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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흔들리다가도 삐그덕대다가도
- 전창수 지음
[1] 언젠가 나도 말할지 모른다, 아니야, 나도, 라고
1.
어느 것 하나 관계가 중시되지 않는 것은 없다. 특히, 청소년 시기에 있어서는. 청소년 시기에 일어나는 범죄도 그렇다. 잘못된 관계, 일방적인 관계들이 청소년들의 비행을 부추긴다. 그러므로, 비행청소년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 역시 관계의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관계의 회복을 통해서 청소년은 얼마든지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이, 청소년을 "징역"이라는 일방적 처벌에 가두려 하지 않는 이유다. 그래서 청소년 시기엔 사람을 잘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청소년 시기에 어른을 잘 만난 청소년이 어른이 되어서 또 다시 청소년에게 좋은 어른이 되는 선순환은 반복될 수 있는 것이다.
2.
나는 청소년문제에 관심이 많다. 나의 청소년시절이 별로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객관적 시선으로 볼 때, 집안이 가난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모님들이 딱히 문제였다고 할 것도 없어서 아무 문제 없어 보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힘들었다. 나의 말 못할 고민들은 오히려 "고생한 거 없다"는 말에 묻혀버렸고, 그러므로 인해서 나의 심리적 압박은 극에 달했다. 소년원에 가지 않을 만큼만, 딱 그만큼만 엇나가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그러한 청소년 시절은 성인이 되어서 지속적 영향을 미쳤다. 정신적으로도 힘들었고, 그 정신은 육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행복하지 않은 시간은 꽤나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것이 내가 청소년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다. 어렸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가도 사춘기만 되면 변해버리는 아이들. 그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부모님과의 관계가 결정이 나 버리고, 또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청소년 시기에 형성된 관계의 패턴은 어른이 되어서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3.
나의 청소년 시절에 따뜻한 말 한마디, 위로의 말 한마디, 진심으로 대하는 어른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후의 오랜 방황이, 그날을 기억하며 종지부를 찍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지금도 든다. 그래서인지, 나 역시 청소년에게 또 어린아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못 건네는 어른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도 나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 왠지 모르는 셀렘까지...나는 따뜻한 말을 못 건넬 뿐이지, 아이들을 좋아한다. 청소년도! 그들에게 보다 따뜻한 마음, 따뜻한 미래를 선물하고 싶어서!
4.
청소년들에게 처벌만이 능사는 아니다. 학창시절, 성적이 나쁘다고 매를 때리는 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고 할 수만 있다면 그에 대해 반항하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특별히 혼나야 하는 이유가 아닌데도 기합을 받게 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도 그것에 대해 억울해한다.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학교 다닐 때에 용서와 관용을 베푸는 선생님이 있었다면, 나의 삶은 분명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내 선택이었다고,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고 비난한다면, 거기에 대해 반박할 생각은 없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나는 이것만은 말하고 싶다. 청소년, 특히 사춘기는 민감한 시기이며, 그 시기는 아주 사소한 하나의 계기가 사람을 망치기도 하고,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놓기도 한다는 사실을. 그 사소한 하나의 계기는 사소한 말 한마디일 수도 있고, 용서와 관용이라는 특별한 행동일 수도 있다. 사소한 하나의 행동 때문에 아이는 평생 마음의 짐을 얻게 될 수도 있으며, 그 짐은 아이가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멍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5.
청소년들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이 아픈 이유는 너무도 다양하다. 그 다양성을 존중해 줘야겠다. 그들의 자율성, 그들의 인격, 그들의 개성을 존중할 때, 비로소 한국의 미래는 밝다고 할 것이다. 그들을 마냥 억압하려 해서도, 그들을 찍어누르려고 해서도, 그렇다고 방종해서도 안 되는 어른들. 그 어른들의 삶에 나도 있다는 것이. 언젠가 나도 그들에게 말할지 모르겠다. 아니야, 나도, 라고
[2] 모두 함께 어우러져
1.
가끔은, 인생이 너무 애매하다. 이것은 이루었는데, 저것은 안 되었고, 저것은 되었는데. 이것은 한참이나 남은 인생. 그 기록을 하다 보면, 삶은 저 너머 어딘가로 어느덧 달려가고 있다.
2.
나의 인생도 자주 삑사리가 났다. 하나를 정말로 마치려고 생각하니, 나의 인생도 이렇게 많은 삑사리가 나오면서 거쳐왔구나 하는 생각. 이것도 인생이라는 것을 덤으로 얻은 이유
3.
인생이 가끔은 너무 애매해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할 때, 나의 결정을 도와주는 책들이 있고, 그 책들의 제목들은 너무도 소중하다. 앞으로도 나의 인생에 잦은 삑사리가 있을지 모른다. 그 삑사리난 인생들이 서로 삐걱대다가 어느 순간, 잘 맞아 떨어져서 아쉬움이 시원함으로, 서러움이 깨달음으로 바뀔 때, 나는 정말 지금 잘 살고 있구나, 라는 퍼뜩함으로 오늘을 살아갈 거다. 그 살아감이 내일의 나에게 보다 더 많은 응원을 하고 있을 거다.
나의 인생도 새로 시작된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그 기쁨이 모두 함께 어우러져 진실한 세상을 이뤄가는데 초석이 되어가기를.
[3] 섬김의 자세로
1.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솔로몬, 욥, 아담, 예수 그리스도, 세례 요한, 어떤 부자, 베드로, 스데반, 가롯 유다, 바울.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죽었다는 것이고, 그들의 다른 점은 사는 방식과 죽는 방식이 모두 달랐다는 것이다. 어떤 죽음은 축복받았으며, 어떤 죽음은 저주를 받았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사람은 모두 죽으며, 그 죽음을 현명하게 맞이하기 위해선 우리는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냥 아무런 의미 없이 죽는 죽음.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또한 사람들에게 패악만 끼치다 맞이하는 죽음. 그런 죽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오늘 내가 한 일들을 돌아볼 것이다.
2.
오로지 질투에 사로잡혀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을 요셉은 용서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용서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쯤, 나도 잘 안다. 그러나 거기에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걸 안다면, 용서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언젠가 진정한 반성을 하는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나는 당신을 이미 용서하였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반성하지도 않는 누군가까지 용서할 자신은 없다. 물론, 거기에도 분명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존재하리라 믿긴 하지만. 요셉이 형들을 용서했듯이 말이다.
3.
나도 여전히 이승에서 욕심을 내려놓지는 못 했다. 조금 더 편하게 살고 싶고, 조금 더 많이 가지고 싶고, 조금 더 잘 먹고 싶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지금 잘 산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에 충분히 만족하고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가끔 한다. 하지만, 매해 일자리를 구하러 다녀야 하는 상황, 그리고 뒷받침되지 않는 체력은 나를 조금 더 편하게 하고 싶어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없고, 나도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기에 지금 현재를 조금 더 즐기고 싶다는 것. 그리고 조금이라도 주변 또는 어려운 이들을 도우면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비교우위의 동정적 도움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도움 말이다.
4.
주변 또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자세도 이러한 것이 아닐까. 우월감에서 나온 도움이라면 상대도 필시 거부감을 느껴 별로 고마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그런 도움은 안 주느니만 못한 도움이 된다. 예수님은 진심으로 우리를 섬기셨고, 또한 말씀하셨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김을 하러 오셨다고. 예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예수님은 강압적으로 자신을 섬기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섬김으로서 그분을 섬기게 하셨다. 이런 사랑. 그래서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도 섬김을 받으려는 자세가 아니라 섬김을 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우선, 나부터.
5.
나 지금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너무 잘 보이려고 애쓰지도 않고 있다. 나는 소통하기를 원한다. 나머지는 내가 섬기는 그대들의 몫이오! 그대들을 내가 섬기도록 하겠소. (설마 진짜? 라고 하시는 분들, 나도 자신 없소이만, 최소한 노력이라도 해 보겠소. 그대, 나 잘 보고 있소?)
6.
누군가를 섬기지 못한 삶의 비극적 삶이란 이렇게 막을 내리기도 한다. 괴롭고 괴로워 하다 회개할 마음조차 갖지 못하는 상황. 예수님을 얘기할 때 빠드릴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이야기인데, 유다가 자살하지 않고 회개하고 작심하여 예수님을 전했더라면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과연, 더 나아졌을까, 더 안 좋아졌을까. 분명한 건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고 자살함으로서 지옥행을 택했고, (이 글을 쓸 당시에는 지옥행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바뀌었습니다. 유다도 분명 회개를 했을 것이고, 회개하여 천국에 갔을 것이라는 게 저의 지금 생각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만 집착하다 보면 회개를 하여 거듭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반성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님 사랑을 받은 다음,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 진심을 다해 섬기겠노라고 그렇게 다짐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분명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지 않을까.
7.
요즘 내가 자꾸만 반복하게 되는 죄 때문에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이 되었던 중에 들리는 음성. "내가 너를 버리지 않겠노라고 다짐하였노라. 이 말을 몇 번 해줘야 하겠느냐?" 나도 모르게 지은 죄, 그리고 알면서도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여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자꾸만 짓게 되는 죄. 그 죄 때문에 나 스스로를 자꾸만 핍박하였는데, 그러지 말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요 며칠 답답하던 나의 마음에서 비로소 벗어나게 되었다. 죽음을 준비하던 나의 자세. 나를 핍박하려 하기보단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하며, 섬김의 자세로서 세상을 살아가야겠다. 하나님은 여전히 나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끊임없이 기도하라. 죽음을 준비하면서 섬기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로다.“
[4] 성령의 희망
1.
성경을 읽는 것은 나에게 위안과 동시에 희망을 준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쓰시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다가 천국에 가게 되는 사건으로 가득하다. 성경은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
2.
사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도 모자란다는 덤으로 또 주신다. 우리를 온전함으로 만드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희망의 불씨를 심어놓으셨다. 그래서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웃을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리라. 나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3.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닥쳐올 고난은 장차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마련해 놓으신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나의 지금 고난, 지금 상황이 어려워도 언젠가는 뜻이 이우러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믿으며 오늘 행복하게 하루를 보내면 된다.
4.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나는 그 하나님을 사랑한다. 아니, 내가 사랑하는 건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 것에 대한 조건반응일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다.
5.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다. 나의 새벽을 깨운다.
여전히 남아있는 잔상으로 하루를 편안히 보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 부족하지만, 이제는 정말 시작해야 할 거 같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으므로, 그러하므로.
[5] 천국에서라도 행복하길
1.
“과연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는가?”
2.
죽기 전에 1초만 믿고, 그때 믿고 천국 가면 되니까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 동의한다.
3.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죽기 전에 회개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때까지 막 살다가 천국에 가면 되겠네요? 나는 여기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과연, 그렇게 살아온 사람의 삶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 비록, 순간적 즐거움과 쾌락에 취해, 하루하루 의미 없이 즐기는 날들은 많았어도 그 하루하루의 삶의 끝에는 허무함이 있었을 것이고, 후회만 남은 삶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오던 삶이 후회스러워서 결국은 죽기 직전에 회개를 하고,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설명 하나를 더 덧붙인다.
4.
사람들은 악인들은 잘 먹고 잘 살고 또 오래 살기까지 한다고 이 세상은 잘못되었다고 한탄을 한다. 하지만, 이조차 하나님의 넓은 뜻이라면 오해가 더 생기는 걸까? 그들은 좀처럼 회개하지 않는다. 이대로 죽는다면, 그들을 좀처럼 천국에 데려갈 수가 없다.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할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래서 회개를 좀처럼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고 때로는 그들을 오래 살게 내버려 두시기도 한다. 그렇기에, 지옥에 간 사람은 없을 거라는 게 나의 논리다.
5.
그렇다. 이 모든 논리의 전제는 모든 사람은 회개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 이다. 그리고 회개하는 그 순간, 사람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 죽기 전에 조금 더 일찍,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조금이라도 행복한 삶을 살다가 갔다면, 일생 동안 못된 짓만 하다가 간 그들의 죽음이 안타깝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기에,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천국을 간 사람들의 모습이 안타까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천국에서라도 행복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 진정 예수님을 진정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이라 생각한다.
6.
우리 삶에서 진정한 행복한 삶이 있어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기를. 그래서, 모두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6] 내가 꾸는 꿈
1.
어쩌면, 끝이 있는 인생에서 오춘기, 갱년기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한 그 시절의 감수성도 예민해지기 마련. 우리의 감수성을 톡톡 건드리면서, 슬픔과 행복과 즐거움과 마음의 어느 방향에서 나를 안내하는 마음의 길이 있다.
2.
꿈 – 성장 – 작가 – 소망 – 완성 – 소멸 – 영혼
태어나 꿈을 꾸면서 성장하다가 작가가 되어 소망을 이루고 나의 작품세계를 완성한 후에는 모든 걱정거리가 소멸되어 나의 영혼이 빛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런 말 하긴 뭣하긴 하지만, 나 정말 멋진 꿈을 꾸고 있지 않은가요?
3.
어디로든 간다면?
1) 작가로서 첫 출발 (책 내기)
2) 맛있는 곳이 있는 곳 (음식 먹기)
3) 돈이 많이 생긴 날 (평생 생활비 해결)
나의 가장 큰 소망 세 가지를 적어봤다. 책을 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대로 먹고, 그리고 책이 잘 나가서 평생 생활비가 해결되는 게 나의 간절한 소망이다. 이렇게 소망을 적어나가다 보면,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 곧 오지 않을까!
4.
마음의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우리가 이루고 싶은 소망, 내가 이루고 싶은 소망, 사랑하는 사람이 이루고 싶은 소망을 이루는 날이 올 날이 있겠다는 희망이 생긴다. 그 희망에 나의 글을 하나 담는다. 오늘도 나는 글로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삶이 너무도 희망적이어서 기쁘다.
[7] 진심이란, 사랑이란
1.
나에겐 인생에서 가장 아픈 기억이 하나 있다. 내가 원하는 일을 구해서 취직을 했다가 한달도 안 되어서 강제퇴사 당해야 했던 경험. 내가 정말로 원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쫓겨나는 기분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그 참담한 기분은 무얼로도 채울 수 없었고, 그 후 나는 꽤 오랫동안 방황했다. 한번 그렇게 경력도 쌓지 못하고 쫓겨난 직장 때문에 나는 다시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이미 써먹다 버린 냄비를 다시 써주는 데가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 그곳은 나를 물로 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누군가는 나를 보물로 보고 있음을. 나는 누군가에게 보물이 되어, 몹시도 소중한 사람이 되어 간다. 남의 마음을 흔드는 한 줄. 이 한 줄. 우리는 당신을 보물로 본다는 이 한 줄. 너무도 소중한 이 한 줄.
2.
그 대책 없는 막막한 기분으로, 몇날 며칠을 애태웠고, 간신히 그 슬럼프를 극복하고 나는 알바를 시작했었다. 내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3.
테크닉만으로 되는 게 사랑은 아니다. 사랑은 진심이란 게 있어야 성공한다. 그 사람이 좀 안 되는 경우라면 마음이 아파서 어쩔 줄 몰라하는 진심.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이 아프면 마음이 너무 아파 그 사람과 함께 헤쳐가나고 싶은 용기.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함께 어떻게든 돌파해나가고 싶은 마음. 그런 것들이 사랑의 마음이다. 기술이 중요한 게 아니다.
살아가는 것은 진심을 찾아가려는 마음의 한 조각이라 할 수 있겠다.
4.
남의 마음을 흔드는 것. 남의 진심을 보는 것. 남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이 모든 말들이 의미 있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나도 진심이란 게 무엇인지, 사랑이란 게 무엇인지 알아가는 중이기 때문이 아닐까.
내 글은 남의 마음을 흔들까~ 정말 흔들까~!
[8] 큰 그림 – 스토브리그를 보고
1. 승수는 만년 꼴찌팀 드림즈의 단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싸가지가 바닥을 치는 임동규를 트레이드 하는 일. 임동규는 실력만큼은 탁월한 타자. 그러나 백승수의 노련한 활약으로 강두기와의 2:2 트레이드에 성공하게 된다. 강두기는 국가대표 에이스 투스. 과거의 임동규와의 불화로 드림즈를 떠난 선수지만, 임동규가 떠나므로 강두기가 드림즈로 복귀하게 된다.
2. 드림즈에는 야구를 전혀 해보지 않은 백승수의 부임을 반가워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차츰차츰 백승수는 주변 사람의 마음을 얻기 시작한다. 먼저 세영과 재희가 승수편이 된다.
3. 승수에겐 야구를 하다 하반신 마비가 된 동생 영숙이 있다. 영수는 드림즈의 통계전문가로서 활동하게 된다. 형 승수와의 갈등도 있었지만, 결국은 드림즈에 들어가게 된 영수. 그는 어떤 활약을 펼치게 될까.
4. 마일스와의 계약에 실패한 승수는 길창주라는 새로운 해법을 찾는다. 다소 논란이 있는 길창주와의 계약이지만, 승수는 그의 인성과 실력을 보고 계약하기로 결정한다. 스토브리그의 중심에는 휴머니스트가 있다. 단순 실력만 보고 사람을 뽑지 않는 승수의 철학.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승수의 지휘력. 그렇지 그런 거지. 승수의 활약상은 그렇게 순풍을 하고 있다.
5. 세영과 재희는 팀장과 팀원 사이다. 세영은 야구팀 최초의 여성 팀장이다. 재희를 심심하면 갈구지만, 재희는 그런 갈굼이 왠지 싫지 않은 듯 하다. 그래서 세영의 갈굼은 웃음을 유발하는 포인트가 된다.
6. 승수는 상무로부터 선수단 전체 연봉을 30프로 삭감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우여곡절 끝에 협상을 마무리한 단장 백승수. 그게 너무 억울해서 신문기사에 백승수 단장 자신의 연봉을 전액 반납하고 그만큼을 선수단 연봉에 보태겠다는 기사를 내버린다. 당황한 구단의 오너. 백승수 연봉을 보장하고 선수단에게 그만큼 연봉을 더 올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7. 승수의 행보를 보아온 권경민 상무. 승수에게 자진 사퇴를 요구한다. 첫째는 문제 많은 길창주를 용병으로 데려왔다는 이유로 둘째는, 동생을 채용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셋째는 싸가지가 없다는 이유로?
- 창수의 감상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백승수의 차가운 듯 하면서도 속내는 따뜻한 마음이 있는 그 정에 끌렸다고나 할까. 남궁민이 연기했을 백승수를 떠올리면서 그 모습을 상상해 보니, 더욱 더 재미가 났었던 듯 하다. 그러면서 치열했을 실제 프로야구의 스토브리그 생각도 많이 난다. 연봉협상, 트레이드, FA 계약, 외국인 용병 잡아오기 등, 실제 프로야구처럼 치열한 스토브리그 현장. 그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단장의 고뇌. 스토브리그는 야구를 보는 또 하나의 재미다.
드라마라는 특성상, 이야기의 전개보다는 캐릭터에 치중되어 읽게 되는데, 스토브리그는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듯 하면서도, 어느 순간 정지된 화면에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승수라는 테두리 안에서 모두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결국 승수가 그리는 큰 그림에는 승수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윗사람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것 아닐까.
<스토브리그 속 창수가 뽑은 명대사.>
(1)
승수 믿음으로 일하는 거 아닙니다. 각자 일을 잘하자는 겁니다.
→ 각자각자 일을 잘하면 믿음도 저절로 생기지 않을까!
(2)
승수 저는 아무 의심도 없는 흐리멍덩한 사람하고 일하기 싫습니다. 차라리 나까지도 의심하고 다 확인하세요. 떳떳하면 기분 나쁠 것도 무서울 것도 없습니다.
→ 사실 여기저기 다 확인해 볼 필요는 있다.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면 안 된다는 말은 옛말이다. 일단은 의심하고 봐야 된다. 100프로 믿음이 생기기 전까지는. 의심을 받기를 불쾌해하는 사람을 오히려 경계해야 하는 세상이다.
(3)
승수 ...그렇게 비웃는 게 무서워서 책으로 안 배우면 누가 저한테 알려줍니까. 그런 사람들이 알려줄 때까지 기다릴까요. 1년 뒤에도 야구 잘 모르는 게 창피한 거 아닙니까. - p.191
→ 책으로 배울 것은 많다. 정말로. 우리가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책으로 배울 수 있다는 사실.
(4)
승수 다행이요... 당연한 걸 다행이라고 하는 세상입니까.
→ 당연한 걸 다행이라고 하는 세상. 그 세상에 날리는 승수의 일방적 조소. 그렇지 당연한 걸 다행이라고 해서는 안 되지.
(5)
승수 확인도 없이 정에 이끌려서 그럴 사람 아니야. 그게 믿는 겁니까. 그건 흐리멍덩하게 방관하는 겁니다.
→ 방관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승수의 냉정함에는 이유가 있다. 정에 이끌려서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 그러나 그러면서도 방관자가 되지는 않겠다는 굳은 의지.
(6)
승수 고쳐야죠. 소 한 번 잃었는데 왜 안 고칩니까. 안 고치는 놈은 다시는 소 못 키웁니다.
→ 아, 이제부터라도 고치도록 해야지. 나도 그런 깨달음. 나 잃은 게 많았는데 왜 안 고치지. - 그러면 될 걸, 그러면 될 걸. 더 이상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도록 그러면 될 걸.
(7)
영수 (점점 화가 나는) 그딴 소리 좀 그만해. 형 인생 다 던져서 우리 가족한테 매몰되면 그거 지켜보는 우리도 지옥에서 사는 거 몰라? 못 걸어 다니는 건 난데 왜 형이 죄책감에서 허우적대고 내가 또 왜 그걸 기다려야 되는데. 난 이제 빠져나왔는데 형은 왜 거기서 계속 나를 보는데 (답답함이 치밀고) 내가 진짜 앞으로 가길 바라는 사람이 할 짓이야, 그게? 내가 희생할 테니까 너는 다른 안정적인 직업을 선택해. 이거잖아. 그딴 소리가 듣는 입장에서 얼마나 숨 막히는 줄 알아?
→ 영수가 승수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다. 우리는 누구도 누구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결국 극복하는 건 자신의 몫이다. 영수는 스스로 극복했고, 오히려 승수가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견디기 힘들다. 운명을 개척하는 건 자신의 몫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 명대사는 신문에서 많이 보던 것들도 있다. 그만큼 울림을 주는 대사들이기 때문이다. 승수의 큰 그림을 따라가다 보면 승수의 냉정함을 보게 되지만, 승수의 인간적인 부분, 그리고 마음 약한 부분을 더 많이 보게 된다. 단장이란 자리는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는 게 먼저가 아니다. 그보다 먼저 다른 사람의 운명을 쥐고 있고, 그 운명을 함께해 나가야 한다. 많은 사람의 운명을 쥐고 있는 것이 단장의 자리다. 승수는 과연 많은 사람의 운명을 함께 도모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나아가 자신의 운명도 개척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9] 흔들리며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1.
오늘도 저는 이리저리 흔들렸습니다.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다가 결국은 긴축재정을 하기로 결심을 하였고, 이곳에 지원서를 넣을까 말까 하다가 결국은 먼 걸음을 하고 온 뒤에, 여전히 갈등을 하고 있는 저를 봅니다. 오늘 할 일을 미리 정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아침에 일어나면 이리저러 흔들리면서 할 일을 찾고 있는 저를 봅니다. 작은 것 하나조차 결정 못하는 나.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인생이 아닐까요. 하나하나의 작은 결정을 하던 순간들이 모여, 나중의 큰 결정을 해야 할 때 지침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는 것. 그리고 결정을 했다면, 뒤돌아보지 않고 밀고 나가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닐까요
.
2.
글을 쓰는 중에 오타가 자꾸 나서 몇 번이고 그 글자로 되돌아가곤 합니다. 너무도 빨리 쓰려고 했던 것일까요. 어떤 날은 글을 한번 쓰고 나면 기력이 다 빠지기도 합니다. 요즘은 컨디션 조절을 하느라 기력이 바닥 날 정도로 쓰고 있지는 않지만, 기력이 다 빠질 정도로 쓴 글은 우수한 글이 될 확률이 꽤 높다는 것은, 그만큼 정성들인 글은 알아준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러나 그렇게 기력이 다 빠지게 쓰고 나면 다른 걸 못 합니다. 여유가 없어진다고 해야 할까요. 우수한 글이 되는 건 아주 좋지만, 그렇다고 마음의 여유까지 내팽개치며 살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친 몸을 집에 당도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 와서 실컷 글을 쓰고 나서 지치는 그런 삶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즐기는 글쓰기, 글도 즐겨야 하지 않을까요.
3.
사랑을 할 때는 한 사람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괜히 이 사람 저 사람 눈을 돌리다가는 사랑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저도 여기저기 여러군데 눈을 돌리고 있었는데요. 최소한의 할 것만 남겨 두었습니다. 이것저것 벌리다 보니, 스트레스를 너무 받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중이 잘되지 않습니다. 어학 공부도 그렇지요. 이것저것 여러 교재를 보는 것보다는 한가지 교재를 선택해 집중하는 편이 좋다고 많은 영어교사들이 그리 말합니다. 그 말을 듣지 않은 건 전적으로 저의 잘못. 이제 책 읽고 글쓰는데 인생의 반 이상을 써야 할 듯 합니다. 전에는 그리 안 헀냐구요? 밥벌이가 반, 자격증 공부 쬐끔, 국어공부 쬐끔, 한국사 공부 쬐끔, 영어공부 쬐금, 더불어 기타 관심 있는 분야 쬐끔. 찔끔찔끔 다 인생을 까먹고 있었어요. 사실 고백하자면, “신통한 옆자리” 시리즈를 만들어볼 계획이었습니다. 뭐,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예를 들면, 신통한 옆자리 한국사, 신통한 옆자리 영단어...ㅋㅋ..꿈이 너무 크지요? 물론, 이게 저의 욕심이란 걸 알고 접으려고 합니다. 대신, 신통한 옆자리에 제가 쓸 습작소설들을 놓고는 앞자리로 와라, 하고 주문을 걸어야지요. 그리고 그 소설에 이렇게 말해야겠습니다. I See You. 연애할 상대가 없으니, 소설하고라도 연애를 해 보려고요. 이렇게 소설이 하나 탄생하는 건가! 신통한 옆자리 시리즈. 괜찮지 않나요?
4.
이리저리 흔들리는 인생. 글을 쓸까 말까부터 시작해서, 제목을 뭘로 할까, 이 글은 언제 올릴까, 오늘은 어느 책을 읽을까. 그러다가 또, 에잇, 오늘은 못 읽겠어! 하고 책을 집어던지기도 하는 게 인생이지요. (글타고.진짜 집어던진다는 야그는 아닙니다…) 이렇게 흔들리는 인생 속에서 자기만의 가치관이 완성되어가고 완성되어가는 삶 속에서 새로운 보람을 느끼게 될 테니, 우리는 참 잘 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너나 잘 살라고요? 네네. 고맙습니다. 나도 잘 살고 너도 잘 살고, 그러니까, 우리 지금 말 튼거? 악수하자, 친구야. 고마운 마음을 가득 담은 책 한권, 너에게 추천한다, 친구야.
[10] 풍경이 참 맑다
1.
눈앞에 펼쳐진 그림들은 삶을 설정하기 딱 알맞다. 다양한 산수와 풍경의 그림들로 나의 눈을 호강시키면, 마음의 어딘가에 있는 향수 같은 것들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비록, 그 시대가 오늘날의 우리를 만족시키진 못하겠지만, 그 시절들의 그리움으로 다가온 그리움들은 우리의 세계를 향상시킨다.
2.
산수화와 풍경화의 세계가 너르게 펼쳐져 있고 그에 대한 설명과 묘사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나를 황홀감에 빠지게 하면, 어느 덧 나는 그림 속에 푹 빠져서 이상향의 어딘가에서 머물고 있다. 그 중에는 상상하면 좋은 느낌인 것도 있고, 보기만 해도 좋은 느낌인 것도 있다. 그리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어떤 것도 있고, 마음을 평화롭게 유지시키는 어떤 것도 있다. 삶이란 풍경 속에서 어떤 이들을 보는 것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어느 날.
3.
오늘, 딱딱한 날의 일과에서 벗어나 흐물거리는 느낌으로 다가온 그 세계에선 무엇이 있을까를 자꾸만 생각해 보면, 이 그림들이 가져오는 다양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터인데, 나는 자꾸만 자꾸만 들여다 보아도 모를 듯 알 듯한 어딘가에서 내가 있으니, 삶은 그런 것일 텐데.
4.
그렇지, 삶은 알 수 없지, 라는 꺠달음. 내가 하고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게 이 속에 들어있지는 않을 터이고, 이 오묘한 그림들에서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주 미약한 힘. 미약한 힘으로 들어가다 보면, 더 깊은 이치를 깨칠 터이고, 그 깨침이 그 세계를 알게 하겠지. 오늘 조금만 더 들여다보고, 내일 조금 더 들여다 보면, 이 풍경들이 이 그림들이 내 마음 속으로 살며시 걸어와 있겠지.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 조금 더 많은 관찰을 해 본다. 풍경이 참 맑다.
[11]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라는 공간에, 그리고 미래의 시간에게
☆프롤로그☆
글을 쓸 준비를 하다 깨달은 점은,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형식으로 쓰든, 글에 자신의 철학 혹은 사상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 사상이 글에 온전히 드러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글은 암묵적으로, 의도가 보이지 않게 하면서, 은연 중에 독자가 깨달을 수 있게 장치를 해 놓는다. 그것은 소설이든, 시든, 칼럼이든, 리뷰든 마찬가지다. 이글을 준비하면서, 나는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 또는 내가 생각하고자 하는 바와 다른 방향의 글은 최대한 배제하려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하여, 나의 리뷰는 온전히 나의 주관적인 감상이지, 객관적인 평가는 아니라는 한계점이 생기게 되었다. 그 한계점을 구태여 깨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유는, 글을 쓰면서 나 자신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을 써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알아야 하고, 그리고 내가 원하는 글을 써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얻게 된 온전한 나의 깨달음이다.
1.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은 소설쓰기의 첫 단계에서 지켜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이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이 선행되지 않을 때, 어쩌다 책을 냈거나, 혹 운이 좋아 어느 출판사의 신인등용문에 이름을 올렸을지라도, 그 사람의 이야기는 즉시 한계를 드러내어 단명하고 말 것이다.
2.
무언가를 하는 것은, 그것도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책을 읽는 것은, 신선한 충격을 줄 수도 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을 때 좋은 점은, 어느 장소에서 어떤 책이 있더라도 그 책을 집어들 수 있다는 것이고, 그랬을 때, 내가 알지 못헀던, 또는 내가 알더라도 독특한 자극을 주는 글을 만날지도 모른다.
3.
나의 책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하지만, 내 것이라 짐작되는 분야의 책은 많이 읽어야 한다. 분석하면서, 해부학을 공부하듯.
소설쓰기의 기본을 보면서, 나는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절대로, 이렇게, 소설을 해부하듯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다. 소설 읽은 감상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적당히 얼버무려 비판을 하거나 한 적은 있지만, 마치 공부를 하듯 심도있게 파고들어 공부를 해 본 적은 없다. 그렇구나. 내가 여태껏 소설쓰기를 온전히 해내지 못했던 것이 이런 이유였구나.
★에필로그★
그동안 나는 글을 쓰는 데도 너무 안일했다. 이 정도쯤이야 하고 넘어가는 일이 너무 잦았다. 그래서 다짐한다. 앞으로는 글을 대충 쓰지 않겠다. 성의있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수정해 가면서 쓰겠다. 이 다짐이 어디까지 지켜질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러한 노력만이라도 최선을 다해 해보려 한다.
글을를 쓰다가 실수를 한 적이 있다. 글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때, 대충 얼버무려 적당히 때우면서. 소설을 쓰다가도 잘 되지 않으면 적당히 때우면서, 대략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포기한 적이 많다. 그 모두가 내가 나를 기만한 것이었음을 처절히 깨닫는다.
내가 얻은 최상의 기쁨은, 내가 앞으로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어떻게 소설이라는 것을 써내려갈 수 있을지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글을 쓸 때에, 안일했던 나를 반성하며, 적당히 얼버무렸던 나를 또한 되돌아보면서,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라는 공간에, 그리고 미래의 시간에게 나를 이야기한다
[12] 더 많이
1.
과거에는 성매를 위한 납치가 서슴지 않고 행해졌다. 이를 반대하여 성매매방지법을 통과시킨 건 하나님이 주신 지혜일 거다. 지금은 성매매 방지법이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성매매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법안이 이렇게 위력을 발휘하는 것도 드물다.
용감한 철학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나오는 사명감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분명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에 헌신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진다면, 우리는 눈앞의 작은 이익보다는 더 큰 헌신, 더 큰 마음을 바라보게 된다.
2.
세상엔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을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쓰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세상엔 예수님의 뜻을 정말 올바로 바라보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그것의 옳고 그름은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예수님의 마음을 통하여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이 느껴져서 그 마음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세상에 너무나 많기에, 앞으로의 세상은 더욱 더 살아가고 싶은 세상, 살아갈 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오늘의 예수님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희망을 본다. 그 희망의 어딘가에서 내가 살아갈 생각을 하니, 기분도 좋고, 너무나 뿌듯하다. 그 뿌듯함이 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더 많이 살아가자. 더 많이 행복하자. 더 많이 희망을 갖자. 그 희망에서 피어올린 작은 기쁨들이 모여, 모두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바뀌어 갈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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