹었던 음식이다.
추석엔 송편을 설날엔 떡을 해 먹는다.
정월 대보름에 찰밥을 먹는 것을 필두로 주로 음력 15일은 보름으로 명절이다.
그 때는 뭔가를 해 먹어야 했는데 가장 많이 세던 명절이 6월 유두와 7월 백중이다.
물론 8월 추석이야 성대한 2대 명절이고~.이 두 명절은 여름에 있는데 주로 부침개를 해 먹었다. 파전도 해 먹었고 방앗잎 전이나 부추전,호박전도 해 먹었지만 아무 것도 넣지않고 밀가루로만
부쳐 먹기도 했다.난 7월 백중에 부쳐먹는 매운맛이 강렬한 고추전을 좋아했다.
그 때는 후라이팬도 없었고 가마솥 두껑을 뒤집어 놓고 호박 꼬다리로 콩기름을 골고루 솥뚜껑
바닥에 골고루 뭍힌 후 밀가루 전을 부쳐 냈다.날씨도 더워 땀을 흘리면서 응달진 마당에 임시로 설치한 아궁이에서 장작불을 때면서 부침개를 부쳐내던 젊었을 적 어머니 모습이 생생하다.
가을엔 먹을 것이 흔했다.여름 내내 강렬한 햇볕을 받아 익은 감,밤,대추 등 갖가지 과일들이
풍성했고 밭에는 고구마,달콤한 김장용 무우..맘만 먹으면 언제고 훔쳐 먹을 수 있었다.
그래도 당시는 교육을 잘 받고 자라 남의 곡식에 손을 잘 대지 않았다.설익은 벼를 베다가 살짝
찐 후 말려서 껍질을 까면 올개쌀이 된다.올개심리라고 농사를 짓는 집이면 해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곡식이 모자라던 시대라 그렇게 미리 먹었던 것도 같고, 벼가 익었나 덜 익었나
확인하기 위해 이를 테면 샘플을 추출했던 풍습 같기도 하지만 씹을수록 고소한 게 올개쌀 이었다.
올개쌀을 호주머니에 넣고 가 수업시간에 먹다가 선생님께 혼 난 애들도 많았다.
주로 간식을 좋아하는 여학생들이 그랬다. 수수열매를 따 낸수수깡의 부드러운 부분을 씹어도
단 맛이 나서 낫으로 대강 껍질을 벗긴 후 그 토막을 간식으로 갖고 다니며 씹었던 기억도 난다.
사탕수수는 아니라도 일반적으로 수수대는 단 맛이 나나 보다.지금처럼 찰옥수수는 없었지만
누런 강냉이도 삶아 먹어 봤으면 하는 바램이 어린 시절 내내 있었으나 밭이 없었기에 한 번도
먹지 못했다.
겨울에는 긴긴 밤이 문제다.TV도 없던 시절이라 노동에 지친 부모님들은 일찍 주무셔야 했었다.
사실 늦게까지 있어 봤자 배만 고팠을 것이다.하지만 우리들은 공부를 한답시고 늦게까지 자지
않았고 중,고등학교 다니는 형이나 누나가 있는 집에서는 불이 늦게 꺼졌다.대신 한창 때인지라
형들은 삶은 고구마를 동치미와 함께 먹기도 했고 삶으면 물고구마가 되는 살이 연한 고구마를
골라 밤참으로 깍아 먹기도 했다.가끔 늦게 주무실때면 어머니가 모두 모아놓고 고구마를 깍아
주셨는데 치아가 좋지않은 어머니는 고구마나 무우를 숫가락으로 긁어서 드시는 것을 좋아했다.
한 수저 얻어 먹으면 깍아 먹는 것보다 훨씬 시원하고 부드럽고 맛이 있었다.
우리집 뒷산에는 공동 묘지는 아니었지만 묘지가
모여 있는 넓은 터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기계로
고구마를 삐져(잘라) 말려서 역전에 있는
‘보해 소주 공장’에 소주 주정원료로 납품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묘지터 한 쪽에 임시로 움막을 지어놓고 한 사람이
지켰는데 터가 워낙 넓어 사각지대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우리는 적당히 말른 빼깽이라 불리는
고구마 편을 훔쳐다 그냥 먹기도 하고 부모님 몰래
쪄 먹기도 했다.
훔치는 시기는 캄캄한 밤이나 비오는 날이 좋았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고구마를 잘라 바짝 말린 다음 보관을 하면 썩히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가 있다. 그걸 쪄 먹으면 적당히 물기가 들어가 삶은 고구마처럼 맛이 나고 그냥 생채로는 돌처럼
떡딱하지만 잘라서 입에 넣고 오래 침으로 불려 먹으면 그 또한 맛있었다.훌륭한 간식인 셈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라면이라는 것은 내가 4학년 때 쯤에 나왔을 것이다.
'왈순마'나 '삼양라면'이었는데 농심라면은 몇 년뒤에 출시된
것으로 기억한다.우리가 라면을 먹는 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지금의 애들도 좋아 하지만 그 때
우리들도 라면 한 번 먹어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하지만 학용품도 제대로 못사는 처지에 군것질은 힘든
일이었고 라면을 삶아 먹는 다는 것은 동네 흉 거리가
되기도 했다.그렇게 귀했던 라면을 6학년때 재수생이던
백옥련이란 친구가 날 것으로 깨 먹다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찬물을 떠와서 거기다 불려 먹기도 하는 것을 보고 많이 부러워 했었다.
라면이야 주식이지만 우리들이 먹는 과자로 나온게 '뽀빠이','라면땅'이었다,
손바닥만한 봉지에 라면을 구워서 넣은 것 같은 과자인 라면땅도 정말 맛있는 과자였다.
그당시 우리들이 간식으로 사먹을 수 있는 과자는 몇 종류가 되지 않았다.
구멍가게인 ‘전방’에는 3~4단의 진열대 위에 상품을 진열
했었는데 맨 윗단에는 사탕류가 있었다.지금 술 담그는
병인 주둥이가 큰 유리병에 '유과'나 '비과'라고 씌여진
말랑말랑한 젤리형 사탕, 오다마라고 불리운 큰 사탕.겉에
설탕으로범벅이 된 빨갛고 파란 색사탕이 각각의 병에
담겨져 있었고, '바브민트','쿨민트'등 해태와 롯데에서
생산된 껌들이 반달모양의 진열대에 꼿혀 있었다.
그 아래 에는 '라면땅'을 비롯한 몇 종류 안되는 봉지 과자나 고무처럼 늘어나는 길다란 '고무과자'가 놓여 있었다.
맨 아래에 삼립빵등 방부제가 잔뜩 들어 갔을 법한 빵들이
나무상자에 담긴 채 진열돼 있었다.
지금이야 몇 개의 대형 제과점에서 만들지만 그 때는 가내
수공업으로 과자나 사탕을 만드는 곳이 많았다.
생목 넘어 연탄공장 옆에도 과자 공장이 있었는데 동네
아가씨들이 한 달에 3천원씩 받고 일을 했었다.
그곳에 다니던 누나들은 과자 만드는 것 보면 사먹기가
싫다고 했다.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대강 만들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부드러운 아이스 크림은 아예 없었고 얼음에 색을 넣고 단맛을 나게하여
손잡이 막대기를 달아 판매하는 '아이스케끼'가 최고 였는데 내가 고학년 때쯤 삼강 아맛나를
비롯하여 제과점에서 관리하는 얼음과자가 출시되기 시작했다.
아마 우리가 어렸을 때 가만히 있는 우리들의 입맛을 자극하는 소리 두 가지를 뽑는다면 엿장수
가위소리와 “아이스 케키”라고 리드미컬하게 외치는 소리였을 것이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신던 고무신이나 쓰던 대두병을 부모 몰래 갖다주고 엿을 바꿔 먹거나
아이스케키를 사 먹었을까? 그 때 아이스케키 장사들도 리어커를 끌고 다니면서 고무신이나
큰 병,심지어 장작까지 받으며 팔았다.
아마 그 때 도시에서는 저녁에 들리는 “찹쌀~떡,메미~일묵”하는 소리가 하나 더 있었을 것이다. 또 냄새로 홀리는 것은 붕어빵 집에서 빵 굽는 냄새였다.그나마 현남이나 대동등 시내와 떨어져
있는 동네에는 붕어빵가게가 없어서 괴로움이 덜 했을 것이다.
돈은 물론이고 모든 것이 귀하던 시대.그 때가 우리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지금 중국의 시골이나 필리핀의 시골에 가면 당시 우리가 살았던 환경과 비슷한 것같다.
모든 것이 귀하던 시대에는 물건들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알았었고 음식에 대해선 참 맛을
느낄 수가 있었다.
들판의 풀이나 산속의 열매에 대한 진정한 맛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느끼지를 못한다.
우리도 몰래 입맛이 변해 있어서 어린시절을 추억하며 괭이밥을 먹어보면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세상의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 맞는 것이라 생각 하면서도 자연과 멀어진다는 왠지 모를 불안함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