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이 되려다 장미가 된
로제라니, 프랑스의 어느 고풍스러운 정원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와인이라고 했으니 암흑 속에서 새벽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천일야화가 마침내 빛으로 나온 것이 틀림없다. 하물며 로제 와인이라니, 어쩌다 이 둘이 만나 이토록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는 걸까.
나는 지금 내 생일 (숫자로서의 나이는 지웠다. 나이를 잊고 싶은 나이여서) 식탁에 축하주로 올라와 있는 로제 와인 병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다. 물론 내가 ‘로제 와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술을 오늘 처음 본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것이 오롯이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처음이라 그 특별한 느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있는 거다.
로제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아 와인 제조업자도 나처럼 맛보다는 빛깔에 더 사로잡혔던 모양이다. 저녁노을이 서서히 펼쳐지는 순간과도 같은 환상적인 장밋빛을 보면 누구라도 그리했을 것이다. 부드럽고 우아하며 순해서 문득 처녀성의 빛깔이 이럴지 모른다는 상상까지 불러온다. 그러고 보니 굴곡을 만들며 미끈하게 빠진 병 모양이 오늘따라 유난히 여체를 닮았다. 출산지를 살피려고 목선을 잡고 조심히 집어 올리자 장밋빛은 살짝 서리 낀 살굿빛으로 톤을 바꾼다. 로맨틱의 절정이다. 이제 이 아름다운 빛깔을 혀로 음미할 시간, 병 속에 갇혔던 장미 한 송이가 마침내 크리스털 잔으로 옮겨져 만개한다. 2020년 헌터밸리 오드리 가문에서 출시된 지 3년 만의 일이다.
내 혀는 이미 달큰한 장미향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을 감고 코와 입을 열어 분홍 액체를 조심히 혀에 댄다. 부푼 향이 입안으로 퍼진다. 순간,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혀가 움찔한다. 낯선 맛이다. 이것은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있던 그 로제 와인 맛이 아니다. 밍밍하고 드라이한 것이, 차라리 화이트와인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분명 내가 처음 만났던 로제 와인은 달큰했다. 단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로제 와인과 친해질 수 없던 이유였다. 단맛을 기대하고 있던 목과 혀가 뭔가의 다름에 극도로 예민해진다.
나는 참지 못하고 폰을 꺼내 ‘로제 와인’을 클릭한다. ‘되다 만 와인’이라는 닉네임이 먼저 따라 올라온다. 그랬다. 이 술은 포도가 숙성하는 과정에서 온도 조절이 잘못되어 얻어진 실패의 결과물이었다. 당시 와인 제조업자에겐 불명예였지만, 결국 새로운 종으로 인정받아 역전 스토리를 갖게 되었다는 흥미로운 사연이다. 그중 진판델이라는 포도로 만든 캘리포니아 산 로제 와인이 단맛이 강하면서 인기가 많다는 정보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그때 내가 마신 로제 와인은 바로 이 종류였던 것 같다. 아이러니로 탄생된 비화치곤 제법 달콤하다.
알맞은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면서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야만 하는 ‘숙성’이라는 과정은 얼마나 모진 시간인가. 와인이 제조되는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매 순간 긴장을 놓지 않고 포도의 변이를 지켜보는 와인 제조업자의 기다림은 가히 종교에 가깝다. 온도의 경계와 빛의 경계를 이해하고, 새로운 향과 색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하나의 우주가 탄생되는 순간과 다를 바 없다. 포도 씨는 암흑 속에서 오랜 세월을 감내하다가 하늘과 땅 사이에서 햇볕과 물을 만나면서 포도라는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다시 암흑으로 들어간 후에야 최고의 향을 만들어 내면서 기나긴 여정에 정점을 찍는다. 나는 제사 의식과도 같은 이런 과정들이 좋다. 내가 누군가의 딸로, 누군가의 엄마로 살아온 삶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아서이다.
그 정점을 향해 지루하고 고된 시간을 보내던 중에 숙성이 멈추어 버린 것을 알았을 때 와인 제조자의 상심은 얼마나 컸을까. 포도의 한 생을 망치고 망연자실했을 제조자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영혼이 멈추어버린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럴 때 ‘단 한 번뿐인 생’이란 말은 ‘숭고함’보다 ‘잔인함’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통에서 새로운 웅성거림이 들려오고, 새로운 색과 향이 부풀어 오르고, 달라진 의미의 꽃이 피고 있었다면, 이를 발견한 기분은 또 어땠을까. 망친 줄 알았던 자식이 장미로 핀 것을 알아챈 순간, 세상은 기쁨을 넘어선 희열로 팽창되었을 것이다. 그런 상상 덕분에 나 또한 오늘, 아이들이 나를 위해 만들어 준 생일 식탁 앞에서 한껏 환해지고 있다.
오늘 식탁에는 연어 회와 삶은 새우와 갈비찜이 주 메뉴로 올라와 있다. 회와 새우는 바다 음식을 좋아하는 나를 위한 것이고, 갈비찜은 고기를 좋아하는 아들과 딸을 위해서이다. 우리 집 식탁은 늘 갈등의 소산물로 세팅된다. 육 고기와 바다 고기, 배추김치와 무김치, 돼지고기 김치찌개와 멸치 김치찌개 등이 양날의 검처럼 날카로운 대립 구도를 이룬다. 당연히 곁들이는 술도 다르다. 딸은 산도가 높은 화이트와인을, 나는 바디감이 묵직한 레드와인을 선호한다.
와인은 한번 따면 적어도 일주일 이내에 소비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 한 식탁에서 각기 다른 두 병의 와인을 따는 것은 이래저래 낭비가 심하다. 그런데 오늘 올라와 있는 이 로제 와인은 분열된 양쪽의 선호를 신기하게 하나로 끌어안는다. 최상은 아니더라도 두루두루 무난하게 어울린다는 말이다. 무난하다는 말은 기본은 갖추었다는 의미가 아닌가. ‘되다 만’이 ‘다 되는’ 지점이 되고 있다.
빛깔은 레드와인 쪽을 따랐지만, 성질은 화이트와인 쪽에 가깝고, 향은 두 와인의 중간쯤 되는 로제 와인이 새삼 기특하다. 최상의 것을 이루고 싶었으나 최선을 다해 차선으로 살아남은 삶이 애틋하고 아름답다. ‘되다 만 인생’이라 여겨지는 내 삶이 그러하다는 거다. 언감생심 장미라고 말하고 싶은 거다.
유금란 / 수필가이자 시인. 산문집 ‘시드니에 바람을 걸다’, 공저 ‘바다 건너 당신’. 재외동포문학상, 동주해외신인상. 문학과 시드니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