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켈리 : 헐리우드 여신에서 모나코 왕비로, 모나코는 부흥했으나 본인은 정작 행복하지만 않았다.
1. 그레이스 켈리는 미국 헐리우드 유명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Grace Patricia Kelly, 1929~ 1982)는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1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나 비교적 부유하게 자랐다.
모델로 경력을 시작한 그녀는 브로드웨이와 텔레비전에서 연기를 했다. 그러다가 1951년 스릴러 영화 ‘14시간’으로 데뷰하게 된다.
1952년에 서부활극 ‘하이 눈’, 그 이듬해 ‘모감보’에 출연했다. 그리고 ‘시골소녀’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탔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을 만나면서 스릴러 영화인 ‘다이얼 m을 돌려라’를 시작으로 ‘이창(rear window)’, ‘도둑잡기’, ‘백조’, ‘상류사회’ 등 히치콕 감독의 수많은 여주인공을 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사실 켈리의 장점은 완전무결한 미모에서 풍기는 정적인 우아함에 있었다. 이 단아한 맵시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녀만의 자산이었다.
2. 모나코 국왕과의 화려한 결혼
1956년 4월 모나코에서 세계 이목을 집중시킨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레이스 겔리와 모나코 국왕 레니에 3세 (1923~2005)와 결혼식으로 1주일간 지속되었다.
(그레이스 26세, 레니에 32세)
세계 각국에서 결혼식을 보기 위해 축하객들과 취재진들이 모여들어 호텔 뿐 아니라 거리에도 사람들이 넘쳐났다.
영국 황실을 비롯한 온 유럽이 비행기, 기차, 승용차, 여객선을 타고 모나코로 향했다.
성당 결혼식장에서 레니에 3세는 고혹적인 웨딩드레스의 꽃문양 레이스에 싸인 그레이스 켈리의 손을 꼭 잡고 입장했다.
곧 이들은 대기하고 있던 백마가 끄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여 신혼여행지인 스페인향 바닷가의 호화 요트에 올랐다.
3. 모나코 부흥을 위해 결혼 시나리오가 짜여지다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 3세의 결혼식에는 미리 준비된 시나리오가 있었다.
일단 모나코는 세계에서 제일 작은 나라인 바티칸시티 다음으로 작은 나라다.
땅덩어리래야 2.2제곱km 정도로 여의도 면적보다 작다. 프랑스 남부 해안가 3km(서울시청~이화여대 정도 거리)가 국토의 전부다.
공용어는 프랑스어이며 인구 3만명 중 프랑스인이 60%이며 순수 모나코인은 16% 안팎이다.
국방, 외교, 경제를 프랑스에 의존하고 있으며 심지어 왕위도 프랑스의 재가를 받는 실정이니 사실상 프랑스의 보호국인셈이다.
1949년 레니에 3세가 즉위하자 프랑스는 모나코를 합병할 움직임을 보였다. 독신인데다 후사도 없으니 이 참에 간단히 합병을 해버리자고 생각을 한 것이다.
또한 그 당시 2차대전이 끝난 시점이라 모나코는 참전국들과 같이 어려운 경제파고에 휩쓸렸다.
그동안 모나코에 공을 들인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는 레니에 3세에게 이 난국을 면하려면 왕비감을 찾으라고 꼬득였다.
고심 끝에 오나시스는 미국 할리우드에서 잘나가는 여배우를 데려다 세기의 결혼으로 띄우고자 했다.
그러면 세계의 이목을 끌어다 프랑스의 모나코 합 병 바람을 간단히 잠재우고,
모나코 왕국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을 모나코 관광산업에 접목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시나리오의 왕비감에 미국의 여배우인 그레이스 켈리가 잡혔다. 인기 절정의 배우이면서 지적 우아함으로 이상적인 왕비감으로 지목됐다.
4. 그녀는 은막의 여왕에서 모나코의 왕비로
오나시스는 더욱 바빠졌다.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 3세 사이를 오가며 그들의 데이트 각본을 짰다.
1954년 드디어 그레이스 켈리는 잡지에 실릴 화보를 찍는다며 모나코로 촬영차 방문을 한다. 그리고 우연인 것처럼 레니에 3세를 만난다.
그녀가 다녀가고 레니에 왕은 줄기차게 러브레터를 썼다. 대서양을 마구 건너갔다.
그 열정에 그녀는 그가 보낸 12캐럿 다이아몬드 반지와 호화요트를 받아들였다. 그레이스 켈리가 청혼을 수락한 것이다.
5. 두사람 결혼쇼로 모나코는 부흥한다.
그레이스 켈리가 모나코 왕비가 된 후, 미국인들의 모나코 여행이 몇 곱으로 증가했다.
자연스레 모나코가 세계적인 관심도시가 되면서 관광수입도 급증했다.
그녀는 공식 행사 외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하게 왕실 생활에 충실했다.
그래도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뉴스가 되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어서 그녀의 헤어, 의상, 가방은 물론 장신구까지 일시에 전 세계 매체로 타전되는 판이었다.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의 치밀한 비즈니스 덕분에 현재 모나코는 탄탄한 관광도시로 잘살고 있다.
명배우의 고전영화를 보듯, 추억을 더듬어 찾는 이들로 북적이기 때문이다.
6. 화려함 속에 숨어있는 우울함
그녀가 왕비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영화계를 마저못해 은퇴해야 했다. 영화배우를 시작한지 5년만의 일이다.
레니에3세는 혹시라도 그녀가 자극을 받을까 봐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 전부 모나코 내 상영을 금지했다.
그녀는 결혼전 동부 뉴욕과 서부 LA를 바쁘게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했던 다작 배우였다. 인구 3억의 나라 미국에서 인구 3만의 모나코에 갇혀 있었으니 갑갑할 만 했다.
레니에 3세와는 영어로 대화를 했지만 일반 국민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어를 배워야 했다. 그녀는 프랑스어를 배우다 어렵다고 여러번 울었다고 한다.
살아온 방식과 가치관이 다른 레니에 3세와의 갈등도 많아서 얼마 지나지 않아 켈리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급기야 우울증 증세까지 보였다.
게다가 시어머니, 시누이와도 사이가 좋지 못해 시집살이를 꽤나 했다고 한다.
켈리는 1957년에 장녀 카롤린 공녀(公女), 1958년에 외아들 알베르 2세, 1965년에 차녀 스테파니 공녀를 낳아 총 1남 2녀를 두었다.
현재 국왕은 알베르2세이다.
7. 해안도로에서 유명을 달리하다
니스와 모나코를 연결하는 그랑코니쉬 해안도로는 영화 ‘나는 결백하다’에서 캐리 그랜트와 그레이스 켈리가 위험한 질주를 벌이던 곳이었다.
1982년 9월14일 모나코 근교의 여름별장에서 왕궁으로 돌아오던 중 이 길을 지나다 갑작스런 뇌졸증으로 차가 벼랑으로 굴러 떨어져 사망했다. 향년 53세.
동승했던 스테파니 공주는 다행히 살아남았다.
- 전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