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곰소에서 묵고
다시 천안으로 오르는 길 개암사에 들렀다
개암사는 634년(무왕 35)묘련(妙蓮)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이다.개암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우(禹)와 진(陳)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妙巖), 서쪽을 개암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어제 내소사에서 실망한 변산의 실제 모습을 이곳에서 다시 충전했다
조용한 산사, 맑은 시냇물(내소사는 물도 거의 말랐다), 빼어난 능가산의 절경
가장 좋았던 것은 한적함이다 이곳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거의 없었다
불이교를 넘어 보이는 사천왕문도 극락으로 들어서는 느낌이다
676년(문무왕 16) 원효와 의상이 이곳에 이르러 우금암(禹金巖) 밑의 굴 속에 머물면서 중수하였다. 1276년(충렬왕 2)원감국사(圓鑑國師)는 조계산 송광사에서 이곳 원효방(元曉房:우금굴)으로 와서 지금의 자리에 절을 중창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276년(충렬왕 2) 원감국사(圓鑑國師)때는 30여 동의 건물을 세워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능가경(楞伽經)』설법으로 많은 사람을 교화시켜 이 산의 이름을 능가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황금전(黃金殿)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는 청련각(靑蓮閣), 남쪽에는 청허루(淸虛樓), 북쪽에는 팔상전(八相殿), 서쪽에는 응진당(應眞堂)과 명부전(冥府殿)을 지었으며, 총 30여 동의 건물을 세워 『능가경(楞伽經)』을 강의하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하였다.
기와토담으로 둘러싼 쪽문 모습이 고풍스러우면서도 정겹다
임진왜란으로 황금전 이외 전소된 것을 1636년(인조 14)계호(戒浩)가, 1658년밀영(密英)과 혜징(慧澄)이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며, 1728년(영조 4)법천(法天)·찬견(贊堅)이 명부전을 중건하고, 1733년하서암(下西庵)·석주암(石柱庵)·월정암(月精庵)을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인등전·응향각·응진전·일주문과 월성대 및 요사가 있다.
대웅보전은 보물 제292호로 지정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대표적인 조선 중기 건물이다. 예전의 황금전이 바로 지금의 대웅보전이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영상회괘불탱은 1749년에 제작된「의겸」의 작품으로 가로 13.25m, 폭 9m 크기의 영산해상도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개암사 응진전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후기 목조나한상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79호다.
나한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는 1677년(숙종 3) 7월 1일 전라북도 부안 능가산 개암사 응진당에 봉안하기 위해 덕희(德輝)와 보윤(寶允)이 발원하고 조각승 경탄(敬坦), 준계(俊戒), 법학(法學), 경삼(敬森)이 석가삼존상을 비롯하여 16나한상 및 권속을 제작한 것으로 적혀 있다.
응진전 뒷편으로 100년 넘은 단풍나무 군락지가 있는데 이곳으로 우금암으로 오르는 탐방로가 있다
이 절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울금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고, 이 바위에는 모두 3개의 동굴이 있다. 그 가운데 원효방이라는 굴 밑에는 조그만 웅덩이가 있어 물이 괸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물이 없었으나 원효가 이곳에 수도하기 위해 오면서부터 샘이 솟아났다고 한다.
이 사진은 그곳은 아니고 최근에 마련한 샘인 것 같다
어쨌든 우금암으로 오르다가 뱀을 만나 상쾌한 마음이 완전히 가셔 그냥 포기하고 내려왔다
또한, 이 바위를 중심으로 한 주류성(周留城)은 백제의 유민들이 왕자 부여 풍(扶餘豐)을 옹립하고, 3년간에 걸쳐 백제부흥운동을 폈던 사적지로도 유명하다.
내려오던 길 개암역사문화산책로가 호숫가에 조성되어 있어 산책로 한쪽편 흔들그네에서 한참을 쉬다 내려왔다
개암사 오르는 길 오래된 벚나무도 많은 것으로 보아 벚꽃 피었을 때 왔으면 더욱 좋았겠단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