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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현 퇴수당 김연 선생의 큰 업적을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야현也玄 退修堂 20세 김연 선생은 낙성군의 막내아들 대호군 세진世珍의 후손으로 경상감사시절 실전한 낙성군의 산소를 되찾아 구산求山하였고 위토도 마련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이를 분석할 때, 낙양동의 낙성군과 문충공위토도 함께 구입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굳어져 가는 느낌입니다. 새삼 선생의 연보를 꼼꼼히 들여다보니 그 가능성이 엿보여 여기에 그 연보를 실어 함께 돌아보고자 합니다.
1. 퇴수당의 부친 정목공 김우석의 연보에 숙종16년(1690)9월 성주목사를 사임하고 돌아가는 길에 개운동을 들러 낙성군묘소를 조문하고 제를 올렸다는 기록을 남겼다.
2. 그 후 14년만인 숙종30년(1704) 6월 경상감사가 된 퇴수당이 부친에 이어 2번째로 개운제를 찾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낙성군 묘역은 이미 청주한씨들이 차지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퇴수당은 곧 구산求山운동에 나서, 묘소를 되찾아 다듬고 묘설물을 설치하였으며 아울러 위토까지 마련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3. 허나 묘소주변의 위토는 당시 사정을 감안할 때 외지고 척박하기 짝이 없는 산골이라 지료다운 지료를 기대할 수 없자 넉넉한 지료가 나올 다른 옥토를 찾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개운동의 지정학적인 제약조건에서 벗어난 곳을 물색 중 현재의 낙양동의 땅을 그 대안으로 택했을 것으로 보인다.
4.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존의 낙성군의 묘소는 물론 위토까지 몽땅 잃어버린 마당에 야현 공 말고는 새 위토마련작업에 나설 인물이 있다고 보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야현 공의 손길이 미쳤을 게 분명해 보입니다.
5.아울러, 선생의 부임지 주변 곳곳에 선정비들이 즐비하게 남아있는데 연보를 보면 선정비답게 선생의 선정정황들이 다음과 같이 11번이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선생의 백성들 이민利民에 대한 각별한 애정의 발로가 아닐까요.
퇴수당 김연의 연보로 본 선정행적 요약
① 숙종 20년 9월 24일 정언으로 있으면서 호남에서 이생지신고자에게 주는 경작권을 규정보다 배로 걷고 있는 폐단을 상소하고 있고,
② 숙종23년 8월4일 엔 양양부사로 있으면서 재해를 입은 백성들의 세금경감을 상소하여 유허를 받은 사실이 있으며,
③ 숙종30년 4월22일 경상감사로 부임인사는 자리에서 지방죄인 취조 횟수를 줄여줌으로써 백성을 배려하도록 청하여 따르도록 하였고,
④ 숙종32년 9월2일엔 경연특진관으로 참여하여 문경을 문경부로 승격시켜 주고 방어사를 두어 조령방어를 강화토록 하였으며,
⑤ 숙종39년7월30일 개성유수로 있으면서 황해도 세곡을 나르기 위해 송도에 전속해있던 예성강가의 우수참이 폐지됨에 따라 실직한 선원들을 본부로 이직시키도록 상소하여 따르게 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돌아올 때 백성들이 유임을 간청하다 뜻을 못 이루자 초상화를 그려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일이 있었으며,
⑥ 숙종 41년1월17일 함경감사로 있으면서, 청나라 사람 50여명이 경원시장에 나타나 술을 마시고 깃발을 앞세워 떼로 몰려다니며 주민을 불안케 하자, 부사 박동삼에게 일러 청나라사람들이 낮에만 시장에 들오도록 하고 경원성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해 민폐를 막았다.
⑦ 숙종44년 5월11일 경기감사 김연이 상소로 경기의 굶주리고 곤폐한 백성을 구제하도록 요청해 강화, 북한산성의 곡식 각각 2천석과 남한선성의 미곡과 콩7천석을 구해다 베풀었다.
⑧ 숙종44년 6월3일 경기감사 김연이, 여러 방어사와 큰 군영의 대장을 비롯해 강화와 개성유수가 역마를 함부로 타는 것을 금할 것을 청해 따르게 해 역원의 고역을 덜어주었다.
⑨ 숙종44년 8월5일 경기감사 김연이 감영을 옮기는 불편을 상소하여 민력을 아끼게 하였다.
⑩ 숙종45년 2월8일 김연이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농번기에 지키기 어려운 북한산성 쌓는 일에 많은 민력을 동원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상소하였다.
⑪ 경종2년2울5일 호조판서 김연이 호조에 납부해야할 각도의 방납물건을 관원들이 산출되는 곳과 그렇지 않는 곳의 물건을 서로 바꾸어 대신 납부하고 이익을 취하는 일을 금하게 해 임금이 따랐다.
그러나 선생의 이러한 큰 선정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소론에서 노론으로 정권이 바뀌는 바람에 시호를 받지 못한 점이 아쉽기만 합니다.
퇴수당의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에서 조부 성옹 김덕함 보다 40회가 더 많은 140회 등장하고 있고, 선정비 역시 조부보다 2회가 더 많은 6곳이나 됩니다. 조카 김동필이 금역의 영역이었던 성옹의 묘역에 야현공을 특별히 안장한 의중을 읽을 만 합니다. 선생의 묘지명을 쓴 이덕수의 마음이 아름답게만 느껴지네요.
퇴수당의 선정비가 있는 곳
부사 김연 淸德善賑不忘碑-양양군청 앞 현산공원내-숙종26년(1700)건립.
관찰사 김연 거사비-문경시 상초리-숙종35년(1709)9월 건립
순찰사 김연 청덕애민선정비-양평군지평리 숙종35년(1709)건립
관찰사 김연 선정비-일본 교토고려미술관 소장-유래미상
관찰사 김연 선정비-문경시 유곡면 선정비군 내-
순찰사 김연 몰세난망비-경북 칠곡군 기산면기산산성 혜원정사뒤-병술년(숙종35년 1709)5월 건립
야현 퇴수당 연보
년 호 | 서기 | 세수 | 연보 |
효종6. 5.16 | 1655 | 1 | 정목공 김우석의 차남으로 출생 |
숙종원년 | 1675 | 21 | 중진사 |
숙종10 | 1684 | 30 | 정시문과 급제 |
숙종12 | 1686 | 32 | 승문원 부정자(종9품) |
숙종14 | 1688 | 34 | 典籍, 예좌좌랑(정6품) |
숙15.4.25 | 1689 | 35 | 남인의 추천으로 들어 온 장희빈이 첫 왕자를 낳자, 숙종은 인현왕후 민비를 폐출하고 대신 장씨를 왕비로 삼아 원자로 책봉하려함에 송시열, 오두인, 남구만, 김연 등 86인의 연명으로 반대에 나선 서인들을 내 쫒고 남인정권이 들어서자 물러나다. |
숙종15 | 1689 | 35 | 강원도사(종5품) 남구만이 강릉으로 유배오자 방문위로하다. |
숙종16 | 1690 | 36 | 성균관 직강(정5품) |
숙종17 | 1691 | 37 | 경상도사 |
숙17.7.11 | 1691 | 37 | 부친 정목공 우석 별세 |
숙종19 | 1693 | 39 | 병조좌랑(정6품) |
숙종20 | 1694 | 40 | 영천군수(종4품) |
숙20.4.17 | 1694 | 40 | 지평(사헌부 정5품) 인현왕후폐출에 앞장섰던 영의정 권대운, 민암들을 극변에 귀양토록 상소하다. |
숙20.4.27 | 1694 | 40 | 김연이 인현왕후를 모해하려 한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를 형장으로 심문할 것을 청하였으나, 세제에 미칠 화를 우려한 소론 남구만의 만류로 중지하자 김연이 벼슬을 떠났다. |
숙20.5.2 | 1694 | 40 | 掌令(사헌부 정4품) |
숙20윤5.15 | 1694 | 40 | 장희빈의 왕비책봉을 반대하다가 장살당한 박태보와 그 아비 박세당에게 상을 주도록 아뢰다. |
숙20.7.2 | 1694 | 40 | 집의(사헌부 종3품) 한성우가 濟用監正(관청의 피륙모필 인삼들을 담당하는 정3품벼슬) 柳成運(세자시강원 문학을 지낸 윤증의 문인으로 송시열 일파의 미움을 샀다.)이 어리석고 유치한데도 출사했으니 파직케 하자, 김연이 그의 흠은 세상물정에 어둡기 때문이라고 해명하며,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숙종의 인정을 받고 시강원의 요직에 발탁되기도 한 그의 문재가 매우 애석하다고 하였다. |
숙20.9.24 | 1694 | 40 | 정언(사간원의 정6품). 호남 관아에서 버려진 땅을 신고자에게 경작토록하고 지세를 받는 절수折受가 호조의 세는 20두이나 호남의 여러 관아의 세는 40두나 되어 소민(小民)들이 호소하러 갈 곳이 없습니다하는 폐단을 상소하다. |
숙20.10.7 | 1694 | 40 | 공을 탐하고 화를 입히기를 좋아하고, 남을 불측한 지경에 빠트린 훈련도감 장만춘 등을 귀양보내게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 |
숙20.10.27 | 1694 | 40 | 장령 |
숙20.12.16 | 1694 | 40 | 사헌부 지평(5품) 김덕기가 부제학 오도일의 문사가 넉넉하나 도리에 어두어 비웃음을 사니 경연관을 둘 수 없다고 파직을 청하자, 사헌부장령(4품) 김연이 꾸미고 무고하여 남을 모함하고, 편파적이고 꾸며대는 말이라고 배척하여 체직시켰다. |
숙20.12.21 | 1694 | 40 | 대사헌 이수언이 오도일의 거칠고 경솔함을 들어 재차 배척하자,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장령 김연이 이수일의 논계는 꾸며서 날조한 것이 많았다고 하자, 이튿날 이수언이 김연이 오도일에 아첨한다고 나무랐으며, 장령 김흥정이 김연을 칭찬하고 이수언을 배척했다. |
숙21.5.14 | 1695 | 41 | 임금이 영의정 남구만, 좌의정 유상운을 불러 국사를 논하는 중에, 호조판서 이세화가 희빈장씨가 왕비가 되고 남인이 득세한 가운데 1694년 김춘택과 함께 폐위된 인현왕후의 복위를 꾀하다가 함이완의 고변으로 투옥돼 있는 한중혁의 사형감면을 청하자, 장령 김연이 절도에 보낼 것을 청하자 임금이 따랐다. |
숙21.11.5 | 1695 | 41 | 헌납(사간원 정5품) |
숙22.5.18 | 1696 | 42 | 동부승지(승정원 정3품) |
숙22.7.24 | 1696 | 42 | 동부승지, 우의정 윤지선이 희빈장씨의 묘비를 부순 자를 처벌할 것을 상소한 강오장의 국청을 말리자, 승시 김연의 의견에 쫓아 임금이 나문하라고 하였다. |
숙23.2.월 | 1697 | 43 | 양양부사, |
숙23.8.4 | 1697 | 43 | 부사 김연이 양양에 재해가 있자 상소로 부세경감을 청하여 윤허 받았고, 또한 장학사업에도 힘써 향교를 현북면 면옥치리로 이전할 것을 상소하여 허락받았다. |
숙24. 5월 | 1698 | 44 | 의병사직 |
숙25 | 1699 | 45 | 여주목사 |
숙26 | 1700 | 46 | 형조참의, 승지 |
숙26.6 | 1700 | 46 | 안주목사, 성옹유고 초간 |
숙28.3.21 | 1702 | 48 | 강원감사, 정언 조정위가 병조판서 김구와 강원감사 김연은 용열하여 인망이 없으니 체차하기를 청하자, 도리어 정언 이만민이 이 일을 상소한 조정위를 상소해 파직케하다. |
숙28.6.28 | 1702 | 48 | 승지 |
숙28. | 1702 | 48 | 강원감사. 강원도에 유배중인 남구만을 찾아뵙고 조부의 성옹유고 서문을 부탁하다. |
숙28.11.28 | 1702 | 48 | 충청감사. 감사로 떠나며 임금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공주의 束伍軍(지방에 설치한 병농일치형태의 예비군) 4천명을 감영으로 이속해 감사의 친병을 강화해 줄 것을 아뢰자, 3천명을 감영에 이속하게 했다. |
숙30. 4.22 | 1704 | 50 | 경상감사. 김연이 경상감사로 떠나는 인견자리에서 외방의 죄수를 한 달에 3번씩 정식형추定式刑推알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연이 그동안 모아 온 성옹유고의 서문을 최석정에게 서문을 부탁하다. 2년6개월재임 중 실전된 낙성군 묘를 찾아 求山하고 立石治山하였으며, 위토를 마련하고 성옹유고를 재간하다. |
숙32.8.2 | 1706 | 52 | 대사간, 교리 이사상과 대사간 김연이 장희재와 어울려 인현왕후를 모해한 남인 민언량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된 오도일의 문장과 청백함을 칭친하며 복관을 청하자 따랐다. |
숙32.9.2 | 1706 | 52 | 경연특진관, 문경의 급을 올려서 문경부聞慶府로 삼고, 방어사를 겸하여 조령을 지키게 청하다. |
숙34.9.14 | 1709 | 55 | 도승지, 영의정 최석정이 충간으로 장희재의 사형을 감면시키자 유학 권익평이 상소로 감면한 일을 중상하자, 최석정이 도성 밖에서 임금의 부름을 기다리니 임금이 도승지 김연에게 돈유敦諭하게 하다. |
숙34.10.3 | 1709 | 55 | 도승지. 영의정 최석정이 강원감사의 논밭을 측량하는 일을 아뢰자 도승지 김연이 嶺東과 같이하기를 청해 따르다. |
숙35.7.3 | 1709 | 55 | 경기관찰사. |
숙36.윤7.6 | 1710 | 56 | 도승지 |
숙37.6.9 | 1711 | 57 | 부제조. 대청외교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숭명의리를 내세워 빨리 청나라를 공격하라는 익명괘서가 중국인으로 위장해 영은문에 내걸리자, 임금이 은1천량과 가선품계를 걸고 범인을 잡도록 하였으나 오리무중인지라. 김연이 노복이 주인을 범인으로 고발하더라도 贖良하고 施賞하는 길을 열어주소서 하였다. |
숙37.9.14 | 1711 | 57 | 도승지. |
숙37.10.30 | 1711 | 57 | 진주사은사 부사로 청나라로 출발하다. |
숙38.4.4 | 1712 | 58 | 김연이 사은사로 돌아오다. |
숙38.4.24 | 1712 | 58 | 도승지 |
숙38.9.5 | 1712 | 58 | 김연이 지평 이세덕李世德이 같은 소론인 이돈李墩과 함께 조태채趙泰采의 일로 억울함을 당했다고 논하다가 도리어 노론의 미움을 사 먼 곳으로 유배되자 귀양을 거둬줄 것을 아뢰다. |
숙39.7.30 | 1713 | 59 | 개성유수, 황해도 세곡을 나르기 위해 송도에 전속해있던 예성강가의 우수참이 폐지됨에 따라 실직한 선원들을 관부로 이직하도록 상소하여 따랐다. 개성유수에서 돌아올 때 백성들이 유임을 간청하다 뜻을 못 이루자 초상화를 그려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초상화는 자손 집에 현존 |
숙40.8.1 | 1714 | 60 | 예조판서 민진후가 의식에 참여하는 賀班을 하지 않은 개성, 강화유수를 나무라자 김연이 外官이 내외직 職事를 아울러 행할 수 없음을 들어 하반에 받들지 못한 소를 올리다. |
숙40.11.5 | 1714 | 60 | 예조판서. 성균관유생들이 과거수석합격자 이광보가 윤증의 상에서 제문으로 송시열을 능욕했다하여 벌을 주자, 김연이 이광보를 위하여 ‘급제를 내린 자에게는 유생이 유벌을 내리지 못하도록 법을 제정초록 소를 올리자 임금이 따랐다. |
숙41.1.17 | 1715 | 61 | 함경감사. 청인 50여명이 깃발을 내세우고 경원시장에서 술판을 벌리고 돌아가자, 이를 꾸짖지 못한 부사 박동삼을 벌줄 것을 청하자 임금이 따랐다. 김연이 장계로 경원부의 개시는 청나라 사람이 낮에만 들어오도록 하고 경원성에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청하다. |
숙42 | 1716 | 62 | 의병사직 |
숙42.8.19 | 1716 | 62 | 한성우윤(종2품). 김연이 윤선거의 문집에서 소론 윤증과 최석정이 근거 없이 노론의 송시열을 헐뜯었다하여 그 문집을 헐 것을 상소한 전라도의 송시열 유생 申球를 배척하여 귀양 보내기를 청하자,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노론의 좌의정 김창집이 김연처럼 직분을 넘어서 절의를 세우는 것은 우스워서 꾸짖을 만도 못하다고 하자, 임금이 윤선거 문집을 헐어 시비를 밝히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소위송시열과 그의 제자 윤증 간에 벌어진 ‘회니시비懷尼是非’에 대해 숙종이 송시열의 손을 들어주고 윤증을 내치고는 윤증과 윤선거의 관작을 추탈하는 한편 윤선거의 문집도 없애버리게 함으로써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서게 한 사건이 벌어지자, 김연이 소론의 입장을 보였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김연은 처벌을 받았으며, 소론의 정치적 입지이 급격히 좁아지고 노론의 전제정치가 시작되었다.) |
숙43.1.23 | 1717 | 63 | 예조참의 조태억이 송시열의 유생 신구의 소에서 말로서 뭇사람을 배척하고 내쳐 처벌을 받은 이선부, 이동암, 오명준, 김연, 이태좌, 이광좌, 이대성, 이세면, 이정신, 여필희 등을 용서해 달라 하였으나 상이 내치다. |
숙43.7.28 | 1717 | 63 | 노론의 영의정 이이명이 숙종과의 독대에서 세자를 교체하기로 밀약하고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후 꼬투리를 잡아 명분을 만드는 전략을 짰다. 세자에게 들이댄 덫이었다. 임금이 노론과 독대한 것을 의심한 소론에서 큰 반발이 일었다. 82세의 노구로 와병 중이던 소론 영수 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은 관을 들고 상경해 독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김일경도 가세했다. |
숙43.8.2 | 1717 | 63 | 사직 이대성, 김연 등 25인 연명으로 숙종을 대신한 태자 경종의 聽政을 잘 살펴 시행토록 상소문을 올렸다. |
숙43.12.22 | 1717 | 63 | 경기감사, |
숙44.3.18 | 1718 | 64 | 경기감사 김연이 윤선거의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령을 봉행할 수 없다고 하자 빨리 철거하라 하다. |
숙44.5.11 | 1718 | 64 | 경기감사 김연이 경기의 굶주리고 곤폐한 상황을 말하고 구제요청을 하자, 강화, 북한산성 兩陣의 창고에 있는 곡식을 각각 2천석과 남한산성에 있는 미곡과 콩 7천석을 지급토록하자 세자가 허락하였다. 양평에 김연 선정비가 있다. |
숙44.6.3 | 1718 | 64 | 경기감사 김연이 여러 방어사와 대흥의 군영대장이 역마 타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강화, 개성 등 두 유수가 왕래할 때도 규정외의 말을 타는 것을 금하도록 청하자 세자가 따랐다. |
숙44.8.5 | 1718 | 64 | 경기감사 김연이 감영을 옮기는 불편을 말하니 세자가 따랐다. |
숙45.2.8 | 1719 | 65 | 예조참판, 김연이 상서하여 북한산성을 지키기 어려우니 성 쌓는 일을 혁파할 것을 상서하니 세자가 조정에 품신하겠다고 하다. |
숙45.7.14 | 1719 | 65 | 도승지 |
숙45.10.2 | 1719 | 65 | 연령군의 초상이 있자 도제조 이이명이 김연으로 하여금 호상하기를 청하였다. 김연의 종손녀가 연령군의 부인 때문이다. |
숙45.10.7 | 1719 | 65 | 임금이 연령군의 발인에 임어하고자 하자, 도승지 김연이 따듯한 날 임어를 권하자 인금이 더 춥기 전에 가보겠다고 하다. 年齡君諡狀을 지어 올리다. |
숙45.11.23 | 1719 | 65 | 임금의 환후가 심해지자 도승지 김연에게 일체의 정사를 동궁에 상주하는 글을 올리도록 하였다. |
숙46.6.8 | 1720 | 66 | 숙종승하 도승지 김연이 산릉도감을 맡다. |
경종즉6.22 | 1720 | 66 | 예조참판 |
경종즉.7.5 | 1720 | 66 | 지평 홍현보가 예조참판 김연이 國喪班次에서 소변을 보고, 술을 마셨다고 상소하여 파직을 당하자, 양화진으로 내려가다. |
경종즉.8.20 | 1720 | 66 | 우의정 이건명이 진달하기를, “김연이 哭班(국상에서 곡을 함)에서 술을 마셨다고 탄핵받았는데, 김연이 원래 술을 못하는 것은 온 조정이 아는 바입니다. 마침 그 때 신기가 불평하여 한 잔 술로써 기운을 소통시켰다 하니 너그러이 용서함이 마땅합니다.”하니 임금이 따랐다. 이어 영의정 김창집이 김연의 음주는 옳지 못한 일인데 허물을 무식한 데로 돌리니 한심한 일이다 하였다. |
경종즉.9.29 | 1720 | 66 | 도승지 |
경1.9.24 | 1721 | 67 | 강원감사. 사헌부에서 강원감사 김연이 빈청에서 논핵할 때 참가하지 않고 몰래 양천으로 갔다하여 체직할 것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경1.10.17 | 1721 | 67 | 이광좌, 이태좌, 이조, 강원감사 김연 등이 청대한 가운데, 세제의 대리청정을 거둬줄 것을 대신들이 청하였다. |
경1.10.19 | 1721 | 67 | 사헌부에서 조태구가 대리청정을 환수하러 몰래 임금을 뵈러 들어갈 때 따라 들어간 김연, 이조 등을 삭탈을 청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
경1.12.6 | 1721 | 67 | 호조판서, |
경1.12.7 | 1721 | 67 | 김동필을 수찬, 윤순을 교리로 삼다. |
경1.12.22 | 1721 | 67 | 숙직궁관 김동필이 상소하여 청휘문을 폐쇠하고 임금을 알현하러 가던 왕세제를 가로막고 해치려한 박상검을 처벌할 것을 청하자, 영의정 조태구, 호조판서 김연 등 대신들이 몰려들어 박상검을 엄히 다룰 것을 청하다. |
경1.12.23 | 1721 | 67 | 영의정 조태구가 우의정 최석항, 호조판서 김연, 이조참판 김일경, 훈련대장 윤취상, …사간 이진유, 지평 박필몽, 교리 윤순, 정언 조태억 등등 노‧소론의 인물들이 모두 입대한가운데 박상검을 엄히국문하여 동궁의 마음을 풀어주기를 청하다. |
경2.1.10 | 1722 | 68 | 호조판서 김연 등의 건의로 장씨의 사당건립하고 칭호를 청하다. |
경2.2.5 | 1723 | 69 | 호조판서 김연이 호조에 납부해야 할 각도의 물건을 서로 바꾸어 대신 방납하고 이익을 취하는 일이 있으니 이를 금하소서하니 임금이 따랐다. |
경2.2.9 | 1723 | 69 | 김동필-대사간, 이덕수-집의 |
경2.3.29 | 1723 | 69 | 세제가 조신들의 숙배를 받으려 하자 최석항에 이어 김연 등도 동궁을 위안해야 한다고 누누이 힘써 전달했다. |
경2.8.13 | 1723 | 69 | 우의정 최석항, 호조판서 김연,…이조참판 김일경 등 대신들이 입시한 가운데 최석항이 삼사를 동원해 이이명, 김창집 등 凶逆들의 逆節들을 定形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하다. |
경2.9.14 | 1723 | 69 | 정언 조익명이 이르기를 국청에서 물고된 죄인 李晩成(노론인물로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연잉군의 세제책봉을 주청해 실현시켰다가 소론이 일으킨 신임옥사에 연루되어 국문 중 옥사)의 시신 앞에서 호조판서 김연이 사정에 이끌려 조곡을 하였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다. |
경2.9.16 | 1723 | 69 | 집의 이덕수가 이르기를, “호조판서 김연이 이만성을 조곡했다하여 파직을 계청한 일이 있는데, 예부터 이만성과 정의가 있었다면 한 번의 문상이 어찌 해롭겠습니까? …소인의 허물은 각박하고 잔인한데서 나온 것이니, 이제 김연이 당한 것을…미루어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사람의 죄를 가혹하게 들추어내는 것은 본시 쇠퇴한 습속에서 나온 것이지,…신은 김연에게 사사로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깁니다.”라고 변호하자 임금이 “말이 진실하니 유의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
경2.9.19 | 1723 | 69 | 간원에서 아뢰기를…호조판서 김연이 물고죄인 이만성을 조곡한 일을 논죄할 적에 두둔한 장령 이경열, 이광도, 정언 조익명, 조진휘를 모두 체차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를지 않았다. |
경2.10.10 | 1723 | 69 | 김동필-승지 |
경2.11.18 | 1723 | 69 | 김동필-대사간. |
경2.11.26 | 1723 | 69 | 김동필이 김일경이 이진유, 박필몽과 한 패가 돼서 국정을 농단하는 일을 상소하자 김일경이 부신을 바치고 교외로 나가다. |
경2.11.28 | 1723 | 69 | 김동필-승지. |
경2,11.30 | 1723 | 69 | 김연을 원접사로 삼다. |
경2.12.1 | 1723 | 69 | 간원에서 김동필이 김일경을 공박한일로 파직을 청하다. |
경2.12.2 | 1723 | 69 | 김연을 형조판서로 이진유를 승지로 삼다. |
경2.12.17 | 1723 | 69 | 원접사 김연이 칙사를 영접하고 돌아와서 들은 것을 호조판서 이태좌에게 말하였다. |
경3.2.23 | 1724 | 70 | 이조참의 이진유가 김동필, 유수원을 외읍으로 척보할 것을 청하자 김동필을 광주목사로, 유수원을 예안현감으로 내보내다. |
경3.8.11 | 1724 | 70 | 김동필-호조참의 |
경3.11.21 | 1724 | 70 | 김동필-승지 |
경3.7.19 | 1724 | 70 | 형조판서에 김연, 정언에 이집급, 부수찬에 조익명으로 삼다. |
경3.12.6 | 1724 | 70 | 호조판서에 김연, 형조판서에 김일경, 대사헌에 이진유를 삼다. |
경3.12.17 | 1724 | 70 | 소론의 강경인물 이정영(이유간의 손자, 이경직의 아들)의 처를 추벌하다. 처는 노론인물 조태채의 딸로 남편이 세제청정사건에 연루돼 죽자, 그 원망을 소론 조태구에 돌려 허수아비 상을 수례에 싣고 죽이는 형상을 하였고, 또 김동필의 집에 흉물을 묻어 저주하였으며, 그 외삼촌 임원군의 집에까지 미치게 한 죄였다. |
경4.1.11 | 1725 | 71 | 호조판서 김연이 경비조달을 위해 주조할 것을 묻자 최석항, 이광좌가 찬동하여 임금이 따랐다. 대사성 이진유가 윤증의 서원이 중첩하여 설립되어있으니 철훼토록하자 임금이 따랐다. 사신이 논하기를 이진유, 박필몽이 참옥하게 옥사를 주도하고 있으나, 오직 이진수 만이 이를 걱정하고 공평한 논의를 펴므로 식자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
경4.2.4 | 1725 | 71 | 사간원에서 재차 임명된 호조판서 김연이 요구하고 수용하는 것이 너무 많아 기량에 맞지 않으니 체자하라 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
경4.2.9 | 1725 | 71 | 호조판서 김연이 대간의 논박을 받고 출사하지 않자. 조태억으로 대신케 하다. |
경4. 3.7 | 1725 | 71 | 예조판서 |
경4. 5.2 | 1725 | 71 | 우참찬 |
경종4.8.25 | 1725 | 71 | 경종승하, 영조즉위 |
영조1. 봄 | 1725 | 72 | 중병사직 |
영조1.3.27 | 1726 | 72 | 경종2년2월27일 목호룡 고변사건에 請對하거나 관여해 소론이 노론을 타도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에 참여했다하여 이정신 외에 김연, 김동필 등40여명을 관작을 추탈해 문외출송하다. |
영조1.,4.28 | 1726 | 72 | 별세하자 공산 쌍계동에 장례 |
영조8.3.15 | 1732 | -7 | 조카 김동필이 적성 군방제에 천장 |
영조11.4. | 1735 | -10 | 묘표건립. 묘표 윤순, 묘지 이덕수, 행장 김동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