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석현수
나는 한 때 모자 부자가 되었다. 딸아이가 아버지를 위해 푸짐하게 준비해 주었다. 살아생전 모자에 대한 여한은 없으라는 듯 철철이 씻고 벗고도 남을 만큼이다. 그 중에는 꼭 일본 순사같이 못 되어 보이는 시쳇말로 따까리Ivy Caps 모자도 있고, 둥근 얼굴이어서 젊을 때 참 잘 어울렸노라고 제 어미가 일러주었던 붉은 베레모berets도 빠뜨리지 않았다. 글 모임에나 갈 때 쓰라고 하면서 빵모자cardinal beanie cap도 준비해 넣었다. 처음에는 어느 것 하나 내 풍채에 어울릴 성 싶은 물건들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모두 여남은 개가 넘는 내 장신구가 되었다.
때가 되면 누구나가 모자는 하나쯤 쓰고 싶어지고 어느 것이 내 스타일까 하여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다른 이의 행장차림을 살피게 된다. 왜냐하면 멋의 기준은 항상 타인에 기준하여 결정되어지기 때문이다. 모자는 햇빛 가리개나 머리보호의 차원을 넘어 멋으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바리코트의 깃을 올리고 중절모를 쓴 신사를 보면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 쯤 탐내 봄직한 멋이다. 남성들의 경우 이러한 충동은 대개 황량한 겨울철에 느끼게 되며 모자가 없으면 무언가 뚜껑을 열어놓고 다니는 듯 허전하고 썰렁해 지기도 한다.
안경이니 모자니 하는 것들은 하나의 화장이 되어 잘만 받쳐 올린다면 사람의 인상착의를 달라보이게 하는 좋은 장신구로 활용될 수 있다. 지적으로 보이려고 눈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 무도수의 안경을 끼는 경우가 있기도 하며, 얼굴이 흰 사람은 금테 안경으로 얼굴을 받쳐 올리면 부티를 내기도 한다. 잘 선택된 모자 하나가 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수도 있으며 신사의 표상이 될 수도 있으리라. 아울러 외출 때마다 성가신 헤어스타일을 가볍게 감춰주는 편리함도 있다. 그러나 멋있는 중절모가 젊은 짧은 깍두기 머리에 오를 경우에는 불량한 주먹들을 연상시키는 수도 있을 수 있어 선택이 마냥 쉽지 만은 않다.
옛 부터 의관은 공인된 치레이다. 성년이 되면 갓을 쓰고 신분에 따라 그 모양도 달랐다. 특히 모자를 선택함에 있어 남을 많이 의식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영향인지는 모른다. 혹시 치레가 제 분수를 넘은 사치가 될까봐 나이가 들어도 모자 하나 머리에 얹지 못하고 망설일 수도 있다. 처음 색안경을 끼고 길을 나서면 길가는 사람이 모두 나를 쳐다보는 듯하다. 마음이 약한 사람은 안경을 벗다 끼다 몇 개월이 지나야 겨우 불안감을 떨친다. 모자일 경우는 더 심하다. 몇 년을 두고 씨름해야 겨우 자기 스타일로 정착하여 마음이 편해진다. 모자를 처음 쓰는 순간 누가 웃어 보이기만 해도 그 후유증은 오래 간다. 요즈음 같이 바쁜 세태에 남에게는 과도하게 주목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니, 그저 편한 마음으로 예사롭게 모자를 생각하는 것이 좋을 성 싶기도 하다.
여성들은 미장원을 다녀오거나, 새롭게 옷을 사 입고 거울 앞에서 분주히 앞뒤를 점검한 뒤에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살핀다. 전에 해 보지 않던 첫 시도에 있어서는 지나치리만큼 주위의 눈치를 보며 자신을 점검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대를 편하게 해 주려고 ‘괜찮아’ 라고 안심시키며 자신감을 심어준다. 그러나 간혹 상대의 물음에 최대한 성의를 낸답시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는 식으로 덧을 내는 사람이 있다. 얼핏 보면 솔직하여 고맙게 여겨져도 그건 당사자를 무척 힘들게 하는 고약한 훈수이다. 말 한마디에 가까스로 장만한 옷을 바꾸러 가기도 하여 새 옷에 대한 한껏 부푼 기분을 싹 가시게 한다.
내가 선물한 중절모를 석 삼년이 지나도 아직 쓰지 못하는 친구가 있다. 만날 때 마다 모자의 안부를 물었더니 올해는 꼭 쓰겠다는 화답을 한다. 풍채도 좋고 얼굴도 적지 않게 줄음도 잡혀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모자 하나 쓰는 결심이 이렇게 오래 걸린다. 추측컨대 필경 모자 쓴 모습이 어떠냐고 물어 보았을 것이고, 이때 가족들이 애매한 반응을 보였을 것 같다. 친구는 그만 아직은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어 숫제 모자를 쓰고 밖을 나설 용기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내 차림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는 편이다. 평범하게 다니면 될 것을 이상한 모자를 쓰고 나서는 꼴은 가까이 있는 가족들조차도 탐탁해 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굳이 의견을 물어서 내가 마음의 병을 얻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 멋은 내가 낸다는 기분으로 내 눈에 들어 보이면 그만이다. 설령 그것이 꼴불견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남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 나는 어색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 평상시 일부러라도 모자를 쓰고 밖을 나선다. 한번은 이것으로 하고 한번은 저것으로 하여 내 방에는 온통 모자로 즐비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고 맛도 들였는지 내가 보아도 괜찮다 싶은 궁합의 모자들이 있다. 어떤 것은 야인시대 모습을 연상하여 혼자 웃기도 한다. 지나친 자기애와 때론 장난기마저 동한 것일까. 일본 순사 같던 모자가 자연스러워 보이고, 검정색으로 샀으면 좋았을 걸 싶었던 붉은 베레모도 지금은 제법 내 멋인 양 마음 편하다.
꼴불견은 남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심약한 사람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졸작이다. 두리번거리고 남의 눈치나 살피다 보면 어느새 스스로가 꼴불견이 되어버린다. 개성을 잃고 점점 획일화 되어가는 도회에 그래도 거리의 홍일점들은 눈을 즐겁게 해 주지 않는가. 흰색이나 검정 일색의 차량 행렬에서 빨간색 소형 자동차 한 대가 주는 산뜻함, 한결같은 검정 양복의 샐러리맨들에서 캐주얼한 재킷 한 벌이 주는 눈의 편안함도 크다. 추위에 웅크린 아저씨들 사이에 모자 하나라도 버젓이 받쳐 올리고 걷고 있는 신사는 거리의 멋을 창출한다.
멋있는 모자를 쓰고 멋있는 말을 해주며 살고 싶다.
언젠가 시장에서 만난 모자장수 아저씨의 멋있는 거절과 번득이는 해학이 생각난다.
“아저씨 이 모자 얼마예요?”
“손님 쓰시게요?"
"아이쿠, 손님 쓰 시기엔 아직 얼굴이 너무 곱네요. 훗날 오셔도 되겠습니다.”
날씨도 추운데 얼렁뚱땅 아무에게나 하나 팔면 그만일 것을 점잔하게 나에게 중절모를 만류했던 아저씨,
비록 거절은 당했지만 그날 나는 ‘젊다’는 말 한마디에 무안함을 잊고 진종일 기분이 좋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