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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안 UBF 오요한 목자의 성경 66권 강해서 원문보기 글쓴이: 말씀 선생
에스라 7장 강해 에스라의 결심
에스라 7장 1-28
요절 에스라 7장 10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에스라의 결심입니다. 자기의 이름을 넣어서 ( )의 결심하여 봅시다.
우리는 누구나 영향력을 끼칩니다. 우리가 믿음의 결단을 해야 좋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일차 귀환합니다.
이차는 에스라를 중심으로 귀환합니다.
삼차는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귀환합니다.
스룹바벨을 통하여 성전을 중건하고 에스라를 통하여 내면을 개혁하고 느헤미야를 통하여 성벽을 중건합니다.
에스라는 무너진 내적인 이스라엘을 회복합니다. 외적인 성전과 성벽을 회복할 뿐 아니라 내적인 믿음을 회복합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분명한 결심을 하고 옵니다. 에스라의 결심을 통하여 유대인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에스라의 개혁이 있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와 사가랴와 엘리사벳과 안나와 시므온과 같은 사람들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사도와 같은 사람들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나 한 사람의 결심이 우리의 공동체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 가르칩니다.
(믿음의 역사가 계승됨)
1-5절을 보십시오. “이 일 후에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왕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그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살룸의 현손이요 사독의 오대 손이요 아히둡의 육대 손이요 아마랴의 칠대 손이요 아사랴의 팔대 손이요 므라욧의 구대 손이요 스라히야의 십대 손이요 웃시엘의 십일대 손이요 북기의 십이대 손이요 아비수아의 십삼대 손이요 비느하스의 십사대 손이요 엘르아살의 십오대 손이요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대 손이라”
6장과 7장 사이에는 약 60년의 기간이 흐른 셈입니다. 이러한 공백 기간 중에 있었던 사건들 중 본서에 기록된 유일한 것은 아하수에로 재위(B.C. 485-464)때의 성전 건축 훼방 사건입니다(4:6).
아닥사스다왕은 B.C. 464년부터 424년까지 왕위에 있었던 페르시아 제6대 왕입니다. 성전을 봉헌한 후에 아닥사스다가 왕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가 나옵니다.
에스라는 역대기 상하를 포함한 본서의 저자로서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도우신다’ 입니다. 스라야의 아들입니다. 스라야는 여호와께서 권세를 잡으셨다 의 뜻입니다. 이 사람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여호사닥의 아버지였습니다(대상 6:14, 15). 그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된 당시의 대제사장이었으며, 바벨론의 군대에 의해서 리블라라는 바벨론 땅에 끌려가서 거기서 죽임을 당했습니다(왕하 25:18 렘 52:24).
따라서 여기의 아들은 문자적 의미의 아들이 아닙니다. 벤이라는 단어는 반드시 아들이라는 의미 이외에 문맥에 따라서 자손의 의미도 갖습니다.
에스라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었던 스라야부터를 자신의 조상으로 언급한 까닭은 에스라가 여호사닥의 직계로서 대제사장의 혈통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또한 역대기의 족보와 일치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대상 6:3-15).
아사랴의 자손인데 아사랴는 여호와께서 도우셨다의 의미입니다. 힐기야의 증손인데 힐기야는 말할 나위도 없이 요시야 왕 시대에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던 대제사장입니다(왕하 22:4-14 대하34:14-22).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분깃입니다.
에스라는 사독의 오대손입니다. 므라욧의 구 대 손인데 므라욧은 솔로몬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의 증조 할아버지였습니다(대상6:6-8). 따라서 바로 앞에 나왔던 아사랴와 여기의 므라욧사이에는 7대가 생략되어 있는 셈이 됩니다.
므라욧은 완고한이란 뜻입니다. 비느하스의 십 사 대 손인데 이 비느하스는 대제사장 아론의 손자(대상 6:3, 4)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짓 선지자 발람의 꾀로 인하여 이방 사람들과 정(情)을 통하는 등 결정적인 영적 위기를 맞았던 순간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심으로그 사태를 진정시켰던 인물입니다(민 25:7-13). 이에 따라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을 받게 되었습니다(시 106:30, 31). 또한 그는 가나안 정복 전쟁 동안에는 동쪽 지파들이 제단을 쌓은 일에 대한 조사를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수 22:9-34).
엘르아살은 모세 시대의 대제사장 아론의 네 아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대상 6:3). 엘르아살의 두 형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 잘못된 제사를 드림으로 진노를 받아 아들도 없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레 10:1, 2). 이에 따라 엘르아살은 아론의 뒤를 이어서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민 20:25-28). 대제사장 아론의 16대손입니다.
여기서 저자 에스라가 특별히 대제사장이라는 말을 첨가한 까닭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의 역할과 관련하여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자신이 대제사장 가문의 정통적 후손임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수 있는 자격자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레위지파요 제사장의 가문을 이어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서 70년 포로생활을 하였습니다. 70년동안 정치적인 단절은 있었으나 영적인 단절은 없었습니다. 바벨론에서도 제사장 직분을 유지하였습니다. 제사장이 살아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는 예배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가르칩니다. 백성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합니다. 에스라는 역대기상하를 기록합니다.
나라는 망했어도 하나님은 살아있습니다. 시대순으로 보면 다니엘서와 에스더서 뒤에 에스라 7장이 나옵니다.
느브갓네살, 벨사살왕(다니엘)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습니다. 다리오(다니엘)-아하수에르(에스더)- 아닥사스다왕(에스라, 느헤미야)이 이어져 내려오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간 사람들이 바벨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들은 절대 기도하다가 사자 굴에 들어가고 신상을 숭배하지 않다가 풀무불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에스라)
6절을 보십시오.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여기의 바벨론은 구체적으로 유프라테스 강 하류와 티그리스 강 하류의 중간에 위치한 평야지대인 닙불을 가리킵니다. 거기에는 B.C. 537년의 귀환에 참여치 않고 잔류하였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올라왔으니’는 팔레스틴이 바벨론에 비하여 지형상으로 훨씬 높은 지역임을 염두에 둔 표현이기도 하지만 또한 팔레스틴을 성지로 의식한 에스라의 의도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중심에 두고 예루살렘에 내려왔다고 하지 않고 올라왔다고 합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역사에 의하면 바벨론에서 장사를 하고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은 다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요 학자라는 것을 소개합니다. 학자는 쓰다, 수를 세다의 의미가 있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형 분사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서기관으로 번역됨이 보다 정확합니다.
페르시아 시대에도 제국의 중앙 정부나 지방 총독의 법정에 소위 서기관 혹은 비서들이 고용되었다고 합니다. 페르시아 왕의 일곱 모사도 이들과 같은 부류의 출신입니다.(14, 15절 에 1:13, 14.)
아닥사스다의 조서 내용으로 보아 에스라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서기관의 직무에 능통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직접 파견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건대 그는 페르시아 왕실에서 주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는 학자로서 성경말씀을 필사하면서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습니다.(11,12,21) 여기서 모세의 율법은 토라를 의미합니다. 모세의 율법은 그 앞에 하나님의 언약적 속성을 강조하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라는 호칭이 나왔음을 볼 때, 언약 백성들이 반드시 이행해야할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뜻합니다(출 19:5-8).
‘익숙한’은 서두르다 혹은 빠르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어떤 특정한 사물에 대해서 충분한 준비와 경험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의 익숙한은 능통한으로 번역해도 좋습니다.
익숙하다는 것은 다윗이 물맷돌에 익숙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한 것입니다.(삼상17장 39,40절) 익숙하다는 뜻은 최고의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달인이 된 사람입니다. 말씀에 익숙한 것은 말씀이 완전히 내 것이 된 것입니다. 몸에 벤 것입니다. 익숙한 사람은 훤히 꿰뚫어 알 수 있고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에스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는 포로로 잡혀간 것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포로로 잡혀서 말씀을 신뢰하고 말씀을 더 연구하였습니다. 그는 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시켜 줄 줄 아는 사람입니다.(느헤미야)
niv성경에는 준비된 성경선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도사가 되어야합니다. 말콤 글래드는 아웃라이어라는 책에서 만 시간의 법칙을 얘기하였습니다. 매일 5시간씩 6년을 해야 익숙해진다고 합니다. 운전을 하면 십년은 지나서 익숙해집니다. 골프선수 신지예는 하루에 골프공을 7천개를 쓴다고 합니다. 무수한 잡념과 싸우며 골프를 치며서 골프에 익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김연아는 한번의 점프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삼천 번의 엉덩방아를 쪘다고 합니다. 미쳐서 신들려 연습한 것입니다.
소녀시대가 요즘에 뜨고 있습니다. 아이돌은 6시에 기상 후 등교하고 5시에 하교하고 저녁을 먹습니다. 6시에 청소 후 트레이닝을 합니다. 가창, 춤, 외국어, 등등을 교육합니다. 10시 귀가합니다. 귀가해서 연습하고 한 시 취침합니다.
달인이 되려면 엄청난 투자를 해야 합니다. 의사들은 전문서적을 외우고 판사들은 육법전서를 다 외우는데 목사들은 성경 한 권을 가지고 쩔쩔 매서는 안 됩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성경으로 이스라엘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말씀으로 새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기반을 놓은 사람입니다.
에스라는 성경에 익숙할 뿐 아니라 실천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심을 받는다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그의 위에 있으므로 의 뜻입니다. 이와 같은 사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섭리로써 적극적으로 돌보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본서와 느헤미야서 전체에서 자주 발견됩니다(9, 28절 8:18 느 2:8, 18). 그는 왕에게 구하는 것을 다 받았습니다.
에스라가 일부 동족들과 함께 바벨론 땅에서 팔레스틴으로의 귀환을 허락받았습니다. 여러모로 필요한 재물을 지원받았습니다. 에스라가 팔레스틴 땅에서의 정치적 지도권을 부여받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것은 말씀을 사랑하고 간절히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익숙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에서 체험합니다.
(에스라와 동역자들의 귀환)
7절을 보십시오. “아닥사스다 왕 제칠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아닥사스다는 B.C. 464년에 즉위하였으므로 칠 년은 B.C. 458년이 됩니다. 개혁은 혼자 할 수 없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박정희는 김종필과 함께 군사의거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에스라를 동역할 동역자를 주셨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칠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에스라가 함께 올라왔습니다.
제사장은 예배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레위인은 제사장을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느디딤 사람들은 바쳐진 사람들이란 뜻을 가진 이들로 이방인으로 성전에서 봉사했던 사람들입니다.(민 31:40, 42, 47). 이들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청소하고 제단에 물을 나르고, 나무를 패는 일, 희생 의식에 쓰이는 그릇을 설거지하는 일을 하였습니다(수 9:23).
노래하는 자는 찬양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배드릴 때는 반주자와 특송하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말씀과 음악이 함께 해야 합니다.
에스라는 바벨론 땅에서 믿음의 사람들과 교제하는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통합니다. 에스라는 동역자의 필요성을 알고 동역자를 데리고 옵니다. 자신이 성경에 능동한 것도 중요하지만 겸손하게 영적인 동역자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역자들은 에스라가 말씀을 가르칠 때 이들이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껴서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느헤미야 4 장에는 성전을 중건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8장 1-14절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에스라와 함께 온 여기의 몇 사람은 장정만 1,773명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여주었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바울이 소중한 동역자를 한 사람 한 사람 귀하게 여깁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제칠년 다섯째 달이라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그가 도착했다 혹은 그가 왔다의 의미입니다. 왕의 칠 년이라고 저자가 7절에 이어 여기서 또다시 칠 년을 언급하는 까닭은, 자신이 바벨론에서 출발한 바로 그 해에 예루살렘에 도착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이와 같은 강조를 통하여, 하나님의 보호가 자신들과 함께했음을 뚜렷이 나타내고자 하였습니다.(6, 9절).
오 월이 정확하게는 오월 초하루(9절)이므로, 에스라 일행이 바벨론에서 출발한 지 만 5개월 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의 여행 거리가 약 800여 킬로미터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5개월씩이나 걸린 이유는 레위인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서 중간에서 얼마 간을 소비하였기 때문입니다.(8:15, 31) 일행 중 어린이들이 많이 있었고(8:21), 사막 지대를 피하기 위해 북부 시리아 지역을 거쳐 여행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의 여행자들에게는 처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에스라 일행의 안전한 도착은 하나님의 각별하신 보호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에스라가 이 시기를 택해서 여행을 한 까닭은, 팔레스틴 땅으로 오는 도중 반드시 거쳐야만 했을 사막 지대의 폭염을 피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당시 에스라는 니산월(태양력으로 3, 4월), 즉 봄에 바벨론을 출발하여 압월(태양력으로 7, 8월), 즉 여름에 도착함으로써 사막에서의 고생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강도의 위험, 짐승의 위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렀습니다. 느헤미야와 사람들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에스라의 결심)
10절을 보십시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본절의 초두에는,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은 접속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왜냐하면의 의미로서 에스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를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10절의 맨 끝부분의 결심하였더라는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로 번역함이 보다 적절합니다.
10절이 또한 에스라가 팔레스틴으로 귀환했던 중요한 이유 혹은 목적을 말해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가 결심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기로 결심한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이를 기뻐하시고 도우셨습니다.
느헤미야 9장 25,26절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잘 먹고 잘 살 때 죄를 지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시대 문제의 해답을 말씀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깊은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말씀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말씀에 익숙하지만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끊임없이 연구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말씀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연구하려면 순결한 삶을 사는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야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말씀이 있을 때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입니다. 말씀을 지키게 할 때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도와주십니다.
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결단하였을 때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여호수아 1장 7,8절에보면 말씀을 묵상하고 지키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면 형통합니다.
(연구하기로 결심)
첫째, 에스라는 연구하였습니다. 연구하다는 조사하다 혹은 찾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어떤 사물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행동을 말합니다(벧전 1:10, 11).
그는 과거에서 지금까지 계속하여 연구하였습니다. 에스라는 새로운 나라를 시작할 때 먼저 말씀을 연구하였습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이 포로로 간 근본적인 원인이 말씀을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라를 회복시키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삼성 경제 연구소에서 많이 연구합니다. 삼성연구소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습니다. 삼성전자만도 2012년 12조원을 투자합니다. 매출액의 6.5%를 투자합니다. 삼성전자는 10만 452건의 특허를 갖고 있습니다. 대학보다 그들이 빨리 연구합니다. 의사는 질병을 연구합니다.
삼성전자가 연구하기 때문에 삼성전자가 세계 일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환자가 병원에 가면 피, 대소변 혈압 검사를 하고 문제가 생기면 MRI를 찍고 내시경 검사를 통하여 정밀검사를 합니다. 의사의 많은 지식으로 그 병명을 진단합니다. 처방전을 내립니다. 약을 먹이거나 수술하거나 운동을 하게 하게 하거나 음식을 권합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말씀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문제의식을 갖고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율적으로 연구해야 합니다. 연구는 개방성과 자유가 첫째입니다. 우리는 성경연구를 오픈하고 다른 사람들의 연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씀을 현실에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광산에서 광맥을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구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연구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연구해야 제사장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말씀을 준행하기로 결심)
둘째, 에스라는 말씀을 준행하였습니다. 준행하는 것은 행하다, 만들다 등의 의미가 있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자신의 사상 및 견해를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창 1:31 6:22 신 5:27 23:23).
준행하지 않으면 죽은 믿음입니다. 자신이 말씀을 준행해야 영향력이 생깁니다. 우리는 준행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준행하기 위해서 연구해야지 가르치기 위해서 연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말과 행동이 다른 바라새인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고 가르치면 죽은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르치기 전에 먼저 순종해야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엘리 제사장이나 성 중독자 전병욱씨와 같은 사람입니다.
사사시대에 가장 큰 문제는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신상을 만듭니다. 레위인이 첩을 둡니다. 단지파나 에브라임 지파는 말씀을 준행하지 않고 우상 숭배하다가 이스라엘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말씀을 가르치기로 결심)
셋째, 에스라는 율례와 규례를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율례는 새기다 혹은 초상화를 그리다 등의 의미를 갖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번복될 수 없을 만큼 단단히 규정된 것 혹은 명령된 것을 뜻합니다(레 10:13 욥23:12 렘 5:22). 규례는 재판하다나 공의를 실행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의 파생형입니다. 이것은 마땅히 따라야 할 행동의 규범 혹은 선악의 분별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준(레 18:4 시 103:6)등을 말합니다.
그런데 위의 두 단어는 외형상으로는 차이가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두 단어가 항상 동시에 혹은 교대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볼 때, 거의 같은 의미로 봐야합니다. 이 두 단어가 여호와의 율법의 보다 본질적 특성들을 두 가지로 드러내주는 단어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율례는 율법의 기초적인 규정들에, 규례는 보다 구체적인 적용례들에 각각 중심을 둔 표현입니다.
‘가르치기’로는 습관들이다 혹은 효율적으로 가르치다는 의미입니다. 에스라가 실행하기를 결심한 여러 일 중 가장 중요시되던 것은 바로 여기의 이 가르침이었습니다.
대학의 기본 정신이 먼저 연구하는 것이고 다음에 교육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엄히 명하노니 말씀을 가르치라고 합니다. 전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가르치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지식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도록 해산의 수고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연구할 뿐 아니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가르칠 뿐 아니라 지키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요즘 세대에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르치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않으면 목자의 책임입니다.
이세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면 삶의 절대적인 기준이 상실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상실됩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상실되면 사람들은 상대적이 됩니다. 현실과 타협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따라서 행합니다. 손해가 되다보면 해야할 것도 하지 않습니다.
에스라는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가르치지 않은 것이 최고의 문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는 종교 혼합주의에 빠지고 혼혈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이런 죄에 빠졌습니다.
성전이 있어도 소용 없습니다.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가 망한 것도 종교적 혼합주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씀을 낭독하고 깨닫고 행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큰 아픔이 있습니다. 백성들이 말씀을 듣고 다 울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신명기 7장 3,4절에 보면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방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아내와 자녀를 쫓아내도록 하였습니다.(에스라10장 2,11)
에스라를 통하여 유대인은 개혁하여 신앙의 명맥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에게서 메시야가 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가르쳐야 크리스찬이 보존됩니다. 십계명 말씀에 절대성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죽은 교회가 됩니다. 죄와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죄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건물을 사는 것보다 사람을 교육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ubf는 없어져도 성경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건물이 전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ubf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성서한국과 세계선교에 사용하여 주셨습니다.
요즘 한국교회는 물질적이 되고 세속화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홍수가 나면 물이 많지만 먹을 물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가르치지 않을 때 병고치는 것이나 신비적인 것으로 채우고자 합니다. 예언을 받으러 갔다가 사람의 종이 되어 두려움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구원을 주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한다는 것을 확신해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말씀은 성례전과 함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결심하는 에스라)
넷째, 에스라는 그 모든 것을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결심했다는 말은 헌신하였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찾고자 하는데 헌신하였습니다. 말씀을 연구하고자하는 몸부림쳤습니다.
지도자의 결심은 공동체에 영향이 갑니다. 새해의 결심은 올 한해에 영향이 갑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잡혀갔을 때 포도주로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다니엘 1:8) 하루 세 번 기도하기로 결심합니다.(다니엘6:10) 하나님은 다니엘이 세 왕조에 걸쳐 총리가 되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보게 하셨습니다. 에스라는 영혼을 중건시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에스라의 연구는 바리새인 운동에서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루터나 캘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는 ‘오직 성경으로’라는 기치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회복을 하려면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것입니다.
이창우 사무엘 선교사님이나 배사라 선교사님이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고자 결심한 것이 지금의 UBF를 있게 한 것입니다.
나는 16년 전에 새벽 기도를 결심하였습니다. 3년 전에 새벽에 일용할 양식 메시지를 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결심을 축복하시고 큰 일을 하셨습니다. 지난 한해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여 주셨습니다. 올해도 계속하여 성경 66권 강해서를 쓸 수 있기를 결심합니다. 올해는 하루에 양식 한 말씀씩 영어로 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새해에 한 가지 결심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
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 학자요 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의 초본은 아래와 같으니라”
계명은 ~의 위에 놓다 혹은 임명하다 등의 의미를 갖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구약성경에서 언약 백성들에게 지키도록 요구 사항들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출 24:12에서는 십계명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제사장이라는 직함은 1-5절의 계보를 통해 간접적으로 설명되었습니다.
에스라는 페르시아의 공무를 담당하는 관리로서, 또 하나님의 율법을 맡은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동시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를 많이 배운 학자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에스라에게 조서를 내렸습니다.
(동역자를 주심)
12,13절을 보십시오.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조서를 내리노니 우리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지어다”
12절에서부터 26절까지는 아람어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겸 제사장이었습니다.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에스라에게 조서를 내립니다. 모든 왕의 왕이라는 소개는 자신이 내리는 조서의 권위를 증대시키기 위한 의도입니다. 모든 왕의 왕이라는 칭호는 앗수르나 바벨론 왕들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는데 이런 호칭은 원래 왕들에 의해 다스려졌던 기존의 나라들을 정복한 정복국의 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왕은 완전한 평강을 기원합니다. 왕이 조서한다는 말은 명령한다는 말입니다. 바벨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에스라와 함께 가라고 합니다. 왕이 우리나라라고 한 것은 아닥사스다가 통치하던 전 지역을 말합니다.
아닥사스다 당시에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페르시아 전역에 흩어져서 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애굽의 남부에서도 상당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와 함께 귀환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부분 바벨론에서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유다 백성이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포로 귀환민들을 언약 공동체 전체, 곧 이스라엘 열 두 지파와 연결시키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본서와 느헤미야서에 나오는 에스라와 관련된 기사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24회 등장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도 강조됩니다. 에스라 자료에서 유다라는 용어는 단지 네 차례만 나오며 그것도 단지 지리적 용어로서 언급되었을 뿐입니다(14절 9:9 10:7, 9).
(예물을 가지고 가라고 가라고 함)
14-16절을 보십시오.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하여 왕과 일곱 자문관의 보냄을 받았으니 왕과 자문관들이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이스라엘 하나님께 성심으로 드리는 은금을 가져가고 또 네가 바벨론 온 도에서 얻을 모든 은금과 및 백성과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그들의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기쁘게 드릴 예물을 가져다가”
에스라는 손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유다와 예루사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해서 왕과 일곱 자문관의 보냄을 받았습니다. 네 손에 있는 은 에스라가 손에 들고 있는 의 의미가 아니라 다만 에스라가 항상 가까이하고 있는의 의미입니다.
율법에 따라는 율법에 기초하여입니다. 양피지 두루마리에 기록되었을 모세 오경은 그 부피가 엄청났을 것이다.
추측컨대 에스라는 본토로부터 어떤 심상치 않은 소식을 들었던것 같습니다. 이에 따라 그는 아닥사스다에게 이스라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해서 귀환을 허락해주기를 요청했을 것입니다. 에스라는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지를 살필 필요성을 느꼈음이 분명합니다.
페르시아 정부의 입장에서도 팔레스틴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켜서 안정된 삶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 페르시아는 피정복민들의 반란이 잦았던 관계로 골머리를 앓았었기 때문입니다. 일곱 모사는 페르시아 왕들에게 조언을 하던 고위 관리들이었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에스라 1:14은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 첫 자리에 앉은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헤로도투스와 크세노폰과 같은 헬라의 고대 저술가들도 이 같은 직분자들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에스라의 팔레스틴으로의 귀환이 표면적으로는 페르시아 정부의 이익을 위하여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왕과 자문관들이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이스라엘 하나님께 성심으로 드리는 은금과 바벨론 온 도에서 얻을 모든 은금을 에스라는 가져가야 합니다.
왕과 모사들이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심을 쓰는 것은 피정복민들을 잘 통치하여 정치적 소요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며, 피정복민의 신으로부터의 진노를 피하기 위한(23절 6:10)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백성과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그들의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기쁘게 드릴 예물을 가져가라고 합니다.
본절에서는 에스라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할 재물을 충당할 수 있는 두 가지 출처를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라가 우선은 바벨론 백성들로부터 얻을 변상 예물을 가리킵니다(1:4). 다음은 백성과 제사장들은 드린 예물입니다. 그들은 에스라와 함께 팔레스틴으로 귀환하려고 했던 무리들을 가리킵니다(7, 13절). 제1차 귀환 때에도 바벨론 땅에서 귀환한 모든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위하여 많은 현물들을 하나님께 바쳤었습니다(2:68, 69).
(제물을 사라고 함)
17-20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돈으로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과 그 소제와 그 전제의 물품을 신속히 사서 예루살렘 네 하나님의 성전 제단 위에 드리고 그 나머지 은금은 너와 너의 형제가 좋게 여기는 일에 너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쓸지며 네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위하여 네게 준 그릇은 예루살렘 하나님 앞에 드리고 그 외에도 네 하나님의 성전에 쓰일 것이 있어서 네가 드리고자 하거든 무엇이든지 궁중창고에서 내다가 드릴지니라”
그들의 돈으로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양과 그 소제와 그 전제의 물품을 신속히 사야합니다.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가져간 재물의 제1차적 용도가 하나님께 대한 제사와 관련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사의 종류 및 제물에 대한 정보는 에스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필요한 것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얻어졌을 것입니다.(6절) 아니면 페르시아 왕의 궁전에서 일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익명의 이스라엘 사람으로부터 제공되었을 것입니다. 제물은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의 제단 위에 그 예물을 드리는데 사용해야합니다. 나머지 은금은 에스라와 형제가 좋게 여기는 일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위하여 그에게 준 그릇은 예루살렘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으로 가져갔던 그 기명이 아닙니다. 그 기명은 이미 오래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환되었습니다(1:7-[1). 이것은 페르시아 정부와 바벨론에 잔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련해서 준 것입니다(8:25-27).
그 외에도 하나님 성전에 쓰일 것이 있어서 그가 드리고자 하거든 무엇이든지 궁중창고에서 내다가 하나님께 드려야합니다. 왕의 내탕고는 강의 서편에서 징수되는 세금을 보관하는 금고 및 그관리 기관을 가리킵니다. 이 같은 명령은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공공 사업 비용은 그 지역에서 충당되어야 한다는 제정 원칙(6:8)과 완전히 부합됩니다
(물품을 공급함)
21,22절을 보십시오. “나 곧 아닥사스다 왕이 유브라데 강 건너편 모든 창고지기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가 무릇 너희에게 구하는 것을 신속히 시행하되 은은 백 달란트까지, 밀은 백 고르까지, 포도주는 백 밧까지, 기름도 백 밧까지 하고 소금은 정량 없이 하라”
아닥사스다 왕이 유브라데 강 건너편 모든 창고지기에게 조서를 내렸습니다. 아닥사스다의 조처는 성전 제사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비용입니다. 귀환하는 에스라의 일행이 귀환 도중에 필요한 식량 등의 조달을 가능케 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강 서편 모든 고직(庫直)는 바벨론을 출발하여 유다땅으로 가는 에스라가 경유하게 될 지역의 재정관리들을 말합니다. 이 고직이는 일정 지역에서 거둬들인 세금을 용도에 따라 출납하거나 혹은 페르시아 왕실에 상납하는 역할을 담당했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학자 겸 에스라가 무릇 그들에게 구하는 것을 신속히 시행해야 합니다. 은은 백달란트까지 밀은 백 고르까지 포도주는 백 밧까지 기름도 백밧까지 소금은 정량 없이 해야 합니다. 한 달란트는 약 34kg에 해당합니다. 1고르 혹은 1호멜은 220리터 정도입니다.
강 서편 쪽은 사해 등지에서 소금이 풍부하게 생산되었습니다. 비록 고대에 소금이 귀한 것이기는 했으나 다른 것에 비해서는 생산량이 많아서 저렴했던 물품인 관계로 원하는 만큼 제공되었습니다. 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와 번제의 제물에 뿌려졌습니다(겔 43:24). 그리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은 순결하게 체결되고 유지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소금 언약'이라고 불리웠습니다(민 18:19 대하 13:5).
(세금을 면제해 줌)
23,24절을 보십시오. “무릇 하늘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하늘의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삼가 행하라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제사장들이나 레위 사람들이나 노래하는 자들이나 문지기들이나 느디님 사람들이나 혹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받는 것이 옳지 않으니라 하였노라”
하늘의 하나님이 하늘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명령하신 것을 삼가 행해야 합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이방인과 결혼하고 언약을 맺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말합니다. 제사장들이나 레위 사람들이나 노래하는 자들이나 문지기들이나 느디딤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받는 것이 옳지 아니 합니다. 본절에 언급되는 성직자들에 대한 면세 혜택은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졌던 특전이 아니었습니다. 아닥사스다에 의하여 처음 시행된 정책도 아니었습니다. 다리오 왕의 가다타스비문에는 아폴로 신의 구별된 제사장들에게서 세금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는 엄중한 경고문이 새겨져 있을 정도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사람에게 면세 혜택을 주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게 함)
25,26절을 보십시오.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 하였더라”
왕은 에스라에게 치리권도 주었습니다. 에스라는 그 손에 손에 있는 그의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합니다.
아는 것은 체험적이리만큼 확실하게 아는 것을 뜻하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형 분사입니다. 여기의 이 아는 자는 특정 분야에 대해 질적. 양적으로 상당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유사는 재판하다 혹은 공의를 시행하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재판관도 역시 재판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어근에서 온 단어입니다. 의미상으로는 위의 두 직분에 대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고대 페르시아에는 시민들 상호간의 문제 및 갈등을 해결하던 재판소와, 국가 및 정부의 이익과 관련된 판결을 위한 재판소 등 두 가지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유사와 재판관의 차이를 규명할 만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사는 종교.사회 문제 등에 관한 관습법을 다루는 직분자였고, 재판관은 왕에 대한 충성심의 여부 등에 관한 정치 문제를 취급하는 직분자였을 것입니다.
에스라는 종교 문제 뿐만 아니라 정치 문제에 관한 권한까지도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위임받았던 셈입니다. ‘삼아’는 분리하다 혹은 임명하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의 파생형으로서 적재 적소에 인재를 세우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들을 통하여 그 중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는 가르쳐야합니다.
여기의 강 서편...백성은 표현과는 달리 실제에 있어서는 다만 팔레스틴 거주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가리킵니다. 비록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오랜 이방 땅에서의 생활을 거쳤던 관계로, 혹은 그런 사람의 자손인 관계로 율법을 잘 모르는 경우는 많았을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상당수의 개종자도 포함됐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야합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에스라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칠 권한을 주었습니다.(6절). 사실 이 같은 왕의 직접적인 명령은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칠 수 있는 권위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이 분명합니다.
무릇 그의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재산을 몰수 하고 옥에 가두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곧 율법을 가리킵니다. 말씀을 바르게 실행되도록 하며 혹은 실행되고 있는 지의 여부를 감찰하는 책임을 가진 자가 유사인 듯합니다(25절). 에스라는 페르시아 왕실의 이익도 대변해야 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바로 이 책임을 감당키 위해 세운 직분이 재판관이었습니다(25절). 준행하는 것은 - 섬기다 혹은 순종하다의 의미의 파생형으로서 높은 사람의 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속히 정죄하라는 말은 하나님과 왕의 명령을 필연적으로, 그리고 급히 이루어져야할 것을 강조합니다(17, 21절 5:8 6:8, 12, 13). 죄를 정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징계가 이루어지도록 하여 의 의미합니다(NIV).
페르시아에서는 심지어 왕들조차도 자신의 명령을 변개하거나 국법을 범치 않았다는 점에서, 왕명 거역자에 대한 징벌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단 6:15). 따라서 왕의 조서나 조약 문서의 끝부분에는 명령을 불이행하거나 약속을 파기하는 자에 대한 징벌사항이 명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귀양을 보내는 것은 뿌리를 뽑다와 동일한 아람어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로 보고 공동체에서 내쫓다라는 의마기 있습니다. 재산을 몰수 하는 것은 재산을 강제로 빼앗는 일을 말합니다. 이런 형벌은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는 지극히 일반적으로 시행된 듯합니다. 에스라는 이것을 담보로 하여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기는 했어도(10:8) 이런 형벌을 백성들에게 실제로 집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형벌은 왕정 국가에서는 보편적이었음이 분명합니다(삼상 8:12 왕상 21:15).
왕은 에스라에게 왕의 권위를 주어서 말씀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불신자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벨론에 있는 많은 선지자에 의해서 감동을 받고 신앙이 성장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칠 때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는 에스라)
27,28절을 보십시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또 나로 왕과 그의 보좌관들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노라”
여기서부터는 다시 히브리어로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합니다. 열조의 하나님께서 자고 이래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항상 선하게 인도하시며 보호하셨습니다.(신 6:3 13:6 수 18:3 삿 2: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베푸신 큰 은혜와 그분의 위대하심을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이런 말씀은 시편 등의 여러 문맥에서 흔히 나타납니다(대상 29:10, 20 시 16:7 26:12 34:1 63:4 145:10).
하나님이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셨습니다. 왕의 마음에...뜻을 두셨다는 말은 여호와께서 온 우주를 통치하시며 섭리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1:1 5:5). 아름답게는 꾸미다 혹은 찬미하다 등의 뜻이 있는 동사의 강조형으로서 사람이나 인물을 외적으로는 근사하게 꾸미며 내적으로는 명예를 더하게 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시편과 이사야서의 후반부에서도 여러 번 나옵니다(시 149:4 사 55:5 60:7, 9, 13).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동사의 주어는 공히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이사야는 종말론적인 문맥에서 성전을 본 동사의 목적어로 삼고 있습니다(사 60:7, 13). 바로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을 이미 알고 있었던 에스라가 그 예언이 자신의 시대에 성취되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이사야가 종말론적으로 성전에 대해서 사용한 동사를 자신도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의 ‘아름답게 할’ 은 구체적으로는 성전 제사가 율법대로 제대로 이루어짐을 가리킬 것입니다. 에스랴로 왕과 그의 보좌관들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스가랴의 위에 있으므로 하나님이 도우셔서 그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스가랴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습니다.
에스라 7장 강해 에스라의 결심
에스라 7장 1-28
요절 에스라 7장 10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 7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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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안 UBF 오요한 목자의 성경 66권 강해서 원문보기 글쓴이: 말씀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