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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현실과 콩깍지>의 줄거리:
연애 기간 중사랑의 콩깍지는 남자의 경우 일 년 반이면 절반이상에게서 벗겨진답니다. 그러나 여자는 많은 경우 무려 3년이나 지속 된다는군요. 보통 말합니다. 콩깍지가 씌우면 현실을 못 본다고. 그렇습니까? 도대체 이 때의 현실이란 어떤 현실인가요? 실상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현실이랄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 유일한 현실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뿐이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들이 일컫는 모든 세상속 현실은 단지 콩깍지일 뿐입니다.
현실과 콩깍지
(사무엘상 13:1~23)
5.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 치매
6.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7.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더라
8.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9.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10.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11.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오늘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현실과 콩깍지>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현실과 콩깍지’
콩깍지 씌운 경험이 있으십니까? 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져 봤다면 알 것입니다. 천사처럼 보이던 상대방이 악녀처럼 보이고, 세상에서 가장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웠던 남자가 천하의 몹쓸 놈으로 보입니다. 남자의 경우에는 3개월만 지나도 1/3가량 콩깍지가 벗겨지고 1년 반이면 절반 이상이 벗겨진다고 합니다. 여자는 3년까지도 콩깍지가 간다고 하는데 신실성에 있어서는 여자가 월등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눈에 콩깍지가 씌웠다’라는 속담은 ‘앞이 가려서 상황판단이 전혀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장성한 딸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 딸이 열애중이고 결혼까지 하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청년의 집안이 무척 가난하고 제대로 된 직장도 아니고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부모의 눈에는 외모도 썩 마음에 들지 않고, 아무리 말려도 딸은 청년과의 결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친척들에게 ‘우리 딸의 눈에 콩깍지가 씌워서 사람 볼 줄 모르고 아직 사회 경험이 적기 때문에 현실을 모른다.’고 얘기합니다. 할아버지까지 나서서 손녀를 데리고 ‘결혼은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럴 경우에 소위 어른들이 말하는 현실은 대동소이하게 재력에 관한 것인데, 이러한 재정적 조건에 대한 절실한 깨달음을 갖게 된 부모님들은 그 딸과는 다르게 현실을 아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재정적으로 여건이 갖추어져야 결혼이 가능하다고 보는 이 부모님들도 현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콩깍지가 씌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부모님들은 돈의 콩깍지가 씌운 것입니다. 재정적으로 형편없는 청년을 남편감으로 고른 딸은 현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 딸은 그 청년을 현실로 선택하고 있는 것이죠. 결혼의 현실을 알게 되어서 나중에 후회해도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선택이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즉 청년이 아닌 다른 존재나 다른 사실을 현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몰라서 청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청년이 딸에게는 현실인 것입니다.
사회 경험이 적다고 해서 현실을 모를 수는 없는데, 이러한 말은 현실을 모르는 무지로부터 나오는 생각입니다. 딸은 현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부모가 선택한 현실을 딸은 선택하지 않은 것이 정확합니다. 사회적인 경험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사람은 누구나 선택된 현실을 삽니다. 현실은 지금 현재 내 마음에 가장 빛나게 나타나서 시선을 빼앗고 꽉 채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현실로 삼고 있느냐는 질문은 가능하지만 현실을 모른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현실을 몰라서 ‘눈에 콩깍지가 씌웠다’는 속담을 한탄조로 말할 수 있는 단 한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지구 위에 사는 사람들을 보실 때에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의 상황을 현실로 살고 있는 한 참 현실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콩깍지가 씌워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딸을 향해 콩깍지가 씌웠다고 하지만 돈이 있어야 한다는 부모도 콩깍지가 씌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한 참 현실은 살아계신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현실은 없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이 현실입니다. 세상의 상황이 내게 현실로 느껴지더라도 그것은 콩깍지가 씌운 것입니다.
좀 더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지금 암에 걸린 사람이라면 이 사람의 현실은 암과의 투병생활이고, 또는 사업이 망해가는 사람이라면 망해가는 사업의 상황을 현실로 봅니다. 이러한 현실 의식에 대해 이의를 달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안타깝게 보십니다. 암의 콩깍지가 눈에 씌운 것이고 현실이 아닙니다. 암이 걸린 육체보다 하나님이 더 먼저 계셨고 망해가는 사업보다도 하나님은 먼저 계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더 먼저 현실이 되지 못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내가 하나님보다 나중에 생긴 내 육체의 암이나 망해가는 사업을 현실로 선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암이라는 육체에 콩깍지가 씌웠고, 망해가는 사업에 콩깍지가 씌워서 그것을 현실로 착각하면서 살아간다고 한탄하십니다.
이런 극단적인 예들을 성경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풍랑 속에서 주무시는 예수님, 돌에 맞아 순교하는 스데반 집사님, 죽도록 맞고 던져진 빌립보 감옥에서 기적을 경험하는 바울과 실라, 참수형이 결정된 전날 밤에 천사가 와서 걷어차도 잠을 못 깨는 베드로, 모두 극단적으로 위험하고 절박한 세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현실로 삼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이렇게 온전한 신앙의 모습을 당장 내 모습으로 삼을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한 밤 중의 바다에서 집어삼킬 폭풍우를 만나면 세상에서는 아우성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은 해야 합니다. 폭풍은 현실이 아니라 콩깍지가 씌운 것일 뿐입니다. 살아계셔서 지금 이 현장을 보고 계신 하나님이 현실이신데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 사실을 인정할 때에 유전 죄를 가지고 태어난 소위 자연인의 삶으로부터의 틈새가 벌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현실로 살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 믿음의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왕으로 선택되어 등극한 사울이 콩깍지 시험에서 탈락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절박한 상황을 만드시자 그 상황이 콩깍지가 씌워지면서 마음에서는 하나님이 현실이심을 놓쳐버리고 맙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왕의로서의 가계가 끝날 것임을 사무엘을 통해 예언하게 하십니다.
사울이 왕이 되어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이스라엘의 영역에 들어와 영향력을 미치는 블레셋을 척결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서 북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게바에 블레셋의 수비대인 영문이 있었는데 그 진 친 곳을 이스라엘이 치게 됩니다. 블레셋이 그 이야기를 듣고 대대적인 정벌 전쟁을 준비하여 군대를 파견합니다. 바다의 모래처럼 많고 마병과 병거 등을 갖추어서 이스라엘을 진격하기 위한 진을 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은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흩어지는데 그 상황을 보자 사울의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일주일 안에 오겠다는 사무엘을 기다리다가 늦어지자 사무엘 대신 번제와 화목제의 제물을 가져다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사무엘이 도착하게 됩니다. 사실 번제 드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사무엘이 늦은 것도 아니었지만, 마음이 급해진 사울의 주관적인 감정이 표출된 행동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사울의 왕권이 단절될 것을 예언하게 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사울의 흔들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현실로 택할지 눈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혼비백산 하는 상황과 블레셋 군사들의 위엄과, 늦어지는 사무엘을 현실로 택할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현실은 우레를 동반한 폭우처럼 나를 압도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현실이 살아계신 하나님인지 눈앞에 펼치진 상황인지를 묻고 계십니다. 블레셋의 어마어마한 군사들이 진을 치자 그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치고 오겠다던 사무엘은 늦어지고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사울은 주어진 물리적인 상황의 콩깍지에 씌워버립니다.
물리적인 상황이 콩깍지가 되어서 현실로 느끼고 마음에 현실감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버려지고 종교의 하나님의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종교적인 존재가 될 때에 물리적인 상황을 현실로 느끼는 사울의 종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하나님을 부를 뿐입니다.
현재의 상황이 현실이 되어서 번제를 드리는 종교 행위를 하게 되는데 번제가 기독교와 타 종교(불교, 힌두교, 무속신앙 등)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절박한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인간이 똑같습니다.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람이었던 사울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불교였다면 불상 앞에서 절을 했을 것이고 무속인은 굿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선민을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선민이었다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기독교를 허락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행위가 선민을 구별 짓는 것이었다면 불교도 힌두교도 이슬람도 무속신앙도 괜찮습니다. 굳이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의 제사들이 신의 마음을 달래서 내가 현실로 삼는 것들을 해결해주길 바라는 것이라면, 이스라엘 선민의 제사는 유독 나의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콩깍지가 씌워서 번제를 드리는 것은 일반 종교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예배는 세상의 상황이 콩깍지가 된 교인들에게서 눈에 덮인 콩깍지를 떼 내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오늘 사울의 제사처럼 되어서 불상 앞에서 절하는 것이나 무당이 굿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어느 일부 교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통 장로교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장로교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목사 안수까지 받았습니다만 장로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노골적으로 세상에 복과 형통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노골적으로 복과 형통을 추구하는 사람들보다 나은 점이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교단을 욕하는 모습이 더 치사하고 비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현실이 되지 않으면 모든 종교 행위는 다 악입니다. 선민은 하나님을 현실로 사는 사람들이지 종교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의 신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살 때에 하나님의 이름은 종교의 신으로 전락해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종교의 신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헛되게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번제단은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현실이시기 때문에 세상을 콩깍지 씌운 상황을 죽이는 곳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창17:1절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현실이시고 할례의 언약의 의미도 같습니다. 어떤 급박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할례를 보면서 내 현실은 이 급박한 상황이 아닌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도 수1:8~9절에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라’고 하셨던 것은 율법을 묵상함으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현실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을 치러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현실은 전쟁이 아닌 하나님인 것을 잊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전쟁의 콩깍지가 씌운다면 하나님을 종교의 신으로 전락시켜 버릴 수밖에 없는데 그런 하나님은 함께 하실 수가 없고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마치 “톰과 제리”라는 만화영화 같습니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서 선반에 올려놓고 앞발로 가지고 놀다가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댑니다. 그러면 고양이의 얼굴이 태산같이 보이고 쥐가 공포에 질립니다. 이 상황을 그대로 옮기면 이 지구를 하나님이 바로 앞에서 보고 계신 것입니다. 지구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구를 보고 계신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내가 지금 암에 걸렸고 사업이 망하고 자식이 문제일 때 이보다 절박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아무리 절박하고 베드로처럼 내일 참수당할 처지에 처했더라도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폭풍우가 현실이 아닙니다. 그것을 현실로 느껴서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며 벌벌 떨면서 진땀을 흘리며 잠을 못자는 것은 그 상황에 콩깍지 씌웠을 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현실로서 살 수 있을까요? 이 세상 속에는 내 현실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 상황들은 하나님이 보시며 하나님의 현실인 것이지 내게는 현실이 아니므로 하나님께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꾸 마귀는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의 유전 죄가 이 세상의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고 내 마음을 지배하려고 할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번제로 내가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므로 어제 말씀대로 하나님께 눈멀어서 세상 콩깍지는 벗겨지고 하나님의 콩깍지가 씌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현실로 보이는 하나님의 콩깍지가 진리 안에 서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세상 콩깍지를 벗으세요. 세상에는 내가 마음을 줘야할 현실이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실 수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콩깍지 벗겨진 삶을 하루하루 참 현실로 살아가실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세상이 현실인 척하고 내게 덮어씌워지는 순간을 극복함으로 참 현실이신 하나님의 삶만을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