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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23일 주일 메시지 (설교안)
시리즈 주제: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가르침과 배움
여섯 번째 설교
제목: 가르침이란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한복음 15:13~15
설교 목적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가르침과 배움은 언제나 적절한 분위기와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우정이 싹트는 개방성 또는 솔직성, 이곳이 바로 배움의 자리임을 인정하는 정주 서약, 그리고 어떤 주제든지 받아들이겠다는 환대가 그것이다. 소그룹 모임과 성경공부를 통해서 피차 가르치고 배우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우리가 꼭 갖추어야 할 가르침의 자세다.
설교 개요
1. 도입 – 헬라어 수업의 두 경우
2. 예수님의 가르침: 소수에게 집중하심
3. 너희는 나의 친구다 – 우정을 통해 배운다(개방성과 솔직성)
4. 너희도 가려느냐? – 정주서약의 비밀(경계)
5. 무엇이든지 물어보고 생각도 해 보자!(환대)
6. 결론 – 가르침이란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
1. 도입 – 헬라어 수업의 두 경우
지금부터 31년 전 9월 제가 대학교 1학년 시절의 일입니다. 저는 그 당시에 거의 매일 교회당에 가서 기도를 드리던 열성 기독청년이었습니다. 당시에 교회에는 늘 상주하시던 전도사님이 계셨는데, 시골에서 온 저를 무척 아껴주셨습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교회당에 오는 저를 보면서 언젠가 이 청년이 신학공부를 하여 목회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어느 날 그 전도사님은 저에게 나중에 신학공부를 할 수 있으니 미리 헬라어를 공부해 두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마침 1학년 2학기 때 저는 수강신청을 하면서 고전희랍어 과목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반가운 마음에 수강신청을 했습니다. 헬라어를 한자말로 하면 희랍어(希臘語)라고 부릅니다. 저는 주님의 일에 동참할 것을 기대하면서 헬라어 과목을 들을 부푼 기대를 가졌습니다.
당시에 저는 공과대학생이었기에 서양철학과 학생들이 주로 듣는 고전헬라어 과목을 듣기 위해서 쉬는 시간 동안 1킬로미터를 달음질하여 강의실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땀을 흘리면서 뛰어가 교실에 도착했더니 마침 소크라테스처럼 생긴 철학교수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성함은 ‘권창은’ 교수님입니다.
그리스 아테네대학에서 공부를 하신 분이라 현대헬라어 발음으로 우리들을 가르치셨는데 그 수업에 참여한 학생은 대략 25명 정도였습니다. 조용한 그 교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기 위해서 저는 하버드대학에서 출판한 헬라어 입문서(A New Introduction to Greek, 1969)를 샀습니다. 온통 영어로 된 그 문법책은 매우 짤막한 설명과 함께 고전헬라어 원문을 소개하는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중간 중간에 서약철학 전공자답게 철학 이야기를 들려주시는데 공대생인 저에게는 매우 낯선 경험이었습니다.
결국 그 해 가을이 다 가고 겨울이 될 때까지 헬라어 문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문법 용어를 교과서에 나온 대로 영어로 설명하지 않으시고 교수님이 아테네에서 배우신대로 현대헬라어로 설명하시니 더더욱 어려웠습니다.* 결국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학기는 끝났습니다. 물론 학점도 낮았습니다. 신학공부를 위한 원어 공부가 힘들다더니 정말 힘들었습니다. 저는 헬라어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도 이해하지 못하고 학기를 마쳤습니다.
* 참고: 헬라어의 문법 용어를 현대 헬라어로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 http://www.phrasebase.com/archive2/greek/lesson-no-7.html
예를 들어, 헬라어 문법에 ‘미완료시제’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imperfect입니다. 문법교재에도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현대헬라어 문법용어로는 Imperfect or Past Continuous (Paratatikos -Παρατατικός )라고 합니다. 교수님의 발음으로는 ‘빠라따띠꼬스’입니다. 그러니 교재에도 없는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으니 그저 한 학기 내내 소리 나는 대로 한글로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현대헬라어로 설명하는 고전헬라어 문법책을 구입하고서 그 말들이 무슨 의미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군대에 다녀온 후 복학을 하고 다시 수강신청을 하는데 중급헬라어 과목이 개설된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반드시 신학공부를 준비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다시 헬라어 수강신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실에 들어가 보니 저를 포함해서 세 사람의 학생만이 교실에 와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그대로인데 세 사람의 학생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청강생입니다. 다행히 그렇게 적은 학생이 수강신청을 했어도 그 과목은 폐강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교재가 옥스포드대학 출판부에서 발간한 것으로 이야기식으로 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를 배우는 동안에 점차 헬라어 실력이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25명이 배우는 수업과 세 명이 배우는 수업은 그 태도에서부터 달랐습니다. 저는 집과 도서관에서 부지런히 연습하고 또 연습했습니다. 딱딱한 하버드교재보다 이야기식으로 전개되는 옥스퍼드교재(Athenaze)는 공부에 재미를 더해주었습니다. 그렇게 헬라어에 재미를 붙이면서 지금까지 헬라어 성경을 읽고 우리 교회 청년들에게도 가르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맨 처음 헬라어를 배우던 31년 전 그러니까 스무 살 때는 헬라어의 낙제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수정예반에 들어가 집중적으로 가르침을 받을 때는 달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는 헬라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돌아가신 권창은 선생님이 이 모습을 보신다면 놀라서 미소를 머금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뒤쳐진 공대생이 이렇게 헬라어를 가르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입니다.
저는 지금 교회에서 두 청년에게 헬라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둘 다 재미있어 합니다. 한 사람은 신학생으로 헬라어를 매우 어렵게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에게 배우는 헬라어를 통해서 그 청년도 저처럼 나중에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의 가르침: 소수에게 집중하심
가르침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려면 이처럼 소수정예에게 집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특히 중요한 가르침이나 전 인격을 담아서 가르쳐야 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 사이는 뜨거운 신뢰관계를 형성하며 모든 것을 물려주는 사이가 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하셨지만 결국 열두 제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불러 산 위에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드리실 때는 그들 세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하기도 하셨습니다. 야이로라는 딸을 고치러 가실 때도 그 세 제자를 데리고 그 방에 들어가셔서 죽은 딸을 살리는 현장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떻게 사역을 하는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그리고 장차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계획을 은밀하게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군중들 앞에서 가르치신 이야기를 다시 열두 제자들에게 집에서 별도로 해설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주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공중 가운데서 들었지만 그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마가복음 4장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설명을 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막 4:10)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막 4:33~34)
오늘날 많은 사람이 모여야 교회는 큰 은혜가 임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큰 교회에 다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에게 가르치신 후에는 제자들에게 더 자세하게 풀어주심으로 그들을 바르게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더 나은 가르침과 배움이 일어나려면 소수정예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는 그런 공간이 필요합니다. 거기에는 서로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스물다섯 명이 배우는 교실에서는 숨을 수 있지만 세 사람이 배우는 교실에서는 숨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모두 드러나고 가르치는 사람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그루터기가 되고자 하는 교회는 당연히 이렇게 복음의 장인을 양성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을 대량으로 훈련하는 곳은 매우 단순한 기술을 배우는 곳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밀하고 중요한 것을 배우고 훈련하는 곳일수록 소수에게 집중적으로 가르칩니다. 그렇게 해서 전문적인 장인이 태어납니다. 본래 교육은 그렇게 전 인격을 쏟아 부어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장인(匠人)과 그의 제자인 도제(徒弟) 사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가정교육도 그렇습니다. 교회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처럼 충성된 사람을 선별하여 모든 것을 함께 함으로 가르칠 때 교육의 효과가 극대화되고 인재가 세워졌습니다. 지금처럼 설교에 교육의 모든 것을 걸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예가 바울 사도의 디모데를 향한 권면에도 나옵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디모데후서 2:1~2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는 모름지기(사리를 따져 보건대 마땅히) 충성된 사람을 찾아 자신이 들은 바를 잘 전수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사람은 마땅히 자신을 진정으로 아껴주는 사람을 찾아 그에게 배우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제자로서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상의 풍조를 좇아 많은 사람이 모일수록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 스스로 충성된 제자가 되려고 애를 써야 하며, 지금 우리 가운데 충성된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나아가 나 자신이 그렇게 신실한 배움의 관계를 맺고 있는지, 또한 나를 통하여 누군가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곧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첫걸음입니다.
우리말에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계복음화를 꿈꾸면서도 한 사람을 돌보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 걸음도 출발을 하지 않은 여행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본 받아 ‘한 사람을 세우는 일’부터 시작합시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도 ‘한 사람을 구한 사람은 온 세상을 구한 것이다’(Save a life, save a whole world)라는 명언이 있습니다:
탈무드 산헤드린 37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은 한 사람으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이런 사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한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사람에게 성경은 전 세계를 해치는 죄가 있다고 정죄한다. 그리고 누구든지 한 사람을 보존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온 세상을 보존한 공로가 있다고 말씀한다.”
어쩌면 성경은 처음부터 한 사람을 통해서 세상을 보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많은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알고 계시는 듯 합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3. 너희는 나의 친구다 – 우정을 통해 배운다(개방성과 솔직성)
그처럼 소수의 제자들을 통하여 온 세상을 바라보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태도로 가르치셨을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대하신 태도를 보면 오늘 우리가 교회 안에서 또는 가르침과 배움의 공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한복음 15:13~15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교수법을 봅니다. 우선,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로 여기십니다. 예수님이 친구로 여기실 때, 그 의미는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는 의미에서 친구입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비밀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종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지만 친구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그래서 종들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친구는 압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 들은 비밀을 다 그 친구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르치는 자가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하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배우는 자의 행복과 유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 영혼을 생각하고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르치는 자는 무엇을 가르치기 이전에 자신에게 배우는 사람을 친구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처럼 대하지 말고 아랫사람처럼 여기지 말고 단지 학생으로 여기지 말고 친구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른 가르침은 우정의 깊이에 비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로 여기셨고 제자들의 유익을 구하셨으며, 제자들에게 비밀을 공유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마침내 제자들은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자신들도 다른 충성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독교 신앙은 우리들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그룹에서 모일 때,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가르칠 때는 예수님처럼 친구로서 대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문화에는 유교적 가르침이 뿌리깊게 남아 있습니다. 유교의 삼강오륜에는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든 분과 어린 사람은 순서가 있다는 말입니다. 서양에는 레이디퍼스트(Lady first)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성 먼저, 약한 사람 먼저는 서양에서 온 문화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찬 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문화입니다. 노인공경의 문화는 참 좋은 것이지만 솔직하게 무엇을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에 있어서는 나이나 선후배의 위계질서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장유유서의 문화 속에서는 예절은 작동될 수 있지만 교육이나 바른 가르침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웃어른이 말하는 것을 가만히 배우던 시절의 교육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진리를 탐구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가운데 자유로운 토론과 질문이 이루어지는 교육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선배라는 우월감이나 후배라는 복종의식을 극복하고 우리는 친구라는 의식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임에서 가르침과 배움의 창조적인 공간은 열릴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배와 후배,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 공히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나이 든 사람이 먼저 나서야 합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한 노교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근동학의 전문가로서 수메르어 아카드어 및 원전에 능통하신 분이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그분의 강의를 통하여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복도에서 그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교수님은 손을 들어 ‘Oh, My Friend!”라고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교수실로 불러 초코파이를 한 개 주시면서 가족상황을 물어주셨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교수님에게 초코파이를 받아 먹은 사람은 저 외에도 여러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그런 겸손하고 친근한 태도는 가르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저는 대학원 졸업 논문을 쓸 때 그분의 수업에서 받은 가르침을 이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분이 장국원 교수님입니다. 훌륭한 스승은 제자를 진정 친구로 대하는가 봅니다.
** 나의 졸업논문은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http://dl.nanet.go.kr/SearchDetailView.do?cn=KDMT1200159926_2
제목: 성경에 나타난 신전(神戰)에 관한 연구: 이집트, 가나안, 그리이스-로마 신화를 배경으로
여기서 말하는 신전이란 신들의 전쟁을 말한다.
4. 너희도 가려느냐? – 정주(定住)서약의 비밀(경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던 제자들 중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어서 물러가고 다시 주님과 함께 하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생각의 틀에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배움과 가르침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머물러 거기서 씨름을 해야 합니다. 쉽게 포기하거나 자기 생각과 맞지 않다고 수용을 거부하면 더 이상의 배움은 없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를 결단하는 사람들은 세 가지의 서원을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가난, 순결, 순종의 서원입니다. 그리고 훈련이 끝날 때까지 그 수도원을 떠나지 않겠다는 정주(定住)서원입니다.
토마스 머튼의 영적 일기에는 정주서원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정주서원을 함으로써 수사는
‘완전한 수도원’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헛된 희망을 포기하게 된다. 이는 믿음의 진정한 행위를 뜻한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누구와 살든 상관없이 기도에 전념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침묵과 가난, 고독과 육체노동, 독서와 하느님께 대한 공부를 하며,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기꺼이 사랑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음을 아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 <토마스 머튼의 영적 일기 – 요나의 표징> 중에서
우리도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더 나은 교회, 더 좋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나의 신앙도 더 많이 성장했을 텐데. 내가 더 훌륭한 교사를 만났다면 지금보다 더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텐데…. 등등.’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가나안신자’로 사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은 특별한 배움을 바라고 명사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그러나 한 구절의 성경말씀이라도 찬찬히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그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본다면 우리에게 충분한 진리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 자리에서 충분히 인내하면서 얼마든지 주님이 우리를 여기서도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씨름하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정주서약’입니다.
저는 최근 몇 년 동안 몇 사람이 한 권의 책을 오랜 기간 동안 조금씩 읽는 것의 유익을 발견했습니다. 매주 한번 만나서 책을 조금씩 읽어가면서 그 내용을 함께 생각해 보고 우리의 상황에 비추어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책을 한 자리에서 하루나 이틀 동안에 다 읽어내는 것도 유익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읽어나가면서 서로의 생각을 나눈다면 더 풍성한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책을 마칠 때까지 인내하겠다는 결단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정주서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의 생각을 나누면서 함께 성숙하기 위한 배움에 방해가 되는 것은 일방적인 가르침입니다. 자기의 생각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퀘이커교도는 관습적으로 결혼을 앞둔 예비신랑신부를 상담해 주는 모임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 모임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명확하게 모르는 사람을 위한 시간으로 ‘명료화 모임’(clearness committee)이라고 부른답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도움을 받고자 하는 커플이나 개인은 자기의 문제를 배경지식과 더불어 종이에 쓰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런 뒤 그들은 대여섯 명의 사람을 위원으로 선발하고 그들에게 그 종이를 보여준 뒤 함께 대화하기 위해 모여 앉습니다. 그러나 이 대화에는 한 가지 확고한 규칙이 있습니다. 위원들은 당면한 문제에 대한 그들의 자신의 대답이나 해결책을 제공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질문만 할 수 있습니다. 그 커플이나 개인은 그 질문에 대해 모든 위원들 앞에서 대답합니다. 그러면 대답은 더 많은 질문을 낳고 질문은 더 많은 답을 낳으며, 모임이 진행될수록 질문과 대답 모두 깊이가 더해 갑니다. – 파커 파머의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에서 인용 179쪽.
질문을 통해서 가르치는 방식은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본래 소크라테스 같은 위대한 교사는 질문을 통해서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귀를 기울이고 들어줄 때 학생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진리의 문턱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그룹 모임을 통해서 바르게 배우고 가르치려면 충분히 인내하겠다는 배우는 사람의 결단과 나의 생각을 주입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생각을 끄집어내서 함께 배우고자 하는 인도자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5. 무엇이든지 물어보고 생각도 해 보자!(환대)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배운다는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봅시다. 만약에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안다면 우리는 다시 배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나이가 어느 정도 되면 세상사 모든 일들을 다 꿰뚫고 알게 된다면 몇 살까지만 배우고 더 이상 배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평생을 배운다 하여도 여전히 모르는 것이 더욱 많음을 우리는 알 것입니다. 사람은 모르는 것을 깨달을 때 “아! 그렇구나!”라는 소리가 마음으로부터 솟아나오며 동시에 즐거움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배움의 즐거움입니다. ‘이것이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라는 말은 우리가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의 기쁜 소리입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배운다는 것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며, 서로의 생각을 이해해 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알고 서로의 생각을 이해해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한 공동체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가족이며 같은 교회의 일원이며, 같은 나라의 백성이기에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며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부 사이에 대화가 필요한 이유가 이것이며, 부모와 자녀 사이에 대화가 필요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래야 가정이 건강하게 세워질 수 있습니다. 서로를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한 마음으로 힘을 모을 수 있습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같은 공동체를 세울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을 상대방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단(豫斷)하고 내 생각을 숨긴다면 마침내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고자 하는 열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생각을 상대방이 말할 때, 그것을 이상하다고 박대하지 말고 그 생각을 환영하면서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잘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환영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한 우리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늘 들을 수 있을 것이고 배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임이 풍성한 가르침과 배움의 자리가 되려면 배우는 과정에서 비판을 용납해야 합니다. 낯선 가르침과 질문이나 문제제기도 수용해야 합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서로 언약을 맺은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언약관계 속에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그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인내하고 씨름하고 그렇게 하는 동안에 우리는 자신과 타인에 대해서 점차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6. 결론 – 가르침이란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
교육학자 파커 파머는 가르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가르침이란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
그런 공간을 만드시려고 예수님은 소수정예의 제자단에게 자신의 삶을 투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친구로 여기시면서 자신의 모든 것과 비밀을 공유하셨습니다. 그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시면서 결국 그들도 예수님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이끄셨습니다. 일방적으로 가르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심으로 그들의 생각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더 깊은 진리로 인도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아무 때든지 무엇이나 예수님께 물을 수 있었고, 때로는 예수님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열린 공간 속에서 바른 가르침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들도 소그룹에서 배웁니다. 우리들도 가정에서 가르치고 배웁니다. 우리들은 어쩌면 평생을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 속에 살아갑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이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는 배움의 공간으로 채워질 때 우리는 건강한 가정과 교회, 국가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끝>.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가르침과 배움6-가르침이란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설교안).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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