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에 개봉하여 관객 천만을 넘긴 영화 <암살>. 이 영화의 주인공 안옥윤이 일제 강점기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였던 남자현을 모티브로 했다 하여 남자현이라는 인물이 잠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사실 남자현이 영화의 실제 모델은 아니다. 영화의 내용과 남자현의 실제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감독도 분명히 얘기했지만, 그저 모티브만 됐을 뿐이다.
▲ 남자현 강한 의지와 일관된 정신으로 독립운동의 길을 간 독립운동가 남자현. 생가 추모각 안에 그녀의 사진이 걸려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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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암살> 스틸컷 남자현을 모티브로 한 영화 <암살>은 실제 남자현의 일생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 |
ⓒ 네이버영화 <암살> 스틸컷 |
그 남자현의 생가 앞에 와 있다.
별다른 특색은 없어 보이는 평범한 시골 마을의 산줄기 한 자락에 자리한 생가는 1999년 영양군 측과 남자현 후손들에 의해 세워졌다.
주차장에서 정면을 바라보며 왼쪽에 남자현지사 항일순국비가 서 있으며, 오른쪽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대문으로 들어가니 생가에는 정면으로 본채 하나가 세워져 있으며, 그 오른쪽 담장 너머로 추모각이 있다.
추모각에 들어가니 남자현의 사진이 정면을 응시한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잊힌 이름이지만, 그녀는 별다른 아쉬움도 없고 자기 할 일은 다했으니 잊혀도 상관없다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잠깐 고개를 숙여 묵념하고 나왔다.
▲ 남자현 생가 본채 외문을 열고 들어가면 만나는 생가 본채. 정면 4간의 평범한 기와집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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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생가는 겉보기에 깨끗하고 깔끔하다. 하지만 썰렁하고 아쉽다. 사람의 채취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생가조차 없었다면, 남자현이라는 독립군 대원이자 독립운동가를 눈으로 볼 수 있는 흔적조차 없을 뻔 했으니 고맙기는 하다.
사실 남자현의 일생을 기록한 기념비가 있지만, 세로로 쓰인 데다 한자가 다수 섞인 한문 투의 긴 문장을 성의 있게 읽어줄 사람이 필자 외에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겠다. 1999년의 기념비는 마치 조선시대의 기념비 같은 인상을 준다.
지금이 고려나 조선시대가 아니고 시대가 바뀌었으니 형식도 좀 달라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더구나 기왕에 복원했다면 그녀의 역동적인 삶만큼이나 좀 더 구체적인 형상물을 만들어두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녀의 유언이나 그녀의 삶의 흔적들을 어딘가에 실체로 보여주거나, 혹은 본채 마당 어딘가에 그녀의 손가락 비라도 세우고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면 어땠을까. 실제 당시 그녀가 살던 만주의 마을에서는 혈서를 쓴 그녀의 손가락 목비를 세웠는데 말이다.
아니면 그녀가 죽을 때까지 입고 다닌 남편의 피 묻은 옷을 복원하여 본채 방 안이나 추모각에 하나 걸어두고 설명을 덧붙였다면 어땠을까. 좀 더 눈에 들어오는 생동감이 있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다행히 작년(2017년) 영양군 측에서 예산 50억 원을 들여 생가 주변에 남자현지사 기념관을 한옥형으로 지을 것이라 발표하였다. 한옥형이 아니라도 좋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외면에 돈을 많이 들이거나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인다. 남자현이 그런 인물도 아니다.
중요한 건 내용물이다. 기념관에는 그녀의 생생한 실체가 입체적으로 나타나길 기대해 본다. 그저 평면적으로 그녀의 일생을 나열하고 사진과 유물 자료만 몇 개 전시하는 식으로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개인적으로는 세 번에 걸친 손가락 절단으로 두 개만 남은 그녀의 손가락 형상물이 있었으면 한다. 마치 안중근의 손가락이 안중근의 상징이듯.
본채의 마루에 앉아 따스한 봄 햇살과 정면의 느릿한 산줄기를 바라보며 망설임 없이 한 길을 갔던 그녀의 단호했던 한평생을 생각해보았다.
▲ 남자현지사 항일순국비 남자현의 일생이 기록되어 있는 기념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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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로서의 삶
남자현은 학자였던 남정한의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은 그녀는 19세에 아버지의 제자인 김영주와 결혼한다. 이렇게 남편과 홀시어머니를 섬기며 살던 그녀의 평범한 삶에 변화가 닥친 것은 1895년이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의병운동이 안동에서도 일어났고, 남편도 의병으로 참전했는데, 홍구동 전투에서 그만 일본군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스물넷의 나이에 임신 중이었던 그녀는 남편을 잃어 혼자가 되었고, 의병운동의 여파로 친정아버지와 오빠마저 잃게 된다. 이 와중에도 아들을 낳아 키우고 홀시어머니를 봉양하며 20여 년 이상 집안 며느리로서의 의무를 다하였다.
시어머니 사망 후 삼년상을 치른 다음 그녀는 서울에 올라가 3.1운동에 참여하였다. 3.1운동의 경험으로 독립운동을 결심한 그녀는 장롱 속에 넣어둔 남편의 피 묻은 옷을 간직하고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었다.
지금으로 치면 환갑이나 다름없는 47세의 나이. 평범한 양반가의 여성으로 살기를 거부한 그녀는 스스로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의병운동에 나서 일본의 탄압에 희생된 그녀의 집안과 남편의 집안에 서린 DNA 때문이었을까.
만주로 망명한 그녀는 아들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시키고, 자신은 독립군 부대 서로군정서의 일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남자현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거나 부상병의 간호를 담당하며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그녀가 독립군의 어머니라 불린 것도 이때부터였다.
더구나 전투가 없을 때는 만주 각 마을을 누비며 12개의 교회를 세우고 여성과 어린이 교육을 맡기도 하였다. 고향에서 가족을 모두 잃은 후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남자현은 만주에서도 기독교 교인의 생활을 이어나간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 같은 교인이자 독립운동가를 교회사의 주춧돌로 삼아야 한다. 엉뚱한 친일파 인물이나 신사참배에 굴복한 인물들을 내세우는 오류를 범하지 말고.
▲ 남자현 추모각 생가 옆에 추모각이 있는데, 내부에 남자현의 사진이 걸려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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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은 스스로 손가락 세 개를 자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독립군 내부에 분파가 생기고 그들끼리 싸우는 일이 생기자, 그녀는 7일간 금식기도를 한 후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써서 간부들을 소집한 후 통합을 호소했다. 그의 정성과 각오에 마음이 움직인 독립군 간부들이 분쟁을 접고 화합을 이루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1923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을 때 회의가 성과를 보지 못하고 결렬되자, 다시 손가락을 잘라 민족의 통합을 호소했다. 1932년 국제연맹 리튼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다시 한 번 손가락을 잘라 흰 수건에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내 독립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녀는 1927년 길림대검거 사건으로 안창호, 김동삼 등 47명의 독립운동가가 체포되고 일본 경찰에 인도될 위기에 처하자, 안창호의 집안 친척으로 위장하고 면회를 허락받아 감옥에 들어간 다음 안창호의 밀명을 받아 이를 관계자에게 전달, 이들을 일본 경찰에 인도하는 데 반대하는 여론을 일으켜 결국 석방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그녀는 두 번 암살을 시도했는데, 1926년 54세 때 사이토 총독을 처단하기 위해 서울에 들어왔다가 송학선이란 청년이 먼저 암살을 위해 움직이다가 체포되는 바람에 포기하게 된다.
다음으로 61세 때인 1933년 만주 전권대사인 무토 노부유시 처단을 목표로 허름한 중국 노파로 변장하여 폭탄 투척을 실행하기 위해 움직이다가 한국인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6개월 동안 일제의 악랄한 고문과 심문이 이어졌지만 이미 60대의 여성인 남자현은 굴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며 단식으로 일제에 투쟁하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남자현은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서 아들과 손자가 찾아오자 감춰둔 249원 80전을 꺼내어 200원은 독립되는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내놓고, 나머지는 손자와 친정 손자의 교육비에 쓰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미음이라도 들기를 원하는 아들 앞에서 그녀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에 달려 있다."
이후 남자현의 아들은 어머니의 유언을 성실하게 지켰다. 그는 해방 후 삼일절 기념식장에서 임시정부 요인에게 200원의 독립축하금을 전달하였다. 그 후 1962년 그녀에게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남자현 생가 추모각 쪽에서 바라본 남자현 생가. 정면으로 평범하고 느릿한 산줄기가 지나간다. 생가는 북향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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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일관된 삶을 회상하며
해방 후 60년 이상 그녀는 거의 잊힌 존재였다. 2015년에 와서야 천만 영화를 통해 그녀의 이름이 비로소 대중에게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름이 주는 무게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영화 때문에 오르내린 그 이름에 대해 제대로 알려는 노력을 했던가. 그저 한번 전지현의 멋진 액션과 이미지가 오버랩되며 '그런 여자가 있었다' 정도로 소비되고 또 다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건 아닌가.
우리는 철저한 독립군으로 독립운동의 길을 갔던 그녀를 제쳐 두고 엉뚱한 친일파 인물들 여럿을 위인으로 알고 지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는 인물들 여럿을 존경하며 살았다. 그래서 우리는 남자현과 같은 인물들에 대해 더 알아야 한다.
한 평생 집안과 남편, 아들, 가족에게 충실하고 자기 의무를 다하면서도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의연하고 강직하게 독립운동의 길을 걸어간 불굴의 여성, 남자현. 그녀의 구체적인 활동 내용이 아직 다 밝혀지지 않았지만, 알려진 것만으로도 존경하고 남음이 있는 독립군의 어머니.
그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로서의 남자현을 넘어 자신의 인생과 의지에 최선을 다한 한 인간으로서 그녀를 존경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현실에 휘어지고 꺾이는 것이 다반사인 우리네 삶에 그녀의 일관된 치열한 삶은 하나의 표상이 되기에 충분한 까닭이다.
그래서 바란다. 남자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녀의 생가에 방문하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만들어주길. 외형에 매몰되어 내실을 놓치지 않길. 아무쪼록 한 여성의 삶이 방문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생가와 기념관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 남자현 생가 외문에서 내부를 본 모습.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글과 유교 경전을 배우며 자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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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현 생가 안내판 영양군 석보 가는 길가에 안내판이 있어 차를 갖고 갈 경우 찾기 쉽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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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정보
* 경북 영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구가 희박한 고장 중 하나이고,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에서 가장 찾아가기 힘들고 먼 곳 중 하나이다. 남자현 생가의 방문은 개인적으로 군위에 있는 김수환 추기경의 생가를 찾아갔을 때만큼 놀랍고 가슴이 아린 경험이었다. 평범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평범한 사람의 길을 갈 수 있었을 사람들. 풍수지리적으로 그다지 좋지 않은 북향의 집들. 역사와 현실은 그들을 평범한 인간의 삶을 버리도록 만들었다. 조용하지만 그들의 행적을 뚜렷하게 알 수 있는 유적지가 되길.
*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 → 34번 국도 → 안동 → 34번 국도 → 진보를 지나 월전삼거리에서 영양 방면 좌회전, 1.5km 진행 후 우회전, 911번 지방도로를 따라 약 2km 가면 오른쪽에 생가가 있다. 당진영덕 간 고속도로 영양IC에서 나와 34번 국도 안동 방향으로 진행, 월전삼거리에서 영양 방향으로 들어가도 된다.
* 대중교통은 불편하다. 행정구역은 영양군에 속해 있지만, 청송에 가까운 입지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청송군 진보로 가는 것이 좋다. 진보에서 석보로 가는 농어촌버스(하루 5회)를 이용해 지경정류장 하차. 비교적 버스가 더 자주 다니는 영양-진보 간 농어촌버스를 이용해 흥구에서 내린 다음 지경리까지 약 2km 걸어가는 방법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