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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오덕호목사/하나님의 제단을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말 1:6-14)
오늘도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 가정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서로 축복해주실까요? “주님을 잘 섬기고 큰 복을 받으십시오.”
지난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 이런 보도가 있었습니다. 지하수 개발업자들이 식수로 사용할 수 없는 지하수를 어린이집 19곳, 학교 168곳, 마을 상수도 286곳 등 1400여 곳에 공급해서 수많은 어린이들과 시민들이 오염된 물을 먹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 뉴스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도 놀라운 일을 자주 겪기 때문에 웬만한 일에는 잘 놀라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어린이들에게 오염된 물이 공급되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내용을 듣고는 더 놀랐습니다. 그것은 지하수 수질검사기관이 검사 결과를 조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질검사를 조작한 것이 한두 건이 아니었습니다. 수십 건도 아니었습니다. 무려 1,753건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이 조작했기 때문에 1,400여 곳에 오염된 물이 공급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수질검사기관 52개 중 14개가 검사조작으로 적발되었습니다. 전체의 27%나 되는 기관이 검사를 조작한 것입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지하수 개발업자들이 오염된 물을 먹는 물이라고 속여서 공급했다면 제가 좀 덜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검사기관이 돈을 받고 검사 결과를 조작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지하수 개발업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스스로 검사 결과를 조작한 기관도 있었습니다. 더욱이 어린이집에까지 이렇게 조작된 결과를 통보해줘서 수많은 어린이들이 오염된 물을 먹게 했다니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는 그 동안 수많은 불량식품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불량식품업자들을 얼마나 격렬하게 비난했는지 모릅니다. 그 중에도 특별히 분개하는 것은 어린이들에게 불량식품을 공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입니다. 이런 글을 본 적도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먹는 음식으로 장난하는 사람은 극형에 처했으면 좋겠다.” “너희 자녀에게도 그런 불량식품을 먹이겠느냐?” 정말 그렇지요. 아무리 불량식품업자라도 자기 자녀에게는 불량식품을 먹이지 않겠지요?
그러면 부모님에게는 불량식품을 드리겠습니까? 당연히 드리지 않겠지요. 사람이 자녀나 부모님에게는 불량식품을 드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하면 바르게 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에게 불량식품을 주지 않습니다. 부모님을 사랑하면 부모님께 상한 음식을 드리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불량식품 자체를 만들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악을 행하지 않고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불량식품이 사람에게 얼마나 해로울까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여러분에게 불량식품을 줬다면 그 불량식품으로 인해서 몸 상하는 게 더 괴롭겠습니까, 나에게 불량식품을 줬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 상하는 게 더 괴롭습니까? 자녀가 노부모님에게 상한 음식을 드려서 부모님이 배탈이 나면 배 아픈 것 때문에 더 화가 나시겠습니까, 자식이 그런 음식을 드렸다는 사실에 더 화가 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친구의 자녀가 차려준 저녁을 잘 먹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보니 자녀가 차려놓은 저녁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음식이 상한 것입니다. 어차피 지금 배불러서 먹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상한 음식을 먹지도 않고 병도 생기지 않으니까 괜찮은 겁니까? 그런 음식을 차려놓은 것 자체가 얼마나 속상하는 일입니까? 특히 이때는 친구의 자녀와 비교가 되어 더 슬프고 화가 나겠지요?
하나님도 그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음식을 드려도 드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음식을 먹는 분이 아닙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만일 음식이 필요하다고 해도 우리가 드리는 것보다 더 싱싱한 자연산으로 마음껏 드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편 50:9-11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하나님은 우리가 돈을 드려도 그 돈을 받아서 쓰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특히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이루시는 분입니다. 아무것도 우리로부터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봉사도 필요 없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다 됩니다. 아니면 천사를 시켜도 되고 다른 사람을 감동시켜 일하게 하셔도 됩니다.
여러분 모세가 처음 하나님을 뵈었을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고 여쭤보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는지 생각나십니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14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입니다. 무엇이 없으면 못 사는 분이 아닙니다. 부족한 것이 없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무엇을 받아야 하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제물을 요구하시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데 왜 이런 것을 요구하십니까?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와 친밀하게 지내고 싶어서입니다.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주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며 아무리 잘해줘도 그가 나에게 무관심한데 내가 아무렇지도 않다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동정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기는 하지만 그와 친밀해지기를 바라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를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만한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가 어려울 때는 관심을 가지고 돕지만 형편이 나아지면 관심도 없어지고 멀어지게 됩니다. 이게 사랑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거지처럼 동정하시는 게 아닙니다. 자녀처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친밀해지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께 무관심하면 안타까워 견디지 못하십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내지 않으면 친밀해질 수 있겠습니까? 또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질이 있는 곳에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물질을 바치지 않고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해지기 위해 시간과 물질을 바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 일할 때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일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복을 받게 하시려고 우리의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려울 때 도와주십니다. 또 헌금을 강요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해지고 싶어 하십니다. 또 우리에게 복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헌신을 요구하셔도 이런 사랑의 마음으로 요구하시기 때문에 절대 무리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것에서 정성껏 하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헌금을 요구하시는 모습을 고린도후서 8:12는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이것은 신약에서만 그런 게 아닙니다.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요구하실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조금만 바치라고 하십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 5장을 보면 보통 사람은 속죄제의 제물로 어린 양이나 염소를 드려야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 두 마리를 드리면 됩니다. 더 가난한 사람은 밀가루만 조금 드리면 됩니다. 하나님은 헌금을 요구하실 때 이런 식으로 요구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절대 무성의한 것은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좋은 양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자기 욕심 때문에 불구의 양을 바치면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제물에 모욕감을 느끼고 분노하십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녀들이 자기들은 싱싱한 생선을 먹으면서 부모님 상에는 상한 생선을 드리면 부모님이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가난한 자녀들이 정성껏 차린 상이라면 생선이 없어도 기쁘게 받습니다. 하나님도 그러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남유다왕국이 바벨론에게 망하고 나서 지도적인 사람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러나 페르샤가 바벨론을 정복한 후 이들을 유다로 돌려보냅니다. 이들은 유다로 돌아와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결국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합니다. 신앙생활도 어느 정도 회복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백성들의 신앙이 다시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약 50년 정도 지나자 신앙상태가 아주 나빠졌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종교의식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 앞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과 세상에 나가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드리고 은혜를 받아 세상에 나가서 바르게 삶으로써 바르고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반드시 같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배를 제대로 드리면 삶이 바르게 변합니다. 예배를 아무렇게나 드리면 삶도 악해집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는 열심히 나오는데 세상에 나가서는 바르게 살지 못합니다. 이것은 교회에 나와도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지만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새로운 은혜를 받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잘못된 자세로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말라기 때도 그랬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소홀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이 사용할 수 없는 불구의 동물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것은 정말 부모님께 상하고 곰팡이 난 음식을 드린 것과 같은 짓이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쁜 짓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부모님보다 더 위대하고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이런 제사를 드리는 백성이 삶은 하나님 뜻대로 살겠습니까? 부모님께 상한 음식을 드리는 자녀가 부모님 말씀을 듣습니까?
이렇게 백성들이 제사도 엉터리로 드리고 삶도 악해졌을 때 하나님이 말라기를 보내신 것입니다. 말라기는 1장에서 백성들이 신성모독이라고 할 만큼 못된 자세로 제사 드리는 것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악하게 사는 것을 꾸짖습니다. 백성들은 속히 바르고 정성스러운 제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참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얼마나 정성스럽습니까? 우리는 시간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바칩니까? 어려운 여건 때문에 시간을 온전히 드리지 못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언제 호출이 있을지 몰라 예배당 문가에서 예배드리다가 호출이 있으면 나가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런 분은 하나님이 충분히 아시고 이렇게나마 바치는 시간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시간 몇 분 빼먹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배에 참여해도 여러 가지 행사계획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면 큰 일입니다. 이것은 부모님께 먹다 남은 음식을 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니까 예배시간에 안 늦는 것보다 마음이 진실하고 삶에서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정말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한 주일에 몇 시간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시간을 다른 일로 다 잘라먹고 마치 먹다가 남은 음식을 드리는 것처럼 바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세가 이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며 순종하겠습니까? 이런 자세가 우리와 친밀하게 지내려고 우리를 사모하며 기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자세라고 볼 수 있습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이렇게 정성이 없을까요? 당시 유다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몰라서 그랬습니다. 말라기 1:2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정성껏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도 눈가림으로 드리게 됩니다. 엉터리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몰라서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속히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에는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님의 사랑을 알아야 진짜 효자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하고 순종해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믿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모습이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버릇이 나빠진 아이의 모습과 같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는 방법은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방법과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하고 거룩하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하나님과 친밀감을 느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공경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용서해주신다고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귀한 시간을 바치며 정성껏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귀한 예물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정성껏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할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는 마음 아픈 말씀을 두 가지 듣게 됩니다. 첫째, 누가 성전 문을 닫아서 이런 엉터리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굶으면 상한 음식이라도 먹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그까짓 것 필요 없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정성이 깃든 예배입니다. 무성의한 예배는 하나님께 모욕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것을 받을 바에는 차라리 교회 문을 닫고 예배를 폐쇄하면 좋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와 그렇게 친밀하게 지내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 예배를 폐쇄하라고 하실 정도라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신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혹시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의 예배에 대해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정말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의 예배 자세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에게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이방인에게서 영광을 받으실까요? 이방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믿어온 하나님의 백성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다 잊어버리고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새가족들이 오래된 교우들보다 더 진지하게 예배드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이런 일입니다. 이방인들은 자기 신들을 정성껏 섬기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그만큼도 섬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사실 참 신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데도 말할 수 없이 많은 정성을 쏟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이들보다 훨씬 더 게으르고 무성의하지 않습니까?
언젠가 어떤 목사님이 우리가 우상숭배자들만큼만 하나님을 섬겨도 교회가 완전히 새로워지고 나라가 복음화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우상숭배자는 기복신앙으로 섬기는 거니까 아무리 겉으로 정성껏 드리는 것 같아도 마음의 자세가 바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우리가 예배에 참석하는 자세가 그들보다 못하게 보일 때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 각자가 형편이 다르고 마음의 자세가 다르겠지만 아무리 봐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가 많이 잘못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 시간과 물질을 바치고 예배하며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며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풍족히 이루어드리는 귀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