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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의 인력(引力)
- 김금희, ‘경애의 마음’을 읽고 -
2019. 06. 백란주
어느 순간, 내 손에 잡히는 것은 중의적 해석이 가능한 문학서의 한 줄보다 삶을 규정짓거나 나를 성찰하게 하는 글 한 줄에 머무르고자했다. ‘개연성’이라는 소설의 허구성은 때때로 나의 이성과 가슴이 서로 마찰을 빚어 소설 밖에 있는 나를 힘들게 하기 때문이었다.
꼭 그렇게 해야 할까, 그럴 수도 있지, 산다는 것 별 것 아니잖아, 현실을 빗댄 상황들은 이해를 요구하기도 벅찬 경우가 있는가하면 그대로 스며들어 내 이야기인 듯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내게는 이십대 때의 소설읽기가 더 가벼웠는지 모른다. 나이 드는 만큼 얽히고설킨 감정들이 많아서인지 어느 시점부터 소설읽기가 더 힘들었다. 어떤 난관에 부딪혔을 때는 오히려 철학서나 심리서가 명쾌하게 닿았다. 내게 문학서는 어떤 논제에 대한 유추를 요구하는 느낌이었다. 단답형의 답으로 나의 잘·잘못이나 상대의 잘·잘못을 찾고 싶었던 나는 그렇게 한동안 문학서를 기웃거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서술형의 긴 답을 고백할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숨 막히는 상황에서는 짧은 호흡이 필요했다. 나의 상황에 맞는 위로를 찾기 위해 드러내지 않는 작가의 심리전에 내어줄 마음체력이 고갈되어짐을 나는 스스로 알 수 있었다. 나의 책읽기 패턴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네 잘못이 아니야! 때로는 사회를 향해 우리가 조롱하듯 듣고 싶은 말이 아닐까. ‘경애의 마음’, 공경하는 마음으로, 고유명사 ‘경애’를 소리 내어 부르게 된다. 네 잘못이 아니야…, 사회의 문제이고, 어른들의 문제이며, 그 속에서 네게 죄를 묻고 벌하는 시선들이 잘못이야.
소설의 깊은 맛을 알아가는 덕분에 혼자서 간이역을 만들며 읽는 독특한 버릇이 생겼다. 표지화표를 사서 목차의 간이역을 지나 작가의 말,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마음을 다해 썼다. 2018년의 초여름 김금희를 만나는 종착역까지 오는데 시간이 걸렸다.
진자운동
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가운데로 갈수록 점점 빨라지고 양끝으로 갈수록 점점 느려지는 진자운동처럼 경쟁하는 군중 속에 있을 때, 잘·잘못을 따져 물어야 할 때, 우리의 심장박동은 빨라질 수밖에 없다. 경쟁하는 누군가와 등급이 시소처럼 확연히 드러났을 때 우리는 섣불리 그 상황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라퐁텐 우화에서 힘 있는 사자가 양을 잡아먹은 죄보다 힘없는 당나귀가 수도원의 풀, 혀 넓이만큼 뜯어 먹은 것이 가장 큰 죄가 되었다. 여우는 천하고 어리석은 양들을 잡아먹은 게 죄가 되냐고 묻는다. 오히려 사자의 먹이가 됨으로써 양들은 큰 영예를 얻었을 것이라는 비논리성에 아첨꾼들은 박수갈채를 보낸다. 호랑이, 곰, 다른 힘센 동물들에게는 죄를 묻지도 않는다. 싸움을 잘하는 동물들은 저마다 용서받지 못할 만큼 큰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 당나귀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법정은 힘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판결을 내린다는 것이다. 무죄 혹은 유죄라고.
경애가 경험하는 사회구조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소의 높이에 따라서 누군가는 하늘에 닿을 수 있는 힘을 가졌고, 누군가는 땅바닥에서 울어야했다.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소리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 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뜨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 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 나희덕, 〈귀뚜라미〉 전문 -
시소는 나와 경쟁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가능한 놀이다. 나와 동급의 누군가와 마주 앉았을 때 재미있는 놀이와 달리 나와 다른 체급의 상대가 앉았을 때 시소는 유죄이거나 무죄일 수 있는 무거운 놀이로 전환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네는 나 혼자서 군중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군중을 피해 멀리, 천천히 달아날 수도 있다. 구름판을 딛듯 힘을 주어 서서히 가속도를 붙이는 지점이 어디 즈음인지, 어디만큼 오르고 싶은지 오롯이 나의 선택이며 몫이 된다.
상수.
서툰 어부는 폭풍우를 두려워하지만 능숙한 어부는 안개를 두려워한다고 했다. 지금 당장 나쁜일 폭풍우일 수는 있겠지만 안개가 아니라면 두려워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비록 능숙한 어부의 삶을 사는 나의 안목이 아닐지라도 안개가 끼지 않도록 살면 나의 진자운동을 스스로 조율하면서 살아가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옷을 왜 입냐는 것인데, 우리가 혼자 살면 옷 안 입어도 됩니다. 그런데 옷을 입는다는 건 어딜 나간다는 거고 누굴 만난다는 거고 그렇게 해서 인간이 된 다는 거잖습니까. 인간다워지라고 미싱을 돌린다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조 선생이 공상수에게 잊으면 안 된다고 한 말이었고 공상수는 귀담아 들었다. 마음 어딘가에 쌓인 만년설 같은 것을 녹이는 소리였다고 한다.
부모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유년의 상처가 깊은 상수에게 인간의 삶이란 옷을 입는 것과 같다는 조 선생의 말을 가슴을 뛰게 했을 것이다. 가슴 한켠에 엄마와 친구의 죽음을 묻고 있어서 얼음처럼 차가웠던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는 조 선생의 조언은 그네 끝에서 방황하던 상수를 출발점으로 이끄는 인력이 작용하는 시점이 되었을지 모른다. 기계라는 것, 미싱이라는 것, 물건을 사고파는 일에도 그런 ‘의미’랄까, ‘본질’이랄까 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경애.
사랑이 시작하는 과정은 우연하고 유형의 한계가 없고 불가해했는데, 사라지는 과정에서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알리바이가 그려지는 것이 슬펐다. 그렇게 소멸은 정확하고 슬픈 것이었다.
육년간의 연애가 끝이 나야한다면 그건 세속의 셈법이 아니라 사랑본질의 것, 슬프게도 그것이 갖는 한계이기를 원했다. 적어도 경애에게 이별을 통보할 때 산주는 경애의 선배이기도 한 그 여자를 선택하면서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어, 라고 정확하게 이야기했으니까. 경애가 왜, 왜 그런 일이 벌어졌지, 라고 묻자 그렇게 되었어, 좋아하게 되었어, 라고 다시 말했다. 내가 너를 우연히 좋아한 것처럼 그런 일은 그렇게 벌어졌어, 라고.
분명 사랑에는 시작도 끝도 예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모호함의 시작은 늘 이유가 없다. 모든 것, 또는 이유 없음의 공통분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모두 다른 사랑을 꿈꾼다. 그 무형의 실체 앞에서 자신만의 특별함을 엮으려 한다. 그러나 대단할 것 같던 그 사랑도 소멸함에는 분명한 이유들이 모호함을 벗고 드러난다. 이별의 통보절차를 거친 선주를 놓지 못하고 방황하는 경애는 선주에 대한 기득권을 인정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좋아했던 물리적 시간보다 곱절의 시간이 흘러야 그 사랑이 퇴색된다던 친구의 말처럼 경애에게 이별이라는 척력斥力으로 가는 시간이 필요했다.
끝장난 연애를 미화하기 위해 기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상수는 경애에게 충고한다. 그러나 경애는 스스로 그네를 멈추지 못하고 ‘산주’라는 추를 달고 끊임없는 진자운동을 한다. 경애 스스로 소멸의 시간이 될 때까지 속력을 높였다 줄였다, 최고점과 최저점을 몇 번이고 왔다갔다, 기력이 다해야 놓아줄 수 있음을 상수는 모르기에 시소 타듯 최고점에서 최저점의 나락이 되면 끝낼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섣부른 판단을 했을 것이다.
언어의 유희
오늘이 왜 어려워?
오늘을 넘겨야 하니까 어려워.
오늘을 넘긴다는 것은 뭐야?
오늘을 견딘다는 것이지.
오늘을 견딘다는 것은 뭐야?
그건 오늘은 사라지지 않겠다는 거야.
오늘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뭐야?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거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건 뭐야?
내일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거야.
내일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건 뭐야?
내일은 못 견딘다는 것이지.
내일을 못 견디면 어떻게 되는데?
내일을 넘길 수 없게 되지.
내일을 넘길 수 없으면 어떻게 해?
그러면 …… 쉬워질 수도 있다는 거야.
“네 서방인지 남방인지 걸인 하나 내려왔다.” 엄마 월매의 한마디는 희망이 사라지는 상황으로 슬픔을 극대화시키는 장면으로 내게 남아있다. 어린 상수에게서 엄마가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다르게 아주 차가워지는 것. 엄마에게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며, 내쳐짐을 각오하는 마음.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상상을 하지 않는다. 그 대상이 엄마일 경우에 아이는 감히…. 그런데 너무도 덤덤히 말하는 엄마의 부재를 어린 상수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독특한 상수의 버릇들은 언어유희처럼 어두운 마음자락을 애써 다르게 표현하려고 ‘언니는 죄가 없다’며 스스로의 면죄부를 통해 위로를 찾았는지 모른다.
조 선생의 집에 갔을 때 경애는 자신의 경험으로 조 선생의 집이 늙어감을 느꼈다. 엄마랑 오래된 집에서만 살아봤기 때문에 젊고 싱싱한 새 집보다는 늙고 낡은 짐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집도 늙은 아파트다. 처음 이사할 때 전 세입자가 주인에게 말해서 도배, 장판 등을 새로 바꾸고 들어오라고 했다. 2년만, 잠깐만 머문다 생각하고 그냥 들어왔다. 벌써 15년이 되어간다.
집이 변해가는데는 외부의 영향보다는 내부의 소진이라는 맥락에 동의한다. 그러나 나의 성격이 집은 편하면 된다는, 편히 쉬는 공간이 주목적이 되는 나의 생각은 그래서 늙어가는 내부의 소진을 덧없이 보고만 있다. 씽크대가, 수도꼭지가 곳곳에 환갑을 넘어선 듯하다. 그럼에도 병원 가는 것을 지독히 싫어하는 주인을 닮아서인지 입주 때 모습 그대로 늙어가고 있다. 목주름처럼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벽지를 보며 한번쯤은 추억위에 새로운 기억을 덧칠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을 때가 있다. 그러나 스스로 미싱을 팔면서도 의미, 본질을 분명히 믿던 조선생의 조언이 내게도 스며들었다 믿고 싶어졌다. 집도 본질에 어울리는 편히 나이듦이 최선이라고.
사람마음 다 똑같다며 인간을 걷어내지 마라는 조 선생의 조언은 내내 머릿속을 헤집었다. ‘인간을 걷어내지 마라…….’
누군가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은 그 사람과 깊은 유대를 맺거나 내가 그 사람을 좀 안다는 자부심을 얻는 것과는 다르게 무기력해지는 것이기도 하다는 상수의 말처럼 누군가의 상처에 대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없다는 것은 ‘무기력’임을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타인의 상처를 안다는 것과 들여다본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지 않을까…. 가십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에 타인들은 상처를 알게 될 것이지만 나의 거리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상처를 들여다 본 공유자들이 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어둠의 한계
경애의 머리 삭발을 위해 찾아온 엄마가 이발기로 머리를 정리하다가 정수리 근처에 손을 올렸다. 숨골이 있었는데 다 닫혔다고, 민머리는 아주 애기 때 보고 오랜만이라고 한다. 애기 때 숨을 쉬면 여기 뼈가 열려서 숨 쉬는 게 느껴졌다던 엄마. 왜 그런 게 닫혔는지 궁금해 하는 경애는 한번은 머리 숨으로 살고 한번은 가슴으로 쉬면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
사람이 어떤 시기를 통과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궁금해 하며 ‘나아간다’라는 느낌이 가능했던가, ‘견뎌낸다’라는 느낌만 있지 않았나, 묻는다.
E와 지냈던 물리적 시간에서 나아가기보다는 견뎌내기 위해 지나온 어떤 시기를 경애는 머리 숨과 가슴 숨으로 살았을 것이다. 상처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머리 숨이 기억하는 나아가야하는 주체와 가슴 숨이 추억하는 견뎌내야 하는 객체가 서로 공유하는 교차점에서 곪아버린 상처라고 말하고 싶다.
자음과 모음으로 무수히 만들 수 있는 낱말을 두고도 아무 말을 조합할 수 없는 경애의 단어가 공중으로 떠밀려가는 이유일지 모른다. 나 많이 아프다, 슬프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미사여구 없이 담담한 문체들과 마주하는 상처를 보면 오히려 견디고 있는 문장들에 우리는 가슴이 더 아프다. 지나가기 위해서는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는 틈으로 들어오는 사물의 흔적을 통해 마음이 너무 강하게 움직여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지해 있다는 경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번 써본 마음은 남지만 안 써본 마음이 어렵다고 했듯이 경애, 상수, 조 선생을 통해 우리는 한번쯤은 상처도 추억도 써본 마음으로 남는다.
어디로 가든 다시 돌아올 곳이 있다는 사실은 중요했다. 아무리 바닥으로 내려가는 듯해도 최후의 낙하점은 있어야 다시 딛고 올라올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기다림이란, 그렇게 고결하게 기다려야 할 것이다. 자신을 돌보며 상대가 원하는 나의 모습으로, 내가 원하는 시간과 모습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모습과 시간으로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이란, 한 발 한 발 상대를 향한 나아감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나의 인력이 미치는 거리에서 예를 갖추고 경애의 마음으로, 경애를 기다리고 있을 상수의 모습에 나는 그를 응원하게 된다.
작가는 곳곳에 중의적 표현을 숨기고 있다.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느끼게 하는 묘한 힘이 전해졌다. 쉼표가 그 호흡을 대신하고 있다. 시소가 아닌 그네였다는 작가의 표현에서 나는 스스로 몸을 움직이며 놀았던 그 놀이기구가 아닌 삼인칭 대명사 ‘그네’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듣는 이에게 가까이 있거나 듣는 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그네들을 향한 작가의 허구성은 허구성이 아니었다. 짙은 내면의 진실성이었다. 아픈 것을 대체할 다른 말은 없었다는 경애의 가슴 숨이 전하는 말 앞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가며, 어떤 사회를 꿈꿀지에 머리 숨으로 받아야 할 것 같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경애하는 마음으로 본다면, 아픈 것을 대체할 말을 찾지 못한 경애를 지나치지 않고 마주할 듯하다. 서로 시소를 타면서.
“미안해, 나는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아. 그래서 눈을 네가 있는 곳에 먼저 보낼게.”
늦지 않았음을, 늦었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하고 있을 E의 그리움을 그네가 아닌 시소로 마주앉아 있을 상수와 경애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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