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송언수
모든 사람의 가슴에는 원청이 있다
어디서 왔느냐는 린샹푸의 물음에 아창은 ‘원청(文城)’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어디에도 없는, 즉석에서 지어낸 이름이었다. 그것이 책 제목이 되었고, 작가는 ‘모든 사람의 가슴에 원청이 있다’고 서문에 썼다. 책을 덮으며, 왜 원청이었을까? 궁금해졌다. 거의 빈털터리가 된 아창은 샤오메이를 그 집에 두고 혼자 북경에 갈 생각에 그녀와의 관계를 숨겼고, 그들의 출신도 숨겨야 했다. 린샹푸를 속이려는 마음에 지어낸 지명이었다. 그들은 린샹푸의 집에 들어올 때 마침 좋은 옷을 입고 있었고, 북경에서 고위직에 근무하는 외삼촌을 찾으러 가는 길이라고도 했다. 그 스스로 자신들을 포장하기 위한 지명이 튀어나왔을 확률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월문에 성성자다. 문화도시 그 쯤, 뭔가 먹물 먹은 그럴싸한 지명처럼 보이지 않는가.
모든 사람의 가슴에 있다는 작가의 원청은 과연 그런 뜻일까?
"왜 미소 짓는지 알고 싶고 누가 눈물을 흘렸는지 궁금하지만 우리는 알 수 없고 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알고 싶어도 알 수 없고,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일이 너무도 많지요. 그럴 때 우리는 상상 속에서 찾고 추측하고 조각을 맞춥니다."
책의 뒷부분을 읽기 전까지 샤오메이와 아창의 관계와 사연은 추측의 영역이었다. 책을 읽으며 이야기의 연관성을 상상하고 찾고 추측하며 조각을 맞추어 나가긴 했다. 위화는 인터뷰에서 원청에 대한 질문에, 린샹푸의 시신을 고향으로 실어가던 수레가 샤오메이의 무덤가에 멈추었을 때, 린샹푸가 원청을 찾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린샹푸에게 원청은 샤오메이였던 거다.
잃어버린 도시
원청이란 제목 아래 소제목으로 ‘잃어버린 도시’라고 되어 있다. 한국어판을 낸 출판사에서 붙인 이름일 것이다. 왜 잃어버린 도시지? 뭘 잃어버렸다는 거지?
린샹푸는 고향에서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잃었고, 성인이 되기 전에 어머니를 잃었다. 새로 생긴 가족인 샤오메이를 두 번이나 잃었다. 그래서 결국 젖먹이를 안고 그녀를 찾아 나섰다.
작품에 등장하는 도시는 두 곳이다. 그의 고향과 ‘원청’이라는 시진. 그는 고향에서 부모를 잃고 딸을 얻었지만 시진에서는 새로운 가족 천융량 부부를 얻었고, 대신 자신을 잃었다. 잃은 지도 모르게 그녀, 샤오메이도 잃었다.
작가의 의도대로라면, 린샹푸가 잃어버린 것은 원청 즉, 샤오메이다.
한국에도 [원청] 같은 이야기가 있었는지
서문에서 그는 한국에도 원청 같은 이야기가 있었는지 물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딸들이 민며느리로 팔려가는 일이 우리나라라고 없었을까. 고부간의 갈등은 말해 뭣하겠는가. 속고 속이는 일 또한 다반사였다. 먹을 것이 없어 산적이 되고 도적이 되는 일 또한 있었다. 백성을 지켜야 할 관리들이 도적과 결탁해 오히려 백성의 고혈을 빠는 부패한 관리들 또한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가 낳은 애를 놔두고 도망가는 여자, 도망간 아내를 찾아 떠도는 남편의 이야기? 없을 리가 없다.
남을 돕는 고마운 사람들 또한 있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의리와 배려도 없지 않았다. 사람 사는 모양새는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아니 전 세계 어디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원청(샤오메이)’은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이며 주제이다.
중국의 대문호 위화의 신작소설 원청은 6백 페이지 가량으로 꽤 두꺼운 편이다. 그럼에도 지루한 줄 모르고 읽을 수 있다. 그만큼 필력이 좋다. 우리나라에도 원청 같은 이야기 있었느냐고? 그 시대를 다룬 조정래의 [아리랑]을 추천한다. 10권짜리 대하소설이다. 원청의 시대적 배경과 비슷하게 조선말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는 우리네 이야기가 무려 10권이다. 고민 없이 끄덕일 수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