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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나엘
<요1:43~51> 읽고,
ㅎ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지난주에는 세례요한의 두 제자였던 안드레와 요한이 세례요한의 전도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찾아와서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알게 된 안드레가 자기 형제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야(그리스도)를 만났다는 말로 전도함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는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오늘은 주님이 길을 가시다가 직접 빌립을 불러 제자 삼으시더니, 그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에게 전도해서 제자 삼는 내용이다. 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경우를 3가지로 말할 수 있다. 자신들이 직접 주님을 찾아가는 경우가 있고, 주님이 직접 부르시는 방법, 그리고 지인들의 전도를 통해 주님을 믿게 되는 경우로서 3가지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육체로 계신 주님이 없으니까 주님의 직접 부르시는 것은 없겠지만, 사람의 마음에 소원을 갖게 해서 은연중에 ‘예수 믿고 싶다’는 마음을 주셔서 누구의 전도를 받던, 아니면 스스로 교회로 찾아가던.. 결국은 예수를 믿게 된다. 이것이 ㅎ님의 전능성이다. 이를 통해 창세전에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역사 속에서 찾아내짐을 당해 다 구원된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처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하나도 남김없이 찾으러 오셨다는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다.
살다 보면 주변의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다니게 되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양이지만, 택하심을 입은 자 주변에 그런 자들이 없다면 ㅎ님은 비상수단을 써서라도 당신의 백성을 불러내신다. 가령 그 사람의 사건과 환경을 잡아 돌려서 사면초가의 형국을 조성해서라도 ㅎ님을 찾게 하는 경우도 있다. 건강을 빼앗거나 물질의 어려움을 겪게 하거나 혹은 자녀의 문제들로 인해 자신의 한계를 봉착하게 될 때에 마음이 깨어져서 하늘의 ㅎ님께 시선을 돌리게 되어 교회를 찾게 된다.
아무튼 어떤 루트를 통해서 주님을 영접하여 믿게 되었든지 그 이면에는 ㅎ님의 손길이 작동해서 믿게 된 것이지 인간 자신의 의지나 결단으로 믿게 된 것이 아니다. 설령 자기 의지로 믿게 된 자가 있다면 그런 자는 필연코 다시 예수를 떠나 세상으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 처음에는 예수 믿음이 좋아 보이고 뭔가 의미 있어 보였지만 결국은 자기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따라서 애당초 ㅎ님의 택함을 받은 자냐, 아니냐에 따라 갈라지게 되니, 신앙은 결코 우연이거나 사람의 의지적 결과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랜 세월 같이 신앙했던 사람들이 마지막 단계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다 떨어져 나가는 모습들을 보면 더더욱 ㅎ님의 택하심에 대한 말씀이 맞구나하는 생각으로 확증된다. ㅎ님께로서 난자는 예수 안 믿는 게 예수 믿는 것보다 더 어렵다. 아니 불가능 하다. 그러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자는 예수 믿는 게 예수 안 믿는 것보다 더더욱 어렵다. 그래서 교회 생활을 접는 게 편해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행13장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니까 어떤 이들은 듣고 기뻐하며 찬송하며 영접하고 어떤 이들은 뒤돌아서 가버리자, 바울이 말한다.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그러나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들은 떠나더라’고.. 결국 어떤 사람 안에 ㅎ님을 알아보는 DNA 칩이 있느냐 없느냐로 나뉘어진다. 그래서 처음부터 양이냐 염소냐, 알곡이냐 가라지냐로 그 씨와 종자가 다른 것이지, 도중에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염소가 양이 되거나 가라지가 알곡으로 전환 되는 게 아니다.
마치 미운 오리새끼의 동화처럼 어린 백조가 어쩌다가 오리 떼에 섞여 살면서 자신이 오리인 줄 알았지만, 점차 커가면서 왠지 모르게 저 창공을 나는 백조가 그리도 부러워 보인다. 그러더니 어느 할머니의 도움으로 드디어 창공을 나는 백조가 되어 자신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 이게 본성이고 씨이다. 존재는 태어나는 것이지 후천적으로 만들어 지는 게 아니다.
이에 대해 갈4장에서 잘 말해 준다. 우리가 본래 ㅎ님의 아들이었지만 어려서는 율법에 갇혀 종노릇하다가 때가 차니까 ㅎ님께서 아들의 영(성령)을 보내시사 ㅎ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요. 구원은 나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 영원 전 ㅎ님의 택하심에 의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ㅎ님의 아들이 아닌 자들은 한 때 ㅎ님을 믿는다는 게 세상 복을 원해서, 혹은 지옥을 면하고 천국 가고자 믿었지만, 이게 ㅎ님께로 온 믿음이 아니라 자기 필요에 따라 조성된 탐심에서 나온 거짓 믿음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시들해져서 교회를 등지고 세상으로 다시 가는 것이다. 그리고도 수년이 지나도 아무런 부담이 없이 산다면 그 사람은 애당초 택함을 받은 자가 아니기에 자기 자리로 간 것이다. 그렇기에 교회 다니다가 안 나오는 자들을 보고 미련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 자기 속에 있는 영의 본색이 드러난 것이기에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이 빌립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온다. 주께서 갈릴리로 가시다가 빌립을 만나서 아주 쿨하게 부르신다. ‘나를 좇으라’. 그랬더니 그냥 따라 온다. 마치 큰 자석을 쇠붙이에 대니까 바싹 달라붙는 것처럼... 택함을 입은 자는 주님이 말씀에 저항할 힘이 없다. 그냥 순종이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거했더니 (이 부분은 생략됨), 예수가 메시야인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 기쁜 소식을 친구 나다나엘에게 전하게 된다.
45절를 보면,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에게 구약의 모세와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를 만났는데 그가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한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대뜸 반문하면서 나사렛에서는 그같은 선한 분이 나올 수 없다고 답한다. 아마도 나다나엘은 구약 성경에 정통한 자였을 것 같다. 그래서 메시야는 미가서 5:2절에 예언된 말씀처럼 유대 땅 베들레헴, 다윗의 고향에서 나와야 된다고 믿어 왔는데, 나사렛은 사마리아 지역이고 게다가 빈민들이 살던 천박한 지역이니 거기서 무슨 메시야가 나오냐는 반문의 말이다.
그러자 빌립은 자신이 이러쿵저러쿵 답해 준게 아니라 그저 와 보라고 말한다. 그렇다. 이게 어디 한 두 마디로 이해시킬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차근차근 진리에 대한 설명이 요구되기 때문에 우리도 전도 할 때에 같이 가서 들어 보자라고 해야 맞다. 어쨓든 나다나엘도 택한 백성인지라 빌립의 말을 듣고 궁금해서 주님 앞으로 나아오게 된다.
그러자 주님이 그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 47절처럼 놀랍다.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하심). 그러자 나다나엘이 - 깜놀하며(아니 나를 아십니까?), 하니까. 한 술 더 떠서 하시는 말씀이 ‘빌립이 널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심) , 그러자 나다나엘이 하는 말(선생님은 ㅎ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왕이시군요)함. 이런 대화 속에 놀라운 복음에 대한 영적이 비밀들이 함축되어 있다.
이 나다나엘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메시지는 너무도 중요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간사하지 않은 참 이스라엘이라는 말의 의미,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말씀의 의미, 더 큰 일이라는 말씀의 의미, 인자 위에 ㅎ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말씀의 의미 등, 숨겨진 비밀한 뜻이 다수 감추어져 있다. 이 시간 이런 내용들을 같이 알아보는 시간을 갖자.
먼저 참 이스라엘이라는 말과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의 의미를 알아보자. 간사하다는 말과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서로 상충되는 개념으로서 야곱에게서 유래된 말이다. 야곱이라는 말이 사기꾼, 속이는 자라는 말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아첨하거나 속이는 게 간사한 것인데 이게 바로 야곱이었다. 그래서 ㅎ님의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였던 자이다. 그래서 분노한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라반이 사는 하란으로 도망을 쳤다. 물론 거기서도 라반과 버금가는 야바위꾼 행세를 통해 부를 축적했던 야곱이 아닌가?
이처럼 간사한 자의 대표가 야곱이다. 그런데 때가 차자 ㅎ님이 야곱의 마음에 소원을 주셔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된다. 그때도 떳떳하게 외삼촌 라반에게 자초지종을 말해서 이제 고향으로 가겠다는 말을 하면 누가 말리겠는가? 그러나 뭐가 그리도 켕기는지 삼촌 라반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야반도주를 한 것이다. 이처럼 타고난 속성 자체가 사기꾼 기질이 다분한 야곱이었다.
야곱의 착각이 뭐냐 하면, ㅎ님의 축복을 받아야 산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고 여겨왔던 것이다. 그래서 장자의 축복권을 받아내는 일부터, 부를 쌓는 일까지 모두 다 자기 꾀를 내어 만들어 왔으니 얼마나 고단한 인생을 살아온 것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남의 뒤통수를 치는 자가 야곱이다. 그러면서도 ㅎ님의 축복을 스스로 받아내겠다는 이중적 태도를 견지하며 살았으니 ㅎ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었다.
야곱은 탐심으로 조성된 모든 인간들의 영적 실체를 고발하는 모형이다.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는 것을 모르고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ㅎ님의 축복을 받아내려고 시도하는 모든 꾀를 성경은 ‘간사하다’고 고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사하다의 반대는 무엇일까? 자신이 죄로 얼룩진 죄악 덩어리인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상태를 ‘정직하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통회하는 상한 심령으로 자기부인이 일어나면 필연코 찾게 되는 게 ㅎ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이다. ㅎ님의 은혜 없으면 살수 없다고 고백하는 이런 자를 일컬어 ‘정직한 자’ 혹은 ‘이스라엘’이라고 한다.
<시32:!~11> 읽고 (다윗의 마스길..교훈/다윗을 범죄와 회개를 통해서 주시는 교훈)
1절~이런 자가 누구일까? -바울은 이 구절을 롬4장에 인용한다. (6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경건치 않는 자를 의롭다 여기시고 불법을 사하심을 받는 자가 있다 네요?
2절~ 1절과 같은 내용임. 죄인이 자신이 그 죄를 속하기 위해 어떤 일도 아니했는데 용서함 받아 정죄를 받지 않게 된 자는 복있는 자라는 말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이것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3절~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남편 우리야를 교살한 엄청난 죄를 짓고도 내심 완전범죄라고 여겨 뻔뻔하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한시도 편치 못했다. 죄의식이 밤낮 괴롭히니까 날마다 뼈가 녹는 양심의 가책 속에서 살게 되는 비참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4절~ 그래도 죄를 토설치 않고 모르쇠로 일관하니 ㅎ님이 그 마음을 편치 않게 달달 볶으시니 삶의 활력은 잃어가고 점차 병색이 짙어가는 모습을 진액이 마르고 여름 가물에 말라가는 풀처럼 되었다고 탄식한다. 죄책감으로 괴로워서 육신의 병까지 얻게 됨.
5절~ (시51편에 상세히 기록) ㅎ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다윗의 죄를 지적하니까 그때서야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게 됨(모친의 태로부터 죄인, 다시 성령을 주사 구원의 즐거움을..ㅎ님은 제사를 원하시는 게 아니고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을 찾으시는 군요),
->깊이 회개하게 되고 ㅎ님의 긍휼하심으로 용서함을 받아 일상이 회복되게 됨.
6절~경건한 자란(자신이 죄인됨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마음에 죄책감으로 괴로울 때가 바로 주께서 사인을 주시는 때임: 어서 회개 하라고)
-그리하면 심판의 홍수가 범람해도 심판이 미치지 못하는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7,8,9절~미련한 짐승 말이나 노새처럼 힘으로 단속받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임(율법으로 ‘하라 하지마라’는 다스림을 받는 자들은 짐승같은 미련한 자라는 말임) 은혜 알면 기쁨으로 하게됨
10절~악인의 슬픔(자신의 죄를 모르거나 죄를 알면서도 그냥 모르쇠로 사는 자는 죄책감으로 종일 불안과 쫓김 속에서 떨고 살게 됨). 그러나 ㅎ님의 긍휼을 의탁하는 자는 ㅎ님의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게 됨.
11절~의인들, 정직한 자들-> 죄를 자백하여 ㅎ님의 긍휼을 입고 사는 자들은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살게 된다는 찬송시이다.
=> 11절과 같이 된 자들이 간사가 없고 마음이 정직한자요, 참 이스라엘이다.
(결론부터 말) 얍복강 이전의 야곱은 간사한 자요, 얍복강 이후의 야곱은 이스라엘이다.
사기꾼 야곱을 이스라엘로 새창조 하시기 위해서 ㅎ님은 사건과 환경을 안배하신다. ~간사한 야곱을 ㅎ님은 한 방에 쓰러뜨려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기회를 조성하심. 거기가 바로 얍복강 나루터다. 뒤에는 분노한 라반이 추격해 오고 앞에서는 에서가 원한을 갚기 위해 장정 400명의 대동하고 달려오고 있다. 앞으로도 못가고 뒤로도 갈 수 없는 외통수 막다른 골목에 갇힌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사면초가의 형국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야곱을 꾀를 부린다. 양떼를 둘로 나누어 형 ‘에서’의 몫으로 앞서 보내고 식솔들도 애착의 경중에 따라 분리시켜 앞서 보낸 후에 홀로 남게 된다. 그리고 자신은 얍복강을 건너지 않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것이다. 여차하면 혼자라도 도망할 셈이었다.
그런데 밤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 그리고는 야곱과 씨름을 하신다. 그런데 야곱이 포기를 하지 않는다(야곱이 씨름에서 이겼다는 말은 자기 애착의 끈을 끝까지 고수했다는 말). 그 씨름은 단순한 육체적 겨루기가 아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셔서 위골이 되게 만드신다. 환도뼈를 치실 수 있는 분이 씨름에서 못 이긴다는 것이 말이 되질 않는다. 그러니까 그 씨름은 단순한 육체적 겨루기가 아니라 영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씨름이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ㅎ님 자리에 앉아 버렸다. 그래서 죄인들은 자기 외부의 모든 것들이 전부 자신을 위해 존재해 주기를 바란다. ㅎ님까지도 자신의 꿈과 야망을 이루는데 필요한 도구요 방법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타락한 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ㅎ님의 보호하심을 상실함으로서, 스스로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 없이 자기 힘으로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간다.
얍복 강가의 야곱은 바로 그 죄인들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죄인들은 하나님까지도 이기려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협박하기도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굴복시키겠다는 의도로 행해지는 것들이 금식기도, 철야기도, 새벽기도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게 악이지 윤리 도덕적 개념의 악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야곱들에게 은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는데, 그게 바로 환도뼈를 치시는 방법이다.
고집스러운 야곱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의 힘과 노력과 지혜로 축복을 얻어 보겠다고 애를 쓴다. 그런 야곱들에게 너희들 힘으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다른 말로 언약의 땅에 절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환도뼈를 위골 시켜 절게 만드시는 것이다.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이 되자 그 때서야 약하디 약한 자신의 실존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자신을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절대 놓지 않겠다고 매달린다.그러나 이 매달림은 은혜를 향한 매달림이다. ㅎ님의 축복의 땅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절대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야곱이 안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주신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축복의 땅에 입성할 수 있음을 안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이름인 것이다. 이런 자가 바로 나다나엘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환도뼈를 치시는 방법으로 ‘십자가’를 택하신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품어 안은 예수 그리스도의 환도뼈가 위골이 되는 현장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죄인들의 ‘옛사람’이 살해되고 새로운 이스라엘로 탄생이 되는 현장이 바로 십자가의 현장인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그 일을 이루려 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과의 대화를 통해 그 유대인들의 율법신앙에 폭격을 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역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다. 무화과나무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누구인가? 선악과 따먹고 두려워서 떨던 아담과 하와가 그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고 무화과나무 뒤로 숨은 모습이 연상된다. 무화과나무 잎은 무성하고 커서 그 나무 뒤로 숨기에 좋다. 유대인은 자신의 율법 행함과 종교적 열심으로 죄인의 실체를 숨기는 것을 무화과나무 뒤에 숨었다고 은유한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여타 유대인들처럼 율법행함이나 종교행위로 자신의 죄책감이 감추어지질 않아서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죄사함을 주시는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던 심적 상태를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고 이 말씀의 진의를 나다나엘도 알아먹고 깜짝 놀란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죄인됨을 모르는 야곱들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ㅎ님의 축복을 받아내려고 율법 행함과 종교의식에 열중한다. ㅎ님은 죄를 깨닫게 하려고 율법을 주셨지만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율법을 잘 지켜서 ㅎ님께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한 모든 종교적 행함이 바로 간사한 짓이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율법행함과 종교적 행함을 아무리 해도 내면의 죄가 여전히 자신을 고발하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선지서에 예언된 대로 메시야가 오시면 죄를 사함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메시야를 기다려 온 자이다.
스가랴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장차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여 줄 메시야를 보았다.
메시야가 오시면 무화과나무 아래로 초대한다고 했는데 나다나엘은 바로 이것을 기다려 왔다.
<슥 3:3-10>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 ~ 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그리스도의 영/부활 성령)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스가랴 선지자가 성령에 감동으로 보니 하나님 앞에 대 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는데 사단이 참소하고 있다. 더러운 옷이란 죄를 말한다. 사단은 사람의 죄를 율법에 걸어 ㅎ님께 ‘저 놈 지옥 보내세요’라고 참소한다.
그러자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머리에 정한 관을 씌우고 깨끗한 옷을 입혀 주시면서 모든 죄과를 사해 주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은 예표라고 하시면서 “새 순”이 나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초대하겠다고 하신다. “새 순” 이란? 메시야를 말하는 것이다.
포도나무란 IX의 새언약의 피를 상징하는 말이다. 주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자주 포도주를 마시는 퍼포먼스를 보이셨다. 이는 죄를 깨달은 자들에게 죄사함을 이루는 새언약의 십자가 복음으로 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실 것에 대한 시청각 교육이셨다. 즉 포도나무는 진리이시며 은혜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무화과나무란 율법을 상징한다. 아담이 범죄한 후 그 나무 뒤로 숨었듯이 자신이 태생적 죄인임을 깨달았기에, ㅎ님의 아들 메시야가 오시면 죄사함을 받게 되리라는 그 날을 기다리며 사는 자의 대표가 바로 나다나엘이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서로 짝을 이룬다. 이는 마치 은혜와 율법이 짝을 이루는 것과 같다. 율법으로 죄를 모르면 은혜 역시 모른다. 죄를 모르는 자는 은혜의 가치와 의미를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실 때에 성막도 함께 짝으로 주신 것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이다. ㅎ님의 관심은 은혜를 알게 하시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해서 죄를 도구로 사용하실 뿐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죄가 은혜로 나아가는 도구요 통로이지 그 자체에 의미 있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말은 나다니엘이 율법의 의로는 자신의 죄가 여상함을 인지하고 그 죄를 씻겨주실 이스라엘의 왕인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참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야곱들을 나다나엘과 같은 참 이스라엘로 새창조 하시려고 오셨다. 여기에 이스라엘에 의미가 있다. 참 이스라엘이란? 자신은 흙의 먼지와 같은 자라서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이 참 소망이요 기쁨이요 만족함으로 여기며 사는 자를 말한다.
이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것을 더 큰 일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을 뒷받침 하는 내용이 마지막 51절이다. 하늘이 열리고 ㅎ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야곱의 체험이다. 야곱이 형 ‘에서’의 손을 피해 하란으로 가다가 몸이 곤하여 벧엘에서 돌베게를 하고 잠자다가 본 환상이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때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고 어렴풋이 믿게 된다. 그러나 그때의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있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20년 후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한 후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자신은 먼지와 같은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진정한 축복은 이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ㅎ님과 화목 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도 나다나엘이 오직 인자 외에는 하나님에게로 갈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참 이스라엘은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에게로 갈 자가 없음을 알고 우리의 스스로의 힘과 노력과 행위로서 하나님에게 나아가려는 의지를 버리고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오직 인자로 오신 그리스도만이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길이 되신다. 즉 멸망의 자리일 수밖에 없는 땅에서 생명인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큰일이라고 말씀한다. 이처럼 우리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를 볼 자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참 이스라엘뿐이다.
우리의 속까지 아시고 드러내시는 말씀 앞에서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하게 될 때 그리스도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놀라운 큰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참 이스라엘이다. 우리의 노력과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 그들이 바로 간사함이 없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참된 성도들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나다나엘은 그 어떤 제자보다도 영적으로 장성한 모습을 가진 자이다. 이 나다나엘은 누구일까요? 다시 요1장 43절 가보자(이튿날~). 전주에 다룬 내용이 창1장의 몇째 날에 해당된다고 했나?(3째 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그 날이다. 아니 주님의 부활로 ㅎ님의 구속사의 시작이 된 날이다. 우리 성도는 7날 중에서 몇째 날에 구원을 얻은 것인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주님 홀로 죽고 홀로 부활한 게 아니라, 성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사건이다. 그렇기에 성도의 죽음과 부활은 이미 IX의 십자가 사건 때에 성취되었다. 그러나 개개인의 실제적 구원을 인식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 각자 다르다. 주님의 부르심이 있을 때에 자신의 거듭남을 비로소 인지하게 된다. 은혜가 임하면 ‘아~ 나의 구원은 이미 2천년 전 주님의 부활 때에 이루어진 거네’를 알게 된다. 그것이 다음 주에 공부할 6째 날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4째날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창 1장의 4째날은 궁창 위에 두 광명인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을 창조하신 날이다. 궁창 위에 둔 해는 십자가에 달리신 IX를 상징한다. 진리이시며 새언약의 실제이신 그리스도가 참 빛(해)이다. 달은 해를 반사하여 세상의 밤(어둠)을 비추는 교회를 상징한다. 별은 그 해인 참 빛이신 XI와 달인 교회의 조화로 탄생되는 ㅎ님의 아들들이다.
지금 요한복음 본문에서 해는 그리스도 되시는 예수님을 비유하지만 달(교회)은 어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44절을 보면, 빌립과 안드레 베드로가 언급되면 모두 벳새다 사람이라고 한다. 벳새다란 자비의 집이라는 말이다. 성전을 암시하고 있다. 즉 ㅎ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상징한다. 그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낳아진 자가 나다나엘이라는 말이다. 나다나엘은 ㅎ님의 선물이라는 의미값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나다나엘은 특정한 어떤 사람을 지칭한다기 보다 구원받은 ㅎ님의 아들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의 12제자가 누구인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소)와 다데오, 가나안인 시몬과 가롯유다..이다. 혹자는 나다나엘이 바돌로매라고도 하는데 근거가 없다. 나다나엘은 요21.2절에 다시 등장한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실족한 제자들이 몇 명이 모여 고기 잡는 곳에 등장한다. 신약 딱 2군데(요한복음만..) 등장한다.
(다시말) 나다나엘은 간사함이 해결된 자로서 참 이스라엘이며 오직 자신의 죄사함을 위해서는 율법행위도 종교 행위도 아닌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으로만 된다는 것을 아는 자로서 이것이 바로 참 이스라엘이고 간사함이 해결된 자이다. 이렇게 자기부인이 일어나서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자를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자라고 한다. 그러므로 나다나엘은 ㅎ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모든 성도에 대한 대표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12제자 속에 있으면서도 특정하지 않고 있는 것은 나다나엘이 바로 12제자이며 성도이며 ㅎ님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ㅎ님의 은혜로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오직 IX만 소망하는 자, 우리가 바로 나다나엘이다.
ㅎ님의 선물이며, 교회가 낳은 ㅎ님의 아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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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