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순 시집 『흐르는 강물도 담이 든다』 도서출판 오감도 2020년 9월
최양순 시인
머리글
주절대며 뱉어 놓은 말들을 모아놓고 보니 저를 관찰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족하고 엉성해서 개갈 안 나는 짓 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부처님께 외상절 하는 벗이 말합니다.
외상절이라도 하고 나면 마음 든든해진다고,
그래서 용기내 봅니다.
충청도 말 중에 버스기사에게 행선지를 대며 가느냐
고 물으면 “타면 가유 ~”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선
타고 보렵니다.
부족한 대로 묶어서 이름표를 달아주려 합니다.
2020년 여름 최양순
흐르는 강물도 담이 든다
고백합니다
당신의 어깨가 참으로 작아보였습니다
갑자기 내 우주가 좁아진 듯 서러웠습니다
다, 아우르고 흐르는 강물이 보고 싶었습니다
거침없이 흐르는 줄로만 알았던 강물도
때로는 담이 결려 멈추는지
가장자리에 살얼음으로 주저앉았습니다
그 자리에 발길 멈추고
우두커니
강물에 마음을 얹었습니다
물비늘 빼곡한 강물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언제부터
내 마음에
겨울 강물처럼 살얼음이 끼었는지
자꾸만
가장자리로 밀리는 남루한 하루가
또 지워집니다
흔적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아버지가 어머니께 남기신
마음 한 자락
어느 날엔가
지붕 키를 훌쩍 넘는
나무를 어루만지며
이다음에
이놈이 효자 노릇 할겨
당신 쌈짓돈은 챙겨 줄 거요
내 먼저 갈 테니
당신은 좋은 세상 더 많이 보고 오소
하고 가신 지 십수 년
가을날 뒤란에 노란 잎이
지천으로 깔리면
등 굽은 어머니
홀로 은행을 줍는다
영감님이 주고 가신
쌈짓돈을 챙긴다
무용지물 가보론
미동도 하지 않는 괘종시계가
거실 벽을 차지하고 보물 노릇을 하고 있다
구순을 바라보는 아버지 네 살 적에
쌀 두 가마니 값으로 집에 들어온 귀한 물건이란다
태엽을 감아주면 지금도 충실하게
재깍 재깍 폼나게 움직이지만
시간마다 치는 종소리에 소스라쳐
침묵을 종용하고 말았다
바늘은 언제나 한곳에 머물러 있지만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것만으로도
흐믓해하시니
가보임에 분명하다
무용지물 가보는 시도 때도 없이
여섯 시를 가리킨다
조금 이른 아침인 듯
조금 이른 저녁인 듯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마음이
그 자리를 가리키고 서 있다
다시, 봄
햇살 좋은 봄날이면
평상에 앉아
뜯어온 나물을 다듬으시던 어머니
검게 물든 손톱 끝에
머문 눈길을 알아채시고
양말 몇 쪽 주무르면 금세 없어진다 하셨지
올망졸망 싸서 들려주신 마른나물
먹어 볼 시간도 주지 않고
홀로 먼 길 가신 뒤
어머니의 체취인 듯 간직했던 보따리
해묵은 나물보따리를 풀어헤치니
푸드득 숨을 몰아쉬는
푸성귀의 지난 시간들 메마르게 펼쳐진다
어머니의 손길 고스란히 남아 있다
까맣게 물들었던 손톱이 아른거린다
물에 푹 잠긴 나물들
꿈을 꾸듯 기지개를 켠다
봄을 소환하고 있다
기다림이라 말하지 않는다
떠나거나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면
능내역에 대한 기억은 지워야 한다
기차의 울음을 삼켜버린 그곳
빈 의자 서너 개 역사 문밖에서 졸고
빛바랜 사진 몇 장 후일담처럼 걸려있다
휑한 바람이 배경이 되는 거기
허공에 사선을 긋는 몸짓에는
슬픈 이름을 붙이지 말자
가령, 낙엽이라던가
낙화라던가
바람결에 쫓기는 빗줄기라던가
그냥, 유려한 몸짓이라 말하자
갈증처럼 번지는 기억 속에 떠오르는 이름 있거든
휘파람을 가장하여
되뇌어 보자
비록 그 사람이 능내역에서
마지막 기차를 타고 떠난 사람이 아닐지라도
폐역에서는 우두커니 서 있어도
기다림이라 말하지 않는다
변명처럼 들릴지라도
그것은 마디게 잊는다는 번역어이기 때문이다
족적
밀물처럼 관심에서 밀려나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재봉틀
존재가 새삼스럽다
선심 쓰듯
젖은 걸레질로 묵은 먼지를 걷어내고
코드를 꼽으니 불이 반짝 들온다
수년을 방치했건만
주변까지 훤하게 비춘다
서툴게 쿨럭대는 페달
한나절
천 조각을 만신창이로 만들고 난 후에야
조금씩 착해져 가는
이랑 같은 박음질선
눈밭에 남겨진 발자국처럼
천 위를 걸어간 노루발의 족적
곧음도 휘어짐도 사실적이다
지나온 발자국은 뒤돌아보아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
지금, 내 발자취를 읽기엔
조금 이른 시간
문에 걸린 풍경소리
선달그믐
봉선사의 저녁 범종 소리 듣고 싶어
그곳에 갔습니다
찬바람이 추녀 끝을 맴돌아
풍경의 침묵을 흔들면
도솔천까지 퍼져나가는 범종 소리 사이사이로
풍경도 소리 내어 제 사연을 채워넣습니다
귓속에 맴돌던 풍경소리 아련해질 즈음
인사동 골목에서 자그마한 풍경 하나
인연으로 품었습니다
봄 하늘에 울려퍼지는
종달새처럼 명랑한 소리 가득한 풍경을
바람결이 어루만져 줄 리 없는
출입문에 달았습니다
오늘도
드나드는 여린 기척을 바람 삼아
봉선사의 범종 소리인 듯
내소사의 독경 소리인 듯
잔잔히 흔들리다 여운을 남긴 채
그리움의 소리로 남습니다
봉선사 처마 끝 풍경처럼
그 여자
그 누구보다 높은 하늘을 볼 수 있다고 말하는
여자
다리가 짧아도 그림자는 아름답다고 우기는 여자
배호의 노래를 좋아하지만
이미자가 부른 여자의 일생을 그대로 실천하는
그 여자
참새처럼 지저귀는 동안
눈물보다 수다가 약이 되는 것을 터득하였다
그녀의 언어가
수척해진 것을 눈치챘을 때
물기 없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고백했다
들릴락말락한 작은 소리가
굉음처럼 강하게 귀청을 때렸다
“나, 암이래”
이 건조한 한마디가
온몸의 물기를 다 끄집어 울린다
혀를 움직이는 방법을 잠시 잊은 시간
눈이 젖은 말을 대신한다
벗이여!
참는 것에 이골이 난
내 벗이여
이번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참고 이겨내주오
천금 같은
내 벗이여
붉은 노을
버스를 갈아타려고 내린 환승역에서 마주한
노을이 어쩌자고 저리 붉게 물들어
감탄사가 터지도록 아름답게 보이는지
환승도 잊은 채
노을에 취해 어둠에 젖어 들었다
생의 절반쯤에 서 있다고 여겨지는 지금
어느 한때
저토록 최선을 다해 아름다웠던 순간이 있었는지
누군가에게
감탄사가 되었었는지 궁금해지지만
생각은 하나에 머무르지 않고
빈 가지를 흔드는 바람처럼
상념을 흔들다 흩어진다
한두 대의 버스가 이미 떠났다 해도
다시 도착할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환승역에서는 가능한 일이기에
서성임이 조금 길어질 뿐
쉼표 하나 찍는 일이다
먼저 집으로 돌아간 이들의 창에
불빛이 환하다
최양순 시인
충남 당진 출생
2013년 『시인정신』 등단
시원문학회 회원
공간시낭독회 상임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