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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베드로전서 4장 1-6절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베드로전서 2장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벧전2:21). 고난을 받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 그리고 그런 고난 속에서 인내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이고(벧전2:20), 그것을 위해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 일을 위하여 본을 보이시고 그 자취를 따라오게 만드신 분이 누구시냐?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의 고난은 어떤 것인가? 베드로전서 2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2:22-24) 동일한 의미로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즉 죄를 범하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온갖 모욕과 고난을 당하신 것은, 또한 그런 모욕과 고난 가운데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신 것은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는가? 베드로전서 2장에서는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24)고 말합니다. 이것을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서는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하나님 앞에로 인도하려 한다는 것은 불의한 우리를 대신하여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이제는 의에 대하여 살아가도록 만들기 위한 방향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말하면서 고난만 있다고 말하지 않고 고난 이후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 그런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는 것 자체도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난 이후 반드시 영광을 보장해 놓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 또한 누구를 통해 알리셨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리셨습니다. 때문에 고난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할 때 고난만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 속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오늘 본문은 다시금 권면하는데, 1절을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은 베드로전서 3장 18절 내용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육체의 고난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영혼과 대조적인 의미에서의 육체가 아니라 인성을 표현한 것이고, 고난을 받으셨다고 되어 있지만 고난 안에 죽음까지 포함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셨는데, 모든 부분에 있어서 우리와 같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그런 분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는데, 그의 고난과 죽음은 어떠한 고난과 죽음인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육체로, 인성으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이란 겁니다.
특히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한 번 죽으신 것으로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한번 죽으신 것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만족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와 안전함은 한번의 고난과 죽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권하면서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육체의 고난’이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오는데, 처음 나오는 육체의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입니다. 다음으로 나오는 육체의 고난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받은 고난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받은 고난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일단 후자를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보게 되면 그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죄를 그쳤다는 해석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입으라”는 권면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다”고 하면서 2절로 연결되는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한다”는 내용이 신자를 향한 권면이기 때문에 후자에 나오는 육체의 고난의 경우 신자의 고난으로 보는 것이 전체 문맥에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는 이 말 속에서 베드로전서 3장 18절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고, 그런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기에 그 한 번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만족시키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6장 4절의 권면과 같은 맥락인데, 거기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세례라고 말하고 있지만 세례는 믿음의 표요 구원의 표입니다. 어쨌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우리도 죽는다는 뜻을 함의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우리도 부활한다는 것을 함의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있다는 것이고, 이제는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 자는, 다시 말해 새 생명을 받은 자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자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빌립보서 2장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 5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할 때는 바로 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셨지만, 다시 말해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자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하나님이 본체이신 분이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이것만 해도 낮아지시고 또 낮아지신 것인데, 얼마나 더 낮추셨는가?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왜 죽기까지 복종하셨는가? 베드로전서 3장 18절의 내용으로 말하자면 불의한 자의 불의를 완전히 사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할 수는 없습니다. 죄를 사할 수 있는 것은 불의한 자가 아니라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만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할 때는 자신을 낮추되 어디까지 낮추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영광을 받은 상태가 아니라 여전히 죄와의 싸움을 싸우고 있는 전쟁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다고 할 때 그 뜻은 죄의 권세에서 벗어났다, 죄책이 제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육체는 옛 사람, 타락한 자를 의미입니다. 그런 육체가 고난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죽은 것인데, 갈라디아서의 표현으로 하자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는 그런 의미입니다(갈2:20). 조금 전에 로마서 6장 4절에 대하여 언급했지만 같은 로마서 6장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우선 2절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6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11절에서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이런 표현들은 죄의 권세에서 벗어났다, 죄책이 제거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권세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죄와 완전히 결별한 상태는 아닙니다. 죄책은 제거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부패한 본성이 있고, 그런 부패성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만듭니다.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익숙한 내용으로 하자면 에베소서 6장에서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6:11)는 의미와 같습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 이하에 보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6:13-18)
전신 갑주라고 해서 허리띠, 호심경, 신, 방패, 투구, 검 등을 말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사실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검에 대하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진리와 의, 평안, 믿음, 구원 역시도 말씀에 근거한 것들입니다. 때문에 본문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말씀에 대하여 성령의 검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말씀을 누가 쥐고 계시는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들려질 수 있지만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이 없다면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면서 곧바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지혜와 지식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너희도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5)고 말씀하기도 하는 겁니다.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을 수 있는 것은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죄에 종에서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럼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다고 할 때 그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2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쉽게 말해 왜 우리의 옛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죽이셨는가? 왜 우리를 죄의 종에서 자유함을 주셨는가? 그 목적은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란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의 정욕이란 이어 나오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충되는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사람의 정욕이란 이 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삶의 방식이요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 뜻을 따라서만 사는 것, 이것이 죄의 종에서 벗어난 자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그런 삶으로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개인적인 종말이든 아니면 모든 만물에 대한 종말이든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서 살게 하시는 동안입니다. 특히 사도 베드로는 지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 대하여 나그네란 표현을 1장에서부터 사용했는데,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동안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할 때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삶의 규범은 무엇인가? 사람의 정욕,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그 뜻은 말씀을 통해 나타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규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을 때를 살게 하려 한다고 할 때 그런 방향으로 살게 하는 규범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없습니다.
이어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사람의 정욕이란 무엇인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와 같은 것들입니다. 물론 이 한 가지 한 가지를 모든 사람이 다 짓는다는 차원보다는 인간 안에 죄악 된 본성이 있다고 할 때 모든 사람이 이런 죄악 된 본성으로 심히 기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음란할 수 있고, 얼마든지 정욕적일 수 있으며, 얼마든지 술취함과 방탕함, 향락으로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도 마찬가지입니다. 골로새서에서 탐심은 곧 우상 숭배라고 말할 때 어느 누가 탐심에서 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측면에서 우상 숭배로 심히 기울어져 있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칼빈의 주석을 조금 읽어드리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죄악에 기울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심각한 죄악의 영향 밑에 눌려 있으므로 모든 죄악의 결과는 이러한 악의 근원으로부터 필연적으로 흘러나오고 있다고 말한다. 자기 속에 모든 죄악의 씨앗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모든 죄악의 싹을 트게 하거나 기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죄악은 모든 인류에게 널리 퍼져서 이미 모든 사회가 수많은 죄악들로 꽉 차 있고 죄악의 부패에서 자유롭거나 순결하게 남아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음란과 정욕,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들에 대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여기서 이방인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 그들이 이방인입니다. 그런 이방인의 뜻은 어디를 향해 기울어져 있는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하던 때가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정욕을 따르는 때는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들은 죄를 그쳤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죄에 속하는 자로 있던 때는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음란합니다. 때로는 정욕적입니다.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같은 쾌락에도 빠집니다. 그러나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죄에 거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의를 행하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다음 주 보게 될 7절 말씀에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에 대해서는 지나간 때로 족합니다. 지나간 때로 족하다는 것은 지나간 것을 다시금 현재 우리 생활로 가지고 올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 부끄럽던 시절은 그때로 족하기 때문에 더 이상 반복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여전히 음란하지 않습니까? 여전히 정욕적이지 않습니까? 여전히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같은 쾌락을 추구하지 않습니까? 지나간 때로 족하다는 것은 지나간 것을 다시금 행하는 것이 부끄러운 줄 알라는 것입니다. 부끄럽기 때문에 그렇게 반복하는 것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너희가 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보고 그 방향으로만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더욱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하고 의에 대하여 살아야 하는데,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4절을 보시면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하던 것을 더 이상 하지 않을 때,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 갈 때,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만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로 있을 때 이방인 쪽에서는 그런 삶에 대하여 이상하게 여깁니다. 이상하게 여기는 정도만이 아니라 때로는 비방하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극한 방탕에 달음질 하던 자들이었다가 그 일을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멈추는 정도가 아니라 극한 방탕에서 돌아서 하나님의 선하기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함으로 그 뜻만을 따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준과 저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요, 우리의 원리와 저들의 원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예이지만 믿지 않는 가정 안에서 어떤 한 사람이 믿게 되면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는 마찰을 일으킬 경우들이 더러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는 보배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와 같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에게 보배라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이것만큼은 버릴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에게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라는 것은 반드시 버려야 할 것으로 있습니다. 버리지 않으면 부딪혀 까지게 되고, 걸려 넘어져 다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만 등장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도만 등장하면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9절입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극한 방탕으로 달음질하다 멈추고 돌아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거룩함으로 나아간다고 할 때 이상하게 여기고 비방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런 악에 대하여 악으로, 욕에 대하여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효력 있게 부르신 것입니다. 또한 이런 과정을 겪게 하심으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이어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14절 이하 16절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합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 자체가 복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으로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이 근심하는 것으로 근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고 그분만을 높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혹 누군가 우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다면 그들에게 대답할 것을 준비하여 알려주는 것을 통해 누군가를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고, 또 누군가는 결국 자신들이 비방하는 그 비방이 부끄러운 짓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가 믿는 우리를 이상하게 여기고 우리를 비방한다고 해서 그들의 생각이나 시각, 말 등에 대해 억울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황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의 뜻을 따른다는 이유 때문에 어떨 때는 손해를 보는 것처럼 있기도 합니다. 쉬운 예로 주일에 장사를 하지 않는 것, 주일에 국가시험에 응시하는 않는 것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물론 실제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따르는 복보다 더 좋은 복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치 손해를 보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어쨌든 우리의 이런 삶의 방식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들의 경우 비방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 가정에서 유일하게 믿는다고 할 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주일에 시험 친다는 것 때문에 치지 않는다면 믿지 않는 가족들이 이상하게 보거나 비방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억울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황해 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주의 뜻을 따라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또한 그렇게 우리 인생을 이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를 이상하다고 여기고 비방하는 저들이 우리의 인생을 이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 5절에서는 어떤 내용까지 말합니까?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즉 그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비방할지라도 결국 그들 스스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에게 사실대로 고하게 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때는 언제입니까? 개인적인 죽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마지막 때를 일컫습니다. 그때는 살아 있는 자만이 아니라 죽은 자도 다시금 살아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때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거짓을 고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그때는 신자를 이상하게 여기고 비방한 모든 사실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데,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 그들 스스로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자신의 죄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 자백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해 요한계시록 1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계18:20)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고 할 때 신자에게 있어 이 심판은 어떠한 심판인가?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이라고 표현합니다. 신원하다는 말은 우리말로 가슴에 맺한 원한을 풀어 버리다는 뜻인데, 마지막 심판은 신자에게 있어 모든 억울함을 풀어버리는 심판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지막 심판 전까지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고난의 삶일 수 있습니다. 억울할 수 있는 일도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진리를 따른다는 이유로 비방도 받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 베드로가 이 서신을 쓸 당시는 박해 시기였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했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복을 빌라고 말합니다. 열심으로 선을 행하되 혹 선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악을 나타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다시 말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복된 줄 알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고난은 결국 영광을 위한 것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 전에 우리의 모든 억울함까지 풀어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정욕,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가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 안에 있는 이 부패성과 또 우리의 연약함으로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되 말씀 앞에서 돌아보면 꽤 많이 짓습니다. 때로는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할 정도로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죄가 우리를 완전히 주관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 옛 사람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함께 죽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 안에 여전히 부패성이 있다는 이유에서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죄에 대하여 계속해서 죽이고 의에 대하여 계속해서 살도록 주의 은혜를 구하는 자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로 오시면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를 위하여’란 ‘이런 심판을 위하여’란 말로 풀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저들의 경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게 되는데, 동일한 심판을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은 자는 누군가? 일단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표현으로 봐서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하고 죽은 자에게 다시금 복음이 전해지는 그런 내용은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3장 19절을 지옥강화설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내용 자체도 성경이 지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내용과 연결되어 생각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닙니다. 또한 이어지는 내용에서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어 그 복음을 받아들인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4절과 5절은 진노의 그릇이 그 대상이라 할 수 있고, 6절은 긍휼의 그릇이 그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죽은 자들로 표현한 것은 복음이 전파되어 믿기 전에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베드로가 편지를 쓸 당시에는 죽었으나 살아 있었을 때 복음이 전파되어 믿게 된 자들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경우는 실제로 죽은 자들을 말하는데, 이때는 죽은 상태에서 복음이 들려졌다고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영적으로 죽은 자든, 아니면 육체로 죽은 자든 그들이 살아 있을 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인데, 왜 복음이 전파되었는가?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지만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긍휼의 그릇이라 할지라도 이 땅에서 사람으로 육체의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처럼 복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가지게 됨으로 신자가 되지만, 그리고 신자의 경우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고린도전서 5장에 보면 심각한 음행의 문제를 언급하는데, 거기에서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4절과 5절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사탄에게 내주었다는 것은 권징 가운데 가장 마지막 단계인 출교에 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권징의 순서와 관련해 잘 소개되고 있는데, 그 마지막은 출교로 마태복음에서는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합니다(마18:17). 더 이상 교회 안에 두어 교제할 수 없다, 교회 밖으로 내쫓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왜 출교까지 하느냐, 출교의 목적이 무엇이냐 할 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즉 교회의 권면조차 거절함으로 자신의 죄에서 돌이키지 않기 때문에 그 죄의 심각성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부터 분리시키는 겁니다. 그런 분리를 통해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고통을 당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통해 결국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을 받도록 하는 것이 출교의 목적입니다. 때문에 출교는 반드시 사랑의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저 사람의 영혼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출교는 굉장히 심각한 죄로 드러나지 않을 경우가 아니고서는 매우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한다는 것이 정확하게 이 뜻이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이를 위해서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심판을 받을 수 있지만 그 심판은 영원한 심판이 아니라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는 목적을 가진 심판입니다. 때문에 긍휼의 그릇으로 있는 자들은, 특별히 복음으로 말미암아 참된 믿음을 가지게 된 신자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공적인 권징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했을 때 이방인을 들어 사용하신 것처럼 그런 식으로 사람을 통해 살아 있는 동안 심판하시기도 하십니다. 사도 베드로가 어떻게 말했습니까?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만이 아니라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을 수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못했을 때 사람을 통해 고난 주시는 바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심판은 결국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심판이 있는 이유는 영원한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의 심판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라 더욱 살도록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땅에서 육체의 심판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신자 된 자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갑옷을 삼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동일한 마음을 가지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죽기까지 복종한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런 마음으로 주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부패한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죄에 대해서조차 이 땅에서 심판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라 더욱 살도록 할 목적을 가지신다면 우리는 그런 목적에 부합하는 자가 되도록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자신을 무장해야만 합니다. 내가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마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기도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서기가 어렵습니다. 비록 우리가 연약할지라도,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이 강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또한 기도함으로 주께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도록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