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가 넘쳐나던 정원의 뜨락이 휑하니 스산합니다. 찬 이슬이 듬뿍 내리고 기온이 뚝 떨어져서 한기가 느껴집니다. 그나마 키가 크게 자라서 씨앗을 맺고 널브러지기 시작하는 것들을 정리해준 덕에 아직은 뜨락의 빈자리가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상강(霜降)의 절기가 지난 지 여러 날인데도 아직 서리가 내리지 않은 탓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위는 계절의 느낌은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즈음은 꽃보다도 단풍이 더 아름답습니다. 뜨락의 맨 아래쪽 바위 틈새의 돌단풍이 물들기 시작합니다. 마당의 가장자리로 봄에 옮겨심은 복자기나무 두 그루가 주황과 노랑의 단풍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농원 안길로부터 집 앞마당으로 이어지는 산 섶의 화살/홑잎나무 잎새도 선홍으로 물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다채롭고 아름다운 단풍이라고 하더라도 도도하게 피어나는 봄날의 생기발랄한 잎새와 꽃 모습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여름의 뜨락은 모든 것들이 순차적으로 일제히 피어나서 조금의 빈틈도 주지 않지요. 그런데 늦가을로 접어드는 지금의 뜨락은 스러지기 시작하는 것들의 잔해와 말라가는 풀꽃의 거친 무더기가 군데군데 눈에 뜨입니다.
그렇다고 풀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을에 들어서며 피고 진 꽃들이 많지만 지금도 꽃을 피우는 것이 있습니다. 애스터 ‘가을 장미(Aster ‘Autumn Rose’)가 옅은 자줏빛 꽃을 지우자 애스터 ‘비올레타(Aster ‘Violetta’)가 짙은 청잣빛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9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한 구절초와 코스모스는 이제 절정의 시기를 지났습니다. 상강 무렵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한 산국(山菊)은 지금 한창 금빛 노랑의 꽃 무더기를 만들고 있구요. 한낮이면 벌과 나비들이 분주히 몰려듭니다.
가녀린 매무새의 말쑥한 청보랏빛 꽃송이가 소담하기만 청화쑥부쟁이는 한가을 뜨락 최고의 선물입니다. 뜨락 함 모퉁이에 등황색 초롱불을 켠 듯이 환한 열매를 달고 있는 꽈리와 함께요. 곧이어 나의 뜨락에서 이 가을 마지막으로 피는 향소국(香小菊)이란 국화가 꽃을 피우겠지요. 하지만 청화쑥부쟁이의 깔끔한 자태를 따라잡을 수는 없을 듯합니다.
나의 뜨락은 집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둘러있습니다. 동남쪽을 향해 있는 집 중간의 문과 연결되는 돌계단과 집과 이어진 서재 ‘나무방’ 앞의 작은 통로와 테이블 하나가 놓인 자리를 제외하고는 빙 둘러 모두가 뜨락입니다. 산기슭에 집터가 있다 보니 뜨락은 모두가 경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남쪽과 동편의 뜨락은 큰 돌로 경사진 면을 축차적으로 쌓아 올려서 암석정원(Rock Garden)이 되었고, 서쪽과 북편에는 허리춤 높이의 담을 쌓아서 언덕과도 같은 뜨락이 만들어졌습니다. 주목, 측백나무 따위가 집 뒤쪽으로 심겨 있어서 이곳의 뜨락 역시 꽤 길지만 그리 넓지는 않습니다.
이렇듯 그 생김새가 특이한 만큼 4면의 뜨락은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여건이 크게 다릅니다. 햇볕을 받는 방향이나 그늘이 지는 시간의 차이가 아주 많이 납니다. 그래서 좁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여기에 심을 수 있는 식물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농원 전체의 공간이 채소, 허브, 자생화 등의 초본식물과 나무, 텃밭과 과원, 가축우리 등으로 이루어지는 이른바 오두막 정원(Cottage Garden)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듯이 뜨락의 공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주로 우리 토종의 풀과 작은 떨기나무 중심이지만, 산마늘과 같은 그늘에서 자라는 산나물도 기르고 있습니다.
이제는 정원에 물을 주지 않아도 됩니다. 그간 초여름부터 얼마 전까지만도 해가 많이 드는 공간에는 거의 매일 물을 주다시피 했는데, 밤과 새벽에 내리는 이슬만으로도 충분해 졌습니다. 대부분은 물을 내려보내고 자신을 비우는 겨울준비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만큼 아침에 나와서도 여유 있게 뜨락을 거닐며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한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구나, 추운 겨울이 찾아올 날이 멀리 있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도 됩니다. 시름을 잊고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뜨락에는 올해도 꽤 많은 새 가족이 생겼습니다. 지난해 초여름 집수리를 마치고 뜨락을 새로 만들면서 옮겨두었던 것들을 제자리로 가져오고 새로운 것들도 많이 심었습니다. 산목련 한 그루와 한 떨기의 철쭉과 미스킴라일락, 그리고 여름과 가을에 꽃을 볼 수 있는 바위취, 범부채, 붓꽃, 왕원추리, 상사화, 초롱꽃, 개미취, 마타하리, 오이풀, 참나리, 하늘말나리, 부처꽃, 구절초, 호범꼬리, 백두구절초, 산국, 향소국 따위를 옮겨심었습니다. 앞 뜨락 바위 틈새에는 돌단풍과 산수국, 뜨락의 모서리 눈에 잘 뜨이는 언덕에는 작약과 꽈리도 심었습니다. 모두 50여 종의 식물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늦가을에는 수선화, 원종 튤립과 가든 튤립, 무스카리 따위의 식물도 알뿌리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해가 바뀌고 봄이 오면서 또 여러 종류의 풀과 나무들을 심었습니다. 팥꽃나무, 꽃향기가 좋은 은방울꽃과 고광나무, 우리 고장 꽃나무 진달래, 생강나무와 올괴불나무, 그리고 복수초와 노루귀, 처녀치마, 에델바이스, 노랑너도바람꽃, 금붓꽃, 족도리풀, 솜나물, 금낭화, 매발톱꽃, 용담, 산국, 좀개미취, 낙동구절초, 산쑥부쟁이, 청화쑥부쟁이 등 산행과 식물원에서 채집한 몇몇 자생식물, 그리고 무궁화는 씨앗을 발아시킨 작은 묘목 몇 그루를 바위 언덕의 틈새에 심었습니다. 찔레와 꺾꽂이로 뿌리를 내린 분홍찔레 몇 가지를 심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난해 여문 씨앗이 떨어져서 싹을 틔우고 무성하게 자란 것도 여럿입니다. 주로 1년생 풀꽃들인데 채송화, 봉선화, 맨드라미, 풍접초, 과꽃, 코스모스, 개박하, 그리고 엉겅퀴, 층꽃나무와 같은 것들입니다.
올해의 여름은 무척이나 길고 무더웠습니다. 이를 견디며 모두가 하나같이 참으로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각각의 것들이 자신의 차례를 지켜가며 꾸준히 자라나서 꽃을 피웠습니다. 개중에는 옮겨 온 탓에 몸살을 하다가 죽은 것도 있고, 장마철 습기와 한여름 고온을 견뎌내지 못한 것들도 없지 않습니다. 기특한 것은 바위 틈새에서도 대개의 것들이 의외로 잘 자랐습니다. 극히 제한된 공간이기에 키가 작아지고 아담하게 자랄 것으로 예상했는데, 오히려 너무나 큰 키로 무성하게 자라서 놀랐습니다. 범부채, 마타리, 개미취, 왕고들빼기는 거의 2m의 높은 키로 훌쩍 자랐습니다. 벌개미취와 왕원추리도 평지의 보통 것들보다 그 키를 더 키웠습니다. 아주 좁은 공간이지만 밑으로 뿌리를 깊게 내린 탓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잔잔한 분위기의 아담한 뜨락을 꿈꿨는데 키가 훌쩍 자란 것들이 무성한 이른바 ‘키 큰 식물 가꾸기(Sky-high Planting)’ 식의 뜨락이 만들어졌습니다. 뜻밖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듯 활기차고 무성하던 뜨락에 조락의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 없지요. 아침에 나가보니 향소국의 꽃봉오리가 아주 통통해졌습니다. 2, 3일 후에는 꽃 문이 열릴 듯합니다. 뜨락의 올해 마지막 꽃인 향소국은 영하로 떨어지는 날씨 속에서도 꽤 여러 날 꾸준히 연분홍의 국화 향을 피울 것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향소국이 시들기 시작할 무렵 얼마간의 구근식물의 알뿌리를 심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면 뜨락의 모든 것들은 침잠할 것입니다. 내년 봄의 환희를 꿈꾸면서요. 이제 좀 쉬어야겠습니다. 함께 쉬시지요. (2024.11.2.)
첫댓글 봄보다 더 아름다운 나래실 모습 정말 잘 보았습니다. 좋은 힐링이었습니다.완전히 천국 같아 보입니다. 행복해 보입니다. 부럽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창문을 통해보는 나래실ᆢ정말 훌륭한 그림입니다. 더 행복하세요ᆢ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평생 살고 싶어". 고등학교 시절 남진이 불렀던 노래가사의 꿈이 현실로 다가왔군요. 초원보다 더 짙은 가을 숲의 모습은 과히 낙원입니다. 하루 하루를 즐겁게 생활하고 있을 순우의 모습이 선명하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