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에 색을 입히는 일은 그리움이다.
묵은 사진첩을 들추다 문득 멈추어 흑백 사진 한 장을 들여다 보고 있다. 눈 길이 닿는 곳마다 사진 속 사연들이 화려하게 채색된다.
중동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우리 네 남매를 데리고 외출을 했다. 계절은 차림새나 빛의 농도로 보아 겨울의 끄트머리인 것 같다. 올망졸망 화면을 꽉 채우고 서 있는 폼이 영락없는 베이비부머 시대의 마지막 주자들이다. 겹겹히 갖추어 입은 옷가지에서는 네 아이를 꼼꼼히 챙겼을 엄마의 수고가 읽혀진다. 막내의 손에는 과자가 한봉지 쥐어져 있다.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떼를 쓴 흔적이다. 엄마는 우리들을 다 내 보내고 무엇을 했을까? 오롯이 혼자만의 휴식을 즐겼으면 좋았으련만 밀린 집안살림 하느라 더 바빴을 것이다.
사진 속 뒤편으로 쭉 뻗은 고속도로가 보인다. 집이 빼곡히 들어 앉은 마을과는 달리 도로는 한산하다. 오랜 세월 공들여 만든 공간이 여백으로 남아 있는 것은 어쩐지 어색하다.
도로로 인해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장막처럼 경계가 생겼다. 공사가 한창일때 이쪽 마을에서 저쪽 마을로 이사를 한 우리 집은 양 쪽의 불편함을 다 겪어야했다. 이사를 하면서 멀어졌던 학교가 두 배 더 멀어졌기 때문이다. 동생은 바로 전학을 했다. 그러나 동생과 달리 전학을 원치 않았던 나는 꽤 먼 거리를 돌아 다녀야만 했다. 그때 내 등하교 길은 매일 넘어야하는 산처럼 고행길이 되었다.
얼마 후, 육교가 생겼다. 끊겼던 마을과 마을이 다시 이어지고, 학교도 다시 가까워졌다. 단박에 먼 길을 줄여준 육교 앞에서 우리는 환호했다. 그것은 내게 고마운 선물이었다.
아버지는 새로 놓인 육교 위에서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귀국선물로 장만한 아사히팬탁스 카메라에, 새로 뚫린 경인고속도로를 담고 싶어했다. 당신의 꿈나무들을 마을이 다 보이는 곳에 세워놓고 미래를 설계했을, 아버지의 희망이 새삼 사진 속 숨은 주제로 읽혀진다. 대망의 80년대를 향해 꿈틀거리던,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자란 우리 세대가 지나온 길목이다.
사진 속의 나는 초등학생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손목시계를 차고있다. 이 또한 아버지의 귀국 선물이다. 굳이 긴 팔을 어색하게 남동생의 어깨에 올려놓고는 은근히 자랑하는 속내가 빤히 보인다. 또래보다 훌쩍 크고 공부를 잘했던 나는 아버지의 주제에 가장 걸맞는 상징이었을 것이다. 맏이로 태어난 덕분에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헌 것을 물려받지 않아도 되는 특혜를 누렸다. 대신 동생들을 잘 돌보아야하고, 모범이 되어야하는 책임감이 늘 뒤따랐다. 나는 아직도 이 두가지의 부채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왼쪽에 뒷 배경으로 보이는 동네가 내가 어린 시절을 야물게 보낸 인천 도화동이다. 작골이라 불렸던 이곳은 수봉산 아래 얕은 산등성이를 타고 자리한 제법 안정된 마을이었다. 마을 끄트머리에는 내가 다니던 도화초등학교가 있다. 그 옆에는 인천 최초의 주공 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당시 아파트에 살던 친구들은 최첨단을 걷는 문화의 상징이었다. 더불어 치맛바람과 학구열 또한 만만치 않았다. 구동네 한복판에 뿌리를 두고 있던 나는 상대적 우월감과 박탈감을 한꺼번에 소화하느라 어린 나이치곤 꽤 치열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공사가 시작된 시점은 분명치 않다. 아마 초등학교 입학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경인고속도로를 연장하는 큰 공사였다. 몇 년동안 마을 경계에 돌이 쌓이고 각종 기계차들이 들락거렸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위험을 염려한 엄마는 절대 접근 불가 명령을 반복했다. 그러나 돌무더기는 동네 아이들의 새로운 놀이터가 되었다. 아이들은 틈만 나면 돌무더기 위로 올라가 서커스 공연이라도 하듯 뛰어 다녔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에 늘 관람객처럼 서 있는 내가 있었다. 에너지가 많았던 내가 구경꾼으로 있었던 것은 용기가 없어서도,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라서도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 보다 성숙한 애처럼 보이고 싶은 욕구가 제일 컸지 않았나 싶다.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주변은 정지된듯 고요했다. 툭툭 아이들의 목소리만 간헐적으로 공중으로 튀었다 사라졌다. 주위가 너무 고요했었다는 느낌은 뒤에 생길 소란이 너무 강렬해서 내가 만든 기억인지, 기억의 한부분이 지워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갑자기 주변이 시끄러워졌다는 것이다. 산발적으로 움직이던 아이들의 머리가 갑자기 한 곳에 모아졌다. 그리고는 잠시 정지 화면이 되더니 몇 아이가 뒤로 물러섰고, 몇 아이는 황급히 달아났다. 바로 이어 머슴아 둘이 돌무더기에서 상자 하나를 들어 올렸다. 멀리 동네 어른 몇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상자를 빼앗듯이 건네 들고는 마을로 돌아갔다.
내 기억 속의 화면에는 두 사내 아이의 손 끝에 들려있던, 반쯤 열려진 상자만이 있다. 상자 안에는 갓난 아기가 들어 있었다. 그 속에 있던 아기를 나는 아마 확실히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배냇저고리를 입고 꿈틀거리고 있는 갓난 아기의 모습이 선명하게 한 묶음으로 튀어 나오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이 사건 후, 마을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공사장 근처에 얼씬 거리지 않았다. 어른들은 금기라도 되는 양 이 일에 대해 쉬쉬거렸다. 아기가 죽었다느니, 뉘집 딸이 나아 버렸다느니, 증명되지 않은 소문들이 음지에서 돌아 다녔다. 그리고는 얼마지나지 않아 아기가 입양기관으로 넘어갔다는 소리를 가느다란 바람 결을 타고 들을 수 있었다.
그 아기는 지금 40대 중반쯤 되었을 것이다. 한국인의 모습으로 지구촌 어디선가 모국의 언어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유럽 여행 중에 자리에서 커피를 시키던 미모의 중년 여성으로, 시드니 타운홀역에서 잘생긴 동양계 남성으로, 우리는 지구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 한번쯤 스쳤을 수도 있다. 아님, 모임의 한 멤버일수도.
나는 지금 손끝 하나로 세상을 단번에 훑어볼 수 있는 첨단의 시대를 걷고있다. 학교를 가면서 고행처럼 걷던 그 길과, 돌무더기에 버려진 아기가 그려진 흑백의 시절도 분명히 내가 걸어온 세월들이다. 그 두 세월을 훌쩍 이어준 사진 한 장이 육교처럼 내 앞에 있다. 이 또한 선물이다.
아버지가 남긴 흑백 사진 속의 시간들이 단풍처럼 붉은 그리움으로 물든다.
유금란 수필가
산문집 ‘시드니에 바람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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