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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학적인...것,,잘 모릅니다
<아래 글은 복의 근원님께서 맨 처음 제게 보내 주신 서신내용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자신을 내게 계시하셨음에 불구하고~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이유는....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었다는 것이었습니다.....하지만...나는 죄인이였습니다
나는 죄의 열매로 죄인것을 알았지만...하나님께선 본질적으로 죄인인것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자신의 존재을~
그래서 죄의 열매로 죄인인것을 판단하지말고...죄의 본질을 앎으로...죄인을 용서와 사랑으로,,,긍휼히 여길것을 원하셨습니다~
죄의 본질은...마음에 하나님두기를 싫어한다는것....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죄의 본질을 해결하기위해,,,오셨다는 것....
하나님만이 율법을 지킬수 있다는 것...
내안에 죄의본질이 사해지지 않으면...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
그래서...예수님께서...십자가를 지셨다는 것....그 복음이~내 안에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것...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내는 피조물이 되어야 하는것이 복음의 목적이라는 것...그 목적을 위해...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이요~
...그동안에 진실로 알게 된것은... 내 안에 선한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선하신 분은 말씀대로...하나님밖에 선하신분은 없다는 것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믿음의 발을 딛지 못하고,,,두려움과 불신으로~가족을 떠나지 못하고(맡기지 못하고)~물질에 눈이 어두워져서~
...몇년동안...하나님을...찾는것에~마음을 다하지 못하여~
...하나님께서~삶을 흩으시어~다시 하나님을 찾게 만드셨네요~~~~
다음 글은 길수가 보낸 적이 있는 죄의 본질(原罪)에 관한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내용이 담긴 글입니다.
원죄(原罪)에 대한 바른 이해 http://blog.daum.net/mugue/18320522
~어린아이 같은 대부분의 백성들(99.999... %)이 罪人이 아닌
까닭은 그들 양심이 하나님의 성령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었다.~는 그 당시의 복의 근원님의
양심의 소리가 기독교 신학교리와 다투고 있었던 것 아닐는지요?)
에녹, 욥, 엘리야, 다니엘, 사르밧 과부, 나아만 등 구약시대의
인물들이 의롭게 살아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얻을 수 있었던
까닭도 그들이 (타고난)양심을 더럽히지 않고 순전하고 정직한
삶을 산 까닭이었습니다.
동서양의 성인과 현인들이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며 하늘을
공경할 수 있었고 , 목사님과 길수의 할아버님들이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후를 막론하고 선하고 순박한 삶을 살고,
경천애인의 십계명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도 하나님이 직접
낳으신 양심을 굳게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길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장로교 고신파인 광주은광교회를 다녔습니다. 83년 전남대 법과 대학을
졸업한 후 부산에 있는 고신대 신학대학원을 한 학기 다니다가
자퇴하였습니다. 그 후에 엘리야 선교원(한농복구회=십계석국)이라는 곳을
갔다고 어머님과 함께 출교 제명당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 중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신학상 교리가 바로 순진무구한 아이들과 착하게 사는 사람들 ,
청렴결백했던 조상들이 모두 죄인(복의 근원님 표현을 빌리자면 본질상
죄인)이라는 이 부분이었답니다.>
단지.. 내마음에 영접한 예수그리스도..그 분께서,,인도하신데로 따르렵니다~
단지..그 분의 음성을 듣는 귀와,,그 분의 말씀을 전하는 입,이 열려지길 따름입니다~
영을 분별할길 바랄뿐입니다~
<대한민국에만 자칭 예수, 하나님, 보혜사 성령이란 이들이 수백 명을 넘는다
합니다.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양과 염소(양의 탈을 쓴 늑대)를 분멸하실 것입니까?
영접한 예수님이 빛의 천사(예수님)모습으로 나타난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짝퉁 예수가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저도 세상에서 쓸모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냥 그저..그렇게~숨쉬는 것이~힘들어 살아있으나 죽은 자 였기 때문입니다~
보이나 보이지않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이 세상것들을 사랑치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나의 남은 인생이란것은 알고 있습니다~
더~점..점..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합니다~
,,,길수님께서~만나신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고..알려주신..십자가의 복음..예수그리스도를~
참되게...세상에 전할수 있도록~하나님아버지께서...이끄시기를 축복합니다~
20년간의 교회에서 알게 모르게 가르침 받은 내용들이
모두 신학적인 내용 아닐는지요?
신학상의 논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세뇌시켰던
그 모든 거짓들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진정한 복음의
교리(진리)로 쳐부숴야 되지 않겠습니까?
시간상 다음에 더 쓰겠습니다.
하지절 길수 배상
참조>
하나님 사랑과 가족(부모 자식 형제)사랑 080114月
http://blog.daum.net/mugue/15697781
마태복음 15장 4절~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 부모(父母)를 공경(恭敬)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毁謗)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종교지도자인)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有益)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父母)를 공경(恭敬)할 것이 없다하여 너희 유전(遺傳)으로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폐(廢)하는 도다.
입즉효어가(入卽孝於家) 출즉충어국(出卽忠於國) 노사구지지야(魯司寇之旨也).
충(忠)이란 심(心)=양심(良心)에 中(맞을 중)하게 즉 합당(合當)하게 처신(處身)하는 삶이니 경천(敬天)=하나님 사랑의 다른 표현(表現)이요 효(孝)란 노쇠(老衰)한 부모(父母)를 등에 업은 자(子)의 상(象)이니 사람사랑=애인(愛人)의 근본(根本)도리(道理)임에 틀림없다.
유대교의 지도자(指導者)들인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분(名分)아래 가족(家族부모자식형제)에 대한 도리(道理)를 내팽개치는 이들을 경건(敬虔)한 이들이라고 추켜세웠다.
오늘날 사이비(似而非) 기독교인(基督敎人)들도 그리스도의 명령(命令)을 곡해(曲解)하여 가정(家庭)을 버리고 교회(敎會)를 섬기는 자가 되도록 순진(純眞)한 자들을 그릇 인도(引導)하고 있다.
다른 한편 가족(家族)을 위한다고 국가(國家)를 팔아넘긴 매국노(賣國奴)들은 자기(自己)양심(良心)=천(天)에 대한 사랑을 버린 자들이다.
충(忠)이란 큰 효(孝)요 효(孝)란 작은 충(忠) 또는 효(孝)는 충(忠)의 씨앗이요 충(忠)은 효(孝)의 열매라 하겠다.
참된 효자(孝子)들은 더 큰 가족(家族)인 국가(國家)나 우주(宇宙)의 입장(立場)에서 보면 진정한 충신(忠臣)들이 아닐 수 없고 참된 충신(忠臣)들은 부모(父母)의 이름을 천추(千秋)에 남긴 큰 효자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참으로 이웃인 인간(人間)을 사랑하는 이들은 이웃의 물질적(物質的) 궁핍(窮乏)만이 아니라 그 마음의 아픔을 함께 나눔으로 천(天)을 기쁘시게 하고 하늘을 공경(恭敬)하는 이들은 바른 양심(良心)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사람들의 축복(祝福)이 되는 것이다.
가장 소중(所重)한 존재(存在)는 양심(良心)이다. 천심(天心)과 인심(人心)은 충심(忠心)효심(孝心)과 다르지 않다.
참된 충(忠)이나 효(孝)는 자발적(自發的)인 육체적(肉體的)희생(犧牲)으로 표현(表現)되는데 유대인의 종교적(宗敎的)제의(祭儀)와 한국인(韓國人)의 가족적(家族的)제사(祭祀)는 충(忠)과 효(孝)를 가시화(可視化)시켜놓은 의식(儀式)들이라 하겠다.
자기(自己)육체(肉體)를 제물(祭物)로 바치는 이 거룩한 제사(祭祀)의식(儀式)은 천(天)이나 인(人)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고귀(高貴)한 사랑을 하라는 무언(無言)의 가르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효(孝)를 빙자(憑藉)하여 불충(不忠)을 저지르는 자들이나 충(忠)을 내세워 불효(不孝)를 저지르는 파렴치(破廉恥)한 이들은 자기 목숨을 지나치게 아껴 양심(良心)을 더럽힌 자들로 하늘과 부모에게 죄(罪)를 짓는 자들이다.
지성과 효성(至誠과孝誠) 090730
http://blog.daum.net/mugue/18320485
誠(정성)이란 사람(작은 하늘)으로서 天神(큰 하늘)을 본받아야 하는
도리(공경敬)와 자식으로서 부모를 섬기는 도리(孝)를 함께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늘-사람의 관계와 부모-자식의 관계의 본질을 같은 誠으로 본 까닭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지요?
우리의 육체를 낳아 주신 이는 부모님이시지만 우리의 마음(제290조의 천심=양심)을 낳아 주신 분은 하늘이십니다.
하늘이 모든 사람의 신령한 부모님으로서 사람의 심령을 돌보시는 그 정성(誠)에서 부모가 자식을 기르는 정성이 나왔기에 경천敬天과 효친孝親의 도를 한가지로 誠이라 하신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하늘의 정성을 본받고, 자식으로서 부모님께 정성 다해 효도하라는 가르침이 바로 이 誠章이라는 말이지요.
誠이란 천심(正心)의 활발한 움직임이라 했습니다.(제1조 衷心之所發)
誠이 없는 사람은 살아있는 나무나 흙덩이에 불과하고 걸어 다니는 시체일 뿐이랍니다.(185조 止卽土木行卽肉尸)
우리 조상들이 청렴결백과 안빈낙도를 생활신조로 삼으시고 실천하셨던 이유도 물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종래에는 신령함을 완전히 잃게 되어 새나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자가 되는 줄을 익히 아셨던 까닭이었습니다.(195조 物慾蔽靈竅塞九竅盡塞與禽獸相似)
사람이 하늘의 이 정성(보살핌과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하늘의 도리는 물론 사람의 도리에 어둡게 되고 우리의 천성(천심=양심=심령)이 어디서 왔는지, 우리의 몸이 어디서 왔는지 결단코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바른 이 깨달음이 밑바탕으로 버텨주지 않기 때문에 여타의 모든 깨달음(사상이나 학문 등)들은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맙니다.(제5조 人 不知 有天工造化卽 昧於天人之理 不知 我賦性 從何而受矣 亦 不知 我身體 自何而來矣. 覺不先此無所餘覺)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인가?
http://blog.daum.net/mugue/15180983
071219木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인가?
중생(衆生)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 아이의 마음과 부모의 마음, 철부지의 마음과 철든 이의 마음, 범인(凡人)의 마음과 철인(哲人)의 마음은 어떻게 다른가? 어떤 점에서 같은가?
사무엘상 8장 4절-9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百姓)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 나를 버려 자기(自己)들의 왕(王)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사무엘상 16장 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容貌)와 신장(身長)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民衆)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어린아이는) 외모(外貌)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中心)을 보느니라.
시편118편 22절 (베드로전서 2장 4절) 건축자(建築者)들이 버린 그 돌이(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 성전(聖殿) 모퉁이의 머릿돌(하나님이 택(擇)하신 보석)이 되었나니~.
이사야 42장 1절-9절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擇)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神)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異邦)에 공의(公義)를 베풀리라. ~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獄)에서 끌어내며 흑암(黑暗)에 처한 자를 간(間)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사야61장 1절-3절 주(主)여호와의 신(神)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消息)을 전(傳)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捕虜)된 자에게 자유(自由)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恩惠)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伸寃)의 날을 전파(傳播)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慰勞)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花冠)을 주어 재를 대신하고 ~.
메시아란 야훼께서 기름 부어 택하여 세운 우주(宇宙)의 지도자(指導者)를 지칭(指稱)하는 히브리어이니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요 한국어로는 정도령(鄭道領) 즉 진인(眞人)들로 번역(飜譯)할 수 있겠다.
양과 염소, 참그리스도와 적(敵)그리스도를 구별(區別)하는 눈이 트이지 않은 백성들에게 지도자(指導者)를 선택(選擇)하게 하는 민주주의(民主主義) 제도(制度)가 중우주의(衆愚主義)를 새롭게 포장(包裝)한 것에 불과한 것임을 인류 역사(歷史)는 확실하게 증거(證據)하고 있다.
민주주의(民主主義)란 가족(家族)의 구성원(構成員)중 미성숙한 아이들에게 부모(父母)를 선택(選擇)하게 하는 것과 같은 제도(制度)이니 자연계(自然界)의 순리(順理)에는 어긋난 것이라 하겠다. 어른(얼든 이)과 어린이(얼 이른 이)는 사람인 점에서는 동등(同等)한 가치(價値)를 지닌 평등(平等)한 존재(存在)임이 분명하나 철인(哲人)은 자기 육체(肉體)의 욕심(慾心)을 다스릴 줄 아는 이, 즉 악마(惡魔)의 시험(試驗)을 이겨내고 승리(勝利)한 자인 반면에 민중(民衆)은 육체의 이익(利益) 욕망(慾望) 때문에 양심(良心)을 내팽개칠 위험(危險)을 안고 있는 아직 미성숙(未成熟)한 존재(存在)라는 점에서는 다르다고 아니할 수 없다.
환인(桓因)과 환웅(桓雄) 단군(檀君)의 나라 한국(韓國=桓國)은 하늘의 도(道)를 얻은 지도자(指導者)를 따르고자 하는 구도(求道)의 무리들이 모여 세운 나라임이 곰과 호랑이를 자기 무리의 상징(象徵)으로 삼은 집단을 나라의 백성으로 받아들이고 거부(拒否)하는 한민족(韓民族)의 신화(神話)에 잘 드러나 있다.
모든 종교(宗敎)에는 그들 나름의 통과의례(通過儀禮) 입문(入門)절차가 마련되어 있고 그 관문(關門)을 통과(通過)하는 자만을 정식교인으로, 신도(信徒)로 받아들인다.
부모(父母)가 자녀(子女)를 몇이나 낳을지 또는 입양(入養)할지를 결정하고 가정(家庭)을 구성(構成)하듯 한국(韓國)은 하늘의 마음과 하나된 선인(仙人)들이 주권(主權)을 가지고 큰 가정(家庭)인 국가(國家)를 세우고 다스려 온 나라였다.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옷은 참한국인들에게는 맞지 않는 옷이다. 한복(韓服)은 가족주의(家族主義)자의 옷이다. 법(法)의 강제력(强制力)으로 짜여진 양복(洋服)을 입은 자들의 눈에는 인정(人情)과 도리(道理)의 자율성(自律性)으로 만든 넉넉한 한복(韓服)을 입은 자들이 순진(純眞)하지만 바보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예물(禮物)을 주고받는 모습을 뇌물수수(賂物授受)의 부패한 문화(文化)로 치부(置簿)하고 강제력(强制力)으로 금(禁)하려 한다.
가족주의(家族主義)의 품이 넉넉한 이 한복(韓服)을 실용적(實用的)이지도 편리(便利)하지도 못하다고, 시대(時代)에 뒤떨어진 구식(舊式) 전통문화(傳統文化)의 소산(所産)이라고 주저(躊躇)하지 않고 고물(古物)처분을 해버리고 있다. 세계 모든 언어(言語)의 발음기호(發音記號)인 한글의 소중함을 알지못하고 영어(英語)를 배운다고 남녀노소(男女老少) 유학(留學)을 떠나는 것도 모자라 혀 짧은 소리를 내기 위해 혓바닥 수술도 마다하지 않는 세대가 되었다.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란 말은 백성(百姓)도 하늘만큼 소중한 존재(存在)이고 아이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사람으로서 대접(待接)받아야 마땅하다는 우리 선조(先祖)들의 가르침이지 백성(百姓)에게 지도자(指導者)를 뽑게 하고 자식들 마음대로 부모(父母)를 선택하는 권리(權利)가 우중(愚衆)에게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한민족(韓民族)의 문화(文化) 언어(言語) 종교(宗敎) 교육(敎育) 정치(政治) 경제(經濟)는 우주(가족)주의 차원(次元)에서가 아니면 이해(理解)될 수 없는 모순(矛盾)이요 신비(神秘)일 수밖에 없다. 개인주의(민주주의)나 집단주의(공산주의)자의 눈에는.
우주적(宇宙的) 가족주의(家族主義)는 양심(良心) 보호(保護)를 위해 하늘이 마련하신 최선(最先)의 제도(制度)인 것이다
님께 보내는 편지Ⅴ
http://blog.daum.net/mugue/12965712
하늘님이 내게 주신 아마추어 농부의 신분을 오늘 나는 자랑하고자 합니다.이 땅의 어머니 아버지들 중 어느 누구도 아들딸들을 농부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 이 시대에 하늘님은 나를 농부가 되도록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하시고 계시답니다.이십사년의 교육으로도 아직 아마추어의 농부의 옷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아니 아마추어라는 옷을 벗기 싫어서 그 옷을 계속 입고 있는 지도 모르겠군요.농촌 총각의 결혼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될 정도로 가장 인기 없고 천대받는 이 직업을 내가 좋아하는 그대마저도 꺼릴 것만 같아 그대에 대한 나의 관심을 감추어 두고만 있답니다.설령 그대가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고 내게 마음을 줄 짝이 영영 나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난 농부의 삶을 결코 부끄러워하거나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문명인 도시인이 되도록 24년 동안 세뇌 받은 그 교육으로부터 자연인 시골 사람으로 되돌아오기까지 동일한 이십사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나 봅니다.모세가 광야에서 애굽에서 교육받은 40년의 문명교육을 지우기 위해 사십년간의 양치기의 삶을 살았듯이.
자연인 원시인의 삶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도 진리나라의 임금님(요한복음 18장 37절)의 양과 염소의 비유(마태복음 25장 31절-46절), 가라지(피)와 벼의 비유(마태복음 13장 24절-30절)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있을 나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애굽의 최고학부의 교육으로도 양은 희고 염소는 검다는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답니다. 벗어나는 교육이 아니라 편견을 강화시키는 교육이었으니까요. 가라지(피)는 벼와는 확연히 다른 쓸모 없는 잡초라는 나도 모르게 세뇌 받은 그런 터 위에 내 삶의 집이 지어졌을 뻔했다는 사실이 저를 아찔하게 합니다.범인(凡人)의 눈에는 양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흰 염소를 시골에 와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비슷하기에 벼인지 피인지 분간을 할 수 없다는 사실도 농부가 되어서야 알 수가 있었습니다.
참 예수인지 거짓 예수인지 구별할 수 없을 때, 사랑하는 그대를 도울 수 있도록 농부의 삶으로 이끄신 하늘의 섭리를 감사하는 까닭을 이제는 아셨으리라 믿습니다.진리나라의 임금님의 길을 그대와 함께 걷고싶습니다. 짝퉁이 명품보다 더 명품 같고 나아가 당당히 짝퉁임을 내세우는 이 세대에 자연인으로 살고싶습니다.천 살이 넘는 나무를 우리 세대에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노아 할아버지 때까지는 인간의 수명이 천년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과학을 신으로 섬기는 이 세대의 학교나 교회에서는 믿을 수 있는 사실로 가르치지를 않습니다.천년 만년 함께 같은 길을 걷는 나의 짝이 그대였으면 좋겠습니다.
정해년 소서(小暑) 셋째 날 저녁 무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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