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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메시지 2017년 8월 20일 주일
시리즈 주제: 참 인간의 삶
(7) 하나님의 눈동자
신명기 32:9~10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설교를 위한 묵상
참 인간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다. 처음 인간은 하나님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살았다. 그리고 에덴에서 쫓겨날 때 인간은 하나님의 눈동자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을 외롭게 했다. 그래서 인간은 불행했다. 구원은 하나님의 눈동자를 다시 주목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참으로 회복한다. 인간의 진정한 삶은 하나님의 눈동자로서 자신을 알고, 하나님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눈동자로 서로를 대하는 삶이다. 여기에 참 인간의 길이 있다.
눈으로 말해요
사람은 말을 하는 존재입니다. 뜻과 생각을 알리기 위해 말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눈으로도 자기의 뜻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말로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눈으로 나타냅니다. 그래서 ‘눈으로 말해요’라는 노래도 있습니다.
1976년 권태수 씨가 부른 이 노래는 본래 ‘눈으로’라는 제목을 갖고 있습니다. 그 가사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눈으로 말해요 살짝이 말해요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으로 말해요
사랑은 눈으로 눈으로 한대요
남들이 알까 부끄러워 눈으로 한대요
사랑은 눈으로 눈으로 한대요
진실한 사랑은 눈을 보면 안대요
그 검은 두 눈은 거짓 말을 못해요
눈으로 말해요 살짝이 말해요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으로 말해요
(…)
말로 할 수 없는 것, 말에는 담을 수 없는 것을 눈으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로는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눈은 마음의 창이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진실을 말할 때는 눈으로 말을 하기도 합니다.
눈은 또한 그 사람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우리는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의학적으로는 심장이 멎었다 또는 호흡이 멈췄다고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흔히 눈을 감았다는 말도 사용합니다. 그의 존재는 눈을 뜨고 살아가던 시절에 의미가 있다는 말이며, 그의 눈을 볼 수 있어야 그를 만난 것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이처럼 눈은 그 사람의 존재를 표현하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눈동자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눈동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렇게 아끼고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을 보호하시되,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자기의 눈동자같이 지키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동일하게 고백을 합니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편 17:8~9)
하나님이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눈동자같이 지키셨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모세가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을 그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에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눈동자처럼 지키셨던 하나님이 지금 나를 압제하는 원수들의 손에서 나를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는 고백입니다. 다윗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눈동자처럼 지키신다는 것을. 그래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그 백성에게 전할 말씀을 주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스가랴 2:8)
전에 너는 약하고 괴롭힘을 당하던 사람이었으나 이제 너를 괴롭게 하던 나라로 가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너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너를 범하는 자는 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다. 스가랴에게 하나님은 전에 모세에게 하시던 말씀처럼 다시 눈동자처럼 소중한 존재임을 생각나게 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보내주셨다고 신약의 언어로 표현하지만, 구약의 언어로 하자면 ‘하나님은 우리를 눈동자처럼 아끼고 보호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동자입니다.
하나님이 주목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눈동자처럼 아끼고 사랑하시기에 언제나 우리를 눈으로 바라보시고 주목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시편 32:8~10
하나님이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를 주목하시며 인자하심과 선하심으로 두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눈동자처럼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우리를 언제나 주목하여 바라보시며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두르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며 예비하십니다.
그러니 무지한 말이나 노새처럼 강압을 해야만 주인에게 가까이 오는 그런 고집스럽고 몽매한 사람이 되지 말고 언제나 인자하심으로 두르시는 하나님,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도우시려고 주목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권면입니다.
전에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자기 아들 곧 백세에 낳은 아들을 바치려고 칼을 들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손을 멈추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아들 대신에 제물로 바칠 수 있도록 새끼 염소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단에서 아들을 풀어 내리고 근처 수풀에 뿔이 결려 우는 새끼 염소를 발견하고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곳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레라는 말은 본래 히브리어 ‘라아’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그 의미는 ‘눈으로 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이레라는 말은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는구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삼일 동안 걸어서 이곳 모리아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바치려고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위에 아들을 묶어 올립니다. 그리고 칼을 들어 아들을 치려 합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은 보고 계셨음을 아브라함은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브라함을 주목하시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에게 인자하심으로 두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에도 그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주만 바라볼지라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하나님의 사랑의 눈동자
하나님의 눈동자는 어떤 모습입니까? 위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눈은 사랑의 눈입니다. 다윗은 그 눈동자를 그의 평생에 함께 하시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백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편).
그런데 성경에 하나님의 눈에 대해서 “불꽃 같다”고도 말씀합니다.
두아디라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요한계시록 2:18)
하나님의 눈이 두아디라교회에 대해서 불꽃같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 교회에 성도들을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는 이세벨 같은 음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죄에 함께 동참하여 빠져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보시면서 그들을 심판하시려고 준비하십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린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어머니가 멀리서 아들을 발견하고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손을 흔듭니다. 그런데 아들의 길을 가로막는 불량배들이 있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아들을 구하려고 그들을 향하여 험한 얼굴을 하면서 노려봅니다. “너희가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이냐!” 이렇게 소리를 지르자 불량배들이 달아납니다. 어머니는 다시 부드러운 얼굴로 아들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괜찮다. 두려워 말아라. 엄마가 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 이와 동일한 말씀을 십자가를 앞두고 변화산에서 기도하실 때 우레와 같은 큰 소리로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눈동자는 어떤 눈빛입니까? 그의 자녀들을 향한 눈은 한없이 부드럽고 사랑 가득한 눈길입니다. 그가 약할 때는 특히 더 자상한 눈으로 바라보시며 그가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용기를 낼 때는 때로 바라보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쳐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시며 응원하시고 격려하시며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눈으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예수님의 눈동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안으시고 그 아이들의 눈을 보시면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의 손을 만지시면서 그의 눈을 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 때도 예수님은 삭개오의 맞은 편에 앉으시고 그의 눈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고 웃으면서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의 눈을 본 삭개오는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셨지만, 그 무리를 바라보시며 긍휼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개인들을 만나셔서 그들의 눈을 바라보시고 치료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가까이서 따르고 그의 품에 기대어 떡을 먹던 제자인 사도 요한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한일서 1:1)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시며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렇게 나사로의 무덤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던 하나님을 바라보고 확신 가운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요한복음 8:29)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의 눈동자를 의식하셨고 그렇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비하심을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동일한 사랑의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눈을 보았으며 그렇게 예수님의 눈을 통해서 하나님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하나님의 사랑의 눈동자를 의식하면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구원이란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눈동자를 의식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삶’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참 인간의 삶이란 결국 하나님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사는 삶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는 눈맞춤의 시간이며, 기도는 육신의 눈을 감고 영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음으로 영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 사랑의 눈동자와 우리의 눈이 마주칠 때 우리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우리의 가슴은 사랑으로 벅차 오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의 삶과 이웃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해석합니다. 그리고 감추어 있던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감사가 시작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눈맞춤 하자
이렇게 우리의 대화는 말로 하며 글로 하며 눈으로 합니다. 눈으로 하는 말은 말로 담아내기 어려운 감정과 존경, 그리고 사랑을 담아냅니다. 우리는 지금 서로의 눈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끼리 눈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 관계는 돈독합니다. 그러나 관계가 악화되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합니다. 이렇게 눈맞춤을 할 때 우리는 친구가 되며 서로를 향한 좋은 관계를 세워가게 됩니다.
요새는 식탁에서도 휴대폰을 들고 있어서 서로를 바라보고 눈을 볼 시간을 빼앗깁니다. 그렇게 가족 사이가 멀어져 가는데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그렇게 지냅니다. 소중한 사람은 자주 만나서 그의 눈을 보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가 말할 때 그의 눈을 보면서 나도 눈으로 말하면서 우리는 서로를 더욱 깊이 알아갈 수 있습니다.
저희 가정도 일년 전까지는 매주 한 번씩 가족 모임을 가져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시간을 가졌는데 삶이 바빠지다 보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삶이 더 고단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심과 공감이 멀어진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가정도 가족모임부터 회복해야 하겠다는 결심입니다.
가족끼리 대화할 수 있도록 산책을 하거나 커피를 함께 마시거나 하는 것은 정말 즐겁고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복하게 살고자 바쁘게 지내면서 정말 행복한 일을 할 수 없다면 우리의 행복은 어디서 오겠습니까? 소중한 사람들인 가족과 더불어 시간을 내고 서로 대화하고 시간을 같이 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이 함께 사는 길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성경을 배우고 삶을 나누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거나 인터넷으로 설교 동영상을 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런데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보면서 성경을 배우고 삶을 나누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이야기에 눈으로 반응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세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 교회가 초대교회를 본받아 열심히 하고자 하는 일 네 가지는 가르침, 교제, 동행, 그리고 기도입니다. 이 중에 교제는 서로를 세워가는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사람을 세우는 건강한 방법은 함께 하며 서로 눈을 맞추며 대화하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는 이렇게 눈을 통하여 진실한 신앙과 삶을 나누며 공감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성경공부를 통해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단지 지식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인정하고 용납하면서 이끌어주기도 하고 밀어주며 서로 격려를 하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사람은 확신에 이르며 견고한 인격과 성숙한 인격체로 자라납니다.
수건을 벗고 성경을 읽자
사람의 눈과 눈이 마주쳐 서로의 감정을 읽고 공유하면서 진실한 교제가 이루어진다면, 진리를 발견하는 눈이 열려야 성경을 바르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초대교회부터 오늘날까지 계속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당시의 유대인 동족에게 수건을 벗고 율법을 읽으라고 권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하나님의 언약이 새로운 시대를 열었음에도 옛 생각의 틀 가운데서 성경을 읽고 있는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전서 3:13~18
똑 같은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바울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심을 밝히 보여주는 증거들을 수없이 발견했지만 바울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은 성경을 들어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 까닭은 그들의 눈에 수건이 덮여 있는 것처럼 실체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볼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을 문맹(文盲, illiterate)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글을 읽을 수 있으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난독증(難讀證, dyslexia)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정치권에서 어떤 글이나 발표문을 읽고 그에 대하여 논평을 할 때 전혀 다른 평가를 하는 것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자기 당의 입장에 따라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평가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그 의미를 곡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오독(誤讀, misreading)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합리한 생각을 가진 비이성적인 정당의 경우에 상대 정당이 하는 일과 말을 이유 없이 반대하고 싫어할 때, 이런 의도적인 오독이 발생합니다. 이런 경우 아예 마음을 닫고 글을 읽기 때문에 자기가 읽고 싶은 대로 읽고 해석하여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이 닫혀 바르게 읽는 눈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가르침이나 사상에 이미 깊이 물들어 있는 경우에 다른 생각이나 사상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게 되면 오독이나 난독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지성적이나 영적으로 보면 소경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이처럼 눈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음이 완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이나 글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해석할 줄 모르고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으로만 이해하고 오해하여 싸우는 경우입니다. 동양의 현자인 공자(孔子)는 자신의 나이가 마흔이 되면서 세상 일에 미혹되지 않고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로 ‘불혹(不惑)’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관점이 생겨서 그것을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불혹의 이면에 자기의 관점만을 고집하면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없는 꽉 막힌 사람이 된다는 함정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공동체가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배우며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로워지는 성장을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경험을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교회 공동체는 글을 읽고 서로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며 성경을 배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성경을 조금씩 새롭게 이해하고 세상을 바르게 읽을 눈을 갖게 될 것입니다.
소경은 보고 보는 자는 맹인이 되게 하려고
진리로 오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마음이 완악하여 도무지 믿지 않고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예수님의 대화에는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한복음 9:39~41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다고 하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주님을 믿는 자들은 계속 눈이 열려 더 많은 것을 보고 소경을 면하게 되지만,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자신의 어둠 속에서 지내면서 자신은 잘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릇된 교리와 고집으로 사람들을 그릇된 곳으로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글은 천주교 오요한 신부의 평일강론에 나오는 짧은 묵상입니다:
박제가(朴齊家)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입니다. 그는 청나라의 수도인 연경을 다녀온 뒤 선진 문물에 크게 감명받습니다. 그래서 기술 도입과 제도 개선의 시급함을 깨닫고 쓴 책이 『북학의』(北學議)입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장사와 제조업의 장려, 신분 차별의 타파와 해외 통상까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그 책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집에서
물건을 만들거나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자와 먹통, 칼과
끌을 갖고 남의 집에서 품팔이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사람들은 그들을 우습게 여긴다. 그런 일을 하는 이 중에는 혼인길마저 끊긴 사람도 많다.”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마땅한 직업이 없어 혼인길이 난감한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직장 때문에 부모들은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판을 칩니다. 우리는 너무 하기 쉬운 일만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직업에 관한 한, 내 눈의 들보를 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박제가는
서자 출신으로 출세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열한 살에 부친을 잃고 가난에 허덕대던 그는 악조건을 이겨
나가려고 닥치는 대로 일합니다. 그러한 고생이 있었기에 세상에 대해 눈뜰 수 있었습니다. 자녀들의 고생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맹목적인 사랑은 자식의 앞날을
망칩니다.
출처: http://www.ocatholic.com/bbs/zboard.php?id=study_
02_2&page=7&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
arrange=headnum&desc=asc&no=813
하나님의 눈동자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눈동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주목하십니다. 악인을 향하여는 불꽃 같은 눈으로 노려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와 묵상 중에 하나님의 눈과 마주칠 때마다 감격과 새로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눈은 다시 서로를 향하여 마주치면서 진실과 공감 어린 교제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건강한 가정이 되고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열린 눈은 다시 성경을 새롭게 읽으며, 세상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치료책을 찾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눈동자입니다.
전에 우리는 소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뜬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에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게 하시는 주님을 인하여 우리는 더욱 주님의 눈으로 만물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고,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 나아갑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이들을 고마워하며 그들과 더불어 손 잡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갑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함께 성경을 읽고, 독서를 하며, 대화를 나눕시다.
전에 어떤 철학자가 말하기를,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일 내 인생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오늘 책을 읽으면서 나의 편견을 극복하고 뜬 눈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합시다. 내 생각이 편협하고 옹졸하면 그만큼 나 자신을 가두는 감옥을 스스로 만드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눈은 즉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가두게 됩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 인간의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눈맞춤을 하면서 그 변화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눈은 다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새롭게 읽고, 세상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삶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눈동자로서 소중한 자신을 이해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눈동자로서 세상을 바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며, 실력을 배양합시다. 그것이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참 인간의 삶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