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학생의 길
제6장 선생님의 학창시절
제2절 선생님의 서울 학생시절
1) 의식주 생활
선생님은 중학교 때 서울에 와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153-33)
선생님이 고향을 18세부터 떠나 지금까지 고향을 잃어버리고 사탄 세계를 수습하기 위해 일생을 거쳐 나오고 있습니다. (147-253)
학생시절에 자취생활을 했습니다. 7년 동안 혼자 자취생활을 했습니다. 서울이 요즘엔 날이 좋지만 그때는 겨울에 영하 21도, 평균 영하 15도가 될 만큼 추웠습니다.
우물에서 두레박질을 할 때, 쇠두레박질을 하게 되면 끈이 끊어지곤 했습니다. 그런 때에 찬 방에서 사는 겁니다. 찬 방에서 자취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는 찬 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때 요를 찬 방에다 깔고 자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그냥 그대로 판이 박힙니다.
이게 일주일을 지워도 안 지워집니다. 무늬가 돋는 판입니다. 추우니까 할 수 없이 전깃줄을 전원에 연결해 열을 내게 해서 썼으나 다리가 탔습니다. 지금 선생님 다리를 보면 여기저기 흠이 있습니다. 다리를 볼 적마다 그때가 생각납니다. 그렇게 절약해서 학비를 못 내는 친구들을 도와 주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손수레를 끌기도 했습니다. (137-283, 51-262)
선생님은 중학교 시절에 점심을 안 먹었습니다. 밥이 없어서 안 먹은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의 사정을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평상시에 수양해 놔야 된다 생각해서 그랬다는 겁니다.
그때는 그저 먹고도 또 먹고 싶은 한창 때입니다. 그런 때에 점심을 안 먹었으니 점심때 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복잡하더라 이겁니다. 친구들은 도시락을 가지고 와서 먹고 있는데, 먼 데 혼자 앉아서 밥도 안 먹고 명상하는 그 자리는 심각한 자리입니다. (50- 308)
선생님은 선생님 자신에 대해서는 참 깍쟁이입니다. 30세 전까지는 새 양복을 사 입은 적이 없습니다. 고물상에 가서 헌옷을 사 입었습니다. 옷은 전부 다 학생복인데 꿰매 입었습니다.
서울 네거리 고물상에 가서 학생들이 입다가 찾아가지 않은 것, 전부 다 옷깃에 때 묻은 것, 기름때 묻은 것, 냄새나는 것을 일부러 택하는 것입니다. 머리는 아무렇게나 하고, 세수도 안 하고, 면도도 안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 다니더라도 아무거나 다 할 줄 합니다. 팬티도 다 만들어 입었습니다. 혼자 살아도 뜻을 이루어야 되겠다 이겁니다. 그 나머지로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 사람입니다. 애국자의 가정에 남편이 수욕을 당하든가 어려움이 있으면 이름도 없이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생활을 해왔습니다. (51-262, 31-260, 137-285)
2) 교회 생활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주일학교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했습니다. 흑석동교회에서도 그랬고, 서빙고교회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때는 추우니까 한강이 얼어서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밤에 그 소리가 들리면 혼자 있으면 무섭습니다.
그런 한강을 건너다니면서 서빙고에 있는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내가 주일학교 학생들을 잘 가르쳤습니다. 지금은 얘기를 재미있게 못 하지만, 그때는 재미있게 했던 모양입니다.
내가 눈물을 흘리면 아이들도 따라서 웁니다. 매번 울고 야단하면서도 그렇게 해주지 않기를 바랄 텐데 따라다니면서 또 해 달라는 겁니다. 그렇게 얘기해 주곤 했습니다. (15- 182)
선생님 학생시절에는 주일학교 선생을 했는데 내가 이름난 주일학교 선생이었습니다. 아동심리를 잘 알았습니다. 내가 경험해서 아는 것입니다. 내가 슬플 때는 제일 슬픈 장면을 엮어 가는 겁니다. 책도 필요없습니다. 얘기하면 장편소설입니다. 감옥에 들어가도 매일같이 소설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건 즉흥 장편입니다.
선생님은 어디 가서든지 하루에 열 번, 백 번을 설교하더라도 막히지 않습니다. 내가 선생님 아닙니까? 통일교회의 문선생님이랍니다. 할아버지 앞에서도 문선생이고 말입니다. 박사 앞에도 문선생님이고, 꼬마한테도 또 문선생님입니다.
꼬마한테도 내가 잘합니다. 꼬마하고도 잘 놀고, 할머니하고도 잘 놉니다. 또 바느질하는 것도 잘 합니다. 뜨개질도 못 하는 게 없습니다. 내 옷을 내가 만들었습니다. 양말 같은 건 하루저녁이면 한 두어 켤레, 서너 켤레를 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139-51)
3) 돈을 아껴 걸어다니시다
학생 때 선생님은 전차를 타고 다니지 못했습니다. 절대 안 타고 다녔습니다. 그때 전차비가 5전씩이었는데 반드시 걸어다녔습니다. 그래 가지고 왕복 10전을 모아 길가에서 적선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때는 거지들을 쭉 관찰하는 겁니다.
옛날 노량진 고개하고 화신백화점 옆 골목길에는 거지들이 많았습니다. 갈 때 한번 쓱 보고, 돌아올 때 다시 한번 봐서 그중에서 나이 많은 사람과 젊은 사람을 가르는 것입니다.
거지들 가운데도 새파란 젊은 녀석들에게는 안 주고 불쌍한 사람에게 주는 겁니다. 봉사라든가 나이 많은 사람을 골라 적선하는 것입니다. 적선도 그렇게 해주었습니다. (50- 308)
내가 학생시절 때 여름에 흑석동에서 서울역까지 걸어다니던 생각이 납니다. 친구들은 어디를 가더라도 전차를 타고 다녔지만 난 걸어 다녔습니다. ‘내 갈 길은 달라. 너는 이 길을 가서는 안 돼’ 이랬습니다.
역전에 가면 적선을 구하는 그들 앞에 쌍수로 돈을 주면서 ‘내가 지금 주는 것이 적지만 이 돈이 천만 배로 불어 거지같은 이 민족이 해방의 한날을 맞을 수 있게끔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신음과 도탄 가운데에 있는 서글픈 민족의 사정을 알고, 그 민족의 수난역사에 피땀을 흘린 자기의 일족을 알고, 그런 자기 일가를 알고, 그런 자기의 부모를 알아야 됩니다.
내가 일본에 갈 때 서울역에서 시모노세키까지 코트를 둘러 쓰고 통곡을 하고 간 것이 몇 시간이었더냐?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뜻 가운데서 당신이 갈 수 있는, 발돋움해 갈 수 있는 굄돌을 놓기 위해서는 사랑의 정열에 불타는 심정이 녹아나서 흐르는 눈물 자국을 통해야 된다는 것을 내가 알았사오니 그런 길을 가게 해주소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높은 자리부터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빈민굴로부터, 인간의 말단 자리부터 더듬어 갔습니다. 생활고에 허덕이는 인간상을 다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어떤 분야든지 다 거쳤습니다. 노동도 해 봤고, 농사도 지어 봤고, 뱃사람 노릇도 해 봤고, 안 해 본 것이 없습니다.
내 일생의 천추의 한과 당신의 서글픈 모든 것을 이 아들이 맞아 가지고 다 해결하겠다고, 6천년 역사 가운데 당신의 심정에 그 무슨 한이 남이 있거든 이 자식 하나 때려 놓고, 천만 대 때려 놓고 풀 수 있는 그 마음을 가져 달라고 하면서 그런 길을 찾아왔습니다. (127-30)
4) 학습
옛날에 선생님이 공부할 때에는 한 페이지를 읽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비밀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 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기도도 그런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39- 62)
선생님은 다방면에 소질 있는 사람입니다. 그림도 잘 그립니다. 내가 열두 살 때 글방에 가서 체(體) 글을 써 준 사람입니다. 한다하면 못 하는 게 없습니다. 공부를 한다 할 때는 하루저녁에 2백 페이지의 책을 외운 사람입니다. 지독하다면 지독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학술 분야로 나갔으면 벌써 누구 못지않게 됐을 것입니다. 누구 부럽지 않게 됐다 이겁니다. 그런 머리를 가졌습니다. (68-66)
선생님은 전기공학을 한 사람인데, 학교에 다닐 때 질문하면 교사들이 전부 곤란해 했습니다. 선생님 얼굴만 보면, ‘저 녀석이 또 무슨 질문을 할까’ 이랬습니다. 자꾸 물어대니까 자기가 실력이 딸렸던 겁니다. 그런 무엇이 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되어 세계를 주름잡을 수 있는 기반을 닦은것입니다.
오늘의 티타늄 공장도 그렇게 해서 있게 된 것입니다. 화공(化工)으로서의 최고의 자리에 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라믹에도 관심 을 갖고 있습니다. 앞으로 모든 과학문명의 재료와 소재에는 세라믹이 들어갑니다. 거기에서 첨단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165-186)
5) 학생 때의 생활
학생시절에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교복을 벗어던지고 노동판에 가서 일했습니다. 내가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석탄을 나르는 일도 해보았고, 배도 타 보았고, 머슴살이도 해봤습니다. 온갖 일을 다 해보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락이 어떤 것인가를 다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고락을 겪으며 살고 있는 인간들을 해방시키는 책임자가 되어 이들을 완전히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37- 36)
선생님은 학생시절에 영화를 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영화 구경도 잘 하러 갈 것입니다. 극장 앞에도 다니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추악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걸 보고 감염되지 않고 그들을 지도할 수 있는 주체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곳도 거쳐가야 됩니다.
그게 왜냐? 내가 그 환경을 넘어가서, 극장이라든가 이런 곳을 아무리 다니더라도 거기에 걸리지 않고 거기에서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선을 넘어서고 나서야 되기 때문입니다. (93-278, 184-247)
6) 풍부한 훈련과 경험을 쌓으시다
선생님이 안 해본 것이 없습니다. 저 산중에 들어가서 숯 굽는 것까지 배웠습니다. 탄광의 동발을 매는 것도 전부 다 배웠습니다. 굴을 못 파나, 노동판에 가서 짐 지는 걸 못 하나 다 잘 합니다.
‘이놈의 자식아!’ 해서 사흘도 안 되어 친구 하는 겁니다. ‘이 자식아, 뭐야?’ 하고 부려먹지 내가 부림당하지 않는다 이겁니다. 노무자 합숙소에 가면 십 장도 한방에 때려잡습니다.
‘이 자식아, 큰소리하지 마. 말 들어 ! 이 놈의 자식들 같으니라구. 너희들이 전부 다 학생들 돈 착취하고 안 되겠다’ 해서 꼼짝 못하게 합니다. 그래 놓고는 구슬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을 지도하자면 일방통행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낄 때는 제껴야 되고, 후퇴할 때는 후퇴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걸 전부 다 자유자재로,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경험을 많이 쌓아야 됩 니다. (143-297)
내가 바느질도 잘 합니다. 뜨개질도 잘 하고, 못 하는 게 없습니다. 우리 누나들 시집갈 때 내가 다 뜨개질도 가르쳐 주고 그랬습니다.
(186-310)
선생님은 손재주가 있습니다. 한 번만 보면 그대로 합니다. 문을 짜라고 해도 짤 수 있습니다. 내가 목수도 해봤습니다. 부산에 있을 때 미군부대에서 목수 노릇을 했습니다.
목수질하는 것을 옛날에 봤기 때문에, 눈썰미가 있어서 잘 한다는 것입니다. 첫날 가서 전부 다 합니다. 건축현장에 나가면 집 짓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대번에 다 안다는 것입니다. 배워서 하는 게 아닙니다. 사리를 판단해 원칙을 따져서 하면 전부 통하게 돼 있습니다.
(68-67)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