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국은 <친일문학론>에서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문장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작가’들도 적지 않았다”며 그 명단을 열거하였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 윤동주, <폐허>파의 변영로·오상순·황석우, 조선어학회 관련 이병기·이희승, 젊은 시인으로 조지훈·박목월·박두진 청록파 3인과 박남수·이한직, 제일 먼저 절필했다는 홍노작을 비롯해서 김영랑·이육사·한흑구 등으로 총 15명이다. 참으로 자랑스런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적어도 2명은 ‘영광된 작가’에서 이름을 빼야할 것 같다. 우선 시인 오상순(吳相淳)은 일제의 종교·사상 침략 첨병역할을 한 ‘일본조합기독교회’의 전도사 역할을 한 적이 있다. 또 한 사람은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李秉岐)다. 이병기는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돼 함흥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런데 그는 출옥 직후 1943년 12월 8일자 <매일신보>에 ‘12월 8일’이란 제목의 친일성이 짙은 시조를 실었다. 해당 시조에 ‘十二月 八日’이라는 한자 제목을 컷으로 만들어 넣고 또 ‘가람 이병기’라고 이름 앞에 호(號)까지 넣은 걸 보면 조작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시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놀래고 깃버하던 그날이 오날이라
시름을 풀어보려 더진 붓을 다시드니
상(牀)머리 해형수선(蟹形水仙)도 꽃방울이 벌어라
비인 뫼와 들에 빗난 구름이 일고
마른 나무마다 새로 긔운이 돌고
한동안 이젓든 봄도 다시 차저 오나다
칼차고 총을 메고 나가는 젊은이들
씩씩한 그 그림자 돌아도 아니 보고
흘리는 피와 땀으로 배를 띄워 저으리
가는이 보내는이 거의 다 한맘일다
한번 죽음이야 안흘이 뉘이리오
당당(堂堂)한 그 길을 밟어 보람잇시 하여라
아모런 괴로움도 당하면 견디노니
하로라도 밧비 그날을 다 보내고
바라는 이봄을 마저 반겨 살아보리라

<매일신보>(1943.12.8)에 실린 가람 이병기의 친일시
우선 시조 제목 ‘12월 8일’은 태평양전쟁 개전일인데, 이 시는 개전 2주년을 맞아 쓴 축시(祝詩)라고 할 수 있다. 평소 서정적인 시조를 주로 써온 그가 이런 시국성(時局性)이 강한 제목을 택한 것부터 예사롭지 않다. 게다가 내용도 문제가 많아 보인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전쟁터에 당당히 나가서 보람 있게 죽으라는 투다.
이 시조가 발표될 당시 일제는 조선인 명사들을 동원해 학병 권유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만으로 볼 때 이병기는 비록 친일작품으로 이 시조 한 편을 남겼지만 시조의 내용으로 보면 친일성은 아주 농후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이병기는 친일규명위나 <친일인명사전>에는 빠져 있다)
반면 정지용(鄭芝溶)의 경우는 이와는 좀 다르다. 정지용은 태평양전쟁 개전 후 시 두 편을 발표했다. <춘추>(1942년 1월호)에 발표한 ‘창’과 <국민문학>(1942년 2월호)에 발표한 ‘이토(異土)’가 그것이다. 둘 가운데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것은 친일잡지인 <국민문학>에 실린 ‘이토’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이토’를 두고 “모호하기 짝이 없어 그 의미를 종잡을 수가 없다”고 했는데,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낳아자란 곳 어디거나
묻힐데를 밀어나가쟈
꿈에서처럼 그립다 하랴
따로짖힌 고양이 미신이리
제비도 설산을 넘고
적도직하에 병선이 이랑을 갈제
피였다 꽃처럼 지고보면
물에도 무덤은 선다.
탄환 찔리고 화약 싸아한
충성과 피로 곻아진 흙에
싸흠은 이겨야만 법이요
시를 뿌림은 오랜 믿음이라
기러기 한형제 높이줄을 맞추고
햇살에 일곱 식구 호미날을 세우쟈
유종호가 “모호하기 짝이 없어 그 의미를 종잡을 수가 없다”고 한 것이 공감이 간다. 전문가인 유종호조차 “그 의미를 종잡을 수가 없다”고 했을 정도로 한 눈에 들어오는 메시지가 없다. 이 말을 바꾸어 표현하자면 성격이 그 무엇이든 간에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없다는 얘기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시어 가운데 병선, 탄환, 화약, 충성, 싸흠 등 전쟁을 상징하는 용어들이 몇 등장할 뿐 그걸로 뭘 어떻게 하자는 주장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를 좀 더 확대해석해 보자면 어떤 연유에선가 그가 이런 시를 쓰기는 썼는데 할 수 없이 썼다는 뉘앙스가 풍기는 셈이다. 유종호 역시 “일제말기 국민총동원 시기에 정지용 정도의 중진시인이 협력의 시늉을 전혀 안할 수는 없어서 의사(擬似) 전쟁시 한 편을 두루뭉수리 날조해서 납품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라”고 썼다. 따라서 이런 정지용에게 친일의 혐의를 두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정지용 역시 친일규명위나 <친일인명사전>에는 이름이 빠져 있다.
첫댓글 저항시인의 시 널리 펼쳐나가서 친일시인과의 결별을 선언헤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