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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천시소리낭송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영욱 / 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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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하 시인
1963년 전북 고창 출생
세종대학교 영문과 및 동국대 영화과 졸업
1988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김수영 문학상 수상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
우리 사회에 대항하기 위한 풍자와 희화의 언어 번제(燔祭)
유하는 첫 시집 <무림일기>에서 '무림이 곧 삶의 세계'가
된다는 간단하면서도 중층적인 인식을 통해 대중문화와
키치문화를 시라는 장르에 멋들어지게 접목했다.
이 시집의 제목부터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왜곡된 상황을
강하게 풍자하기 충분했고, 무척이나 쉽고도 재미있게
읽히는 이 시집을 통해 그는 문단과 대중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현실의 무대를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이다(homo homini lupus)'
란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살벌한 무림의 세계에 빗대어
표현한 후, 그는 계속해서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선 물질적 ·성적 ·정치적 욕망이 뒤엉켜 들끓고 있는
타락한 우리 사회에 대항하기 위한 풍자와 희화의 언어 번제
(燔祭)를 지낸다.
알다시피 시인은 그 욕망의 집결지를 '압구정동'으로 상정하고
있다. 한편 시인은 작금의 요란 ·소란 ·현란한 사회의 대척점에
'하나대'라는 훼손되지 않은 원형적인 상징 공간을 배치한다.
"아우슈비츠의 독가스보다/더 잔인하고 음흉"('체제에 관하여')한
문명의 체제와 이데올로기의 횡포로부터 격절된 유토피아가
하나대란 공간인 셈이다.
압구정동이 체제가 만든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라면, 하나대는
"오, 정글어가는 한 마을이/저 모든 것들을 오래 오래 길러온
어머니" ('정글어가는 하나대를 바라보며')의 품속과 같은
고향이다. 그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은 '압구정동' 거리이지만,
그의 눈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멀리 있는 '하나대'이다.
따라서 그는 도시의 '무서운 아이'라기보다는 농경 문화가
침투시킨 순치되지 않는 '도시 게릴라'에 가깝다.
그가 룩스 높은 찬란한 문명의 빛이 '광명'이 아니라 '죽음'이
될 수 있음을 규지(窺知)하는 연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도저한 각성으로 빚어진 짧고 굵은 시 한편. "눈앞의
저 빛!/찬란한 저 빛!/그러나/저건 죽음이다//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오징어 ― 여는 시').
그대는, 아니 나는 지금 무슨 빛을 그토록 열심히 좇아가고
있는가. 의심하라!
자연이 ‘비어있음’의 공간이라면, 도시는 하나의 ‘채움’의 자리이다. 인간의 욕망은 허(虛)를 보존하는 쪽보다는 허를 채우는 쪽으로 움직인다. 그 ‘채움’의 욕망때문에 드러나는 결과가 ‘막힘’이다. 차가 막히고 사람이 막히고 하수구가 막힌다. 그 막힘의 결과가 ‘넘침’이다. 인간이 채움의 욕망을 제어하지 않는 이상 대홍수는 계속 일어날 것이다. 넘친다는 것은 지구의 절멸을 의미한다.
*,<하나대>는 시인의 고향고창의 작은 마을의 지명이다 압구정은 조선의 칠삭동이 아며 지략가이자 간신배의 대명사인 희대의 권력을 사취한 한명회의 정자이고 지금은 우리나라 손꼽히는 부와 지략가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 이고 부와 재력가 타락의 중신이라 할 수있다.-지산 생각-
고창읍성 입구
깊이 깊이 정글어버린 한 마을이 있습니다
퍼온글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문지, 91년
<욕망의 덩어리로서의 압구정동과 그 반대편에 자리한 하나대>
첫시집에서 무협소설의 형식을 빌어 우리의 현대사와 사회적 모순을 풍자하여 우리 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유하는 이 두 번째 시집에서는 자본주의의 고도로 발달한 실상으로서의 압구정동, 그 욕망의 덩어리인 압구정동을 도마 위에 올린다.
압구정동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다
국화빵 기계다 지하철 자동 개찰구다 어디 한번 그 투입구에
당신을 넣어보라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
--욕망의 통조림 또는 묘지> 중에서
일상언어와 온갖 요설로서 유하는 원래 배밭이었던 압구정동이 세속도시의 표본으로 변하는 모습을, 변한 뒤의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꼬집고 있다. 압구정동의 화려함은 욕망을 자극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현장이자, 그것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인 것이다. 압구정동에 대한 시인의 철퇴는 도시 문명의 물질적인 욕망의 끝임없는 추구에 대한 비판으로 시인은 노자의 사상을 인용하여 그것을 설파하고 있다.
자연이 ‘비어 있음’의 공간이라면, 도시는 하나의 ‘채움’의 자리이다. 인간의 욕망은 허(虛)를 보존하는 쪽보다는 허를 채우는 쪽으로 움직인다. 그 ‘채움’의 욕망 때문에 드러나는 결과가 ‘막힘’이다. 차가 막히고 사람이 막히고 숨이 막히고 하수구가 막히낟. 그 ‘막힘’의 결과가 ‘넘침’이다. 인간이 채움의 욕망을 제어하지 않는 이상 대홍수는 계속 일어날 것이다. 넘친다는 것은 지구의 절멸을 의미한다.(책 뒷표지)
자본주의적인 도시 문명의 비판은 당연한 결과로서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이슈 중의 하나인 환경 문제로까지 연결된다. 빈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간은 지극히 심각한 환경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유하 시의 도시 문명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은 멈출 줄 모르고 굴러가고 있는 욕망의 수레바퀴(그 끝을 보고 싶은 욕망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에 제동을 가하고자 하는 시도의 하나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유하의 언어이다. 그의 언어가 이러한 비판에 효과적인 지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지만, 키치의 세대답게 키치적인 언어로 이러한 작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산다는 일이 뭐 뾰족한 일이 있으랴 넥타이 매고
소주잔 돌리며 지글지글 삼겹살이나 뒤집는 일 외에
뾰족한 일 찾으려다, 노충량이는 뽕 먹다 빵에 갔고 기어이
난 누에 같은 시인이 되었다 참 누에는 뽕 먹고 살지
언어의 뽕잎 갉아먹으며 내가 황홀해지는 시 한편 쓰고 싶었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5
--호텔, 그린그래스> 중에서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연작편에서 시인은 <무림일기> 연작편에서보다 한층 더 무르익은(‘성숙하다’는 말은 이상하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목소리를 내고 있고, 그가 90년대의 한 흐름을 이끌어갈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유하는 이 ‘압구정동’에 반대되는 자리에 위치한 곳으로서 자신의 고향인 ‘하나대’를 내세우고, 그 고향을 소재로 한 시도 이 시집에 많이 실었다. 이 시들은 <바람부는>의 연작편들과는 달리 아주 서정적인 어조이다. 그것은 몇 편의 연시들과 같은 어조이다.
한 마을이 정글어갑니다
들꿩 한 마리 잘 익은 단시감 같은 석양을 데리고
당산뫼 솔숲을 넘었습니다
저녁 짓는 냉갈이 콧날을 시큰하게 스치며
빈 몸의 들판으로 뿌옇게 몰려갑니다
-<정글어가는 하나대를 바라보며> 첫부분
유하의 첫시집을 읽고 그에게서 이런 어조가 나오리라는 것은 생각하기 쉽지 않은 노릇이다. 그러나, 그는 독자들의 기대를 허물고 서정시인 같은 목소리로 고향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고향은 소멸되어가고, 허물어지고, 시들어가는 그런 모습으로 제시된다(그것이 고향의 대체적인 의미이긴 하지만). 당연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고향의 그런 모습들(도시의 인구 집중화로 공동화, 노령화, 황폐화 되어가는 시골, 고향을 가장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시인은 김용택이리라)은 유하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는 시편들과 대조되면서 이중적인 안타까움을 준다. <무림일기> 시편들에서는 ‘무협소설/만화’의 용어를 많이 차용했던 작가는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고향의 방언들을 많이 차용하고 있다. 그것은 좀 더 고향, 근원의 언어에 가까워 지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나, 시의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다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그것이 오히려 시의 신비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효과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키치에서 출발한 유하는 이 시집에서 욕망의 덩어리로써의 도시 문명과 소멸되어 가는 고향, 시골, 자연을 대비하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를 적나라하게 풍자, 비판하고 있으며, 그러한 것을 시적으로 형상화해나가는 데 있어서도 전시집보다 상당한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시 한 편 한 편의 완결성은 우리가 따져볼 필요가 있는 문제이겠지만, 그의 시들이 보여주는 방향성은 활기가 넘친다.
엘리제를 위하여> 25번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
--욕망의 통조림 또는 묘지
압구정동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다
국화빵 기계다 지하철 자동 개찰구다 어디 한번 그 투입구에
당신을 넣어보라 당신의 와꾸를 디밀어보라 예컨대 나를 포함한 소설가 박상우나
시인 함민복 같은 와꾸로는 당장은 곤란하다 넣자마자 띠-- 소리와 함께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그 투입구에 와꾸를 맞추고 싶으면 우선 일년간 하루 십 킬로의
로드웍과 새도우 복싱 등의 피눈물 나는 하드 트레이닌으로 실버스타 스탤론이나
리차드 기어 같은 샤프한 이미지를 만들 것 일단 기본 자세가 갖추어지면
세 겹 주름바지와, 니트, 주윤발 코트, 장군의 아들 중절모, 목걸이 등의 의류 액세서리 등을 구비할 것 그 다음
미장원과 강력 무쓰를 이용한 소방차나 맥가이버 헤어스타일로 무장할 것
그걸로 끝나냐? 천만에, 스쿠프나 액셀 GLSi의 핸들을 잡아야 그때 화룡점정이 이루어진다
그 국화빵 통과 제의를 거쳐야만 비로소 압구정동 통조림통 속으로 풍덩 편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곳 어디를 둘러보라 차림새의 빈부 격차가 이쓴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욕망의 평등 사회이다 패션의 사회주의 낙원이다
가는 곳마다 모델 탤런트 아닌 사람 없고 가는 곳마다 술과 고기가 넘쳐나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구나 미국서 똥구루마 끌다 온 놈들도 여기선 재미 많이 보는 재미 동포라 지화자 봄날은 간다--
해서, 세속도시의 즐거움에 동참하고 싶은 자들 압구정동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는구나
투입구의 좁은 문으로 몸을 막 우겨넣는구나 글쟁이들과 관능적으로 쫙 빠진 무용수들과의 심리적 거리는, 인사동과 압구정동과의 실제 거리에 비례한다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오, 욕망과 유혹의 삼투압이여
자, 오관으로 느껴보라, 안락하게 푹 절여진 만화방창 각종 쾌락의 묘지, 체제의 꽁치통조림 공장, 그 거대한 피스톤이, 톱니바퀴가 검은 기름의 몸체를 번득이며 손짓하는 현장을
왕성하게 숨막히게 숨가쁘게
그러나 갈수록 쎅시하게
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
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이곳에 오라
저만치, 존재의 무게를 버리고 곤두박질치는 물새떼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기에
오래 견디어 낸 상처의 불빛은
그다지도 환하게 삶의 노을을 읽어 버린다
소멸과의 기나긴 싸움을 끝낸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쓸쓸하게 허물어진다는 것,
그렇게 이 세상 모든 저녁이 나를 알아보리라
세상의 모든 저녁을 걸으며 사랑 또한 자욱하게 늙어 가리라
--<세상의 모든 저녁 1> 중에서
상처입은 삶이기에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고, 그리고 결국에는 ‘쓸쓸하게 허물어진다는’는 시인의 생각에 우리가 전적으로 수긍을 하든 안하든 간에(사르트르는 우리가 허무에 빠지는 것은 ‘삶 쪽에서 죽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죽음 쪽에서 삶을 보기 때문이다(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가 그리고 있는 세계는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이 맞이해야 하는 것이고(그래서 ‘세상의 모든 저녁’이리라),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이 시집에서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가 된 듯하다. 언어를 다루는 그의 솜씨는 이전 시집에서부터도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었지만 이 시집에 이르러서는 그 솜씨가 한 정점에 다다른 느낌을 주며(예전에 김형경의 ‘담배를 피는 여자’인가를 읽을 때 느꼈던 그 느낌) 그건 잘 그려진 풍경화를 보는 느낌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언어의 화려함에 휩쓸린 나머지, 언어의 외화성이라고 해야 할까, 때로는 그 알맹이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지로 이번 시집에서는 욕망, 사랑, 죽음 같은 실체를 느끼기가 힘든 어휘들이 많이 등장하고 그러한 어휘들이 개개의 작품 속에서 그 무게를 이겨내고 있는지는 공구해 보아야 할 문제일 듯하다.
정확한 추적이나 고찰은 아니겠지만(시를 한 번 읽고난 감상이긴 하지만) 그가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상처는 실연의 그것이고, 그 결과 삶은 그에게 있어서 ‘외로움’의 그것이다(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예술가는 사랑을 잃은 대가로 예술을 얻는다’라는 말이 그에게 적용될 지 모르겠다. 고흐의 경우에는 위의 말이 꼭 맞다고 할 것이다. 샬롯 브론테나 조셉 콘래드의 경우도 위의 말이 적용될 수 있으리라). 그것의 징후를 우리는 <사랑의 지옥--序詩>에서 찾아볼 수 있다(발문에 적힌 진이정의 말이 아니더라도 유하의 실연 이야기는 어찌된 셈인지 모두가 알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길지 않으므로 전문을 인용하겠다.
정신 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짓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 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의 캄캄한 감옥에 갇혀 운다
이 시에서 나의 눈낄을 끄는 구절은 옴쭉달싹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을 나타내는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이라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그러니까, 사랑으로 부터 벗어나지도, 또 사랑으로 몰입하지도 못하는 그런 딜레마적인 상태를 말하고 있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S-I 단계의 전형적인 딜레마이다.
어쨌거나 이 시집의 구조는 대략적인 나의 파악으로는 사랑의 실패--외로움--소멸을 주조로 되어있으며, 특히 소멸의 부분이 크게 다가온다. 만 서른의 나이에 펴낸 이 시집에서 왜 유하는 특히 죽음의 문제에 골몰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시의 동반자인 진이정의 죽음(이 때까지 죽은 것은 아니지만)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시간에 쫓겨 여유를 가지고 읽지 못했지만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어휘와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유하의 이런 시적 변화가 그의 체질에 맞는지는 장담을 할 수 없지만 일단 나에게는 의미있는 시도라고 보여진다. <살구나무 있던 자리>의 마지막 연은 그가 이 시집에서 보여주고 있는 태도를 집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지워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슬픔은 세월이 흐를수록
잘 익은 살구처럼 더욱 무거워지고
그래 추억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살구나무 자리 정령 그 분주한 움직임도 끝내 멈추리라
끝으로 지산생각은 자연이 ‘비어있음’의 공간이라면, 도시는 하나의 ‘채움’의 자리이다. 인간의 욕망은 허(虛)를 보존하는 쪽보다는 허를 채우는 쪽으로 움직인다. 그 ‘채움’의 욕망때문에 드러나는 결과가 ‘막힘’이다. 차가 막히고 사람이 막히고 하수구가 막힌다. 그 막힘의 결과가 ‘넘침’이다. 인간이 채움의 욕망을 제어하지 않는 이상 대홍수는 계속 일어날 것이다. 넘친다는 것은 지구의 절멸을 의미한다.
하나대라는 곳은 이 시뿐만 아니라 이 시집 전체에서 아름다운 곳이지만 왠지 을씨년스런 느낌을 주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모든 것들을 오래오래 길러온 어머니였다. 그래서 하나대는 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하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이 추구하는 그의 하나대는 그의 시에서조차 시인이 추구하는 것을 잃어버리고 생명력을 잃어 멈추어 서려고 한다. 단지 지금은 마지막 발악만이 남아 귀 먹먹한 새울음 쏟아내어 겨우 솔방울 하나 툭하고 멈추게 만들게 할뿐이다.
시인의 하나대를 그렇게 만드는 것은 아마도 도시를 향해 떠난 우리의 농촌사람들일 것이다. 아니 욕망의 소용돌이가 되어 주위의 모든 것을 끌어들이는 도시일 것이다. 누구나 하나대는 간직하고 있지 압구정이 욕망의 고향일지라도 끝으로 시를 읽든 낭송을 하든 그 시를 지은이 이의 마음을 읽어 내야 시를 지를 수도 낭송 할 수도 있다고여겨진다 맥락은 난해 한 것 같지만 두편의 시를 잃고 이해하고 낭송까지 한다면 2020에 합류 하리라 늙은 여우는 생각 해본다 이상 -지산생각-
첫댓글 공부 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