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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인공폭포로만 받는 폭포수은혜>의 줄거리:
폭포수 같은 은혜는 오로지 인위적으로 낙차를 조성하고 물을 흘려보냄으로써 만들어지는 인공폭포를 통해서만 받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안에서 우리는 오직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지요. 그런데 이 믿음이 바로 되면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인 샘인데, 이 믿음이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낙차를 조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폭포수 같은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거지요.
인공폭포로만 받는 폭포수은혜
(예레미야 17:1~27)
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8.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11.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인공폭포로만 받는 폭포수은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인공폭포로만 받는 폭포수은혜’
폭포수와 같은 은혜를 받고 싶다면 마음에 인공폭포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자연적으로 은혜의 폭포수가 떨어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인공폭포는 인위적으로 낙차를 조정해서 물을 떨어지게 합니다. 그런데 은혜에도 낙차가 필요합니다. 요한복음 1장 16장절을 보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앞의 은혜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얻게 되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말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어떤 대상이나 상황보다도 하나님을 더 우선적인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은혜 위에 또 은혜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음이 분명해지면 그 은혜가 폭포수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원래 폭포가 있던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해 낙차가 생겨남으로써 폭포가 만들어지고 그 은혜가 삶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요한은 ‘은혜 위에 은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를 다시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앞선 은혜를 받으면 마음에 인공폭포가 생겨납니다. 그렇게 인공폭포가 만들어진 마음에는 폭포수처럼 은혜가 쏟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인은 날마다 순간마다 인공폭포를 만들어 내는 자입니다.
이전 설교에서 히스기야 터널에 대해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산헤립의 침공을 대비해서 예루살렘성 밖의 기혼 샘으로부터 예루살렘성 안에 있었던 실로암 연못으로 물을 끌어들입니다. 장기간 포위되어 식수난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이러한 터널을 팠던 것입니다. 이 터널은 S자 모양으로 길이가 535미터나 되었는데 지금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수원지 기혼 샘으로부터 실로암 연못까지의 고도 차이가 2미터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고작 2미터 높이로 535미터의 수로를 만들어야 하니 아주 균등하고 완만하게 낮아져야만 물이 흐를 수 있었습니다. 비록 완만했지만 어쨌든 낙차가 있었기에 물이 흘러들어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우리나라의 양화대교 근처에 있는 인공폭포를 보면 이와는 전혀 양상이 다릅니다. 높이가 12미터, 폭이 15미터가 되는 주 폭포가 있고 그 밖에도 총 6개의 폭포가 98m에 걸쳐서 늘어서 있습니다. 인공적으로 12m 낙차를 만들어서 물을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히스기야의 터널을 만들든지 인공폭포를 만들든지 날마다 물을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이 폭포수와 같은 은혜를 경험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히스기야의 터널과 같이 아주 격차가 미미한 터널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가 하나님을 바르게 믿어서 하나님의 올바른 자녀가 되면, 마음은 인공폭포 같은 큰 낙차를 가지게 되고 폭포수와 같은 은혜를 받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문제나 대상들을 만날 때마다 인공폭포를 만들어서 폭포수 같은 은혜를 경험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막의 떨기나무 같은 사람과 물가에 심긴 나무 같은 사람’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사막의 떨기나무 같은 사람은 13절에 나오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반대로 물가에 심긴 나무 같은 사람은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의지하고 의뢰하는 사람입니다.
12절을 보면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라고 하나님을 높이 계신 분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3절에서는 이 높으신 하나님께서 ‘생수의 근원’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곳으로부터 피조세계로 생수를 흘려보내시는 장면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이렇게 쏟아지는 생수와 같은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하나님을 떠난 자는 사막의 떨기나무처럼 은혜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금 생각해봐야할 점이 있습니다.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고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사람이 어떻게 버리고 떠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생수가 아래로 흘러내릴 것이고 하나님의 눈길과 뜻이 피조세계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피한다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것이 앞서 말씀드린 낙차와 연결되는 문제입니다. 사람이 앞뒤나 좌우로 움직이며 살아가는 삶은 평면상의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평면상의 피조세계에서는 결코 하나님을 피할 수가 없는데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피해서 살아갑니다. 높은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생수의 은혜가 내려오는데, 그 은혜를 피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 같은 높이가 되거나 더 높아지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피하고 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만큼 높아진다는 것일까요?
제가 살아봐서 알지만 달동네에는 수돗물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수원지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급수차가 와서 물을 공급해줘야만 합니다. 물론 아파트처럼 펌프로 물을 끌어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달동네처럼 물은 높은 곳으로는 흐르지 못합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아진 마음에는 은혜가 흐를 수 없어 사막의 떨기나무처럼 되어버리고 맙니다.
본문 5절에 높아지는 원인이 나옵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믿는 것은 곧 인간사회에서 정한 가치에 따라 궁극적인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려는 모습입니다. 또 육신으로 힘을 삼는 것도 인간사회에서 성공하고 번영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의 남 유다 같은 경우에는 앗수르의 침공에 대비해서 애굽에 손을 벌리고 있습니다. 우리로 이야기하자면 인간관계에 힘을 쏟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의뢰하고 의지하게 되는 이유는 인간 세상에 충분한 만족과 기쁨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11절을 보면 재미있는 비유가 나옵니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단순히 부정축재를 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은 아닙니다. 자고새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생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자의 비유로 사용된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부정축재 하는 자들과 같이 혹은 자고새와 같이 살아가며 스스로를 은혜 받지 못하는 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자고새는 자기가 낳지 않은 알을 품지만 이렇게 태어난 새는 곧 떠나가고 맙니다. 부정축재자도 자기가 가져서는 안 되는 돈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그 돈은 반드시 자기를 떠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높아져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처럼 되면 사막의 떨기나무처럼 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바로 자고새나 부정 축재자들처럼 내가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가져서는 안 되는데 가지려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전에 삼각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삼각관계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나와 세상과 하나님이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곧 나의 삶의 문제나 과제들입니다. 이 삼각관계 안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높은 자리에서 생수를 솟아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때에 내가 높아지면 삶의 문제들에 하나님의 생수가 임할 수가 없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내 곁에 계십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처럼 높아지면 나와 돈 문제도 하나님의 생수의 근원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은혜의 생수를 접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 삼각관계 안에서 높아지는 이유는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A. 마이클 슈메이트의 “예술가로 살아남기”라는 책이 있는데, 여기서 마른 우물에 빠진 노새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늙은 노새 한 마리가 밭 가운데를 지나가다가 마른 우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노새를 구하기 위해 방법을 생각해보았지만 묘안이 서지를 않았습니다. 우물에 빠진 노새가 계속해서 처량하게 울고 있는데 결국 주인은 결단을 하고 동네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우물도 말라서 사용할 수가 없고 늙은 노새가 처량하게 우는 것을 계속 지켜볼 수도 없으니 우물을 메워서 노새를 안락사 시키기로 한 것입니다. 이웃사람들도 이에 수긍하고 흙을 우물 안으로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노새의 입장에서는 생매장의 위기를 맞게 되었으니 공포에 질려 더욱 울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노새가 조용해졌습니다. 주인은 노새가 죽었는지 궁금해서 우물을 들여다보았더니 놀랍게도 노새는 멀쩡했습니다. 노새는 흙이 떨어질 때마다 몸을 흔들어서 흙을 털어버리고 바닥에 쌓이는 흙을 밟아다지면서 조금씩 위로 올라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노새는 우물 밖으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킨 긍정적인 예로써 자주 사용되는 예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높아질수록 그로 인해 상상도 못할 생의 손해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노새이고 마른 우물은 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흙더미는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 이 세상의 문제나 대상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2절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너무나도 과격한 요구입니다. 어떻게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은 세상의 문제나 대상들을 마음에 담고 다져나가는 것입니다. 예화에서 우물에 흙을 채워 넣으면 노새가 발로 밟아다지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될수록 마음의 위치는 높아집니다.
집안 문제, 나라 문제, 건강 문제, 직장 문제, 취직 문제, 결혼 문제, 노후 문제 등과 같은 문제들을 마음에 담고 생각하는 동안 나는 노새가 됩니다. 그 문제를 책임져야 하고 해결해야만 된다고 인정하는 동안 쌓인 흙을 다져서 밟고 올라서는 것처럼 마음의 위치는 높아집니다.
나와 세상과 하나님의 삼각관계 사이에서 돈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때에 돈 문제를 마음에 끌어들이면 해결할 방법을 생각하게 됩니다. 발로 다지는 것이고 나는 하나님처럼 높아지게 됩니다. 본래 내게 발생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마음 바깥에 있는 것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문제를 알로 비유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이 품어야 될 하나님의 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고새처럼 그 알을 품습니다. 부정축재자가 타인의 돈을 자기 돈으로 둔갑시키듯이,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일을 나의 일로 둔갑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심각한 문제인데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로써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본래 인간은 육체로 만나는 이 세상의 문제를 마음에 담아서는 안 되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이 삼각관계를 영화의 한 장면으로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한 여인과 두 남자가 있습니다.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동안 팽팽한 긴장과 갈등이 생겨납니다. 결국 두 남자는 서로 권총을 들고 결투를 벌이게 됩니다.
나와 하나님과 세상의 삼각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의 위치에서는 배우자의 문제, 돈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 직장 문제, 결혼 문제 등의 어떤 것이든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는 여인입니다. 하나님이 문제를 품으시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도 이 문제를 품겠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대등한 높이가 되어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삶은 추악하기까지 합니다. 이 삼각관계에서 세상을 차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동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만 존댓말일 뿐 기도로 하나님을 구슬립니다. “하나님!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본 결과 이렇게 해주셔야 되겠습니다. 제가 말하는 대로 능력을 발휘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높은 위치가 되어서 명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에는 결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가 흐를 수 없을뿐더러 사막의 떨기나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이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세상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마음에 받아들입니다. 주인과 종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주인은 문제를 마음에 담지만 종은 주인의 생각과 뜻을 마음에 담습니다. 충성된 종은 절대로 문제를 마음에 담지 않습니다. 마음에 담는다면 주인의 자리를 넘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럴 때에 세상의 문제가 생기면 그것은 누구의 마음에 담겨야 할까요? 그 문제가 알이라면 우리는 자고새처럼 그 알을 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운행하다’라는 말은 원문에서 암탉이 알을 품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이미 마음에 품고 계십니다. 그 문제를 알로 품으시고 부화시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예정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물과 같아서 아래로 흐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문제의 알을 빼앗아서 품고 있습니다. 우물 속의 노새가 흙을 다져서 올라가듯이 문제들을 계속 생각하며 하나님의 높이까지 올라갑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내가 마주한 모든 문제들에 대해 알고 계시고 뜻한 바가 있으십니다. 내가 낮은 곳에 머물고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와 내 문제에 대해 은혜의 생수를 흘려보내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에 물가에 심긴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지 못하기에 사도 바울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은 곧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를 안식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안식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21절을 보면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라고 하였습니다. ‘짐을 지지 말라’는 것은 세상 문제에서 마음을 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안식일의 회복입니다.
행동하는 이유는 곧 마음에 담은 것을 이루기 위한 육체의 움직입니다. 안식일에 아무런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은 곧 마음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러한 안식일의 의미를 인생의 모든 순간에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삼각관계에서 세상의 문제에 대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의 위치는 그만큼 낮아집니다. 십자가에서 확실하게 죽을수록 낙차는 커집니다. 간신히 죽으면 히스기야의 수로처럼 2미터의 격차밖에 나지 않는 상태가 될 것이고, 확실하게 죽으면 양화대교의 인공폭포처럼 은혜가 쏟아져 내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손과 발에 못 박히시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옆구리에 창을 찔리시고 온 몸이 채찍질을 당하시고 죽으셨던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도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나의 마음에 인공폭포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폭포수 같이 임합니다. 그럴 때에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도 하나님의 폭포수와 같은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듯 안 죽은 듯 십자가의 예수님과 나의 마음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히스기야의 수로처럼 완만하고 미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우선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음에 담지 않으면 나는 낮아집니다. 반대로 건강이라는 문제를 마음에 담고 있는 동안에는 나의 위치가 하나님처럼 높아지게 됩니다. 이렇게 높아진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병 고쳐 달라는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심지어 나는 내게 무슨 병이 있는지 몰라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아시면서도 병이 나게 하신 것이라면 그에 대한 뜻이 있으시겠지요. 결코 하나님이 졸고 계시던 사이에 생겨난 실수는 아닙니다. 이 문제는 본래 하나님이 품으셔야 하는 알입니다. 내가 자고새처럼 그 알을 품으면 부정축재자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삼각관계에서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세상의 문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이루어져 갈 알입니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될 때에 낮아져서 나도 문제도 폭포수 같은 은혜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마른 우물에 빠진 노새와 반대라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내 마음은 우물이고 나는 노새입니다. 쏟아 부어지는 흙은 내 마음에 담는 이 세상의 문제들입니다. 노새는 흙을 밟고 나올 수 있었지만, 우리는 세상을 다지며 높아질수록 사막의 떨기나무처럼 될 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세상과 하나님과 삼각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에 마음으로 항상 주님을 보시면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낮아지면 인공폭포와 같이 은혜가 쏟아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안식의 의미를 완성시키신 주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삼각관계로 이어지는 생의 모든 순간에 십자가에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히셨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셨으며, 채찍으로 온 몸을 맞으셨고, 옆구리는 창에 찔리신 주님의 모습이 내 모습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를 통해 낮아져서 하나님의 폭포수 같은 은혜가 늘 임하는 삶이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