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람스와 클라라(Clara Josephine Wieck Schumann,1818~96년)의 만남
1853년 9월, 슈만의 친구가 스무 살 청년과 함께 슈만의 집을 방문합니다. 그 청년은 바로 브람스, 슈만은 브람스의 연주를 몇 소절 듣자마자 클라라를 불렀습니다. 슈만, 클라라, 브람스가 처음 만나는 장면입니다. 브람스의 연주를 들은 부부는 브람스에게 “이제까지 이런 새로운 음악은 들은 적이 없다!”는 극찬을 보냅니다.
■ 슈만(Schumann 1810~1856년)의 도움으로 낭만파의 거장이 된 브람스
브람스는 1833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브람스의 아버지는 가끔 마을의 댄스홀에서 연주하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였습니다. 브람스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고, 이런 가정환경 때문인지 그는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브람스도 집안을 위해 열세 살 무렵부터 술집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마을에서 차츰 실력을 인정받았는지 열다섯 살에는 함부르크 극장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고, 또 아르바이트로 피아노 교습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브람스 자신은 연주보다 작곡이 적성에 맞는다고 판단했는지, 연주자가 아닌 작곡가의 길을 선택합니다. 이 점에서는 슈만의 선택과도 비슷합니다. 브람스가 슈만을 방문했을 당시 슈만의 정신 상태는 이미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브람스에게 행운이 있었던 것일까요? 다행히 브람스가 찾아온 날 슈만은 온전한 정신이었고 얼마 뒤 슈만은 본인이 발행하는 음악 잡지에 ‘새로운 길’이라는 제목으로 브람스를 대서특필로 보도합니다. 슈만의 도움을 받은 브람스의 진로는 비교적 탄탄하고 안정적이었습니다. 39세의 나이로 빈 음악협회 예술 감독 자리에 오른 브람스는 64세에 사망할 때까지 안정적인 수입을 거두며 음악에 전념할 수 있었으니까요.
브람스는 평생 독신이었지만 딱 한 번 약혼한 적이 있습니다. 브람스가 스물다섯 살에 만난 아가테 폰 지볼트라는 여성 가수가 그 주인공입니다. 브람스는 그녀가 노래 부를 때 직접 반주를 하기도 하고 몇 곡의 성악곡을 그녀에게 헌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브람스는 그녀에게 파혼의 의사를 밝혔는데, 그녀를 사랑하지만 구속 받는 것이 싫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모든 것을 다 갖춘 클라라라는 여성을 만난 영향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브람스는 내성적이고 사람 사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의리의 남자였고 신세를 진 사람에게는 꼭 보답을 하는 성격이었습니다. 또 어린이를 무척 좋아해서 그의 바지 주머니에는 항상 사탕이 가득 들어있었다고 하네요. 또 브람스는 베토벤과 비슷한 점도 있습니다.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나, 뒷짐을 하고 산책하는 모습, 독신이나 불우한 가정환경도 꼭 닮았습니다. 음악적으로도 브람스는 베토벤과 닮았습니다. 낭만파 음악의 특징을 잘 활용하면서도 고전주의 양식을 계승했다고 할까요? 실제로 브람스가 교향곡 1번을 초연했을 때 사람들은 베토벤의 후계자가 나타났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멘델스존이 새로운 고전주의를 갈망했 다면 브람스는 낭만파 속에서 새로운 고전주의를 고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브람스가 교향곡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보인 것 또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듣고 난 이후의 일입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듣고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한다는 것은 어느 음악가에게나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올 것 같지 않나요? 특이한 것은 브람스의 교향곡에는 아무런 표제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브람스는 ‘음악은 그저 음악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주위에 이야기하곤 했다고 합니다. 리스트나 바그너, 베를리오즈는 소위 교향시라거나 주제에 따라 음악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새로운 낭만파 음악의 기법을 적극 활용한 반면, 브람스는 오직 본인이 추구하는 음악의 길만을 고집했습니다.
■ 한 평생을 친구로 함께한 고귀한 사랑 클라라와 브람스의 위험한 관계는 슈만의 자살 시도와 정신병원 입원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와 열네 살 연하의 작곡가. 슈만의 빈자리를 브람스가 지켰고 실제로 클라라와 브람스는 부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클라라는 계획된 연주회 준비로 항상 분주했고, 연주 여행도 자주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 클라라가 집을 비울 때면 브람스가 그녀의 자식들을 살뜰하게 보살폈고 클라라의 아이들도 브람스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브람스는 슈만이 정신병원에 입원하자마자 슈만의 집에서 가정을 살피고 가계부를 쓰는 등 클라라의 내조 역할까지 완벽하게 소화했습니다. 밖에서 사람들이 이들의 관계를 두고 어떻게 수군거리든지 현실적으로 클라라는 브람스의 도움 외에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어려웠지요. 여자 혼자서 병 든 남편과 여덟 명의 아이들을 모두 돌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클라라는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야 했고, 또 아이들이 남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지 않도록 사회적 명성 또한 얻어야만 했습니다.
클라라에 대한 브람스의 헌신적 사랑은 클라라가 죽을 때까지 이어집니다. 슈만 사후에도 연주 활동을 이어가던 클라라는 76세의 나이로 뇌졸중으로 사망했습니다. 1년 뒤 브람스도 그녀의 뒤를 이어 사망했지요. 이들 두 사람의 관계는 낭만파 음악가들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큰 스캔들인 것 같습니다. 이들이 실제로 연인이었던지 그렇지 않았던지 무관하게, 긴 세월 서로를 존경하며 용기를 주었던 인생 최고의 친구임은 틀림없습니다. <출처 : 중앙일보사,음악의 유산,제8권,pp.3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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