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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경옥천군향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곽봉호
옥천읍 죽향리에서 전보현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20세인 1920년에 이미 납세불문납문서의 배포 문제로 일제에 투옥되어 1년의 옥고를 치뤘으며 29세에는 조선총독부를 두 번이나 폭파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1963년에는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전좌한(全佐漢) 의사 의사는 구한말 풍운이 감도는 광무 3년, 서기 1899년 4월27일 옥천군 옥천읍 죽향리 64번지에서 아버지 전보현씨와 어머니 문화류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옥천에서 세거한지 600여년이나 되는 유서깊은 옥천전씨로서 고려말 조선 개국초에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절의를 굽히지 않고, 두 임금의 신하되기를 거부한 당대의 거유 전동의 17대손으로, 그의 조부 재신과 종조부 재민(전흥규)은 수천 석을 하던 당대 이 지방의 거부였다.
의사의 집안은 이 지방의 토호로 수천 석을 하던 거부였으나 조부 재신이 일찌기 광산에 손을 대어 많은 재산을 날렸다 한다. 개화기에 일찍 눈을 뜬 조부 재신은 우리나라 광산원이 외국 자본에 수탈되는 것을 안타까워 한 나머지 우리 손으로 광산을 개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경제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일제는 광산주에 대한 교묘한 행정적 압력, 광권을 탐낸 일본인들의 노골적인 방해 공작, 판로의 문제, 광산에 대한 지식 부족 등으로 파산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한다.
이로 인해 그의 부친은 일인들에 대한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갖게 되었다 한다. 의사 집안이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자 종조부 재민(전흥규)이 의사가 어려서부터 의사의 집안을 후원하게 되었다. 의사는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총명하여 이미 서너살 때 그의 종조부 재민을 통해 천자문과 동몽선습 등을 깨쳤다 한다. 또 4~5세때부터 가숙에 들어가 사서오경을 독파하여 온 동네에 신동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한다. 의사가 너무도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게 성장하는 지라 그의 종조부 재민은 항상 옆에 두고 친손자처럼 보살폈다 한다.
친구들에게는 정의감이 불타고, 의협심이 강한 아이로 비쳐졌으며, 끼니도 때우기 어려운 이웃 친구들을 자기 집에 부모 몰래 불러 들여 식사를 제공하는 일이 잦았다 한다. 그의 종조부는 이러한 의사의 호방한 성격에 큰 기대를 걸고 장차 가문을 일으킬 인물로 성장하리라 믿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한다. 구한말 어지러운 시대에 개화에 일찍 눈을 뜬 종조부는 의사를 융희 4년(1910년, 명치 43년) 4월6일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에 입학시켜 정규교육을 받게 하였다.
의사는 1914년 3월25일 옥천공립보통학교 4개년 과정을 정지용 시인과 함께 4회로 졸업하자 그의 종조부는 의사를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서울의 영화학당에 유학시켜 중.고등과를 수료하도록 도와주었다. 의사의 애국심은 이때부터 차츰 눈뜨기 시작했다. 전좌한 의사는 20세를 전후하여 스스로 가슴속에서 치솟는 민족사상의 투혼이 행동하는 역사인으로서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융희(1910년) 4년 8월29일 합방 후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헌병경찰제도에 의한 무단 정치를 하게 되었는데, 전국에 헌병과 무뢰한들로 구성된 2만의 헌병보조원을 배치하여 총독정치에 비타협적인 한국인에게 불령선인(不逞鮮人-못된 조선사람이라는 뜻으로 일제가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불령선인'이라 부르고 독립운동가들을 철저히 감시하였다. 지금의 사상범에 해당됨)이라 하여 하찮은 언동도 검거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무단 정치 아래에서 한국 경제를 마음대로 요리하기 위하여 옛 경제 체제를 철저히 파괴해 나갔는데, 경제 변혁중 가장 커다란 사건은 일본인으로 하여금 한국인의 토지를 강점케 하는 1910년부터 실시한 토지 조사 사업이었다. 1912년 반포된 이 토지조사령에 의하면 토지소유주는 일정기간 안에 토지 조사국장에게 신고함으로써만 그 사유권을 인정받게 하였다. 그러나 민족적 감정으로 말미암아 총독부에 신고하지 않은 한국인이 많았는데 의사의 부친 전보현씨도 자신의 부친 재신의 광산 개발문제로 일본인들과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의사의 부친 보현은 민족적 감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까지 내 땅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땅인데 새삼 일인들에게 자기토지를 신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토지를 신고하지 않은 전답이 총독부에 몰수당하자 그 억울함과 부당성을 일제에 항변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부친은 헌병대에 끌려가 모진 매를 맞아 한때 폐인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한다. 부친의 혹독한 고문이 의사를 조국의 독립운동에 행동하는 역사인으로 나서게 하는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이다.
전좌한 의사는 부친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 고향의 친구들과 규합해 비밀리에 청년회를 조직하고 일제에 대항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의 종조부 재민에게 3.1독립운동 이듬해인 1920년 12월 중순경 경성상업실업단이라는 비밀 지하독립운동 단체로부터 '명령'이라 제목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정서'라고 서명한 '납세불납문서'가 도착하자 그는 낮에는 자기 집 골방에서 친필 복사하고, 밤에는 이집 저집을 돌면서 남몰래 배포하였고,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옥천읍 일원에 게시하며 조국의 독립운동을 꾀하였다.
전의사는 당시 약관 21세로 한참 끓어 오르는 민족에 대한 열애와 독립에 대한 갈망은 누구보다도 강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정서의 명령은 의사의 목마른 가슴에 기름을 부어 넣어 항일의 봉화불을 활활 타오르도록 만들었다. 청년회 친구들과 밤마다 이집 저집 돌면서 자신들이 쓴 납세불납 문서를 배포할 때 신바람이 났던 것이다. 옥천 경찰서에서는 이 사건의 주모자를 찾기 위하여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전의사와 청년회 동지들은 교묘히 헌병들의 눈을 피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배포하기 위하여, 옥천군청에 근무하는 임선재씨와 의논하여 1920년 12월26일 비밀리에 군청 숙직실에서 군청 등사판으로 동 문서를 인쇄하였다.
1921년 1월6일 의사는 등사 인쇄한 납세불납문서를 일본헌병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하여 이원역 앞 우체함에서 김동시 등 수십명에게 전국적으로 발송하였다. 또 1월9일 밤에는 옥천군청 앞 게시판 및 각 공공기관 담벼락에 대담하게 게시하고, 그날 밤으로 청년회 동지들과 옥천시내 일원을 돌면서, 이규연씨 외 다수의 집에 또다시 배포하여 독립운동의 기운을 옥천군민에게 알리고 납세불납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옥천 경찰서 헌병대에서는 더욱 혈안이 되어 현상금까지 걸면서 주동자 체포에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1921년 1월 하순경 전좌한 의사와 그의 동지 임선재가 체포되게 되었다. 의사와 그의 동지 임선재는 1921년 2월9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나라 잃은 백성이 나라를 되찾겠다는 것은 당연한 주장이오, 나라를 강탈한 오랑캐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는 것이 어찌 죄가 될 수 있는가?" 반문하며 이에 불복하였다. 1921년 3월19일 경성복심법원 형사부 재판장 조선총독부 판사 길전평치랑은 일심에서와 같이 출판법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의사와 그의 동지 임선재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대로 징역 1년을 선고하였다.
전좌한 의사와 그의 동지 임선재는 이로 인하여 1년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게 되었다. "그렇게 외쳐 보고 싶던 대한독립만세를 못 불러보고 감방 신세가 됐으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더군"하며 그때의 심정을 토로하던 모습에서 우리는 그 당시 의사가 얼마나 애타게 잃어버린 민족정기와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를 열망했는지 엿볼 수 있다. 1922년(대정 11년) 초봄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정서에서 보낸 납세불납문서 배포문제로 의사와 임선재 동지는 온갖 고문을 겪으면서 대전형무소에서 1년여를 보내고 출옥하게 된다.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사상의 싹을 일찍부터 제거하기 위해 철저하게 탄압하고 가혹한 형벌을 서슴지 않았다.
가혹한 채벌과 고문으로 탈진되어도 조국애로 끓어오르는 의사의 의지는 굳어만 갔다. 포기할 수 없는 조국의 독립운동. 이것은 의사에게는 신앙이요, 생명이었다. 이제 의사는 불령선인이라 낙인찍혀 의사의 일거수일투족은 일제 헌병의 예리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행동하는 역사인으로 끓어오르는 조국애의 독립운동을 막을수는 없었다. 의사는 2년 가까운 세월을 일제 헌병의 감시하는 눈을 피하기 위해 관망하면서 자택에서 칩거하기 시작했다. 정세의 변동을 예리하게 바라보며 장차 재기할 뜻을 펴볼 준비를 은연중 갖추고 있었다. 의사의 가족들은 의사에게 더이상의 독립운동을 포기하도록 종용하며,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오기를 고대했다. 그러나 의사는 온갖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달과 가족을 포기할망정 조국의 독립운동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의사는 이원면 강청리에 사는 구한말 의병으로 활약했던 김응선 동지를 만나 구국 운동을 논의하였다. 김응선 동진는 전좌한 의사보다 17년 연상이었지만 이들은 곧 구국운동의 동지로서 뜻을 함께 하고 독립운동에 나서기 위한 암중 모색을 하게 된다. 의사와 김응선 동지는 "무력에 의해 빼앗긴 나라는 무력 투쟁에 의해서만 되찾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일제 헌병의 감시를 피해 서로의 집을 상호 방문하여 숙의를 거듭하고 우국충정을 토로하며, 울분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1923년(대정 12년) 1월,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투탄 사건, 9월 일본에서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자 무고한 우리 동포들을 수천명씩이나 무참히 학살한 사건, 1924년 1월 의열단원 김지섭 의사의 동경궁성 이중교 투탄 사건 등, 잇달아 일어난 투탄 사건이나 민족적 울분을 터트리는 일제에 의한 동족의 학살 사건은 의사와 김응선 동지를 행동하는 역사인으로 민족과 역사 앞에서 다시 앞장서도록 고무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폭탄을 만들자' 두 의사는 폭탄만 가지면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면밀한 계획은 암암리 착착 진행되기 시작했다.
폭탄을 만들기 위해 옛 문헌을 연구하고 도면을 설계하고... 의사와 김응선 동지는 더욱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희망이 있으면 누구나 힘이 솟게 마련이다. 의사와 김응선 동지는 모든 행동을 조심하면서 비밀리에 하나씩 하나씩 준비를 하였다. 두 의사는 1925년 8월말경 전북 금산군 군북면 상곡리 이견국 집에서 정석조로부터 폭탄제조에 필요한 약품인 '구로루산 가리움' 5병을 매입, 9월 초순경에는 김응선 동지가 충남 서천군 종천면 지암리에 삭고 있는 매제 정원득을 찾아간다. 정원득은 서천면 지석리 소사조수리조합 공사장에서 '다이나마이트'로 암반의 발파작업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매제를 통해 다이나마이트를 얻고자 함이었다.
김응선 동지는 한달 가까이 매제 집에 머물면서 정원득이 공사장에서 몰래 빼돌린 다이나마이트 10개, 뇌관 10개, 도화선 1장 5척을 입수하고 매제에게 수고비로 30원을 주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 했던가. 김응선 동지가 귀향길에 이리역에서부터 동승한 계의산이란 창의단 소속의 새 동지와 만나게 되었다. 계의산은 이리역에서 대전까지 합석하여 오면서 서로 인사를 하고 자기 경력을 대화하던 중 우연히 상대방이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쉽게 친교를 이루어 구국의 동지로 함께 일할 것을 다짐하게 된다.
창의단은 1919년 7월, 러시아령 연추에서 의병 출신 및 국민회의파를 규합하여 조직된 단체로 지도자는 이범윤 선생이며, 단장은 이범모이었다. 이 단체는 러시아령 연해주와 중국의 동만주에 항일 무장 기지를 건설하고, 국내 진공을 통하여 독립을 쟁취하려고 의병 출신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이였다. 창의단은 두만강 국경 함경도의 무산, 동만주의 간도 지방 등지에서 활약하면서 독립 군자금을 모금하여 수백명의 군사를 훈련시키고, 한편 총기를 구입하여 무장을 갖추고 국내에 잠입하여 요인 암살, 중요시설 파괴 등을 하였다.
계의산과 김응선 동지의 만남은 이들에게 새바람을 불어 넣었다. 전좌한 의사와 김응선 동지는 곧바로 창의단에 가입함과 동시에 창의단의 일원으로서 자기들이 준비중인 폭탄의 밀조가 장차 경성시내 일제 각 관공서에 투탄되어 일제의 침략을 분쇄하고 한국인들에게는 독립사상을 선전하며, 창의단의 군자금 확보에 기여할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의사와 김응선 동지는 비밀리에 창의단과 연락을 취하는 한편 폭탄 제조에 더욱 바쁜 일정을 보내야만 했다.
이제 폭탄 제조에 필요한 재료는 모두 준비되었다. 전의사는 자기가 직접 고안한 도안을 가지고 비밀리에 옥천읍 삼양리에서 유기그릇을 만들어 파는 배석규를 찾아가 도면을 근거로 놋쇠제 용기 6개를 주문했다. 거금 46원70전을 주기로 하고 철저히 비밀을 지킬 것을 당부하였다. 이 놋쇠제 용기는 사제 폭탄의 표피로 10월말경 전의사에게 인도되었다. 의사와 김응선 동지는 전의사의 집 골방에서 폭탄 6개를 11월 초순경 제작 완료하고, 곧바로 인적이 드믄 옥천군 이원면과 충남 금산군의 경계에 위치한 진위산 속에서 폭발 실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 위력이 예상 외로 훌륭하였다.
이들은 두손을 맞잡고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장차 이 폭탄이 경성시내 적의 심장부에 투탄되던 날, 잠자고 있던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일깨울 수 있는 자명종이 될 것이요, 일제의 침략 근성에 치명타를 가할수 있는 폭음이 될 것이니라. 의사와 김응선 동지는 이 성공 사실을 창의단에 보고하는 한편 폭파 장소를 물색하게 된다. 의사 일행은 폭파장소로 조선총독부, 경성부청, 조선신궁,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 다섯곳을 선정하고 창의단에서 경비를 송금해오는 즉시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폭파에 가담할 단원들이 만주로부터 들어오기 어려우므로, 김응선 동지가 국내에서 뜻을 같이 할 동지를 확보하기로 하고, 경성으로 무기를 반입하는 일, 거사에 가담할 단원의 선정 등을 의사와 김응선 동지는 치밀하게 숙의하였다. 1926년 1월27일 창의단으로부터 전의사에게 거사 자금이 송금되어오자 김응선 동지에게 이를 인도하고, 창의단의 지시를 받기 위해 의사는 먼저 상경하여 계의산 동지와 거사계획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한편 김응선 동지는 같은 마을 강청리에 사는 송암우 청년과 이원리에 사는 정명옥과 김운용을 경성구경 시켜준다고 포섭하여, 1월28일 이원역에서 출발하여 그날밤 용산역에 도착하여 계의산의 마중을 받았다.
다음날 1월29일에는 시내구경을 시켜준다는 명목으로 폭파장소로 선정된 조선총독부, 경성부청, 조선신궁,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을 실지로 답사하고, 청진동 진일여관에 일행은 투숙하였다. 1월30일 또다시 폭파장소를 재확인한 뒤 광화문통 중국 요리집 광흥원에서 최후의 기념회식을 마친 후 계의산 동지는 창의단의 거사계획을 일동에게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거사일은 1926년 1월31일 새벽으로 정하고 숙소인 진일여관으로 돌아왔다. 계의산과 김응선 동지가 전좌한 의사를 만나러 간 직후였다. 불행하게도 이들은 일제 헌병대에 사전에 탐지되어 급습을 받았다.
이에 송암우, 김운용, 정명옥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고, 김응선과 계의산은 만주의 봉천으로 도주하였다. 전의사는 거사계획이 탄로났음을 알고, 매제 신화수집 골방으로 피신하였다. 창의단의 폭파 계획이 불행히도 거사 직전에 일제 헌병대의 치밀한 수사망에 의해 다수의 동지들이 체포되어 수포로 돌아가자 전의사는 경성의 매제 신화수집 골방 등에서 4개월을 일제의 수사망을 피하며 은신하면서 실패에 따른 좌절감을 되씹으며 고독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얼마나 피땀을 흘리며 치밀히 준비했던 계획이었던가? 일순간에 수포로 돌아가다니... 더구나 동지들이 체포되고, 동지 김응선과 계의산은 만주로 도주하고 자기만 홀로 남아 경성의 매제 집 골방 등에서 일경의 예리한 수사망을 피해야 하니 처량하고 분통터지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매제 신화수로부터 재기하도록 하라는 권고를 받고 의사는 분연히 행동하는 역사인으로 다시 나설 기회를 엿보게 된다. 다행이 매제 신화수는 당시 북만주로 망명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며 명망을 떨치고 있는 양기탁 선생과 비밀리에 통래 해오던 사이였던 것이다.
1926년 4월7일 의사는 북만주 길림성에 망명해 있는 양기탁 선생을 찾아가기 위해 매제 신화수의 소개장을 가지고 국경을 넘어 자기 뜻을 펼 중원의 만주로 교묘히 망명하였다. 전의사를 만난 양기탁 선생은 의사를 구국의 동지로서 반갑게 맞이하였다. 양기탁 선생은 창의단의 거창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못내 안타까워하면서, 독립운동의 거목으로 성장한 젊은 청년 전의사에게 좌절하지 말고 재기할 것을 종용한다.
또 독립운동가들의 대부인 양기탁 선생으로부터 원참의부 소속의 이응서를 소개받게 된다. 당시 이응서 동지는 원참의부 군법국장이며 상해임시정부 민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응서 동지가 속해 있던 참의부는 1923년 8월 만주의 집안현장백산을 거점으로 상해임시정부와 연계하여 백광운, 최석순, 최지풍 등 수백명의 무장 동지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창의단과 같이 무장에 의한 국내 진입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다. 의사와 이응서 동지는 곧 구국의 동지로서 친교를 이루고 혈맹을 약속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어서 이응서 동지의 소개로 남정, 김봉준 등 새로운 동지를 만나 구국을 위한 숙의를 거듭한 끝에 1926년 5월 초순경 길림성 중동철도연선 이도하자의 유해강 집에서 '조선혁명군대본영'이란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게 된다. 당시 국내 정세는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 황제가 4월에 승하하여 경향 각지에서 복상 통곡의 동요가 일기 시작하였다. 6월10일 순종 황제 국장일이 되자 6.10만세 운동이 일어나 국내 정세가 자못 불안하였다. 만주에서 의사와 조선혁명군대본영의 동지들은 국내 정세를 예리하게 바라보며 일제에 다각도로 타격을 가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숙의를 거듭한 끝에 조선혁명군대본영의 최우선 사업으로 창의단이 계획했다 미수에 그친 조선총독부 폭파계획을 재결의하고 전의사가 선발대로 자청한 것은 창의단의 동지들은 옥고를 치르고 있는데 자기만이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거사일은 우리 민족을 수탈하며 식민정치를 주도하던 조선총독부가 10월1일을 기하여 경복궁 자리에 신축한 신청사의 낙성식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선발대가 된 의사와 김봉준 동지 일행은 1926년 8월22일 이응서, 남정과 함께 중국 만주의 길림성 중도철도연선 이도하자를 출발하고, 같은 날 유수현 노변동구의 최용관 동지 집에 도착하여 4일가량 머무른 뒤, 8월26일 길성현 장가소과의 한하강 동지 집에 들려 구체적인 계획을 재수립하였다.
그 구체적 계획에 의하면 의사와 김봉준이 선발대로서 입경을 먼저하고 삼엄한 일제 경비망을 피하기 위해 경성에서 무기 은닉장소를 정한 다음, 그 사실을 이응서 동지에게 통지하면 이응서와 남정은 40~50명의 동지를 이끌고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여 비교적 검문이 소홀한 압록강변 평안북도 벽동을 건너 청천강 부근의 희천에 잠입해 있는 동지와 접선 연락을 취하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경성에 40~50명의 동지들이 선발대의 통지에 의해 잠입하여 거사일인 10월1일 새벽을 기해 조선총독부 낙성식장에 폭탄을 던져 수라장으로 만들고, 포고문을 살포하여 조선독립운동을 널리 선전하여 일제에게는 타격을 주고, 우리 백성들에게는 독립의 기운을 일깨우고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계획하였다.
선발대인 의사와 김봉준 동지는 9월4일 모젤식 권총 2정, 탄환 39발, 경고문, 군자금 영수증을 나무 과자상자에 밀폐하여 봉천에서 기차로 압록강 대안의 한만 국경 도시인 안동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압록강 국경을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일경의 검문을 무기를 휴대하고 통과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다. 의외의 국경 통과문제로 벽에 부딪친 전의사와 김봉준 동지는 안동현 대화교통에 살고 있는 이정해 동지 집에서 이틀간 묵으면서 이정해 동지의 누이동생이 신의주 모 여고에 통학하는 것을 이용하게 된다.
9월6일 이정해 동지의 누이동생의 책가방에 넣어 비밀리에 신의주에 살고 있는 이정해 동지의 처형 집에 갖다 놓도록 하였다. 이들은 곧바로 국경을 넘어와 소포로 포장하여 발송인 수취인을 가명으로 하여, 경성부 누하동 272번지 임영덕 방 김봉수 앞으로 우송시켰다. 무기와 군자금 영수증, 경고문 등을 우송한 전의사 일행은 신의주에서 열차편으로 경성에 들어와 잠입하였다. 창의단이 여관을 이용하다 일경의 검문검색으로 실패했던 것을 거울삼아 인적이드믄 가회동 뒷산에 근거를 마련하고, 선발대로서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보냈던 소포가 경성우체국에서 발각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전의사 일행은 자기들이 우송했던 물품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활동하다가 9월22일경 그의 매제인 신화수 및 이일화와 함께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전의사와 그의 동지일행이 두번씩이나 조선총독부 폭파를 계획했다가 불운하게도 미수에 그친 사건의 전말을 그 이듬해 6월부터 9월까지 당시 신문들은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다. 전좌한 의사는 1927년 8월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1931년 3월26일 출옥하게 된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 3월1일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