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어찜인가?
야고보서 4:3
쉴함마 씨
西洋某大著述家某氏曰, 我所有中盡被蕩失, 惟祈禱不爲見奪, 則是吾滿足也. 誠哉是言! 祈禱果吾信者所有財産也, 靈的呼吸也. 我若止呼吸, 則豈能一時生存乎? 祈禱勿休. 撒前五章十七節. 祈禱是萬能, 而雖熱心求之, 猶爲不得者何也? 祈禱之反面有妨害物, 故不得應答. 妨害物何也? 今引聖經有四大妨害物, ◇一,中心惡思想, 詩六十六章十八節. 祈禱時心中如有秋毫之惡, 則雖禁食求之, 主不應答也. 集會時空氣漸漸冷冷, 少不復興. 米國某敎會有復興會, 十日繼續, 亦不復興, 而敎誨中執事一人, 揮淚干證曰, 數年我被任執事時, 有圖奪我職分者, 只今有惡感而敵視之, 今不復興者, 皆由我之故云, 痛悔自服, 同時發聖火, 全衆被熱, 終至大復興. 僉位心中不有惡念乎? 有毫末之不義, 則非惟個人不興, 全會亦不能復興矣. 何故? 中心如有惡念潛在, 祈禱伊阻, 彼煌煌之電燈機械, 如有故障, 則此講堂之內, 卽化爲黑幕矣. 我大會中如有一人이, 心中有故障, 則全家不能受聖神之光明矣. 反入於黑幕之中矣. 我曾見一靑年, 有煩悶苦痛, 爲之祈禱, 則靑年曰, 不必爲我祈禱也, 祈禱之應答者, 在三百里外, 我乃知其理由, 以書勸其解怨, 此人乃解脫其重負, 喜樂讚頌. 僉位心中, 不有惡念乎? 憎惡之心, 猜忌之心, 憤怒之心, 不有殘存乎, 兄弟乎,姊妹乎? 速爲反省焉. 中心如有惡念者之祈禱, 主不聽之, 如有不義, 則自服然後, 主乃應答焉. ◇二, 吝嗇之心, 箴二十一章十三節. 有吝嗇之心者, 祈禱不能應答, 貧者請求而聽若不聞者, 禱不應答, 神非無意者, 僉位食卓之上, 有豊盛之食物, 而乞人來請, 不欲予者禱不應答. 僉位之家庭, 有三四足洋靴, 及各種衣物, 而嚴冬雪寒, 無衣之人來請衣, 而視若不見者, 禱不應答. 此人之祈禱, 主前爲無用之長物也. 今信者中有如此吝嗇之人多矣. 此皆社會之事, 而敎會內有此種無心者, 獻金之時, 入手袋中, 故擇銅錢而有獻之者, 且欲獻一百金, 則執紙幣之一端, 欲使人見金, 故爲誇耀者, 如此吝嗇者, 禱不應答, 勿却貧人之請求而救濟. 主曰給冷水一器于小子(마태10:42), 此人決不失賞. 余四十年間敎役, 有得實地經驗. 循主旨不吝, 而常常救濟者, 得福不少, 去益豊盛. 僉位中有吝嗇者, 今速悔改, 隨力救濟貧者, 禱必應答矣. ◇ 三, 不聽律法者, 箴二十八章九節. 禱不應答, 不惟不答, 反爲憎惡也. 此何故? 一聞經上之說, 如馬耳東風, 不愼聽主訓, 反爲疎忽, 於本大會中, 有復興會而有不受恩者, 塞耳而不聽主訓故也. 此人禱不應答. 某敎友此敎彼敎巡回不定, 神之恩不擇處而降, 惟看個人心靈而降也. 聞傳道之說, 而漸進救援之階段, 長老敎不悔改之敎友, 至監理敎而有不悔改得救之理乎? 敎會說敎時, 常常攻擊罪惡, 心不忍苦痛, 故離去此敎會, 而更聽他敎會悅耳之說敎, 而有能得救之理乎? 厭棄攻罪之牧師, 必永不得救矣. 此人禱不應答, 救援決不在敎派, 從眞理之說而悔改者得救. 吾等欲修繕病齒, 價反不痛者, 不合病齒拂相當之價, 忍痛而治之後, 可完治矣. ◇四, 夫婦不睦者禱不應答. 彼前三章七節. 夫婦之制, 比於艾田, 彼此相助, 以和睦爲主, 兩人合如一身. 世多不和, 離婚率盛行, 以雄辯證明也. 敎會內亦多此風潮, 痛歎不已, 夫當愛妻, 日常生活井臼之役, 婦人主之, 美人中有男子先食女子後食之人, 男子驕傲, 以爲我作家長云. 此等人約婚時, 得處女之歡心, 用各種手段, 結婚後以奴僕取扱, 逢他人之夫人, 則溫柔謙遜而握手歡迎, 逢自己夫人, 則空然發怒, 此甚矛盾可憎者也. 兄弟中有如此矛盾者乎? 禱不應答. 彼得性急之人, 猶言接待女子甚敬云, 今重托姊妹諸位, 婦人盡自己職分也, 女子受男子之愛, 反發驕傲, 支配男子, 此甚不可, 此人禱不應答. 婦人盡自己職而使淸潔家屋, 使心身爽快, 井臼之役, 勿求男子之助力, 男子自學校或社會而歸, 當出門歡迎, 某婦人男子終日勞役而歸, 反責賃錢之少, 獨處則發笑, 對男便則發怒, 如此者禱不應答. 神造夫婦, 取男子之脇骨而造人, 女子不當高於男子, 不當下於男子, 與男子相等, 彼此相愛和睦, 禱必應答.
서양의 대저술가(大著述家)인 모씨(某氏)가 이르기를 ‘내가 소유한 것 모두를 다 탕진해 없애더라도 단지 기도만 빼앗기지 않는다면 이것으로 나는 만족한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말입니다. 이 말씀이여!
기도는 과연 우리 신자가 가진 재산입니다. 영적인 호흡입니다. 내가 만일 호흡을 멈춘다면 어찌 잠시라도 살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7). 기도는 바로 만능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구하더라도 얻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기도의 반대편에는 방해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응답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 방해물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있는 네 가지 큰 방해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마음에 죄악을 품은 사상입니다(시편 66:18).
기도할 때 마음속에 만일 조그마한 악이 있으면 아무리 금식기도를 해도 주께서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가 부흥회를 했는데 열흘 동안을 계속해도 부흥되지 않았습니다. 설교를 하는 중에 집사 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간증하기를 ‘수 년 동안을 내가 집사로 있는데 나의 집사 직분을 빼앗으려고 하는 이가 있어서 지금도 나쁜 감정으로 저를 적대시했습니다. 지금 부흥이 되지 않는 것은 다 저 때문입니다’ 라고 하면서 통렬하게 자복하였습니다. 동시에 성화(聖火)를 피우니 전체의 무리들이 그 열을 받아 마침내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털끝만큼이라도 의롭지 못한 생각을 가지면 개인만 흥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온 집회가 부흥될 수 없습니다.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이 잠재해 있으면 기도를 막습니다. 저 휘황하게 빛나는 전등의 기계가 고장이 나면 이 강당 안은 검은 장막으로 덮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대회 중에 한 사람이라도 마음속에 고장이 있으면 온 실내가 다 성신의 광명을 받을 수 없고 어두운 장막으로 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내가 일찍이 번민과 고통을 가진 청년을 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였더니 그 청년이 이르기를 ‘나를 위하여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에 응답할 사람은 삼백 리 밖에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드디어 그 이유를 알고 글을 써 보내어 ‘그의 원망을 풀라’고 권유하였더니, 이 사람이 마침내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기쁘게 찬송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악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증오하는 마음이나 시기하는 마음이나 분노하는 마음을 남겨두고 있지 않습니까? 형제여, 자매여! 속히 반성하십시오.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있는 자의 기도는 주께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만일 의롭지 못한 것이 있거든 자복한 뒤라야 주께서 응답하십니다.
둘째, 인색한 마음입니다(잠언 21:13).
인색한 마음을 가지면 기도에 응답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가 도움을 청하여도 듣지 못한 것처럼 행하는 자에게는 응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의지가 없으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식탁 위에 풍성한 음식이 있는데 거지가 와서 구걸을 해도 주려고 하지 아니하면 기도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서너 켤레의 구두가 있고 각 가지 의복이 있어도 엄동설한 추위에 옷 없는 사람이 와서 옷을 달라고 하여도 못 본 체한다면, 그의 기도에 응답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의 기도는 주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지금 신자 중에는 이와 같이 인색한 사람이 많습니다. 이는 모두 사회에 있는 일이지만 교회 내에도 이런 종류의 무심한 자가 있습니다. 헌금할 때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억지로 동전을 골라 바치는 자가 있고, 또한 일백 금을 바치려고 하면 고의로 지폐의 한쪽 모서리만 지어서 사람들에게 그 돈을 보이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자랑하려고 하는 자나 인색한 자에게는 기도에 응답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요청을 물리치지 말고 구제하십시오. 주님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에게는 결코 상을 잃지 아니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40년 교역 생활을 하는 동안 실지로 얻은 경험은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인색하지 않고 늘 구제하는 자는 적지 않은 복을 받았으며, 그 복은 점점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인색한 자는 지금 속히 회개하고 힘닿는 대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십시오. 기도에 반드시 응답이 있을 것입니다.
셋째, 율법을 듣지 않는 자에게는 기도에 응답하지 않습니다(잠언 28:9).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증오까지 받게 됩니다.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성경>의 말씀을 듣고 마이동풍처럼 흘려 보낸다든지 주님의 가르침을 신중히 듣지 않고 도리어 소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본 대회 중에 부흥회가 있었으나 은혜를 받지 못 한 것은 귀를 막고 주님의 가르침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기도에 응답을 해 주지 않습니다.
어느 교우가 정한 곳도 없이 이 교회 저 교회 돌아다니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장소를 골라서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오직 개인의 심령을 보아 내려 주십니다.
전도 설교를 듣고 구원의 계단으로 점점 나아가는 중에, 장로교에서 회개하지 못한 교우가 감리교에 왔다고 해서 회개를 아니 하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교회에서 설교할 때 죄에 대한 말씀을 듣고 마음에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이 교회를 떠나서 다른 교회에 가서 귀를 즐겁게 하는 듣기 좋은 설교를 듣는다고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죄를 공격하는 목사님을 싫어하여 떠나면, 영구히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기도하여도 응답해 주지 않습니다.
구원은 결코 교파에 있지 않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 회개하는 자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병든 치아를 고치려고 하는데, 값이 싸고 아프지 않게 하는 이는 병든 치아에 맞지 않습니다. 합당한 값을 치르고 아픔을 참으며 치료를 한 뒤에 완치할 수가 있어야 병든 치아에 맞습니다.
넷째, 부부가 화목하지 못한 자는 기도에 응답을 아니 하십니다(베드로 전서 3:7).
부부의 제도는 쑥과 삼이 자라는 밭 같아서 서로 도와 화목을 위주로 합니다. 두 사람은 합쳐서 한 몸이 되는 것 같은 것인데 세상에는 불화한 가정이 많은 것은 이혼하는 비율이 많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불화가 많은 것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도 이러한 풍조가 많으니 통탄스러움이 그지 없습니다.
남편은 마땅히 아내를 사랑하여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물물을 긷고 방아 찧는 일은 부인이 맡아서 합니다. 미국인 중에도 남자가 음식을 먼저 먹고 여자가 뒤에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남자가 교만해 져서 ‘내가 집안에 어른이 되었다’고 했답니다. 이 사람이 약혼할 때에는 처녀의 환심을 얻으려고 각 가지 수단을 다 쓰지만 결혼하고 난 뒤에는 아내를 노예 취급을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부인을 만나면 부드럽게 겸손한 척 하며 악수도 하며 환영합니다. 반대로 자기 부인을 마주하면 공연히 성을 냅니다. 이것이 아주 모순되고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형제 중에 이렇게 모순된 이가 있습니까? 기도해도 응답해 주지 않습니다.
거듭 자매 여러분들에게 부탁하노니, 부인들은 자기의 직분을 다 하십시오. 그래야 남자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남자에 대하여 반발하고 교만해져서 남자를 지배하려고 하면 이는 매우 옳지 못한 일입니다. 이런 사람의 기도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부인은 자기의 직분을 다하여 가옥을 청결하게 하고 심신을 상쾌하게 하며 우물물을 긷고 방아 찧는 일은 남자에게 조력을 구하지 마십시오. 남자가 학교나 회사에서 돌아오거든 마땅히 문에 나가 환영해 주십시오. 어느 부인은 남자가 종일 일을 하고 돌아오면 월급이 적다고 도리어 책망했답니다. 그리고 홀로 있을 때는 잘 웃다가도 남편을 대하면 성을 낸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기도하여도 응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부부를 만들 때 남자의 갈비뼈를 뽑아 여자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높은 것도 부당하고, 남자보다 낮은 것도 부당합니다. 남자와 서로 대등하니 피차간에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여야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