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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8
고린도전서 15장 12-20절
사도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신 신분은 그가 성령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 그래서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그가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까지 사도신경의 내용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 동안 말할 수 없는 고뇌와 고통과 공포와 지옥의 괴로움을 친히 당하셨다는 그런 의미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신 신분에 대하여 살필 것인데, 사도신경 내용 안에서는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그리고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것, 마지막으로 거기로부터 오사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까지를 말합니다. 이 가운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것이 높아지신 신분의 첫 번째 내용인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에 대한 것인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5문입니다.
45문.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첫째로, 그는 부활로 죽음을 이기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얻으신 의에 참여하게 하십니다(고전15:16-17, 롬4:25, 벧전1:3). 둘째로,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역시 새로운 생명으로 살리심을 받습니다(롬6:4, 골3:1-3, 엡2:5-6, 벧전1:3). 셋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복된 부활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된다는 것입니다(고전15:12,20-21, 롬8:11, 빌3:20-21).
요리문답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우리의 유익을 설명하지만, 유익에 앞서 그리스도는 과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것에 대해서는 믿지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도 그러하지만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강조함으로 그리스도의 선재성, 동정녀 탄생, 부활과 승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합니다. 특히 부활과 관련해 그들은 예수가 실제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제자들의 상상 속에서 부활하셨을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이러한 가르침이 기록된 성경과 전면으로 배치된다는 데 있습니다. 기록된 성경과 배치되는 주장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은 우리와는 달리 저들은 성경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자들은 기록된 이 성경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는 조금의 거짓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사실성은 결코 우리 이성에 잣대를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경험해야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자들은 기록된 성경을 통해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분명히 증거 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20장 11절 이하를 보시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셨는데, 1절에 보면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래서 두 사도는 마리아가 말한 것을 확인하고는 돌아가는데,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그러면서 11절 이하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십니다. 16절 이하 18절만 보시면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마태복음 28장에서는 다른 여인들에게도 보이시는데, 먼저 천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립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달려 갈 때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는데, 9절과 10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난 뒤 시몬 베드로에게도 보이시고(눅24:34),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보이시고(눅24:13-35), 도마를 제외한 제자들에게도 보이시고(요20:19-23),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에게도 보이시고(요20:26-29), 고린도전서 15장 6절에 의하면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다고 까지 증거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고린도전서 15장 12절 이하 20절을 읽었지만, 고린도전서 15장 전체는 부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어서 부활장이라고도 합니다. 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2절에서는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 설명합니다. 복음은 곧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이 3절과 4절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요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는데, 그 모든 일이 이미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대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런 점에서 부활신앙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가르쳐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자신의 유일한 아들, 다시 말해 약속을 따라 난 유일한 아들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번제물로 바쳐야 했을 때 그가 바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9) 즉 부활신앙은 일찍부터 우리의 영적 선조에서 증거 되고 있었던 겁니다.
다시 고린도전서 15장 내용으로 와서 5절 이하 8절은 앞서 언급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들에 대하여 열거하고 있는데, 구약성경에서부터 예언해 오던 것이 실제로 성취가 되었다고 할 때 성취된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증거 합니다. 그만큼 부활은 성경의 증거와 함께 역사적 사실로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 보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말함으로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 자로 자신을 소개하는데, 정확하게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 승천하시기에 앞서서 본 것이 아니라 승천하시고 난 뒤의 일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바울이 주를 믿고 주를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의 삶이 완전히 돌아서게 되는데, 8절은 그것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직후 승천하기에 앞서 본 것이 아니라 승천하시고 난 뒤 본 것인데, 그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심으로 인해 믿음 안에서 부활하신 주를 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런 명백한 증인과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2절을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사도 바울이 증거 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그 부활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는 반드시 부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더란 것입니다. 문제는 죽은 자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죽은 자의 부활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믿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을 위한 부활입니다. 다시 말해 그의 부활은 그를 믿는 자들을 위한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죽으신 것도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위한 죽음이요, 우리를 대신한 죽음입니다. 죽음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부활하셨다는 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성도 역시 부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활에 대하여 믿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14절을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할 때 그가 우리 죄를 위해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과 그가 우리 의를 위해서 다시금 살아나셨다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죗값을 치르셨고, 그의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의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런데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죽은 자의 부활의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부활도 믿을 수 없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은 헛된 것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함으로 믿게 되는 자들이 있다고 할 때 죽은 자의 부활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다면 믿음도 헛된 것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심지어 15절에서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그리고 그 복음을 믿는 것도 헛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누구로부터 부름을 받아 복음을 전하느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거짓 증인이라면 결국 그들을 보내신 하나님도 거짓된 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과연 하나님이 그런 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덧붙여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이라고까지 말하는데, 그만큼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신자가 동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그런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면 그를 믿는 자의 부활도 있는 것이고, 반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그를 믿는 자의 부활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는가? 부활하셨습니다. 당연히 그의 몸 된 교회, 다시 말해 그를 믿는 자의 부활도 없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16절 이하 19절도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되는 내용입니다. 먼저 16절과 17절을 보시면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4절에서 믿음도 헛되다고 말했지만 여기서 다시금 말합니다. 그리고 덧붙여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죄 문제는 그의 죽음을 통해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없다면 그의 죽음도 헛된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그의 부활이 없다면 그의 죽음도 헛된 것이요, 죄 문제 역시 해결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부활이 없다면 그를 통해 이루신 모든 은택의 내용이 제공될 수 없는데, 죄 사함 역시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8절을 보시면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잠잔다는 표현을 합니다. 이런 표현은 부활을 전제로 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잠잔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까지 앗아갈 수밖에 없는데, 19절을 보시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말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부활 이후까지도 내다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하고 난 뒤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천국 혹은 낙원이라고 불리는 장소에서 영원토록 살아가게 될 것을 소망하게 됩니다. 그때는 이 땅에서처럼 죄를 짓지 않습니다. 더 이상의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죄로 말미암은 고통과 고난도 더 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거짓 소망일뿐입니다. 아니 부활이 없다면 그런 소망 자체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이 세상의 삶이 모든 것이 됩니다. 그것보다 더 불쌍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타까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이 세상의 삶이 모든 것인 양 살아가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그의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그 생명을 가지고 영원토록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갈 것에 대한 소망을 전혀 가지지 못한 것처럼 그렇게 사는 성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통해 하신 말씀,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망이 없는 자,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지 않는 자, 그가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이처럼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할 수도 없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할 수 없다면 그 결과는 우리의 모든 신앙의 근간을 흔들어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 예언의 성취요, 많은 사람들이 본 실제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20절에서 다시금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물론 마지막 때 죽었던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의 첫 번째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간혹 예수님의 부활에 앞서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에 대한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예수님께서 첫 열매가 되신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금 살아난 뒤 다시금 죽는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참된 부활은 부활 이후 다시는 죽음을 맛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일시적으로 부활을 맛보았다고 해서 그리스도보다 앞서 부활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런 부활도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참되게 부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나는데, 이때는 죽은 자만이 아니라 재림 때 살아 있는 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특징을 가지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2절 이하를 보시면 그 특징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15:52-54)
그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살아나셨는가? 죽음으로 육체와 분리되었던 그의 영혼이 진정으로 그의 육체에 돌아옴으로 살아나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심으로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이 되셨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신 것과 동일하게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의 상태로 살아나셨습니다. 신성에 있어서는 전혀 변함이 없지만 인성에 있어서는 본질과 속성에 있어 동일한 상태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모든 연약함들을 다 벗으신 상태로 영화롭게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몸으로 부활하겠지만 모든 연약함을 벗은 상태로, 영화롭게 부활 것입니다.
이런 부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시는 동안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있는데,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성전은 실제 건물이라는 의미의 성전이 아니라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요2:21). 자신의 육체를 죽일지라도 내가 사흘만에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바도 있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요10:17-18) 목숨을 버리기도 하시고 얻기도 하시는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로마서 8장에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나신 것이지만, 성부께서 성자 자신을 통해 성자를 일으키신 것이요, 또한 그 자신이 그의 성령으로 자기 자신을 일으키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부활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이제 부활의 유익과 관련해서 살펴볼 텐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우리와 관계된 것인데, 그의 죽음이 우리를 위함인 것처럼 그의 부활도 우리를 위함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관계된 유익에 앞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관련해서 부활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합니다. 로마서 1장 4절입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즉 그의 부활은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고 선포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조금 전에 말했지만 그의 부활은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부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 어떻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겠습니까?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지만 그는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죽은 자신을 스스로 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받는 유익은 무엇인가?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얻으신 의에 참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6절과 17절을 다시 보시면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부활이 없다면 그의 죽음도 헛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신 모든 공로를 분명히 제공한다는 보증과 같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 25절은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두 번째는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역시 새로운 생명으로 살리심을 받습니다. 본래 우리는 죽은 자였습니다. 육체로는 산 자로 있었지만 영혼은 죽은 자로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로 살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전혀 들을 수 없는 자로 살았습니다. 물론 귀로는 들을 수 있지만 그 말씀에 대한 반응을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혼을 살리셨고 반응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새 생명을 가진 자로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로마서 6장 4절 말씀처럼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우리도 그와 함께 장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우리 역시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에 비록 살아가는 것은 동일하게 이 땅 위에 살지만 이 땅 위에 있는 것만 바라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말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부활도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끝이 있지만 이 세상이 끝나고 난 뒤 영원토록 살게 될 곳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지상의 것에만 매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는데, 위에 있는 것들, 다시 말해 위에 계신 그리스도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을 구하면서 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1장 13절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을 구해야 한다는 것은 성령을 통해 주고자 하시는 하늘에 속한 것들만 구해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특별히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데,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새 생명을 받은 자로서 거룩을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목적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세우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베드로전서 1장 3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까지 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1:3-5) 그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소망과 유업을 주시는데, 그 모든 것이 어디 있느냐? 하늘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시기 위해 무엇까지 약속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신다고까지 하십니다. 누가 그렇게 하시는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과 분리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부활의 유익과 관련해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복된 부활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된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는데, 첫 번째 열매가 있다면 그 다음 열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도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었다가 다시금 살아나서 죽는 그런 부활이 아니라, 앞서도 말했지만 더 이상 죽지 않는 부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3절을 보시면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43절과 44절도 보시면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라고도 말씀합니다. 이런 부활에 대하여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복된 부활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부활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그의 부활하심만이 아니라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도 부활할 것임을 분명히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다고 할 때 부활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결국 이 땅의 삶이 모든 것이 아님을 아는 자로 우리가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지 아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