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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헌(貞軒)의 묘지명(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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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을묘년1795 봄은 우리 정종대왕(正宗大王)께서 즉위하신 지 19년째이다. 간신(奸臣) 정동준(鄭東浚)이 이미 주살(誅殺)되니 왕강(王綱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기강)이 다시 떨치게 되었다. 상(上)이 인정문(仁政門)에 납시어 군신(群臣)의 조하(朝賀)를 받으실 적에 대단히 노하여 큰 소리로 이르기를,
“조정에 있는 백료(百僚)들은 나의 고명(誥命)을 들으라. 내가 오늘 소인을 물리치고 군자를 등용하여 황천(皇天)과 조종(祖宗)의 권명(眷命)을 받들어 호선 오악(好善惡惡)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백성의 뜻을 크게 안정시키려 하노라.”
하니, 모든 신하들은 두려워 떨며 엄숙한 모습으로 삼가 왕명(王命)을 들었다. 이때 상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신(臣) 채제공(蔡濟恭)을 기용하시어 좌의정(左議政)에 제수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 신 용(鏞)에게 앞으로 나와 뽑게 하시어 전(前) 대사성(大司成) 신 이가환(李家煥)을 발탁하여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제수하시니 중외(中外)가 흡족해 하며 ‘선류(善類)가 조정에 모였다.’하였다.
한 달이 지난 뒤 상께서 신 가환과 신 용을 불러 이르기를,
“화성(華城)은 바로 우리 장헌(莊獻)의 묘소가 있는 곳이라 금년 봄에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세자의 원(園)을 참배(參拜)하고 왔다. 앞으로 10년이 지난 뒤 나는 거기서 노년을 보낼 것이므로 화성에 노래당(老來堂)을 지었으니 이 화성의 일은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원(園) 주위의 식수(植樹)와 궁전(宮殿)ㆍ대사(臺榭 망루)의 축조(築造)와 성지(城池)ㆍ갑병 (甲兵)의 수선과 양곡ㆍ전포(錢布)의 저축에서부터 정관(亭館)ㆍ우전(郵傳)과 노부(鹵簿)ㆍ희뢰(餼牢)에 이르기까지 대소사(大小事)를 막론하고 모두 정리하고 부정(簿正)하여 나라의 전례(典禮)를 밝힐 것이다. 가환아, 그대는 박식(博識)하니 이 일을 잘 맡아하라. 용(鏞)아, 그대는 민첩하니 가환을 도와 일을 처리하라. 규영부(奎瀛府)는 왕의 거처와 가까우므로 매우 엄숙한 곳이니, 그대들은 이곳에 머물면서 놀고 쉬며 학문하라. 그대들에게 궁중(宮中)의 술과 진귀한 찬과 국과 귤과 등자(橙子)와 말린 고기와 엿을 내릴 것이니, 마시고 먹으며 두터운 은혜에 젖으라.”
하시었다. 신들은 엎드려 은혜에 감읍하며 공손히 명을 받들었다. 며칠 뒤 상화조어연(賞花釣魚宴)을 베풀 적에 상께서 말에 오르신 뒤 구마(廐馬)를 내어오라 명하시어 우리에게 타고 따르게 하셨다. 신 제공ㆍ신 가환과 신 용은 상을 따라 청양문(靑陽門)에서 담을 끼고 동쪽으로 석거각(石渠閣)에 다다라 말에서 내렸다. 거기서 부용정(芙蓉亭)으로 가서 낚시질하며 운(韻)을 내어 시(詩)를 지었고, 영화당(映花堂)으로 돌아와서 활을 쏘았다. 저녁이 되자 상께서 촛불을 주시며 원(院)으로 돌아가라 하시었다.
이해 가을에 진산 현감(珍山縣監) 이기양(李基讓)을 부르시어 시험해 보시고는 사제(賜第)하여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특별히 제수하시니, 이때는 소인의 도가 쇠하고 군자의 도가 성하여 태화(太和 음양이 조화된 기운)가 함육(涵育)하고 만물이 왕성하던, 진실로 빛난 일치(一治)였다. 5년 뒤인 기미년 봄에 신 제공이 죽고 다음해 6월에 상이 승하하셨다. 그 다음해 신유년 봄에 화(禍)가 일어나서 신 가환은 옥사(獄死)하고 신 기양은 단천(端川)으로 귀양가고 나는 장기(長鬐)로 귀양갔다. 이해 겨울에 악인(惡人) 목만중(睦萬中)ㆍ홍낙안(洪樂安)ㆍ이기경(李基慶) 등이 용사(用事)하여 신 제공의 관작을 추탈하고 다시 신 가환의 죄를 논하여 가율(加律)을 청하고 또 나를 옥에 가두고 죽이고자 하였으나, 여러 대신이 구해준 덕에 강진(康津)으로 귀양갔으니 이것이 그동안에 있었던 영고 성쇠의 대략이다.
아, 하늘은 이미 우리 선대왕(先大王 정조)같이 총명 예지(聰明睿智)한 분을 내어 군사(君師)로 세우고 또 몇몇 현준(賢俊)을 내어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나 일대(一代)의 장관(壯觀)을 이루게 하더니 다시 전복(顚覆)시켜 총록(寵錄)을 잘 마치지 못하게 하였으니, 하늘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18년 뒤인 무인년(1818, 순조 18)가을에 내가 살아 돌아와서 비로소 몇몇 명신(名臣)의 행적을 서열(敍列)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채공(蔡公)은 이미 묘비(墓碑)와 묘지(墓誌)가 있기에 그만두고 이공(李公)의 행적을 기록하여 지문(誌文)을 짓는다.
공의 휘(諱)는 가환(家煥), 자는 정조(廷藻)이니 여흥 이씨(驪興李氏)이다. 이씨는 조선조에 이르러 대대로 혁혁(赫赫)하였고 그 종족(宗族)이 옛 정릉골[貞陵巷]에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정릉 이씨(貞陵李氏)라고도 칭한다. 10대조 계손(繼孫)이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고, 5대조 소릉(小陵) 상의(尙毅)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지냈으며, 그 손자 매산(梅山) 하진(夏鎭)이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냈다. 매산의 아들 여섯 사람 중에 셋이 현달하였으니, 맏이인 옥동(玉洞) 서(漵)는 찰방(察訪)을 지냈고, 둘째인 섬계(剡溪) 잠(潛)은 평민으로 상소(上疏)하였다가 죽음을 당하였으나 뒤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追贈)되었으며, 막내인 성호(星湖) 익(瀷)은 경학(經學)으로 천거되어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지냈다. 성호의 형 침(沈)이 바로 공의 조부(祖父)로서 계부(季父) 명진(明鎭)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침이 용휴(用休)를 낳았는데, 용휴는 진사(進士)가 된 뒤로는 다시 과장(科場)에 들어가지 않고 문장에 전념하여 우리나라의 속된 문체(文體)를 도태하고 힘써 중국의 문체를 따랐다. 그의 문장은 기이하고 웅장하여 우산(虞山) 전겸익(錢謙益)이나 석공(石公) 원굉도(袁宏道)에 못지 않았다. 혜환 거사(惠寰居士)라 자호(自號)하였다. 원릉(元陵 영조(英祖)의 능호(陵號)) 말엽에 명망이 당시의 으뜸이어서 학문을 탁마하고자 하는 자들이 모두 찾아와서 질정(質正)하였으므로, 몸은 평민의 열(列)에 있으면서 30년 동안이나 문원(文苑 문단(文壇))의 권(權)을 쥐었으니 예부터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배들의 문자(文字)에 대해 흠을 너무 심하게 끄집어냈기 때문에 속류(俗流)들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다.
우리 성호 선생은 하늘이 내신 빼어난 호걸로서 도덕과 학문이 고금(古今)을 통하여 견줄 만한 사람이 없고, 교육을 받은 제자들도 모두 대유(大儒)가 되었다. 정산(貞山) 병휴(秉休)는《역경(易經)》과 삼례(三禮 《예기(禮記)》ㆍ《의례(儀禮)》ㆍ《주례(周禮)》를 전공하고, 만경(萬頃) 맹휴(孟休)는 경제(經濟)와 실용(實用)을 전공하고, 혜환(惠寰) 용휴(用休)는 문장을 전공하고 장천(長川) 철환(嚞煥)은 박흡(博洽)함이 장화(張華)ㆍ간보(干寶)와 같았고, 목재(木齋) 삼환(森煥)은 예(禮)에 익숙함이 숭의(崇義)와 계공(繼公) 같았고, 염촌(剡村) 구환(九煥)도 조부(祖父)의 뒤를 이어 무(武)로 이름이 났으니, 한 집안에 유학(儒學)의 성함이 이와 같았다.
공은 여러 종형제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여러 형들의 보살핌이 매우 깊었다. 더구나 공은 기억력이 뛰어나 한번 본 글은 평생토록 잊지 않고 한번 입을 열면 줄줄 내리 외는 것이 마치 치이(鴟夷 호리병)에서 물이 쏟아지고 비탈길에 구슬을 굴리는 것 같았으며, 구경(九經)ㆍ사서(四書)에서부터 제자 백가(諸子百家)와 시(詩)ㆍ부(賦)ㆍ잡문(雜文)ㆍ총서(叢書)ㆍ패관(稗官)ㆍ상역(象譯)ㆍ산율(算律)의 학과 우의(牛醫)ㆍ마무(馬巫)의 설과 악창(惡瘡)ㆍ옹루(癰漏)의 처방(處方)에 이르기까지 문자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한번 물으면 조금도 막힘없이 쏟아놓는데 모두 연구가 깊고 사실을 고증하여 마치 전공한 사람 같으니 물은 자가 매우 놀라 귀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태학(太學)에 유학(遊學)하였는데, 월과(月課) 시험에 계속 시(詩)가 합격되어 원근에 소문이 자자하였더니, 얼마 되지 않아 회시(會試) 양장(兩場)에 합격하였다. 또 정종의 즉위를 축하하는 증광시(增廣試)에도 급제하여 오래지 않아 제조(諸曹)의 낭중(郎中)이 되고, 이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을사년(1785, 정조 9)에는 봉상시 정(奉常寺正)으로 지제교(知制敎)에 제수되어 명을 받들어《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하였는데, 어연(御筵)에 오를 적마다 자세하고 분명하게 의견을 개진(開陳)하고 인거(引據)가 해박하였다. 하루는 상이 그가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이르기를,
“저런 사람을 어찌 끝내 등용하지 않으리오.”
하니, 듣는 자들은 크게 꺼리면서도 그가 크게 등용될 것을 알았다.
이때 번옹(樊翁 채제공)이 당인(黨人 노론(老論))에게 쫓겨나 도성 밖에 살고 있으니 채홍리(蔡弘履)ㆍ목만중(睦萬中) 등이 모두 번옹을 배반하고, 지조가 확실치 않은 자들은 둘 사이를 오가며 눈치를 살폈으나 공은 홀로 청의(淸議 정론(正論))를 가지고 정범조(丁範祖)ㆍ유항주(兪恒柱)ㆍ윤필병(尹弼秉) 등과 함께 지조를 굳게 지켜 변치 않았다. 뒤에 번옹이 10년 동안 집정(執政)할 때 도움이 된 것은 모두 이 몇 사람의 힘이었다. 그 간에《대전통편》을 편찬한 공로로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이내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나갔다. 정주로 나가서는 정치가 깨끗하고 명성이 드높았으나 시론(時論)에 영합하는 어사(御史)는 도리어 공에게 죄가 있다고 아뢰어 파직시키고 금화현(金化縣)으로 귀양보냈다.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 뒤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포천(抱川)에서 여묘살이를 할 적에 친구 중에 번옹을 배반하는 자가 날로 증가한다는 것을 듣고는 사태가 급박하게 되었다면서 상복을 입은 채 서울로 와서 유공(兪公)과 상의하였다. 마침 김복인(金復仁)이 개연히 상소하여 번옹의 억울함을 변명하고 드디어 배신한 무리들을 공격하였다. 이에 상이 크게 기뻐하며,
“가려운 데를 긁는 것 같다.”
고 비답(批答)하셨다. 이때 상은 번옹이 친구들의 마음을 다 잃어 우익이 없다고 여겼다가 김공(金公)의 상소(上疏)를 보시고는 비로소 청론(淸論)을 지키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아셨다.
건륭 무신년(1788, 정조 12) 봄 번옹이 정승이 되고, 공도 승선(承宣 승지(承旨))이 되어 자주 정원(政院)에 들어갔다. 상이 한가할 때 공을 인견(引見)하시고 삼한(三韓)과 사군(四郡) 이후의 우리나라 고사(故事)를 물으시면 공은 번번이 이십삼사(二十三史)를 인용하여 막힘없이 대답하니, 상은 크게 경탄하시고 물러나 좌우에게 이르기를,
“이가환 같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학사(學士)이다.”
하셨다. 신해년(1791, 정조 15) 겨울에 호남옥사(湖南獄事)가 일어나자 홍희운(洪羲運)이 번옹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올렸다.
“진신(搢紳 벼슬아치)과 장보(章甫 유생) 중에 총명하고 지혜롭다는 자들이 모두 서교(西敎)에 빠졌으니, 장차 황건(黃巾)과 백련(白蓮) 같은 난이 있을 것입니다.”
상은 번옹에게 명하여 관서(官署)에 가서 목만중ㆍ홍희운ㆍ이기경(李基慶) 등을 불러 호남옥사의 사실 여부를 조사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장악원(掌樂院) 조사 사건이다. 며칠 뒤 이기경이 상중(喪中)에 상소하여 조사한 일이 공정치 못하였다고 공격하니, 상은 크게 노하여 이기경을 경원(慶源)으로 귀양보냈다.
다음해 봄 내가 옥당(玉堂)으로 들어갔고, 겨울에는 공이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제수되었다. 공이 시장(試場)을 열어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이려 하니, 섬계(剡溪 이잠(李潛)의 호임)를 미워하는 요로(要路)의 자제들이 시장으로 들어오지 않으므로 공이 과시(課試)를 그만두려 하자, 상이 그 소문을 듣고 이르기를,
“저희들 스스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엄히 신칙(申飭)하여 공사(公事)를 집행하라.”
하시므로 공은 애써 과시를 마쳤다. 그러나 공의 화(禍)는 실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부교리(副校理) 이동직(李東稷)이 시론(時論)에 영합하기 위하여 상소하여 문체(文體)를 가지고 공을 헐뜯어 반시(泮試 성균관의 과시(課試)임)를 중지시키고자 하니, 상이 다음과 같이 비답하였다.
“너희가, 재신(宰臣) 이가환의 문체는 경전(經傳)을 경시한다는 것으로 화파(話欛 이야기 거리)를 삼았다. 나도 한마디 하려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던 참인데 그대의 말을 들으니 마치 가려운 데를 긁는 것과 같도다. 근일 내가 치세(治世)의 희음(希音)을 듣고자 하여 몇몇 젊은 문신(文臣)을 일차로 등용하여 이끌어 주고 경각(警覺)시켰더니, 남공철(南公轍)ㆍ김조순(金祖淳)ㆍ이상황(李相璜)ㆍ심상규(沈象奎) 등이 혁혁한 문벌(門閥)로 인하여 순식간에 성균관 대사성과 홍문관ㆍ예문관 제학이 되어 공거(貢擧)하면서 많은 선비를 그르쳤고, 말을 윤색하여 왕언(王言)을 욕되게 하였도다. 이는 이른바 훌륭한 악기로 비속한 음악을 연주하고 좋은 술을 와기(瓦器)에 붓는 격이었다. 태학과 관각(館閣 홍문관과 예문관)을 이들에게 맡겼다가 망쳤으니, 변방으로 귀양가는 것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가환은 그 집안이 본래 좋은 축에 들었으나 오랜 세월을 불우하게 지냈으므로 정숙(精熟)한 문예(文藝)를 쌓고도 스스로 조정의 버림을 받은 초야(草野)의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가 토해 내는 말들은 하나같이 비장(悲壯)하고 강개(慷慨)한 것뿐이었고, 그 마음에 맞는 것은 제해(齊諧)와 색은(索隱)뿐이었다. 처신이 불안하면 할수록 말이 더욱 편벽되고 말이 편벽될수록 문장이 더욱 괴퍅해졌다. 화려한 문장은 팔자 좋은 사람들에게 양여(讓與)하고 자신은 이소(離騷)와 구가(九歌)를 빌어 불우한 처지를 읊었도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가환이 좋아서 한 것이겠는가. 이것은 조정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내가 특별히 편전(便殿)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란 편액(扁額)을 걸고, 정구팔황(庭衢八荒)이란 네 글자를 크게 써서 여덟 창문 머리에 붙이고서 아침저녁으로 이를 바라보며 나의 맹세로 삼았다. 이로부터 가난한 선비들이 먼 시골에서 모여들었으니, 가환도 그 중에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 공철(公轍)과 같이 별안간 일어난 상도(常道)를 어긴 무리와 한가지로 여겨 배척하니 어찌 가환이 억울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배척해야 마땅한 자는 배척하지 않고 배척해서는 안 될 사람만 배척해서야 되겠는가. 가환은 바야흐로 깊숙한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와 지난날을 잊고 마음가짐이 새로워지고 있으니,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문장이 어찌 점점 아름다운 경지에 들어가지 않겠는가. 가령 가환의 재주가 둔하여 삼일 괄목(三日刮目)할 정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아들이나 손자가 또 어찌 문예를 남에게 양여(讓與)하고 스스로 명성을 떨치는 성대함을 본받지 않겠는가. 맹단(盟壇)에 올라 우이(牛耳)를 잡고대일통(大一統)의 대권(大權)을 어둡고 어지러운 이 세상에 다시 밝히는 것을 나는 그의 임무로 여긴다.”
상은 공을 미워하고 꺼리는 자가 많다는 것을 아시고 더욱 서둘러 부르셨으나 공은 완강히 거절하고 명을 받들지 않으니, 상은 공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내보내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공을 내친 것 같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공을 2품으로 승진시키신 것이니 상의 끊임없는 권주(眷注 은총을 베풂)가 이와 같았다.
계축년(1793, 정조 17) 이른 봄에 공이 상소하기를,
“신은 본래 아무 쓸모없는 사람으로 정처없이 떠도는 몸이니, 세상에 대하여 애당초 원망이나 미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후 신을 논하는 자들이 연해 헐뜯고 미워하는 것이 어찌 다른 이유이겠습니까. 혹은 드러나지 않게 배척하기도 하고 혹은 드러내놓고 배척하기도 하지만 그 핵심은 신의 종조(從祖 이잠(李潛))의 일을 가지고 신의 집안을 헐뜯는 것입니다. 아, 신의 종조 잠(潛)이 당시 세자(世子 경종(景宗)) 보호를 진달(陳達)한 상소는 진심을 토로하여 국가에 충성하고자 했던 것인데, 끝내 이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였으니 그 억울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억울한 한이 풀리지 않은 채 세월은 흘렀습니다.
신이 차마 붓을 잡고 종조의 일을 다시 제기(提起)할 수는 없습니다만, 열조 (列祖)께서 분명히 변별(辨別)하신 말씀이 국사(國史)에 환히 실려 있어 이목(耳目)으로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또 다시 이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신이 일찍이 《어정황극편(御定皇極編)》을 보니, 사실을 차례로 서술하시고 남김없이 분석하시어 일편(一篇)의 문자(文字)가 일성(日星)처럼 밝으므로 신은 이 글을 수없이 읽고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손을 씻고 이 글을 베껴 두었다가 죽는 날에 지하로 가지고 가서 종조를 뵙고 한자한자 전해 드리며 조손(祖孫)이 함께 천대(泉臺 구천(九天))에서 감읍하고, 또 장차 천하 후세에 사실이 이렇노라고 밝히려 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저들과 시끄럽게 시비를 다투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신이 평소 마음 속에 맺혔던 생각을 토로합니다.
주먹과 발길질, 칼과 창을 분수로 알고 사생 화복을 생각 밖으로 돌리고 몸을 이끌고 물러나 성은(聖恩)을 노래하며 자자 손손이 살아서는 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하고 죽어서는 결초보은(結草報恩)하기를 바랄 뿐인데 다시 무엇을 한(恨)하겠습니까?”
하니, 상은 온화한 말씀으로 비답하셨다. 이때 우의정 김이소(金履素)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잠(潛)의 흉소(凶疏)가 역적 김일경(金一鏡)ㆍ박필몽(朴弼夢) 등이 종사(宗社)를 모해하고 선류(善類)를 해친 장본(張本)이 되었는데, 지난 신임(辛壬) 연간에 추악한 무리들이, 선견(先見)의 지혜가 있고 국가를 위해 죽은 충신이란 말로써 흉인 잠을 추칭(推稱)하여 표창하기를 청하였으니, 흉도(凶徒)끼리 맥락(脈絡)이 서로 통하고 기미(氣味)가 서로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끝내는 역적 김 일경이 지은 교문(敎文)에 바로 잠의 성명을 거론(擧論)하며 사신의 무릉[徙薪之茂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환이 감히 흉악한 잠의 일을 가지고 장황하게 말을 하니 패악하고 무엄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은 다음과 같이 비답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의 상소는 아무 까닭없이 송원(訟冤)하는 자와는 다르다. 근래 중비(中批 특지(特旨)로 임명하는 것)한 일로 인한 공격을 견딜 수 없어 오랜 뒤에 상소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밝혔으니, 측은하다고 할 만한데 어찌 반드시 운운(云云)하느냐. 하물며 선왕(先王 숙종) 임술년 9월에 내린 교서(敎書)와 다음해 여름에 내린 교서가 기거주(起居注)에 자세히 실려 있음에랴. 잠의 조카인 이맹휴(李孟休)에 대한 성교(聖敎)도 그처럼 정중하고 간곡하시어 ‘내가 모든 일 깨끗이 씻어버리고 너를 등용할 것이다. 지난날 방미 두점(防微杜漸)의 뜻으로 처분(處分)한 바 있으나, 그 뒤 이잠이 무죄하다고 진달하자 다시 증직(贈職)하였노라. 신임(辛壬) 이후 잠을 포장(褒獎)하는 것도 당심(黨心)이고 잠을 헐뜯는 것도 당심이니, 만약 맹휴가 잠의 조카라 하여 등용치 않는다면 나라 안에 어찌 등용할 사람이 있겠는가.’하시고, 드디어 건극(建極)이란 두 글자로 명하셨도다. 나는 승지에게 이 성교를 들이라 명하여 상고한 뒤에 비로소 가환을 등용한 것을 경(卿)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때 대사성 심환지(沈煥之)도 상소하기를,
“경종대왕께서 동궁(東宮)으로 계실 때 숙종께 문안하시고 부왕(父王)이 드실 음식을 살피시어 문왕(文王)의 무우(無憂)를 이루었는데, 저 흉인(凶人)들은 무엇 때문에 보호(保護)란 말을 하였겠습니까? 양궁(兩宮 경종과 영조)을 이간하여 의리를 괴란(壞亂)시키고 충현(忠賢)을 참살할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가환은 이런 사실을 알고서 감히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알지 못하고 말하는 것입니까? 선왕께서 순일한 덕으로 중(中)을 세워 세상을 교화하시어 언의(言議)가 같지 않고 취미(臭味)가 다른 세신 고가(世臣故家)들을 모두 극(極)으로 모이게 하여 복을 주시고 한 울안으로 모아 교화하여 만수 일궤(萬殊一軌)하게 하셨는데, 소론(小論)을 말함. 저 가환은 무슨 심성(心性)으로 편벽되게 일방적으로 제 방조(傍祖)의 흉론(凶論)만을 고수, 의리와 혈전을 벌이고 국가와 배치하여 잠의 심보로 제 심보를 삼고 잠의 입으로 제 입을 삼고자 한단 말입니까? 처음에 전하께서 ‘가환은 잠의 방손(傍孫)이니 잠의 흉론(凶論)을 반드시 이어받지는 않았을 것이고, 문묵(文墨)의 재주가 있으니 완전히 버릴 수 없다.’하시고 드디어 그 잘못을 탕척하고 깊은 성덕으로 이끌어 주셨으니 가환은 마땅히 마음을 고치고 가슴에 새겨 더욱 의(義)를 힘써야 할 것인데, 지금 그렇게 하지 않으니 가환이 바로 또 하나의 잠입니다. 흉인 잠이 있는데도 엄벌하지 않는다면 이는 나라에 법이 없는 것입니다. 가환을 변방으로 내쳐 선한 사람들과 함께 살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다. 정원에서는 언관(言官)이 아니면 의율(擬律)할 수 없는 것인데 심환지의 상소에 내치라고 한 것은 격례(格例)에 어긋난다 하여 상소문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이는 상이 은밀히 그렇게 하도록 시킨 것이다. 이때 판중추(判中樞) 김종수(金鍾秀)도 상소하기를,
“흉인 잠의 상소는 오로지 양성(兩聖)의 자효(慈孝)를 이간하고 당시의 충현을 도륙(屠戮)할 계획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환이 비록 잠의 흉악한 심보를 이어받았다고는 하지만 역시 선왕의 신하인데 하늘 아래 살면서 어찌 감히 잠이 나라를 위하여 순절(殉節)하였다는 말을 글로 써서 어전(御前)에 바칠 수 있단 말입니까. 세도(世道)를 생각하매 다만 목놓아 울고 싶을 뿐입니다.
조덕린(趙德隣)에 대한 처분은 전하의 실수였습니다. 신이 무신년에 올린 차자(箚子)에 어린 돼지가 아니라고 하였는데, 지금 그 돼지가 머뭇거리던 때를 지나 저돌(猪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상이 또 정원에 명하여 그 상소문을 물리치게 하시고, 드디어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를 엄히 신칙하시니, 사나운 기세로 계속 일어나려던 자들이 모두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노여움이 산처럼 쌓여 공공연히 역적처럼 꾸짖었고, 공과 사이가 좋던 민종현(閔鍾顯)ㆍ이서구(李書九) 등도 이때부터 갈라져서 서로 말도 하지 않았으며, 섬계(剡溪 이잠의 호)를 미워하는 자들은 젊은 신진(新進)들까지도 모두 공을 좋은 눈으로 보지 않았으니, 공의 화는 실로 여기에서 성립된 것이다. 큰 명망을 지고 소인들에게 미움을 받는 분으로서 또 이 때문에 모든 사람의 노여움을 샀으니, 어리석은 사람도 공이 끝내 화를 면치 못할 줄 알았다.
이해 여름 번옹이 영의정이 되어 상소하여 모년(某年)의 일을 말하자 김 종수(金鍾秀)가 심히 공격하니, 상은 부득이하여 금등(金縢)을 열어 근신(近臣)들에게 보여 주셨다. 다음해 겨울 모든 신하가 추가(追加)하여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휘호(徽號) 올리기를 청하여 도당(都堂)에서 여덟 자를 의논해 올렸으나 장헌세자의 효의가 담긴 금등의 뜻을 천명(闡明)함이 없으므로 상은 글자를 다시 의논하게 하고자 하였으나 꼬집어 말할 수 없어 번옹에게 물었다. 번옹 역시 무어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공을 불러 물으니 공은 즉석에서,
“개운(開運)이란 두 글자는 옛날 석진(石晉 석륵(石勒)이 세운 후진(後晉))의 연호(年號)였으니, 어찌 할 말이 없음을 근심하십니까.”
라고 대답하므로 대신이 그대로 아뢰었다. 며칠 뒤 상은 그 사실을 아시고 이르기를,
“재상에는 반드시 글 읽은 사람을 등용해야 한다는 말은 바로 가환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시고, 드디어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옥책(玉冊)과 옥보(玉寶)를 만들었는데 번옹을 도제조(都提調)로 삼고 공을 가차(加差)하여 제조로 삼고 용을 도청랑(都廳郞)으로 삼아 그 일을 돕게 하셨다. 대제학 서유신(徐有臣)이 옥책문(玉冊文)을 지었는데 또 금등의 일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유신(儒臣) 한광식(韓光植)이 상소하여 그 소략함을 논박하니 상은 마침내 이병모(李秉模)에게 명하시어 옥책문을 다시 짓게 하셨다.
을묘년 봄 공을 정경(正卿 판서)에 발탁하시어 신 용과 함께 《화성정리통고(華城整理通考)》를 짓게 하시고 장차 공을 크게 등용하려 하셨다. 이해 여름에 포장(捕將) 조규진(趙圭鎭)이 최인길(崔仁吉) 등 세 사람을 잡아 왕지(王旨)를 받들어 곤장을 쳐서 죽인 일이 있었는데, 7월 초에 대사헌 권유(權裕)가 상소하여 포장이 죄인을 멋대로 죽인 죄를 논박하였다. 또 며칠 뒤 부사직(副司直) 박장설(朴長卨)이 상소하여 스스로 기려(羈旅)의 신하라 칭하고, 먼저 서유방(徐有防)의 간사함을 논박하고 다음으로 포청(捕廳)의 일을 논하면서 공까지 논박하기를,
“가환은 약간의 글 재주를 갖고서 의리를 변란(變亂)하였으며, 섬계(剡溪)의 억울함을 변명한 것을 말함. 사학(邪學)을 창주(倡主)하고 유학(儒學)을 배치(背馳)하였으며, 생질(甥姪) 이 승훈(李承薰) 을 보내어 사학의 책을 사오게 하여 부자들을 유혹하고 속여 제 스스로 교주(敎主)가 되어 그 사술(邪術)을 널리 전파하였습니다.”
하고, 또 공이 일찍이 천문 대책(天文對策)에 감히 청몽기(淸蒙氣) 등 정도(正道)에 어긋나는 말을 하였다고 논박하고, 또 공이 일찍이 동고관(同考官)이 되어 경술년 가을에 증광시(增廣試)가 있었음. 오행(五行)을 책문(策問)하였는데, 해원(解元 장원(壯元)) 나의 중형(仲兄)임. 의 대책은 전적으로 양인(洋人)의 설을 주장하여 오행을 사행(四行)로 만들었다고 논박하며 그 죄를 밝히고 바로잡기를 청한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모두 목만중(睦萬中)이 늘 해오던 말로 저는 가만히 있고 박장설을 시켜 논박하게 한 것이다. 상소문이 들어가자 상은 크게 노하여 전교하기를,
“나라의 기강이 비록 떨치지 못한다고는 하나 저가 어찌 감히 이처럼 패악(悖惡)할 수 있단 말인가. 저 역시 나라 안에서 이름 있는 사대부(士大夫) 집안으로서 유구(琉球)나 일본서 어제오늘 귀화(歸化)한 무리가 아닐진대, 기려란 말을 어찌 감히 마음에 두고 입에 올린단 말인가.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때 공은 여전히 공조 판서로 있었다. 에 대한 논박은 역시 기회를 노려 남을 해치려는 행위에서 나온 것이다. 홍낙안(洪樂安)도 오히려 부정(扶正)하였다는 칭찬을 받지 못한 것은 내가 그 마음을 미워하기 때문인데, 지금 저 박장설의 말이 홍낙안의 말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공조 판서가, 이단(異端)을 전공(專攻)하면 해로울 뿐이라는 훈계에 깊이 징계하는 것을 근일 경연(經筵)에서 목도(目覩)하였으니 남들이 하는 말이 중신(重臣)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시고, 드디어 박장설을 먼저 두만강으로 보내고 다음에 동래로 보내고 다음에 제주로 보내고 다음에 압록강으로 보내서 사방을 두루 돌게 하여 기려의 신하란 말에 맞도록 하라고 명하셨다. 또 전교하기를,
“의궤(儀軌)를 교정(校正)하는 일은 역시 중책(重責)이라 할 수 있다. 남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았으니 청몽기(淸蒙氣)가 비록 정론(正論)은 아니지만 어찌 이 한 가지를 가지고 그 사람의 평생의 일을 단정해서야 되겠는가. 전어(轉語) 한 구절은 동연(同硯 동문(同門))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기려라 자칭하는 박장설이 어찌 들었겠는가. 곧 이 한가지 일만 가지고 보더라도 풍속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은 박장설이 남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여겼다. 교정당상(校正堂上) 이가환은 각별 조심하여 공무(公務)를 행하라.”
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생질을 보내어 책을 사오게 했다 하니, 이 무슨 말입니까? 이승훈(李承薰)의 신해년 공사(供辭)에 명백히 사실을 진술하여 이미 소석(昭晳)의 성은을 입어, 저 이승훈도 이미 깨끗이 죄명(罪名)을 벗었는데, 하물며 신에게 그 죄를 끌어붙일 수 있습니까? 또 부자들을 유인하여 모았다 하니 모인 사람의 성명이 의당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해치고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은 과연 누구를 가리켜 말한 것이며 그 증거가 있단 말입니까? 증거가 있다면 왜 드러나지 않으며 만약 증거가 없다면 어찌 그런 말을 함부로 쉽게 한단 말입니까. 또 을사년 질문[作文]의 설에 대해서는 어찌 그리 후합니까. 척사(斥邪)의 글이 신의 손에서 나왔다 하니 신이 어찌 굳이 사양하겠습니까마는 사실 신이 지은 것이 아닌데 어찌 신이 지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창 신을 사(邪)라 하여 배척하다가 또 척사(斥邪)했다 하니, 역시 신을 함정에 밀어넣기에 급급한 나머지 일마다 허튼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몽기(蒙氣)의 설은 진(晉) 나라 저작랑(著作郞) 속석(束晳)에게서 나온 말로 역대로 인용했던 말입니다. 가령 그 말이 서양에서 창시(創始)되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역상(曆象)의 법이요 사학(邪學)과는 전혀 무관한 것인데, 더구나 옛사람이 이미 말한 것이겠습니까? 사람들이 옛 글을 강론하지 않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신이 주시(主試)로서 발책(發策 출제(出題))했다는 말은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신은 그때 참시관(參試官)에 불과하였는데, 어찌 주시(主試)라 할 수 있으며, 참시관이 어찌 발책할 수 있었겠습니까. 박종악(朴宗岳)이 주시관(主試官), 이만수(李晩秀)가 부시관(副試官), 공이 참시관(參試官)이었다. 더구나 장원을 뽑는 것은 보통 급제(及第)를 뽑는 것과 달라 반드시 중론(衆論)이 일치되어 모두 좋다고 해야만 결정하는 것이니, 이를 꼬투리잡는 것은 너무도 엉성하지 않습니까? 신은 본래 장설과 은혜도 원한도 없으니 어찌 밉고 곱고가 있겠습니까. 신은 본래 성품이 편색하여 악을 미워함이 너무 지나치기 때문에 귀신 도깨비 같은 한두 인간이 목만중ㆍ홍낙안 등임. 물고 뜯어 온갖 거짓말을 다 만들어 내어 두려운 말들이 다달이 생겨 나고 있습니다. 지금 장설의 상소도 실은 귀신 도깨비 같은 자들이 일찍부터 떠들던 말로 신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바이니, 신이 장설에게 무엇을 탓하겠습니까? 신이 횡역(橫逆)을 당할 때마다 성은을 입었습니다. 이동직(李東稷)이 상소하여 신을 지척할 적에도 전하의 비답은 은근하고 간곡하셨으며, 또 기궐(剞劂 교서(校書))의 역(役)을 맡게까지 하셨으니 고금에 일찍이 없었던 일로 은혜가 후손에까지 미칠 것입니다. 또 지금 장설의 상소에 즈음하여 한편 미워하시면서 한편 가르치시되 인십기백(人十己百)의 말씀으로 정중하고 돈독하게 하시어 마치 자애로운 아비가 어리석은 자식을 가르치는 것과 같이 하시니 지금 신은 이 한 목숨 다하기 전에 모든 일에 보답하기를 도모하여 어리석음도 돌보지 않고 마음을 다해 성덕을 드날리어 어리석은 백성을 깨우치고 세태(世態)의 광란(狂瀾)을 막아, 세상을 교화하시고 풍속을 바로잡으시는 전하의 지극하신 뜻에 저버림이 없게 할 따름입니다.”
하니, 상은 온화한 말씀으로 비답하셨다. 또 전교하기를,
“이른바 청몽기(淸蒙氣)가 진(晉) 나라 사람의 설이라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역(曆)을 물어 대책할 때에는 마땅히 시용(時用)을 말할 것이다. 오행(五行)을 사행(四行)으로 만들었다는 대책의 시권(試卷)은 단연코 한 번 사정(査正)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임헌 공령(臨軒功令)에 실려 있는 것을 가져다가 상하의 글귀를 몇 차례에 걸쳐 자세히 보니, 애당초 공격하는 자들의 말과 비슷한 곳도 없었다. 처음에 오행을 말하고 다음 금(金)ㆍ목(木) 이행(二行)을 말하고, 다음에 수(水)ㆍ화(火)ㆍ목(木) 삼행(三行)을 말하고, 또 다음에 토(土)가 사행에 기왕(寄旺)하는 것을 말하고, 끝으로 오행을 거듭 말하여 결론지었다. 이행과 삼행으로 갈라 말한 것을 아울러 망발이라 한다면 혹 그럴싸하지만, 이 대책의 내용을 사학(邪學)ㆍ서학(西學)이라 한다면 서양과 교통하기 전에, 8백년 만에 하루씩 틀려가는 대연력(大衍曆)을 바로잡은 당(唐) 나라 일행(一行)의 명자(名字)도 사학이며 일행의 역법(曆法)도 서학이란 말인가? 공격하는 자들의 말은 매우 허무 맹랑하니 식견이 있는 선비라면 스스로 판단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나의 형 약전(若銓)을 위하여 소석하신 전교였다. 다만 공이 서서(西書)를 본 것은 사실인데 공의 상소문은 스스로 변명하는 데만 전념하고 서서를 보게 된 본말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 주기에는 부족하였다. 상이 또 하유하기를,
“전 공조 판서의 사직소(辭職疏)는 사실을 얼버무려 넘기며 허물을 자신에게 돌리기만 하였을 뿐이니 이 어찌 그런 사실이 있다 없다 분명히 말하여 진심을 토로하는 뜻이라 하겠는가. 해박(該博)함이 지나치면 박잡(駁雜)한 폐단이 있는 것은 필연의 이치이니 전일의 허물을 반성하고 새로운 각오를 일으키어 위로는 부감(孚感)의 방법을 다하고 아래로는 경신(傾信)의 도리를 다하기에 힘쓰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다. 또 연석(筵席)에서 아뢸 때는 진실된 말을 했는데 갑자기 문자상에서는 도리어 그 사실을 숨겼으니 정원으로 하여금 문계(問啓)하게 하라.”
하였다. 7월 21일 공이 답하여 아뢰기를,
“신은 평소에 책 읽기를 좋아하는 벽(癖)이 있어, 연전(年前)에 신이 보지 못했던 책이 연경(燕京)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빌려다가 탐독했는데, 혹 신기(新奇)한 내용도 있어 처음에는 대략 섭렵했으나, 좀더 자세히 열람해 보니 그 내용이 허탄하고 바르지 못하여 노불(老佛)과 같은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벼슬하지 말고 제사지내지 말라.’는 말은 인륜(人倫)을 거스르고 상도(常道)를 어지럽히는 무부 무군(無父無君)이기에 곧 그 잘못을 공격하여 물리칠 것을 나의 임무로 삼고 사교를 피하여 멀리할 뿐만 아니라 기필코 사교를 멸하여 없애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친지(親知)들도 모두 아는 바인데, 그 누구를 속이겠습니까. 소본(疏本)에 이런 말을 쓰지 않은 것은 신이 일찍이 어藰에서 다 실토했으므로 거듭 말하지 않아도 성상께서 통촉하시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 상소는 비방을 변명한 등보(滕甫)의 글과 같은 것이고, 자기의 주의 주장을 역설한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와는 다릅니다. 생각하옵건대 소장(疏章)은 연주(筵奏)와 달라 중외에 반포하는 것이니, 이 소장을 보고서 꼬치꼬치 따져 만약 신이 서서(西書) 본 것으로써 중한 죄안(罪案)을 삼는다면 스스로 해명할 방법이 없겠기에 얼버무려 넘겼던 것이니, 신의 사정 또한 슬프다 하겠습니다.”
하니, 상의 노여움이 풀렸다. 며칠 뒤 전교하기를,
“진심을 알지 못하고 견책하였도다. 문계(問啓)를 보고서야 비로소 나의 처분이 너무 지나쳤음을 알았도다. 옛말에 ‘허물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고치는 것이 귀하다.’고 하였으니, 설령 한두 가지 눈에 선 것이 있더라도 이것이 특히 기이(奇異)를 힘씀으로 인해서인데 하물며 깨우쳐 고치고 힘껏 지척하는 마당에 있어서는 가위 장횡거(張橫渠)의 무리라 할 것이며 마침 편간(編簡)의 역에 있으면서 미워하는 자들이 때를 타서 돌을 던지 것인데 그들이 해치게 내버려두는 것도 역시 ‘마음이란 본시 허하여 물에 응하되 자취가 없다.’라는 도가 아니다. 이미 그 본심을 알았으니 이때를 당하여 어찌 개운히 씻어 털어버릴 방법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있으랴. 전 판서 이가환은 등용하여 그대로 교정 소임을 맡겨 일을 보게 하라.”
하였으나, 26일임 공은 또 소명(召命)을 받들지 않으니, 전교하기를,
“벼슬에 나오도록 강압하는 것도 예(禮)로 부리는 뜻이 아니고 그대로 버려 두는 것도 인재(人材)를 등용하는 도에 어긋나니, 마땅히 한번 조정으로 나오게 하는 예절이 있어야 하겠기에 그 파직(罷職)을 서용(敍用)하여 그 직에 눌러 있게 하였으니, 가서 일하는 것도 중하거니와 고두 사은(叩頭謝恩)하는 것도 급하니 서둘러 소명(召命)에 응하는 것이 도리에 마땅 할 것인데, 패초(牌招)를 어기고 나오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시고 드디어 공을 충주 목사(忠州牧使)에 제수하시고, 나를 내쳐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삼으셨다. 또 전교하였다.
“서양의 책이 우리나라로 들어온 지는 수백 년이 되었다. 사고(史庫)와 옥당(玉堂)의 장서(藏書) 속에도 모두 서양의 책이 있어 몇 십 권 정도가 아니니, 연전(年前)에 특명으로 서서(西書)를 구입해 오게 했던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이로써 알 수 있다. 옛 정승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의 문집(文集)에서도 서양 사람 소림대(蘇霖戴)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들의 법서(法書) 보기를 요구한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은 ‘하느님을 섬기고 성품의 본연(本然)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 유학(儒學)과 다름이 없으니 황로(黃老)의 청정(淸淨)이나 석가(釋迦)의 적멸(寂滅)과 동일하게 여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보응(報應)을 논함에 있어서는 도리어 모니(牟尼)의 법과 흡사하니 이런 교리(敎理)로 천하의 풍속을 바꿔놓기는 어려울 것이다.’하였으니, 충문공의 말은 서교의 내면을 자세히 분별했다 하겠다. 또한 간혹 서교를 심히 공격하는 이도 있으니, 고(故) 찰방(察訪) 이서(李漵)의 시(詩)에,
오랑캐가 이단의 학을 전하니 / 夷人傳異學
도덕에 해가 될까 두렵네 / 恐爲道德寇
라고까지 하였다. 대개 근일 이전에는 박아(博雅)한 선비들이 논리(論理)를 세워 서교를 비평하기는 했으나, 그 비판이 너그럽건 준엄하건 간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학(正學)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그 피해가 사설(邪說)보다 심하고 맹수보다 더하니, 오늘날 폐해를 구제하는 길은 정학을 밝히는 것만한 것이 없으며, 세상 사람들에게 힘써 권선 징악의 정사를 행한 뒤에야 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형벌은 습속을 바로잡는 방법 가운데 말단인데, 하물며 사학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랴.”
이 때 최헌중(崔獻重)이 상소하여 서학을 배척하니, 그를 특별히 대사간에 제수하고 전교하기를,
“사학(邪學)을 배척한 최헌중을 이미 발탁하여 썼으니 사서(邪書)를 사들여 온 이승훈이 편안히 집에 있게 버려 두는 것은 형정(刑政)이 아니다.”
하시고, 이승훈을 예산(禮山)으로 유배하여 그 죄를 다스렸으니, 이것이 을묘년 가을에 내린 처분이다. 공이 들어가 하직을 올리니, 상은 공을 위로하여 보내셨다. 이해 겨울 용도 부름을 받아 돌아왔고 공도 내직(內職)으로 들어왔으며, 다음해에 이승훈도 귀양에서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당시의 물론(物論)은 더욱 험악하여 공을 영원히 매장하여 조정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려 하므로 상은 냉각기를 두어 시끄러움을 가라앉히고자 하였고 공 역시 출입을 끊고 한가로이 지내며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았다. 겨울에 병진년 겨울 용이 다시 승지가 되어 규영부로 들어가서 교서(校書)하였는데, 공이 편찬 정리하던 책은 끝내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이때 악인들이 뜬소문을 퍼뜨려 말하기를
“번옹도 공을 버리고 거두지 아니하니, 이는 장사(壯士)가 제 팔목을 제가 끊는 수법을 쓴 것이다.”
하였다. 이 소문이 며칠 사이에 온 거리에 퍼져 드디어 조정에까지 들어가니 상께서도 의심하셨다. 번옹과 가까운 자가 있어 조용한 틈을 타서 그 소문의 진부(眞否)를 번옹에게 물으니 번옹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사년 대보름날 저녁은 구름이 끼었으나 16일에는 달이 밝으니, 윤필병(尹弼秉)ㆍ이정운(李鼎運) 등 여러 사람이 번옹을 찾아가서 함께 답교(踏橋)하기를 청하자, 번옹은,
“오늘 내가 몸이 편치 못하니 그대들은 섭서(葉西) 권 대감(權大監 권엄(權𧟓)) 집으로 가라.”
하였다. 여러 사람이 다 물러가고 이경(二更)이 되자 번옹은 사람을 시켜 공을 청해 오게 하여 함께 광통교(廣通橋)로 나가서 장막 안에서 무릎을 맞대고 앉아 구운 고기와 떡국을 먹으며 즐겁게 고금(古今)을 담론하고 서로 진심을 말하는 것이 끝이 없었다. 이때 놀러 나온 온 장안의 백성ㆍ서리(胥吏)ㆍ유사(儒士)ㆍ조관(朝官)에서부터 경재(卿宰)의 시종(侍從)과 궁중(宮中)의 소신(小臣)들까지 두 공이 무릎을 맞대고 환담하는 것을 보고 모두 감탄하며 말하기를,
“두 분의 사이가 저렇게도 좋단 말인가?”
하였다. 이 뒤로는 전에 두 분의 사이가 멀어졌다고 하던 뜬소문이 일시에 사라져버리고 상의 의심도 풀렸다. 상이 일찍이 경모궁(景慕宮) 재실(齋室)에서 번옹을 불러 조용히 묻기를,
“경이 늙었으니 누가 경을 대신할 만한가?”
하니, 번옹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진실로 믿고 쓸 사람으로 이가환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축년 봄의 상소로 인하여 시론(時論)에 미움을 샀기 때문에 기괴한 비방이 있어 감히 용서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은,
“경의 말이 아니라도 내가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다.”
하시고, 일이 있을 적마다 공에게 가부를 물으셨다. 이해 가을에 내가 곡산 도호(谷山都護)로 나가고, 기미년 봄에 번옹마저 죽으니 도와 줄 사람이 없어 공은 더욱 외로워졌다.
상이 공에게 수리(數理)와 역상(曆象)의 본원(本源)을 밝히는 책을 편찬하게 하고자 하여 연경(燕京)에서 책을 구입하려고 어필(御筆)로 공에게 하문하셨는데, 공이,
“풍속이 어리석어 수리(數理)가 무엇이며 교법(敎法 서교(西敎))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한통으로 여겨 배척하고 있으니, 이 책을 편찬하면 신에 대한 비방만 더해질 뿐 아니라 위로 성덕(聖德)에까지 누가 될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그 일은 드디어 중지가 되었다. 그러나 상께서는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고 여기셨다.
이해 여름에 내가 조정에 들어와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어 중외의 원옥(冤獄 억울한 옥사)을 다스릴 적에 상이 자주 입대(入對)하게 하시어 밤이 깊어서야 물러나게 하시니 당인(黨人)들은 겁을 먹고 더욱 뜬소문을 퍼뜨려 선동 유혹하고 신헌조(申獻朝)가 발계(發啓)하였으나, 상은 엄명으로 막으셨다.
가을에는 내가 공과 함께 번옹의 유집(遺集)을 교정(校正)하였다. 다음해 여름에 정종대왕이 승하하시니, 조정의 판국이 일변하여 당인들이 뜻을 얻어 밤낮으로 몰려다니며 생살부(生殺簿)를 만들어 사람을 죄에 얽어 넣었다.
이때 중국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몰래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서교(西敎)를 선교(宣敎)한 지 이미 6년이 되었는데, 물이 스며들고 불이 붙듯이 교세(敎勢)가 점점 확장되어 서울에서부터 시골에 이르기까지 모여 교습(敎習)하는 상하 남녀가 가는 곳마다 수백 명씩이 되었으나 나와 공은 그 동정(動靜)을 전혀 알지 못하였고 다만 화기(禍機)가 만연하여 불원간 화가 닥치리라는 것만을 알았을 뿐이었다.
목만중과 홍낙안 등이 은밀히 당로자(當路者)에게 붙어 공을 괴수로 몰아 중외에 떠도는 흉흉한 말을 모두 공에게로 돌렸다. 성기(聲氣)가 서로 멀어 사정을 모르는 당로자들은 이미 서교의 형세가 날로 성해 간다는 말을 들은 터에 또 아무아무가 괴수란 말을 들었으니 격분하여 백성을 위해 해독을 제거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심환지(沈煥之)와 서용보(徐龍輔) 등 당로 대신이 어찌 그에 대한 조처를 도모하지 않겠는가. 목만중 등
이 또 스스로 말을 만들어 선동하기를,
“이가환이 척사(斥邪)하는 사람을 미워하여 사흉 팔적(四凶八賊)이라 지목한다.”
하니, 12명 중 반은 바로 만중 저희 무리이고 반은 당로자를 지목한 것이다. 만중 등은 흉적으로 지목된 당로자를 만날 적마다,
“공은 조심하십시오. 머지않아 변란이 생길 것입니다.”
하니, 이때부터 조정이 더욱 흉흉하고 의구심이 짙어가서 공의 화가 날로 임박하였다.
신유년 정월에 대비(大妃) 정순왕후(貞純王后)께서 중외에 교유(敎諭)하기를,
“사교에 빠져 개전(改悛)하지 않는 자는 다 죽여 없애라.”
하였다. 이때 마침 한성부(漢城府)에서 우리 집안의 편지가 든 상자를 지고 가는 한 농부를 잡아 드디어 큰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2월 9일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민명혁(閔命赫) 등이 아뢰기를,
“이가환은 흉추(凶醜 이잠(李潛)을 가리킴)의 여얼(餘孼)로 화심(禍心)을 품고 불평 분자들을 끌어모아 스스로 교주(敎主)가 되었으니, 이승훈ㆍ정약용도 함께 하옥하여 엄히 국문하소서.”
하였다. 밤중에 체포되어 이튿날 심문을 받았는데 위관(委官)은 영중추(領中樞) 이병모(李秉模)와 시임 대신(時任大臣) 심환지ㆍ이시수(李時秀)ㆍ서용보와 판의금(判義禁) 서정수(徐鼎修), 대사간 신봉조(申鳳朝)이고, 문사낭청(問事郎廳)은 오한원(吳翰源)ㆍ이안묵(李安黙) 등이었다. 신문(訊問)에 임하여 공은 선조(先朝 정조)의 소비(疏批)와 전후에 있었던 전교를 이끌어 변명하였으나, 옥관(獄官)은 모두 심리(審理)하지 않고 다만,
“이런 지목을 받았으니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는가.”
할 뿐이었다. 심한 고문을 하였으나 끝내 증거가 될 만한 한 장의 문건(文件)이나 함께 잡혀 온 죄수의 공초(供招)도 없었고, 오직 어지러운 문서(文書) 속에서 노인도(老人圖)를 찾아내어 이것이 누구의 상(像)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이 역시 증거물이 되기에는 부족하였다.
이때 신봉조가 상소를 올려 오석충(吳錫忠)이 흉얼(凶孼)과 체결한 일을 논박하였는데, 옥문 밖에 한 졸개가 지나가며 홍낙임(洪樂任)이 바로 흉얼이라고 하는 말이 들렸다. 조금 뒤 안옥대신(按獄大臣)들이,
“흉얼이 누구냐?”
고 묻자, 공이,
“오석충과 홍낙임의 체결 여부를 나는 실로 알지 못한다.”
고 대답하니, 대신들은,
“홍낙임이란 세 글자를 네가 어찌 먼저 말하느냐. 이로 보아 체결한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고, 공과 석충을 번갈아 고문하니 살갗이 터지고 피가 흘러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석충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혹 죄를 자인하기도 하고 다시 번복하기도 하여 말에 조리가 없었으나, 공은,
“정경(正卿)인 내가 이런 지목을 받았으니 죄가 죽어 마땅하다.”
하니, 옥관은 드디어 승복한 것으로 여겼다. 공은 면하지 못할 줄을 알고 단식(斷食)한 지 6~7일 만에 기절(氣絶)하여 죽으니, 끝내 기시(棄市)하였다. 이때가 3월 24일이었다.
아, 국문과 옥사는 예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선조 때의 기축옥사(己丑獄死)와 숙종 때의 경신옥사(庚申獄事) 같은 때에도 반드시 상변(上變)한 자가 있거나 죄수의 초인(招引)이 있고, 또 증거될 만한 문서가 있거나 죄수가 입증(立證)한 뒤에야 체포하여 고문하고 죽여 기시(棄市)하였는데, 이번처럼 대간의 계사(啓辭)로 발단하고 고문하여 그 옥사를 이룬 다음 증거도 없이 사람을 죽여 기시한 일은 일찍이 기축ㆍ경신 때에도 없었던 일이다. 몇몇 음사(陰邪)한 무리가 입을 놀려 10여 년 동안 근거 없는 말로 선동 현혹하여 당로자들의 귀에 못이 박이도록 하였으니, 저 당로자들이 어찌 공의 무죄함을 알겠는가. 평소부터 공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옥사가 일어나자 공을 죽인 것뿐이다. 《맹자(孟子)》에도,
“모든 대부(大夫)가 죽여야 한다고 하여도 듣지 말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한 뒤에 살펴서, 죽일 만한 잘못이 있음을 본 뒤에 죽인다.”
하였는데, 온 나라 사람이 이미 죽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다시 살펴주기를 바라겠는가. 정(鄭) 나라에서 그 대부(大夫) 양소(良宵)를 죽인 것을《춘추(春秋)》에 썼거니와, 만약 공을 진실로 죽일 만하여 죽였다면 또 무엇 때문에 역사에 기록하였는가? 아, 슬프도다!
지난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갑진년(1784, 정조 8) 겨울 망우(亡友) 이벽(李檗)이 수표교(水標橋)에서 처음으로 서교(西敎)를 선교(宣敎)할 때 공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나도 지난날《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의 책을 보니, 그 내용이 비록 좋은 가르침이기는 하나 정학(正學)은 아니었는데, 이벽이 이 서교로 오도(吾道)를 변역시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드디어 수표교로 가서 이벽을 꾸짖었으나, 이벽이 능란한 말솜씨로 서교를 설명하며 자신의 주장을 철벽(鐵壁)처럼 고수하므로 공은 말로 다툴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발을 끊고 가지 않았다. 이 뒤로는 공에게 의심할 만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몇 사람이 함사(含沙)하매 모든 사람들이 짖어대어 끝내 괴수라는 죄목(罪目)으로 죽음을 당하였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세상에서는 지위가 높고 재주가 높은 사람을 영수(領袖)로 삼지만 그들의 법은 그렇지 않아 신분의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오직 죽어도 신심(信心)을 바꾸지 않는 사람을 두목(頭目)으로 삼는다. 그런데 공의 여러 차례의 소계(疏啓)와 옥중(獄中)에서 한 말을 보면 서교를 극구 배척하였으니 가령 공이 진실로 서교를 믿었다 할지라도 죽어도 신심을 바꾸지 않는 사람이 못되는데 어찌 괴수가 될 수 있겠는가. 공이 죽은 뒤 나라 사람의 반수가 공을 가련히 여겨 물의(物議)가 비등하였으며, 또,
“5~6년이 안 되어 임금의 마음이 다시 돌아설 것이니, 사태의 추이(推移)를 알 수 없다.”
고 말들을 하니, 당인(黨人)들은 다시 음모하여 호남옥사(湖南獄事)를 단련(鍛鍊 없는 죄를 꾸며 얽어맴)하여, 공이 을묘년 여름에 권일신(權日身)ㆍ주문모 등과 모의하여 서양 선박(船舶)을 맞아오기 위하여 은(銀) 2일(鎰)을 내었다는 말과 또 경술년 가을에 이미 이런 모의를 하였다는 말을 만들어 냈다. 옥사가 성립되어 포청(捕廳)에서 금부(禁府)로 이송되니, 드디어 공과 이승훈 등에게 가율(加律)하기를 청하였다. 아, 권일신(權日身)은 벌써 신해년에 죽었는데 어찌 4년 뒤인 을묘년의 모의에 참여할 수 있으며, 주문모는 을묘년에 처음 왔는데 어찌 5년 전인 경술년의 모의에 참여할 수 있었겠는가. 경술년 가을에는 공이 주필(朱筆)을 가지고 시장(試場)에 있었고 을묘년 여름에는 공이 편집의 책임을 맡아 규영부(奎瀛府)에 있으면서 상홀(象笏)과 패옥(佩玉)을 차고 날마다 궁전으로 나아갔는데 어떻게 주문모와 비밀히 만났겠는가? 사수(死囚)를 유혹하여 죽은 사람을 무함하게 하여 후일에도 무함을 못 벗도록 안건(案件)을 만들었으니, 매우 잔인하다 하겠다.
공에게는 보통 사람들과 매우 다른 일이 몇 가지 있으니 넓고 깊은 지식을 속에 넣고 있으면서도 저술(著述)은 난삽(難澁)하였으며, 강계(薑桂)와 같은 강직한 성품을 가졌으면서도 적을 만나면 겁을 내었고 천지 만물의 이치를 세밀히 분석하였으면서도 일을 헤아림에는 편색(偏塞)하였다. 계축년의 상소는 그가 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부득이하여 올린 것이다. 그러나 끝내 이로 인하여 패망하였으니, 그를 아는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공은 평소에 역상서(曆象書)를 좋아하여 일월(日月)의 교식(交蝕)과 오성(五星) 복현(伏見) 시기와 황도(黃道)ㆍ적도(赤道)의 거리 및 차이의 도수에 대하여 모두 그 원리를 통하였으며 아울러 지구(地球)의 둘레와 지름에 대하여서도 별도로 도설(圖說)을 만들어 후생(後生)을 가르쳤으니, 공이 서교를 신봉한다는 지목을 받게 된 것도 실은 이 때문이었다. 일찍이 상국(相國) 이시수(李時秀)가 나에게 말하기를,
“남인(南人)들은 고루하여 정조(廷藻 이가환)가 전공(專攻)한 것이 역상법인데, 고루한 자들이 이를 서교로 잘못 알고 꾸짖고 괴이하게 여긴다.”
하였으니, 역시 사리를 아는 말이라 하겠다. 그가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을 적에 몇 사람의 농민을 잡아다가 사교(邪敎)를 믿는다고 치죄하였으며 또 충주 목사(忠州牧使)가 되어서는 교인(敎人)들을 잡아다가 주리를 틀고 곤장을 치기까지 하였다. 이는 자신이 위험해지자 서교 믿는 자들을 잡아다가 심하게 다스림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려 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공에게 겁이 많다는 증거이다. 내가 위험하다 하여 백성을 악형(惡刑)으로 다스린다면 그 누가 심복(心服)하겠는가? 신해년 가을 신헌조(申獻朝)가 상소하여 홍낙안(洪樂安)의 죄를 논하기를,
“밖으로는 위정(衛正)의 명분을 가탁하나 안으로는 남을 무함할 계획을 하고 있으니 한시라도 놓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갑인년 여름 강세정(姜世靖)이 공에게 상서(上書)하여 홍낙안의 죄를 논하기를,
남을 해치기를 생각하고 일망 타진을 계획하니 마음으로만 절교(絶交)한 것이 아니라 안면(顔面)도 바꾼 것입니다. 시세(時勢)가 변하면 몇 번씩이고 다시 번복하여 이를 갈며 덤벼들 것이니, 세론(世論)이 어찌 안정될 날이 있겠습니까.”
하고, 공에게 자기 아들 준흠(浚欽)을 거두어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공은 행동이 엄정(嚴正)하여 거상(居喪)하는 3년 동안 중문(中門)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벼슬이 상경(上卿)에 이르렀으나 집은 낡을 대로 낡았으며 가난하고 검소함이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 때와 같았다. 저서(著書)로는 《금대관집(錦帶館集)》10책이 있는데 편(篇) 수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부인 정씨(鄭氏)는 고(故) 판서(判書) 운유(運維)의 따님이다. 딸 둘을 키웠는데, 큰딸은 탄옹(炭翁) 권시(權諰)의 후손인 권구(權耈)에게 시집갔고, 작은 딸은 복암(茯菴)이 이기양(李基讓)의 아들 이방억(李龐億)에게 시집갔다. 종조형(從祖兄 육촌형(六寸兄)) 구환(九煥)의 아들 재적(載績)을 양자(養子)로 삼았는데, 재적은 아들 형제를 두어 이미 모두 성취(成娶)시켰다. 공은 임술년에 나서 신유년에 죽었으니 향년 60세였다. 묘는 덕산(德山) 장천(長川 지금의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 서쪽 언덕에 있는데 오좌자향(午坐子向)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영웅 호걸 내시니 / 天降英豪
인류 중에 뛰어나 / 秀拔人群
무성한 잡초 속에 / 雜草蓊鬱
송백처럼 우뚝했네 / 松栝干雲
겹겹이 쌓인 바위 산엔 / 巖磝壘壘
사이사이 옥돌이나 / 介以瑤琨
모양 같은 무리 속엔 / 億貌齊同
다른 것이 홀로 높네 / 殊者獨尊
별의 정기 달의 광채 / 星精月彩
한 가문에 비추었으나 / 萃于一門
막내인 공에게 / 公生最晩
명성이 이루어 졌네 / 聲集諸昆
속에는 만권의 책 간직했고 / 胸韜萬軸
한 번에 천 마디 토해 냈네 / 一吐千言
구고(句股)와 호각(弧角)은 / 句股弧角
호리(豪釐)를 분석했고 / 縷析毫分
훌륭한 재주로 / 鴻毛龍鬣
일세를 드날렸네 / 風掣雲奔
제회가 이미 친밀하니 / 際會旣密
참소가 분분했네 / 謠諑其紛
참소가 성행으나 / 讒夫孔昌
임금은 더욱 후대했네 / 睿照彌敦
문단의 주도권을 쥐게 되니 / 登壇執牛
원망하는 무리 벌떼처럼 일어났네 / 怨師蠭屯
뜻밖에 임금이 일찍 승하하니 / 雲游肇擧
화가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 / 火烈燎原
길에 가득한 죄인들 / 赭衣塞路
삼목(三木) 찬 채 죽어갔네 / 三木收魂
귀신 같은 무리 뜻을 얻어 활개치고 / 鬼騩中逵
범처럼 사나운 자가 궁문을 지키고 있네 / 虎守天閽
만물은 끝내 모두 죽는 것이니 / 萬物同歸
공만이 홀로 원통한 것은 아니리 / 公無獨冤
부(附) 한화(閒話)
기미년(1799, 정조 23) 여름 내가 정헌공(貞軒公)을 방문하였더니, 공이 근심스러운 기색으로 말하기를,
“당인(黨人)들이 천금(千金)을 걸고 나를 얽어넣으려 하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하기에 내가,
“대감을 얽어넣는 데 천금이라면 나 같은 것은 5백금에 불과할 것입니다. 공께서는 장이(張耳)와 진여(陳餘)의 일을 듣지 못했습니까?”
하고 서로 크게 웃었다.
하루는 내가 정헌공에게 묻기를,
“다른 경(經)은 대략 통하였으나 《역경(易經)》은 알 수 없으니, 어찌하면 알 수 있습니까?”
하니, 공이,
“나는《역경》은 평생 동안 연구하여도 알지 못할 글로 이미 판단했으니 묻지 말라.”
하였다. 내가 묻기를,
“성옹(星翁)의 《역경질서(易經疾書)》는 어떻습니까?”
하니, 공은,
“이는 우리 집안의 책이므로 일찍이 숙독(熟讀)하였으나 역시《주역》은 알 수 없었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의 호)의《역경심해(易經心解)》는 어떻습니까?”
하니, 공은,
“이도 우리 집안의 책이므로 일찍이 숙독하였으나 역시《역경》은 알 수 없었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내의선(來矣鮮 의선은 지덕(知德)의 자인데 명 나라 사람)의《주역집주(周易集注)》는 어떻습니까?”
하니, 공은,
“역시 《역경》은 알 수 없었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오징(吳澄)의《역찬언(易纂言)》은 어떻습니까?”
하니, 공은,
“역시 《역경》은 알 수 없었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주진한(朱震漢)의《상역(上易)》은 어떻습니까?”
하니, 공은,
“역시 알 수 없었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이정조(李鼎祚)의《주역집해(周易集解)》는 어떻습니까?”
하니, 공은,
“이 책이 다른 책에 비하여 조금 나으나 역시《역경》은 알 수 없었다.”
하고, 이어 수십 사람의 역설(易說)을 열거하고는,
“모두 보았으나 역시《역경》은 알 수 없었다.”
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자네는《역경》에 뜻을 두지 말라. 역학(易學)은 어리석은 자나 하는 것이니, 자네같이 총명한 사람은 절대로 역학을 배울 수 없다.”
하고, 또 이어 말하기를,
“저 궁벽한 시골에 평생 동안《역경》을 읽고서 드디어 노주역(盧周易)이니 최주역(崔周易)이니 하는 자들이 수없이 많은데, 자네도 이런 무리가 되려는가?”
하고는 한바탕 크게 웃었다.
복암(茯菴)은 성품이 소탈하고 혼후(渾厚)하였다. 매양,
“의리(義理)의 싸움이 당론(黨論)으로 돌아갔다.”
하고, 또,
“남을 너무 심히 미워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공과 의견이 맞지 않을 적마다 복암은 심히 노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일찍이 번옹(樊翁)의 석상(席上)에 화성(華城)으로부터 왔다는 어떤 선비가 있어 말하기를,
“근간 제가 시권(詩卷)에 지이(之而) 두 글자를 썼더니, 유수(留守)가 저를 낙방(落榜)시키고 시권을 여러 사람들에게 돌려보이면서 ‘벽서(僻書)ㆍ괴문(怪文)을 어전(御前)에 올릴 수 없다.’고 하므로 저는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승지(承旨) 신광하(申光河)의 시에 지이 두 글자 쓴 것을 분명히 보았으나 그 출전(出典)을 알지 못하여 힐난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번옹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왕형공(王荊公 형은 왕안석(王安石)의 봉호)의 시에,
고래 잡느라 파도와 싸우니 / 采鯨抗波濤
바람이 일고 비늘이 서네 / 風作鱗之而
란 것이 있는데, 이 시가 노소(老蘇 소순(蘇洵))의 시를 압도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왕형공과 노소의 감정이 이 시 때문에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왕형공의 시도 본래 정경(正經)에서 나온 것이다.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 재인위순거장(梓人爲筍虡章)에 ‘움켜 죽이고 물어뜯는 짐승은 반드시 발톱을 감추고 눈은 툭 튀어나오고 비늘은 불거져 나온다.[之而] 발톱을 감추고 눈이 튀어나오고 비늘이 불거지면 사람이 보기에 반드시 발끈 성을 내는 것 같다. 진실로 성을 낸다면 무거운 악기를 짐질 만하다. 여기에 채색까지 갖추면 반드시 소리를 낸다. 발톱을 감추지 않고 눈이 튀어나오지 않고 비늘이 불거져 나오지 않는다면 반드시 기운이 쇠하여 시들한 짐승이다. 여기에 채색까지 갖추지 못하면 두들겨도 반드시 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정현(鄭玄)은 ‘지이(之而)는 불거져 나오는 것[頰𩑔]’이라 하였고, 가공언(賈公彦)은 ‘협곤(頰𩑔)은 두려운 모양이다.’하였다. 고공기가 어찌 벽서(僻書)란 말인가. 고경(古經)에 어두우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당세를 논하면 좋아서 입이 벌어진다는 말은 바로 이런 무리를 두고 한 말이다. 자네는 어찌 이로써 대답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공이 이 《주례》의 글을 욀 적에 빠름이 마치 나는 물굽이와 세찬 물줄기 같아서 온 좌중(座中)이 모두 시원스러워했다.
하루는 당세에 이름 있는 당로학사(當路學士)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대내(大內)에서 내리신 지리책(地理策)에 두 한계[兩戒]와 사열(四列)을 물으셨는데, 그 출전(出典)을 알 수 없으니 가르쳐 주기 바란다.”
하였다. 이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당서(唐書)》 천문지(天文志)에 ‘일행(一行)이 천하 산하(山河)의 형상이 두 한계[兩戒]가 있으니 북으로는 융적(戎狄)을 한계하고 남으로는 만이(蠻夷)를 한계한 것이다.’하였으니, 이른바 두 한계란 강하(江河)를 이르는 말이다. 이는 진실로 그러하다. 사람들은 무던히도 글을 읽지 않는다. 읽는다 해도 주소(注疏)를 읽지 않고 또 대전(大全)도 읽지 않는다. 대전을 읽어보니, 우공(禹貢《서경》 편명) 채씨(蔡氏) 전(傳 도견장(導岍章))에 ‘왕숙(王肅)과 정현(鄭玄)이 삼조(三條)ㆍ사열(四列)의 명칭을 말한 것은 모두 타당치 않다.’라 하고 그 소주(小註)에 신안 진씨(新安陳氏)는 ‘사열에 대한 설은 정현에게서 나온 것인데, 그는 견산(岍山)ㆍ기산(岐山)이 정음열(正陰列), 서경산(西傾山)이 차음열(次陰列), 파총(嶓冢)이 차양열(次陽列), 민산(岷山)이 정양열(正陽列)이라 하였으니, 사열이 비록 옳다고 할지라도 음양 정차(陰陽正次)로 명칭한 것은 타당치 않다.’하였다. 이 말이 어찌 벽서(僻書)에서 나온 것인가.”
하였다. 공은《당서》와 대전의 글을 인용하면서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줄줄 내려 외었다. 그리고 종이를 꺼내어 답장 쓰기를,
“사열의 명칭이 집전(集傳 《서경》 집전)에 나오고 그 소주(小註)에 자세히 보이는데, 어찌 그것을 상고하지 않았습니까.”
하였다. 내가 이를 보고 말하기를,
“그는 큰 이름이 있는 사람이니 창피를 준다면 감정을 품을 것입니다. 답장을 고쳐 쓰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공은 그렇게 여겨 다시 고쳐 다음과 같이 답장하였다.
“사열은 나도 자세히 몰랐습니다. 지금 《서경》 집전 도견(導岍)의 대문을 상고하여 대략을 들어 말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소보(邵寶)의 《용춘당집(容春堂集)》을 보니 나모전(㒩母傳)이란 것이 있는데, 나(㒩)자를 알 수 없어 자서(字書)를 두루 찾아보았으나 이 글자가 없었다. 이에 나는 손뼉을 치며, 이 글자로 정헌(貞軒)을 곤혹하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말을 재촉하여 공에게 가서 몇 마디의 말을 주고 받은 뒤 나자의 음(音)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공이 말하기를,
“이 글자는 알 수 없다. 자휘(字彙)나 자전(字典)에도 나오지 않는다. 자네가 혹시 소 보의 나모전을 보았는가? 나모전은 모영전(毛穎傳)과 비슷하니 역시 기문(奇文)이다. 나는 마침 기억하고 있다.”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줄줄 내리 외고 나서 말하기를,
“서릉씨(西陵氏)의 딸이 들에 나가 비로소 누에[蠶]의 민숭민숭한 모양을 보고 그를 나조(嫘祖)라 하였다. 나(㒩)자의 음은 당연히 나(嫘)의 음과 같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순자(荀子)》 부편(賦篇)에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그 형상이 민숭민숭하여 자주 변화하는 것이 마치 귀신 같다.” 하고, 그 주(註)에 “나(㒩)는 나(倮)로 보아야 한다.” 하였는데 자전(字典)에 보인다.
하루는 여러 학사(學士)들이 정원(政院)에 앉아서 시(詩)를 논하는데, 한 사람이 말하기를,
“동파(東坡)의 주행시(舟行詩)에 괴기(怪奇)한 시구가 있는데, 지금 내가 잊어 한두 글자도 욀 수 없으니 한스럽다.”
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조류는 물 가에서 생기고 / 暗潮生渚
지는 달은 버들가지에 걸렸다 / 落月挂柳
라는 시가 아닌가?”
하니, 그 사람은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대감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분입니다.”
하루는 어떤 어리석은 자가 와서 묻기를,
“선수(蟬酥)와 아편(鴉片)은 어떠한 물건입니까?”
하자, 공이 정색(正色)하며 말하기를,
“소년은 정욕(情慾)을 억제하고 학업을 닦아야 하거늘 이 어인 질문이냐.”
하니, 그 사람은 부끄러워하며 잘못을 빌었다. 그 사람이 돌아간 뒤 내가 공에게 선수와 아편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음약(淫藥)의 재료이다. 선수는 두꺼비 오줌이고 아편은 앵속각(罌粟殼)의 진액인데, 저 사람이 그것을 조제(調劑)하고자 하기 때문에 내가 일러 주지 않았다.”
공은 또 감식(鑑識)이 정통하여 당ㆍ송ㆍ원ㆍ명(唐宋元明)의 시를 한번 들으면 백 번에 한 번의 착오도 없이 모두 어느 때의 시인지를 알았고, 우리나라 사람의 시로는 더욱 그를 속일 수 없었다. 공의 생질 허질(許瓆)이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시집(詩集)을 가지고 그 속에서 시를 뽑아 종일토록 물어도 끝내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허질은 재사(才士)였는데, 중국의 시체(詩體)를 모방하여 한 편의 시를 지어가지고 가서 이 시가 어느 때 누구의 시이냐고 물으니, 공이 한동안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강아지[犬子]의 시이다.”
하였다. 허질이 탄복하며,
“참으로 귀신입니다. 어떻게 내가 지은 것인 줄 아셨습니까?”
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웃었다.
그가 광주(廣州)에 있을 적에 이웃 고을 백성이 근산(近山)에 장사지내는 것을 송사(訟事)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율(律)에도 인가 1백 보 이내에는 장사지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공이 판결하기를,
“계무자(季武子)가 집을 짓는데, 두씨(杜氏)의 무덤이 서계(西階) 밑에 있었다. 두씨가 합장(合葬)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율은 진실로 어길 수 없으나 예(禮)에도 증거가 있다.”
하고, 그 사람에게 안장하게 하였으니, 지금까지도 공의 이 판결이 칭송된다.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은 정해(精該)한 책이다. 한치윤(韓致奫)이 사신(使臣)을 따라 연경(燕京)에 갔을 적에 연경 선비들이 이 책을 보고 서로 달라고 간청하였다 하니, 대개 뛰어난 운서(韻書)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본래 이덕무(李德懋)가 만든 것인데, 선조(先朝)께서 그 원고를 가져다가 이가환(李家煥)으로 하여금 그 잘못된 편방(偏旁)ㆍ점획(點畫)을 사정(査正)케 하시고 이명예(李明藝)에게 명하여 정서(淨書)케 하신 책이다. 이명예가 한 장의 정서를 끝낼 적마다 공이 그 잘못된 곳을 사정하여 점 하나 획 하나까지 자세히 살피니, 옆에서 보는 이들이 너무 심하다고 하였다. 이 책에 부(父)자를 ‘처음으로 나를 낳으신 분[始生己]’이라 훈고(訓詁)하고, 시(豉)자를 ‘소금물에 메주를 담그는 것[配鹽幽菽]’이라 훈고하였으니, 이는 모두 고훈(古訓)에 의거한 것이다. 또 이 책은 이덕무의 원고를 정리한 것일 뿐, 공이 주석(註釋)한 것이 아닌데도 공을 미워하는 자들은 이 두 글자의 훈고를 가지고 경연(經筵)에서 공을 참소하여 훼판(毁板)하기를 청하였다. 상은 그들이 참소한다는 것을 아셨으나 역시 그 훈고에 대해서는 좋지 않게 생각하셨다. 악당(惡黨)들은 또 세상에 말을 퍼뜨리기를,
“홍계희(洪啓禧)는 《삼운성휘(三韻聲彙)》를 짓고 이가환(李家煥)은 《규장전운(奎章全韻)》을 교정하였다가 모두 패망하였으니, 육서(六書)의 학(學)은 모두 흉화(凶禍)의 근본이다.”
하였다. 남인(南人)들은 자제(子弟)들에게 일부러《규장전운》의 자체(字體)와 틀리게 쓰도록 가르치는데, 《전운》의 자체와 틀리게 쓴다면 자연 글자가 잘못되고 추악해지기 마련이다. 이는 바로 목이 메인다 하여 음식을 전폐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이 조정암(趙靜庵)을 죽인 뒤 《소학(小學)》을 흉서(凶書)라 하여 읽지 못하도록 금한 것과 동일한 수법이다. 육서도 역시 《소학》의 일종이다.
참소하는 말이 이와 같았으나 선조(先祖)께서는 말년에 《규장전운옥편(奎章全韻玉篇)》의 편찬을 명하시어 검서관(檢書官) 유득공(柳得恭)으로 하여금 이가환과 정약용에게 문의하여 잘못된 곳을 수정(修正)한 다음 마지막으로 예재(睿裁 임금 결재)를 받아 결정하게 하셨으니, 이는 모두 어정(御定)하신 책이다. 그런데 상이 승하하신 뒤 어떤 당인(黨人)이 경시관(京試官)으로서 호남 향시(鄕試)의 시관(試官)으로 가서 여러 유생들에게 말하기를,
“시권(試券)에《규장전운》의 자체를 쓴 자는 낙방시킬 것이다.”
하였다. 과장(科場)에 들어온 유생들은《규장전운》을 구경도 못한 처지라 놀라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옛날 송(宋) 나라 때 정국(政局)이 뒤집히자 왕씨(王氏 왕안석(王安石))의《자설(字說)》을 금지하였었다. 그러나 어정(御定)하신 책에도 오히려 이런 관습을 쓰는 것은 매우 불공(不恭)한 일이다.
갑인년(1794, 정조 18) 여름에 유생 윤신(尹愼) 등이 통문(通文)을 발송하여 판서(判書) 홍 수보(洪秀輔) 부자(父子) 아들은 인호(仁浩) 를 공격하였는데, 이 논의는 처음 한씨(韓氏) 예안장(禮安丈)이 홍씨의 말을 전하였다. 에게서 시작되고, 중간에 박씨(朴氏) 박명섭(朴命燮)이 청교(淸橋) 사는 궁관(宮官) 조씨(趙氏)의 말을 전하였다. 에게서 격렬해져서 집집마다 시끄럽게 떠들어 상에게까지 알려져 마침내 공론이 되었다. 홍 대감은 그 통문을 정헌이 지었다고 여겨 드디어 혈수(血讎)로 삼았다. 그러나 사실은 정헌이 짓지 않았다. 최영춘(崔靈春) 최헌중(崔獻重) 은 그 통문의 출처를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평생토록 사실을 말하지 않으니, 공에 대한 홍씨의 오해가 끝내 풀리지 않았다.
[주-D001] 노부(鹵簿) : 임금이 거둥할 때 의장(儀仗)을 갖춘 행렬.[주-D002] 부정(簿正) : 문서(文書)로 정수(正數)를 정하는 것.[주-D003] 사제(賜第) : 임금의 명으로 특별히 과거에 급제(及第)한 사람과 똑같은 자격을 주는 것.[주-D004] 화(禍)가 일어나서 : 순조 원년 신유년(1801)에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천주교를 전교하던 이승훈(李承薰)을 비롯하여 남인(南人)에 속한 권철신(權哲身)ㆍ홍낙민(洪樂敏)ㆍ이가환(李家煥)ㆍ정약종(丁若鍾) 등을 사형하고, 정약전(丁若銓)ㆍ정약용(丁若鏞) 등을 귀양보낸 신유사옥(辛酉邪獄)을 말한다.[주-D005] 목만중(睦萬中) : 자는 공겸(公兼), 호는 여와(餘窩). 신유사옥 때 대사간(大司諫)으로 영의정 심환지(沈煥之)와 함께 정면에 나서서 남인(南人) 시파(時派) 계열의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와 학살을 감행하였다.[주-D006] 홍낙안(洪樂安) : 자는 인백(仁伯). 정조(正祖) 15년에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공서파(攻西派)의 선봉으로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제사할 때 신주를 폐한 윤지충ㆍ권상연 등의 엄중 처단을 요청하는 글을 보냈고, 다시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蔡濟恭)에게 장서(長書)를 보내어 흉역(凶逆)으로 처단할 것을 청하였다.[주-D007] 이기경(李基慶) : 자는 휴길(休吉). 호는 척암(瘠菴).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지냈다. 이승훈(李承薰)ㆍ이벽(李蘗) 등에게 천주교에 관한 책을 얻어 보고는 종래의 유학(儒學)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배척하였다. 진산사건이 일어났을 때 천주교도에 대한 영의정 채제공의 미온적인 태도를 탄핵하다가 경원(慶源)으로 유배되었다. 그가 천주교를 공격하기 위하여 엮은《벽위편(闢衛篇)》은 천주교사(天主敎史)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주-D008] 가율(加律) : 이미 판결한 죄인에게 형을 더하는 것.[주-D009] 잠(潛) :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형 이잠(李潛). 그는 숙종(肅宗) 때 세자인 경종(景宗)을 보호할 목적으로 김춘택(金春澤)ㆍ이이명(李頤命) 등 서인(西人)이 세자에게 불리하다는 소(疏)를 올렸다가 국문받던 중 장살(杖殺)되었다.[주-D010] 전겸익(錢謙益) : 명말(明末)ㆍ청초(淸初)의 문인(文人). 명 나라가 망하자 청 나라에 벼슬하여《명사(明史)》편찬에 참여하였다.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초학집(初學集)》ㆍ《유학집(有學集)》 등의 저서가 있다.《淸史 卷483 錢謙益列傳》[주-D011] 원굉도(袁宏道) : 명 나라의 시인으로 자는 중랑(中郞). 형 종도(宗道), 아우 중도(中道)와 더불어 재명(才名)이 있어 삼원(三袁)으로 불린다. 청신(淸新)한 시풍(詩風)으로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저서로는《원중랑집(袁中郞集)》이 있다.《明史 卷388 袁宏道列傳》[주-D012] 장화(張華) : 진(晉) 나라 사람. 자는 무선(茂先). 학문이 해박하여 도위(圖緯)와 방기(方技)의 서적까지 두루 보지 않은 것이 없으니 당시 사람들이 자산(子産)에 비교하였다.《晉書 卷36 張華列傳》[주-D013] 간보(干寶) : 진(晉) 나라 사람. 자는 영승(令升). 박학(博學)ㆍ다재(多才)하였고, 음양술수(陰陽術數)를 좋아하였다.《晉書 卷82 干寶列傳》[주-D014] 숭의(崇義)와 계공(繼公) : 숭의(崇義)는 청(淸) 나라 사람 왕덕월(汪德鉞)의 자. 그는 정주학자(程朱學者)로서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을 지냈으며,《독경찰기(讀經札記)》ㆍ칠경여기(七經餘記)》 등의 저서가 있다.《淸史列傳 卷69》계공(繼公)은 오계공(敖繼公)으로 예(禮)에 밝았다. 저서에는《의례집설(儀禮集說)》이 있다.《新元史 卷235》[주-D015] 정범조(丁範祖) : 정조 때의 문신. 자는 법세(法世), 호는 해좌(海左). 삼사(三司)를 거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이 되었고, 순조 원년에는 지실록사(知實錄事)가 되어《정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주-D016] 윤필병(尹弼秉) : 자는 이중(彝仲), 호는 무호당(無號堂). 영조 43년에 정시(庭試)에 급제하여 언관(言官)이 되었다. 정조 21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재직중 서학(西學)을 옹호했다는 죄목을 들어 채제공(蔡濟恭)을 탄핵하다가 삭직(削職)되었다.[주-D017] 사군(四郡) : 한사군(漢四郡). 한 무제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없애고, 그 옛땅을 중심으로 낙랑(樂浪)ㆍ진번(眞蕃)ㆍ임둔(臨屯)ㆍ현도(玄菟) 사군을 설치했다.[주-D018] 호남옥사(湖南獄事) : 신해사옥(辛亥邪獄). 일명 진산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한다. 정조 15년(1791) 전라도 진산군(珍山郡)의 선비 윤지충(尹持忠)과 그의 외사촌 권상연(權尙然)이 지충의 모상(母喪)을 당하여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천주교식 장례를 지낸 소문이 퍼지자 조정에서는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을 시켜 두 사람을 체포하여 국법을 어기고 사교(邪敎)를 신봉했다는 죄목으로 죽이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공서파(攻西派)와 신서파(信西派)가 대립,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신서파가 결정적 타격을 받을 때까지 10년간의 암투가 계속되었다.[주-D019] 황건(黃巾)과 백련(白蓮) : 후한(後漢) 말엽에 장각(張角)을 괴수로 하여 일어났던 황건적(黃巾賊)과 명청(明淸) 시대에 자주 반란을 일으켰던 백련교(白蓮敎).[주-D020] 이동직(李東稷) : 자는 거경(巨卿). 정조 16년에 부교리(副郊理)로서 박지원(朴趾源)의《열하일기(熱河日記)》의 문체가 저속하다고 논박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또 남인(南人) 이가환(李家煥)을 서학교도(西學敎徒)라고 논척(論斥)하여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좌천시키는 등 주자학적(朱子學的) 전통에 입각하여 신학문 배척에 앞장섰다. 뒤에 대사간ㆍ대사헌ㆍ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주-D021] 남공철(南公轍) : 자는 원평(元平), 호는 사영(思穎). 정조 8년 음보(蔭補)로 세마(洗馬)가 되었고, 정조 16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순조 때 판서ㆍ좌우의정(左右議政)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당시 제일의 문장가로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주-D022] 김조순(金祖淳) :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 정조 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ㆍ대교(待敎)를 거쳐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순조 2년 국구(國舅)가 되어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장에 뛰어나고 그림도 잘 그렸다.[주-D023] 이상황(李相璜) : 자는 주옥(周玉), 호는 동어(桐漁). 정조 10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ㆍ정언(正言) 등을 거쳐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순조 때 좌의정이 되고, 헌종(憲宗) 때 영의정이 되었다.[주-D024] 심상규(沈象圭) : 자는 치교(穉敎), 호는 두실(斗室). 정조 13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검교(檢敎)ㆍ직각(直閣)을 역임하고《홍재전서(弘齋全書)》 편찬에 참여하였다. 순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문장에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하였다.[주-D025] 《제해(齊諧)》 : 신괴(神怪)한 설을 기록한 패설류(稗說類)로 남송(南宋) 때 무의(無疑)가 편찬한 책.[주-D026] 색은(索隱) : 당(唐) 나라 사마정(司馬貞)이 지은《사기(史記)》주석서(註釋書). 여기서는 괴벽한 사실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 책을 말함.[주-D027] 〈이소(離騷)〉와 〈구가(九歌)〉 : 이소는 굴원(屈原)이 지은 부(賦)의 이름. 구가도 역시 굴원이 지은 가곡(歌曲)의 이름으로 위로는 신(神)을 섬기는 공경을 진술하고 아래로는 자신의 억울함을 나타내어 이 노래를 가탁하여 임금에게 풍간(諷諫)한 것인데, 동황태일(東皇太一)ㆍ운중군(雲中君)ㆍ상부인(湘夫人)ㆍ대사명(大司命)ㆍ소사명(少司命)ㆍ동군(東君)ㆍ하백(河伯)ㆍ산귀(山鬼)ㆍ국상(國殤)ㆍ예혼(禮魂) 등 11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구가의 분편(分篇)에 있어서는 많은 설들이 있다.[주-D028] 맹단(盟壇)에 올라 우이(牛耳)를 잡고 : 일을 주도하는 우두머리의 뜻. 옛날 제후(諸侯)들이 맹약(盟約)할 때 맹주(盟主)가 소의 귀를 잡고 그 귀를 베어 피를 마시고 맹세한 고사(故事)에서 유래했음. 여기서는 문단(文壇)의 주도권을 쥠을 말함.[주-D029] 대일통(大一統)의 대권(大權) : 온 나라 안을 한 사람의 통솔로 다스리는 권한. 곧 왕권(王權)을 이름. 여기서는 문단의 대권을 쥐고 문체를 통일함을 지칭함.[주-D030] 김이소(金履素) : 자는 백안(伯安), 호는 용암(庸菴). 영조 40년 충량정시문과(忠良庭試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정조 16년에 우의정이 되고, 정조 18년에 정조사(正朝使)로 청 나라에 다녀온 뒤 좌의정에 올랐다.[주-D031] 김일경(金一鏡) :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킨 역신(逆臣). 경종(景宗)이 병이 잦고 세자가 없으므로 노론(老論)의 이이명(李頤命)ㆍ김창집(金昌集)ㆍ이건명(李健命)ㆍ조태채(趙泰采) 등의 주청으로 원년(元年) 8월에 왕제(王弟) 연잉군(延礽君 : 영조)을 세제(世弟)로 봉하고 다시 정무(政務)를 대리케 하자, 김일경은 소론의 영수(領首) 조태구(趙泰耈) 등과 이를 반대하여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취소케 하고, 이어 노론 사대신(四大臣)을 축출하고 소론 정권을 세웠다. 소론 중의 과격파로서 노론 탄압에 앞장 선 김일경은 목호룡(睦虎龍)을 매수하여 노론이 역모를 꾀한다고 무고(誣告)케 하여 노론 사대신을 사사(賜死)하고, 노론 수백 명을 살해 또는 축출하였다. 영조가 즉위한 뒤 청주 유생 송재후(宋載厚)의 상소로 신임사화가 모두 무고로 조작된 것임이 드러나 참형되었다.[주-D032] 박필몽(朴弼夢) : 영조 때 역신. 소론의 과격파로서 김일경ㆍ이명의(李明誼)ㆍ이진유(李眞儒) 등과 함께 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청한 노론 사대신을 공격하여 신임사화를 일으켰다. 영조가 즉위한 뒤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 김일경의 잔당(殘黨)인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자 배소(配所)에서 뛰쳐나와 반란을 일으킨 태인 현감(泰仁縣監) 박필현(朴弼顯 : 박필몽의 종제〈從弟〉)의 군중(軍中)으로 가던 도중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도(竹島)에 숨었다가 무장 현감(茂長縣監) 김몽좌(金夢佐)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 반란의 역괴(逆魁)로 몰려 참살되었다.[주-D033] 사신의 무릉[徙薪之茂陵] : 사신은 곡돌사신(曲突徙薪)의 줄인 말로,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아궁이 근처의 나무를 딴 곳으로 옮겨서 화재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뜻. 사신의 무릉이란 한 선제(漢宣帝) 때 곽씨(霍氏)의 세력을 억제하여 화를 미연에 방지하기를 청한 무릉인 서복(徐福)을 이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이잠이 올린 상소가 서복의 상소와 같다는 것을 뜻한다.《漢書 卷68 霍光傳》[주-D034] 기거주(起居注) : 사관(史官)이 임금의 언행(言行)을 기록한 책을 말함.[주-D035] 방미 두점(防微杜漸) : 싹이 트기 전에 막고 물이 스미기 전에 막는다는 말로 곧 화란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뜻.[주-D036] 심환지(沈煥之) : 벽파(僻派)의 영수로 자는 휘원(輝元), 호는 만포(晩圃). 영조 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정조 때 대사헌ㆍ대사간 등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순조 때에는 영의정에 올라 시파(時派)의 천주교도들에게 무자비한 박해를 가했다.[주-D037] 문왕(文王)의 무우(無憂) : 《중용(中庸)》 18장에 공자가 “근심 없는 자는 오직 문왕이로다. 왕계(王季)로 부친을 삼고 무왕(武王)으로 아들을 삼았으니, 부친은 앞서 나라를 창업하고 아들은 뒤를 이어 그 뜻을 잘 계승하였다.” 하였다. 여기서는 경종이 숙종에게 아무런 근심도 끼치지 않아 숙종이 문왕처럼 평안하다는 뜻.[주-D038] 의율(擬律) : 죄의 경중에 따라 법을 적용함.[주-D039] 김종수(金鍾秀) : 벽파(僻派)의 영수로 자는 정부(定夫), 호는 몽오(夢悟). 정조 때 좌의정으로 심환지와 더불어 시파(時派)인 홍씨(洪氏) 일파에 대한 공격에 앞장섰다. 문장이 뛰어났고, 정조 때 《경연고사(經筵故事)》와 《역대명신주의(歷代名臣奏議)》를 지어 바쳤다.[주-D040] 조덕린(趙德隣)에 대한 처분……이르렀습니다 : 영조 1년(1725)에 조덕린은 당시 필선(弼善)으로 당쟁의 폐해를 상소하였는데, 그 글 속에 노론(老論)의 득세를 비난한 구절이 있어, 당쟁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하여 종성(鍾城)으로 유배당했다. 그 뒤 풀려나왔으나 그 죄명(罪名)이 그대로 세초(歲抄)에 실려 있던 것을 정조 12년 11월에 그 죄명을 세초에서 삭제한 처분을 말한다. 본문에 어린 돼지가 아니라고 한 말은《주역(周易)》 구괘(姤卦) 초육(初六)에, “쇠말뚝에 붙들어 매면 정(貞)이 길(吉)하고 풀어 놓으면 흉(凶)을 당하리니 어린 돼지[羸豕]가 머뭇거릴 때 경계하라.” 하였다. 이는 소인을 어린 돼지에 비유하여 군자를 경계한 말인데, 여기서는 당초 악인을 그대로 두어 마침내 흉인이 자라나 큰 해를 끼치게 되었다는 뜻임.[주-D041] 금등(金縢)을 열어 : 영조가 간인의 모함에 빠져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이고는 후회하는 뜻으로 “동혜동혜 혈삼혈삼(桐兮桐兮 血衫血衫)"이란 사(詞)를 지어 금등에 넣었다.《茶山年譜 18年 甲寅》 금등이란《서경(書經)》의 편명이기도 하며, 왕실의 비적(祕籍)을 간직해 두는 엄중하게 봉한 궤를 말한다.[주-D042] 여덟 자 : 융범희공개운창휴(隆範熙功開運彰休)를 말함.[주-D043] 옥책(玉冊) : 제왕(帝王) 또는 후비(后妃)의 존호(尊號)를 올릴 때 송덕문(頌德文)을 쓴 간책(簡冊).[주-D044] 옥보(玉寶) : 제왕 또는 후비의 존호를 새긴 도장.[주-D045] 이병모(李秉模) : 자는 이칙(彝則), 호는 수정재(修靜齋). 영조 50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정조 때에는 규장각 직제학(奎章閣直提學)과 판서를 지냈고, 정조 18년에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에 다시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문장에 뛰어났고 글씨에도 능하였다.[주-D046] 박장설(朴長卨) : 자는 치교(穉敎), 호는 분서(汾西). 영조 50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조 때 삼사(三司)를 두루 거쳐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올랐다.[주-D047] 이승훈(李承薰) :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영세신자(領洗信者). 이가환의 생질이고 정약용의 자형으로서 이벽(李檗)의 권유로 천주교도가 되었다. 정조 7년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청 나라에 가서 북경 남천주교당(南天主敎堂)에서 교리를 익힌 뒤 영세를 받고 많은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귀국하여 명례동(明禮洞) 김범우(金範禹)의 집에 교회를 세우고 주일 미사와 설교를 행하면서 교리를 언문으로 번역하여 널리 배포하였다. 뒤에 천주교의 전파를 막으려는 조정의 탄압이 있자 이승훈은 살기 위하여 여러 차례 배교(背敎)하였으나, 신유사옥 때 서소문 형장에서 참살(斬殺)당하였다.[주-D048] 임헌 공령(臨軒功令) : 임헌은 임금이 어좌(御座)에 앉지 않고 평대(平臺)에 거둥하여 앉는 것이고, 공령은 고과(考課)의 법령으로 학령(學令) 또는 선거령(選擧令)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급제한 사람들의 시권(試券)을 모아놓은 책인 듯하다.[주-D049] 일행(一行) : 당(唐) 나라 승려(僧侶) 장수(張遂)의 법명(法名).[주-D050] 문계(問啓) : 죄과로 인하여 퇴관(退官)당한 사람을 왕명(王命)으로 승지(承旨)가 계판(啓板) 앞에 불러 그 까닭을 물어 아뢰는 일.[주-D051] 등보(滕甫)의 글 : 보(甫)는 원발(元發)의 초명(初名). 송 신종(宋神宗) 때 어사중승(御史中丞)ㆍ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의 벼슬을 지냈다. 신종에게 매우 신임을 받았으나, 부당(婦黨) 이봉(李逢)의 역모(逆謀)로 인하여 지방관으로 좌천되어 10여 년 동안을 불우하게 보낸 뒤 드디어 자신을 변명하는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악양(樂羊)이 공이 없자 비방하는 글이 상자에 가득하였고, 즉묵대부(卽墨大夫)는 무슨 잘못이 있어서 헐뜯는 말이 날마다 이르렀습니까?”《宋史 卷332 滕元發列傳》[주-D052] 계축년 봄의 상소 : 정조 17년(1793) 봄에 이잠(李潛)의 보호소(保護疏)를 극력 변호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변명한 상소.[주-D053] 발계(發啓) : 임금이 재가(裁可)하였거나 의금부에서 처결한 죄인에 대하여 사간원ㆍ사헌부에서 다시 죄의 명목을 갖추어 아뢰는 일.[주-D054] 주문모(周文謨) : 청(淸) 나라의 신부(神父)로 북경 주교(北京主敎)의 명을 받고 정조 18년에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잠입하여 선교하다가 발각되어 사형당하였다.[주-D055] 오석충(吳錫忠) : 천주교인(天主敎人). 자는 유원(幼源), 호는 매장(梅丈).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임자도(荏子島)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주-D056] 홍낙임(洪樂任) : 천주교인. 자는 숙도(叔道), 호는 안와(安窩).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아들로 영조 때 문과에 장원하여 정언(正言)ㆍ문학(文學)ㆍ사서(司書)ㆍ승지(承旨) 등의 벼슬을 지냈다. 윤행임(尹行恁)의 권유로 천주교를 신봉하다가 신유사옥 때 제주도에 안치되었다가 곧 사사(賜死)되었다.[주-D057] 기축옥사(己丑獄事) :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동인(東人)이 화를 당한 사건. 선조 22년(1589) 10월에 동인인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동인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고 서인(西人) 정철(鄭澈)이 옥사를 엄하게 다스리어 이발(李潑)ㆍ이길(李洁)ㆍ최영경(崔永慶) 등이 처형되고, 정언신(鄭彦信)ㆍ정개청(鄭介淸) 등이 유배되었다. 이때부터 전라도를 반역향(反逆鄕)이라 하여 전라도 사람의 등용이 제한되었다.[주-D058] 경신옥사(庚申獄事) : 남인(南人)이 실각한 사건. 현종(顯宗) 이후 예론(禮論)에 승리한 남인이 집권하였으나, 숙종의 신임이 그다지 두텁지 않던 차에 숙종 6년(1680) 영의정 허적(許積)의 유악남용사건(帷幄濫用事件)으로 숙종은 더욱 남인을 꺼렸다. 서인(西人) 김석주(金錫冑)ㆍ김익훈(金益勳) 등이 허적의 서자(庶子) 견(堅)이 종실(宗室)인 복창군(福昌君)ㆍ복선군(福善君)ㆍ복평군(福平君)의 3형제와 역모한다고 고변(告變)하여 옥사가 일어나서 복창군 3형제와 허적ㆍ윤휴(尹鑴) 등 남인이 사사되고 많은 남인이 파직되었다.[주-D059] 이벽(李檗) : 천주교도. 원명(原名)은 덕조(德祚). 정약전(丁若銓)ㆍ권철신(權哲身) 등의 서학(西學) 토론회에 참석한 뒤 천주교에 흥미를 느껴 이승훈에게 부탁하여 중국에서 서양 서적을 구입해 와서 서학 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남인들 사이에 무리를 모아 선교(宣敎)에 전념하고, 이승훈에게 영세를 받아 권일신(權日身)과 함께 영수가 되었다. 천주교 신봉을 말리다가 목매어 자살한 아비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천주교와 인연을 끊었다.[주-D060] 함사(含沙) : 중국 남방(南方)에 있다는 괴물. 모래를 머금어 사람의 그림자를 쏘면 그 사람은 병이 나서 죽는다고 한다. 곧 소인이 음흉한 수단으로 남을 해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주-D061] 권일신(權日身) : 천주교도. 자는 성오(省吾), 호는 이암(移菴). 철신(哲身)의 동생이다. 이벽(李檗)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入敎)하여 청 나라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에게 최초로 영세를 받고 교인들끼리 모여 직제(職制)를 결정할 때 주교(主敎)가 되었다. 신해사옥(辛亥邪獄) 때 이승훈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갔으나 심경에 변화가 일어 천주교에서 탈퇴하였다.[주-D062] 구고(句股)와 호각(弧角) : 구고는 직각 삼각형이고 호각은 원(圓)과 각(角)으로 모두 기하학에 쓰이는 용어인데, 여기서는 이가환이 수학에 능했음을 뜻함.[주-D063] 삼목(三木) : 세 가지 형구(刑具). 곧 머리ㆍ손ㆍ발에 끼우는 칼ㆍ차꼬ㆍ족쇄 따위이다.[주-D064] 장이(張耳)와 진여(陳餘)의 일 : 모두 한(漢) 나라 대량인(大梁人). 진(秦) 나라가 위(魏)를 멸한 뒤에 두 사람이 명사(名士)란 말을 듣고 그들을 잡기 위하여 장이에게 1천 금(金), 진여에게 5백 금을 현상(懸賞)했던 고사(故事).《史記 卷89 張耳陳餘列傳》[주-D065]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 : 정조의 명을 받들어 규장각(奎章閣)의 여러 신하가 편찬한 운서(韻書). 사성(四聲)에 따라 글자를 나누고, 같은 글자라도 음의(音義)가 다른 것은 분별하여 알기 쉽게 하였다.[주-D066] 편방(偏旁) : 한자(漢字)의 왼쪽인 편(偏)과 오른쪽인 방(旁)을 이름.[주-D067] 《삼운성휘(三韻聲彙)》 : 영조 때 홍계희(洪啓禧)가 지은 운서(韻書). 중국의《삼운통고(三韻通考)》를 본떠서 한자(漢字)를 사성(四聲)으로 분류하고, 각 글자 아래 중국식 표음(表音)과 우리나라의 표음을 달아 놓았다. 또 이 책의 범례(凡例)에는 한글의 자모(子母)와 초ㆍ중ㆍ종성을 도식(圖式)으로 설명하였다. 홍계희는 영조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까지 지냈으나, 정조 때 그 아들 술해(述海)와 손자 상간(相簡)이 대역(大逆) 혐의를 받고 사형되자 그의 관작도 추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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