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 드라마의 절정, 성탄절
이사야 11:1~9
목차
1. 온 세상의 왕, 퀴리오스
2. 뼈에 새겨진 예언자들의 이야기
3. 예언자들이 전해준 그리스도 이야기
4. 사도들이 들려주는 그리스도 이야기
5.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설교 목적
대강절과 성탄절이 어떤 의미인지를 명확하게 포착할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는 아마 우리가 어려서부터 듣고 자란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유대인에게는 어떤 의미였을지 생각해 봄으로써 성탄절의 참된 의미를 가늠해 보려는 시도다. 나는 이 설교에서 유대인들의 예언전통과 신앙교육을 받은 사람이 메시아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지 성경을 통해 상상해 보았다. 물론 사도들처럼 유대인으로 나서 자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추정해 보았다. 이런 접근은 성탄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함과 동시에 신약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신약의 저자들은 대개 나면서부터 유대인이었으니까.
1. 온 세상의 왕, 퀴리오스
2천년 전 팔레스타인 지방은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 땅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서 가장 큰 도시는 예루살렘이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에 있었지만 그 힘을 키우더니 점차 이웃나라들을 차지하여 그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땅을 편입하면 군인들과 백성들을 보내어 그 땅을 통치하고 로마인의 땅으로 만들게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땅으로 진출해서 로마에게 속한 땅이 되게 했다. 그런 이유로 이탈리아 반도 이외에 새롭게 개척하여 로마에게 속한 땅을 가리켜 속주(屬州)라고 불렀다.
로마인들은 속주를 프로빈키아(provincia)라고 불렀는데, 그 말은 해외로 진출하여(per-, to go over) 단단히 묶어서(vincio, I bind, tie up, fetter)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는 의미다. 미국은 13개 주(州, state)로 시작하여 지금은 50개의 주로 구성된 연방국가다. 미국은 헌법으로 그 주들을 단단히 묶어서 분리되지 못하게 했다. 우리나라도 남한의 경우, 그 지역이 다섯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것은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다. 지금은 1개의 특별시와 6개의 광역시, 8개의 도(道), 그리고 특별자치도와 특별자치시가 각각 1개로 행정구역이 편성되어 있다. 여기서 도(道)를 province라고 부른다. 로마인들의 흔적이 오늘에까지 남아 있음을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로마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는 로마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그리고 그 황제가 보위(寶位)에 오르면 모든 속주에 전령이 파견되어 새로운 황제가 그 통치를 시작했다고 소식을 전했다. 때로는 동전에 황제의 얼굴을 새겨서 유통하기도 했으며, 왕을 닮은 모습으로 석상을 세우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황제가 온 세상의 주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반겼다. 왜냐하면 그 이전의 황제가 폭압정치를 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남의 통치를 받는 것에는 별다를 것이 없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그런데 유대 땅에서 태어난 한 아기의 소식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 그리고 사마리아와 로마에까지 전달되었다. 그 아기는 세상의 구주라고 불렸으며, 나중에는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고, 교회는 그분을 가리켜 만 왕의 왕, 만 주의 주라고 불렀다. 당시에 온 세상을 통치하는 황제를 가이사(Caesar)라고 불렀는데, 로마에 충성하는 사람들은 가이사가 세상의 왕이라(Caesar is Lord, Kyrios, 퀴리오스)고 충성을 맹세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세상의 왕이시다’(Jesus is Lord)고 고백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나사렛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고 그리스도라 부르며 경배를 드리는 모습은 로마인들에게는 어리석은 일로 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사형선고를 내리고 로마의 군인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이를 세상의 왕이라고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몇 년 전에 미군 특공대에게 사살된 빈 라덴을 온 세상을 구원할 참된 지도자라고 고백하며 열렬히 그를 기념하는 알 카에다 무리가 있다면 오늘 세상은 그들을 어떻게 여길까? 광신도 무리쯤으로 여기지 않을까?
그렇게 어리석은 일로 여겨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2천 년을 넘어 오늘에까지 이어져 왔다. 그 결과 해마다 12월이 되면 온 세상은 ‘기쁘다 구주 오셨네’ 또는 ‘Merry Christmas!’를 서로에게 빌어주면서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념한다. 지금 온 세상에 이보다 더 크게 기념되는 탄생일은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길래 그렇게 짧은 삶을 사시고 그렇게 비참하게 죽으셨는데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으실까?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예언과 관련이 있다.
2. 뼈에 새겨진 예언자들의 이야기
기독교의 성경은 예언의 말씀이라는 이름을 가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예언이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은 단지 신의 뜻을 담은 신탁(神託)을 전할 뿐 아니라 길고 긴 역사를 되돌아보는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그들은 조상들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이해했고 그것이 자신들의 시대와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역사가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당대인들에게 선포하면서 기록으로 남겼다. 그들의 이야기는 조상들의 이야기에 함께 묶여 편집되었고 그 결과 성경은 더욱 다양한 장르와 양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만큼 더 풍성해졌다. 특별히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그 백성이 포로로 끌려간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대체했다. 이렇게 하여 제의의 종교는 차츰 말씀의 종교로 바뀌었다.
예언자들의 이야기는 조상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새롭게 엮여져 새로운 예언과 전설이 되었다. 그것은 모든 유대인들이 어린아이 시절부터 배우고 듣고 뼈에 각인된 희망과 확신이 되었다. 그 이야기는 유월절과 오순절, 그리고 부림절과 같은 절기들과 안식일에 계속해서 되풀이되었다. 유대인 랍비들은 전래되어 내려오는 그 이야기의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단지 이야기만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태어난 근본 이야기와 전승 과정을 연구했다. 그런 연구를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는 더욱 강력한 확신과 근거를 가지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강력하게 새겨졌다. 그런 점에서 랍비들은 율법학자이면서 동시에 역사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하여 깊이 공부하면 자연히 민족의식이 생기기 마련이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자신을 바친 우리 조상들이 역사에 정통한 것은 당연하다. 조상들의 이야기 속에서 현실을 비추어 볼 때 일제의 만행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과제였다. 우리 조상들은 일제의 압제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응하며 살 수 없었다. 조상들의 빛나는 전통과 얼을 생각할 때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사도 바울이 청년이었을 때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추종하는 이들을 체포하러 다닌 적이 있다. 그때 청년 사울의 신념은 율법과 예언의 이야기에 근거한 것이다. 나중에 그 청년이 사도 바울이 되어 사방에 흩어진 유대인 회당을 다니면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전했을 때, 어떤 유대인들은 청년 시절의 사울처럼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들고 일어났다. 그들도 역시 그럴 만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신약성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참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유대인들과 인물들은 우리와는 다른 배경 속에서 살았고 교육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진 희망과 확신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 성탄절에 많은 사람들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외칠 때 마음 속에 기대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리고 2천년 전에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외쳤을 때 그들의 기대와 확신은 무엇이었을까? 어린 시절부터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자라났느냐에 따라 그 둘의 기대나 확신은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될 것이다.
3. 예언자들이 전해준 그리스도 이야기
모든 교육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어린 시절에는 이야기를 배운다. 그리고 점차 나이가 들면서 그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간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마침내 한 사람과 한 사회의 신화가 되고 희망이 되며 공동체의 정체성과 사명을 형성한다. 민족의 동질성은 혈통보다는 공통의 신화를 바탕으로 동일한 정체성과 연대의식을 형성한다. 그만큼 어떤 이야기를 듣고 배우며 이야기하는가는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 이야기는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도 어려서부터 모세오경과 시편, 그리고 예언서를 배운다. 그것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조상들의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과 엘리야 등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저절로 역사가 되며 그 역사를 배우는 이들에게 롤모델을 제공한다. 그래서 ‘나도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처럼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자가 될 거야!’라는 꿈을 가진 어린이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예언자들과 랍비들은 조상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던가? 예언자들이 들려준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었을까?
예언자 이사야가 들려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은 대강절과 성탄절에 자주 인용된다. 그것은 탄생하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이사야 11:1~5
이 예언을 살펴보면,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택하신 일꾼이라는 의미다. 본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다. 그리고 기름부음은 택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공의로 통치하실 것이며, 그가 다스리는 세상에 비로소 평화가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게 될 것이다. 이는 만인이 제사장처럼 또는 예언자처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친밀한 세상이 될 것을 의미한다. 이 예언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 세계 만민을 아우르게 될 것이라고 들려준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주요한 메시지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우려는 것이었다. 때로는 책망을 통해 돌이키게 하고 때로는 위로하여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게 했다. 예언자들은 백성들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를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사랑받는 자들인지 깨닫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자상하신 분인지를 설명했다. 그에 비하면 이방 나라들이 섬기는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 메시지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고 자라난 유대인의 마음에는 자기 백성을 회복하시고 열방을 위한 빛이 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가득할 것이다. 이것은 이사야 40장부터 66장까지 읽고 난 소감이다.
사도 바울이 교회에 편지할 때 그가 예언자의 마음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12:2~3
이로 볼 때 예언자들이 그 백성에게 하나님의 마음과 위대한 계획을 들려줌으로 바르게 세우려고 한 것처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에게 하나님의 경륜(Master Plan)을 들려주어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세상과 하늘의 권세들에게까지 알게 하는 대리인으로 세우려고 그렇게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부지런히 배웠으므로 그의 뼈에 새겨진 하나님의 언약과 영광이 그를 그토록 뜨거운 열정의 사람이 되게 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추정해 볼 수 있다.
4. 사도들이 들려주는 그리스도 이야기
유대인으로 나서 유대인으로 자라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소개했을까? 사도들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만난 그리스도를 전했다. 그들은 대중에게 설교를 통해 이야기했고, 편지와 같은 글로 정리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정리한 사도들의 설교를 읽거나 복음서와 서신서를 읽으면서 사도들이 소개하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이해할 수 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을 성취하실 분임을 드러냈다. 아브라함의 언약이란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한 민족을 세우시고 그 민족을 통해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 약속대로 예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에게 모든 족속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셨다. 다윗의 언약이란 다윗의 자손을 통해 그 나라를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의 주가 되신다는 약속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셨음을 증언했다(행 2:35). 마가도 그 복음서를 마치면서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막 16:19). 사도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도 예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것을 여러 차례 증거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위에 앉으셔서 영원토록 통치하실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롬 8:34, 골 3:1, 히 1:3, 13, 8:1, 10:12, 12:2, 벧전 3:22).
사도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예언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불러 모아 교회를 세우시고 거기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게 하셨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는 거룩하고 진실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새 이스라엘이 되어 세상에 빛을 비추고 어그러진 세상을 바로잡음으로 모든 민족에게 복이 된다. 사도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권면하여 우상에게서 돌이키고 참되고 사시는 하나님을 섬기며 그리스도와 연합하라고 선포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증거했다.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세상은 사실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하신 생명 가득한 세상이다. 하나님은 전에 그 세상을 아담과 노아,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맡기셨던 것처럼, 이제 새롭게 열리는 세상을 교회에게 주셔서 그들을 통해 관리하기를 원하신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자기 손으로 만드신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일을 쉬지 않고 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그 일에 동참하게 하시려고 사람을 부르시며 그들에게 자기 나라를 물려주기를 기뻐하신다. 그런데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아니라 온 세상 만민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민의 구주로 보내셨다.
사도들은 성경에 기록된 길고 긴 이야기를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백성을 부르셔서 언약을 하시고 그들을 통해 이 세상을 경영하셨는지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제 때가 차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새로운 세상을 물려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만민을 불러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을 함께 물려받자고 초대했다. 그것이 복음전도의 목적이고 핵심이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새 이스라엘로서 새롭게 택함을 받은 민족이며 하나님이 구별하신 나라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릴 왕이며, 그 성전과 같이 전체가 새롭게 된 세상에서 주님을 경배할 제사장들이다(벧전 2:9).
5.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성탄절에 울려 퍼지는 캐롤은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였을 것이다. 그런데 성탄을 목격한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본래의 희망과 기대, 그리고 확신은 이미 퇴색되어 버렸다. 한국인의 고유 음식인 김치가 다른 나라에서 ‘짝퉁 김치’로 만들어져 팔릴 때처럼 그 맛을 잃은 지 오래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생일이 산타의 생일로 바뀌었다고 탄식을 한다.
올해도 우리는 성탄절 예배를 드릴 것이다. 성탄 찬송 ‘기쁘다 구주 오셨네’도 부를 것이다. 그런데 올해 우리는 이 찬송을 부르면서 성경 드라마의 절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그 백성을 부르셔서 만들고자 하셨던 그 아름답고 생명 충만한 세상을 마침내 이루시려고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세상에 모델이 되게 하시고 빛을 비추게 하신다. 예언자 이사야가 그 백성을 향하여 외친 말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말씀은 이제 세상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에게 적용되는 격려의 말씀이다.
그 옛날 헤롯왕처럼 자신을 위해서 악을 행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루실 세상에 대한 배고픔과 갈망이 없이 자신의 배를 위해서만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사방에 숨겨진 의인들이 있으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구도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신 성탄절은 바로 그 사람들에게 새 희망의 날이다.
성탄절은 왜 희망과 기쁨의 날인가? 창조 이래로 하나님이 자기 나라를 돌보시고 가꾸시려고 사람들을 부르시고 민족을 세우셨는데, 이제 천하만민을 한 가족으로 부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친히 하나님의 언약을 인용하시면서 새로운 세상이 왔다고 선언하시고 그 세상의 삶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교만한 자를 내치시고 낮고 천한 사람을 높이시며 회복하여 만인이 더불어 평화롭게 생명 가득한 세상을 누리게 하시는 행동이었다.
그 의로운 행동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고 하늘 우편 보좌에 앉게 하셔서 하늘과 땅의 대권을 맡기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 뜻을 따라 동일하게 정의와 자비를 실천할 때 고난을 받겠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일으키시고 자신의 영광의 나라를 상속하게 하실 것이다. 그 영광의 나라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하신 생육 번성 충만의 세상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그 평화로운 세상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그렸다: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6~9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 모두 세상의 왕으로 오시는 분을 정성으로 모시고 살자. 그리고 주님을 충성되게 따르며 주님이 우리에게 열어 주시는 생명 가득한 세상을 물려받자. 그 세상은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고 서로 마음을 모아 연대할 때 우리 가운데서 커져 가는 세상일 것이다. 마치 밭에 심은 겨자씨처럼. 마치 홍해를 건너 약속의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땅이 펼쳐져 있었던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주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빚으셨다. 이제 주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실 것이다. 그 결과 우리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福地)가 될 것이다.
이런 꿈과 희망, 그리고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외치자: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