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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
예레미야애가 1장 12-22절
중환자들을 위한 ‘무균실’을 만들고 아무나 출입하지 못하는 통제지역입니다. 이 실은 먼지보다 더 작은 바이러스와 같은 것까지도 통제하는 곳입니다. 무균실처럼 하나님의 거룩은 아주 작은 죄까지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도 자신과 같이 거룩함을 담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하시고 거룩하셨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처럼 본받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용서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자녀들을 벌하십니다. 진정으로 자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파하시며 진노하신 것입니다.
본문에는 예레미야가 징벌 당한 비참한 이스라엘을 보면서 매우 가슴 아파는 애가입니다. 예레미야는 앞서 바벨론 침공으로 폐허가 된 예루살렘의 참혹하고 황폐하게 된 현실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그는 예루살렘을 여성으로 의인화하여 예루살렘처럼 고통을 겪은 사람이 있는지를 물으면서 시작합니다. 선지자는 마치 자신이 고통을 겪을 것처럼 설명해갑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뿌린 대로 심판하신 하나님(12-17)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이 여호와의 심판이라고 분명히 고백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에서 위로해주고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그러나 심판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과 심판을 행하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고백합니다.
12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13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 14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 15주께서 내 영토 안 나의 모든 용사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청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딸 유다를 내 주께서 술틀에 밟으셨도다 16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17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야곱의 대적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불결한 자가 되었도다(12-17)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이 여호와의 심판이란 사실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신보다 약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으로 돌려드렸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돌아오라고 해도, 오히려 돌아오라고 전한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멸망당함에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을 위로하고 도와줄 사람이 없는 현실에 대해 절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매우 정당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이제 선지자는 육체에 미친 고통을 하나씩 열거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뼈가 타는 듯한 아픔을 겪습니다. 움직이고 활동하는 발까지도 꼼짝도 할 수 없고, 손도 목과 함께 묶여 숨만 겨우 쉴 뿐입니다. 총체적으로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마치 짐승을 나무에 매달아 놓은 것과 같습니다.
⑴ 누구나 알 수 있는 심판(12)
선지자는 서두에서 설명한 것처럼 예루살렘을 여성으로 의인화(擬人化)하여 설명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고통을 호소하며 동정을 베풀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호소는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이 비참하게 멸망당한 이유를 묻습니다. 이렇게 묻는 것은 이스라엘 멸망의 책임이 비단 한 두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있다는 의미입니다. 선지자는 자신보다 더 괴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장 괴로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은 구약에서는 ‘주의 날’을 의미합니다. 이 날은 주님이 임하신 날이며, 주님이 임하시면 심판과 구원이 함께 합니다. 창세기에 나온 바벨탑 사건(창세기 11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사건이며, 심판과 구원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심판과 구원을 받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열방과 이방이 심판을 받지만 언약 백성인 자신들은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이런 잘못된 확신을 깨기 시작했습니다. 심판의 대상은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에게도 동일하게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점점 교회들이 타락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타락해가는 것에 대해 목회자나 특정 그룹의 책임이 아니라 성도들 모두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고쳐야할 일이 있다면 자신부터 고쳐야 합니다. 냉소적인 태도로 비판할 것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해야 마땅합니다.
⑵ 불로 묘사된 하나님의 심판(13)
이제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하셨듯이 예루살렘을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는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것처럼 예루살렘을 잡으려고 공격적이셨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발 앞에 그물을 친다는 것은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것처럼 잡으려고 공격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도망가지 못하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무게로 인해 선지자는 피곤하고 힘들어 흔들리고 있습니다.
⑶ 자기 백성을 넘기신 심판(14)
선지자는 모든 것들이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죄악 때문에 강력한 바벨론에게 자기 백성을 넘기셨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나의 죄악의 멍에’란 이스라엘의 죄악이 자신을 얽매는 멍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만든 죄악의 멍에를 이스라엘의 목에 씌우신 것입니다. 그 무게로 인해 이스라엘은 힘들어 흔들렸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을 묶어서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자에게 넘겨졌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심판이 자신이 쌓아 올린 죄악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러한 상황은 이스라엘이 맞이하고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에 열방이나 이방이 아닌 이스라엘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뜻하지 않게 당한 멸망이 크나큰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호소한 것입니다.
⑷ 청년 용사도 필요 없는 심판(15)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 성 안에 있던 모든 용사를 물리치셨고 젊은 남자들을 성회에 모아 부수셨습니다. 성회(聖會)는 원래 여호와께 감사하고 여호와의 보호를 구하는 모임인데, 오히려 이 모임 때 이스라엘을 부수는 역설적인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온 유다 성읍에 큰 살육으로 포도즙 틀에서 포도즙이 흘러나온 것처럼 살육의 현장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을 불러들여 자신의 자녀인 유다를 포도즙 틀에 넣고 짓밟은 것처럼 심판하였습니다. 선지자가 느끼는 심판의 무서움과 잔혹함이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날에는 용사와 청년도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용사와 청년과 처녀들이 모두 사라지는 절망적인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특히 청년과 처녀는 미래를 암시함으로 이스라엘의 미래는 절망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은 미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현실이 힘들고 고통과 아픔이 있더라도 보장된 미래가 있다면, 결국은 좋아질 것입니다. 결국은 위기가 기회라는 확신만 있다면, 지금 당하는 고통이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에게 작은 소망이나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그들의 땅으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의 머리를 흔들리라”(예레미야 18:16)고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그 경고대로 유다에게 큰 고통을 내리셨습니다. 유다 백성에게 불을 내리시고, 그물을 치시고, 멍에를 얽어매셨습니다.
⑸ 하나님 심판에 대한 반응(16)
이제는 여호와의 징벌에 대한 선지자의 반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이로 인해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다며 자신의 비통함을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것에 슬프고 비참한 것은 위로할 자, 생명을 소생시켜줄 자가 자기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했지만 회개하지 않음으로 당한 모습을 조롱하지 않았습니다. 끝내 심판을 면하지 못한 자기 백성들을 보면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회복에 대한 희망이 없을 만큼 혹독한 재앙임을 알고 절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할 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회복될 수 있는 상태에서 받는 징벌은 그래도 견딜 만하지만, 회복에 대해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내려진 재앙은 매우 절망적입니다. 또한 선지자는 원수들의 뛰어난 능력으로 인해 나의 자녀, 즉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황폐하게 되고 진멸되었다고 고백합니다.
⑹ 도와줄 사람이 없는 심판(17)
선지자는 시온(예루살렘)을 주어로 등장시켜서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라고 합니다. 친구 같이 생각했던 나라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두 손을 펴는 것’은 도움을 구하는 행동으로, 예레미야 4:31에서 해산하는 여인이 극심한 고통 중에 도움을 구하기 위해 손을 펴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까지도 헛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위로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위로자가 되시기는커녕 오히려 이스라엘 사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적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와가 다른 나라에 명령을 내리시는 모습은 그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시라는 예언자들의 사상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신들을 위로하고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절망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심판은 정당했다는 것만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타락을 책임져야할 사람 따로, 비판해야할 사람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책임으로 알고 자신이 고칠 것이 있으면 냉소적인 태도를 함께 울며 주님의 긍휼을 간구해야 마땅합니다. 선지자는 주변 나라들에게 짓밟힌 이스라엘은 그들 가운데 불결한 자가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불결’인 ‘니다’(הדּנ)는 기본적으로는 ‘여성의 생리’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또 다른 의미인 ‘오물’, ‘혐오스러운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제 예루살렘은 더 이상 주변 나라들로부터 공주가 아니라, 이제는 오물 취급을 받아서 혐오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로부터 버려진 여호와의 도성은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도 이스라엘처럼 착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성도와 교회의 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언약에 신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성도 편이 아닙니다. 악을 행하는데도 그것을 지지한다면, 하나님께서 악을 좋아한다는 이상한 논리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없이 사랑하지만 진리 안에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을 행하고 있지만, 주일마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매일 묵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지키실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을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을 찾는 것은, 남편이 있음에도 정부(情夫)와 불륜에 빠진 부정한 일과 같습니다.
여호와께 죄를 인정함(18-19)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인생은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치장하지 않으면, 그것은 오물을 뒤집어 쓴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인간의 그 무엇으로 과시하고 꾸미고 노력해도 전혀 아름다워 보지지가 않습니다.
18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19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목숨을 회복시킬 그들의 양식을 구하다가 성 가운데에서 기절하였도다(18-19)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은 혹독하지만, 이것은 매우 정당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오물 취급하고, 더 나가서 하나님을 존재하지 않는 신처럼 취급한 죄를 생각하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심판하실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은 이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란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기도 하였습니다.
⑴ 심판에도 의로우신 하나님(18)
선지자는 이와 같이 맹렬한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어쩐지 ‘매를 든 하나님’과 ‘의로운 하나님’은 조화롭지 않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의롭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유다가 당하는 고난은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심한 환란을 당했지만 여호와는 의로우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모든 환란의 원인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축복과 보호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거역하는 자에게는 심각한 징계를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이 받을 복과 벌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지금 자신들의 고난은 언약을 어긴 벌을 받는다고 고백합니다.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을 외적의 강함이나 악함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죄에서 찾는 선지자의 모습은 매우 신앙적입니다. 성경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내적인 부패, 즉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않음으로 인해 교회가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따라서 이런 죄의 고백이 필요하며 예루살렘처럼 망하기 전에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⑵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19)
사랑하던 자의 배반에 탄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사랑하던 자는 여호와를 제외하고 이스라엘이 의지하던 모든 것입니다. 그들이 의지한 것은 이방나라들, 이방신들, 재물 등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의지하면 잘 살 줄 알았는데, 정작 환란 날에 이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위로자나 구원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제사장과 장로들이 등장한데, 이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선지자는 평상시에 권력을 행하던 자들이 이제는 처참하게 양식을 찾아 헤매다가 성 안에서 죽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유다가 이렇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죄였습니다. 죄의 결과는 알면서도 쉽게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만큼 달콤해 보지만 그 결과는 비참합니다. 뒤늦게 후회해도 결과를 돌이키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불의한 일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의로운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호소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긍휼을 구하는 선지자(20-22)
범죄한 사람들에게 살 길은 오직 하나, 겸손히 회개하는 일입니다. 아픈 현실을 보며 아파할 필요가 있고, 슬픈 현실을 슬퍼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에는 진중한 성찰과 진심을 담은 회개가 필요합니다. 눈물은 단지 아픔과 슬픔의 눈물을 넘어서, 회개의 눈물이 되어야 합니다.
20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 21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나의 모든 원수들은 내가 재난 당하는 것을 듣고 주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을 기뻐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셔서 그들이 나와 같이 되게 하소서 22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20-22)
사람들은 범죄 후에 비참한 결과를 맺을 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어리석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의 죄악을 단순하게 후회하며 낙심한 것은 아닙니다. 원인을 찾아 그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탓을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돌리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원수들이 저지른 악행을 하나님께 고발합니다.
⑴ 자기 죄로 인한 고백(20)
예레미야 선지자는 다시 11절처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라고 자신들의 형편을 봐달라는 탄원합니다. 예루살렘의 비참한 처지를 탄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반역한 자신의 죄를 탄식합니다. 먼저 자신의 환란이 심각하지만 모든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인 줄 안다고 고백합니다. 개인과 사회의 고통스런 현실을 직면하며 정직하게 탄식하되, 이러한 상황을 야기한 우리의 죄를 더욱 절실히 탄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구원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린도후서 7:10).
⑵ 원수를 심판해 달라는 청원(21)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현재 당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 자비와 공의로 호소합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주변 나라들에게 심판을 요청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보다 더 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한 도구로 그들을 잠시 사용하셨던 것이지만, 이제 자신에게 행한 일에 대해 같이 심판을 받아야 된다고 호소합니다. ‘주께서 선포하신 날’(21b)은 12절에서 언급된 ‘진노하신 날’과 반대되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예언서에는 두 가지 ‘여호와의 날’이 언급되는데,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날’과 ‘이방인을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전까지 여호와의 날이 자신들을 구원하고 이방인들을 심판하는 날로만 생각하며 안이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동일하게 임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원수의 행위를 심판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범죄하여 심판을 받은 것처럼, 원수들의 악행도 동일하게 판단하고 벌하시라고 촉구합니다. 그들은 시온을 약탈하고 학살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약자들과 소외된 사람들이 착취당하고 억울한 일을 겪지 않도록, 이 땅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의 손길이 미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⑶ 원수 죄를 들어 내달라는 청원(22)
이스라엘을 심판할 ‘여호와의 날’이 이미 도래했고, 다음 순서로 이방인을 심판할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의’와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하나님께 반역하여 벌을 받게 되었지만, 회초리로 쓰였던 원수들도 이스라엘보다 선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의 악함대로 그들을 심판해달라며 공의의 하나님께 탄원하며 시를 마칩니다. 그들의 죄악을 모든 사람들 앞에 들어나게 하시고, 그 죄과에 대한 심판을 공의롭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은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끝까지 붙들며 고난의 상황을 이겨 나갑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위해 자신의 일처럼 하나님께 간구한 것처럼, 우리들도 자신과 교회 그리고 나라의 범죄들을 통렬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대로는 계속 죄악으로 가득한 한국교회는 안 됩니다. 모든 성도들이 예레미야처럼 공동체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안고 기도하듯이 함께 기도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진리 안에서 바르게 살아가도록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비참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 의미를 깊이 묵상해보면, 우리에게도 닥친 고난이 단지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아프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의 근거가 됩니다. 우연한 재앙은 통제가 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진심으로 돌이키면 얼마든지 회복될 수 있습니다. 모두가 겸손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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