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딸바보라는 말이 있다. 딸 앞에서 바보가 될 정도로 딸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엄마나 아빠를 이르는 말이다. 요새는 흔한 말이지만 내가 어렸을때는 없던 말이다. 시대에 맞게 신조어로 만들어진 말이라는 것이다. 예전 사람들이라고 자식을 예뻐하지 않겠느냐만은 우리나라 속담에 자식자랑하는 사람을 팔불출이라고 이르고 속으로 너무너무 사랑할 지언정 겉으로는 표현을 하지 않는 것이 미덕처럼 자리 잡았었다. 요즘 부모들은 이해 할 수는 없는 행태지만 과거엔 그랬었다.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딸을 그리 사랑하는 부모의 모습을 찾긴 어렵다. 아들 선호사상이 강했던 우리나라다. 아들을 낳기위해 줄줄이 딸을 낳은 딸부자집 이야기는 너무 흔할 정도다. 딸은 자식이긴 했지만 귀이 여겨지는 그런 자식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부모가 딸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아들에 비해 홀대받았다는 말이다. 오죽하면 아들에 이름은 고심해서 짓는 반면 딸의 이름은 좀 막짓는 경향까지 있었다. “거부”라는 이름의 언니가 있었다. 처음 알게 되었을때는 잘 살라는 이유로 지은 이름인 줄 알았다. 속 뜻은 더 이상의 딸은 거부한다는 의미였단다. 뜻을 알려주며 언니는 씁쓸한 웃음을 웃었었다. 이름에 “終” 이라는 한자가 쓰인 대부분은 딸을 그만낳자 의미가 많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가 팽배했던 그 예날에 내 아버지는 특이하게도 유난히 딸사랑을 겉으로 드러내시는 분이셨다. 그 당시 난 그저 그것이 당연한 듯 받아들였는데 나중에 크고 나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특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고등학교때 어느 토요일 오후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무작정 청량리로 나오라는 말씀만 하시고 전화를 끊으니 갈 밖에.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던 시기도 아니니 다시 물어 볼 수도 없었다. 그 당시 우리집에서 청량리로 나가는 버스는 한 노선밖에 없었기에 청량리 정류장에서 아버지를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나를 아버지는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셨다. 그 때 아버지의 손에는 개봉한지 얼마 안되는 007영화의 영화표가 들려있었다. 나는 아직도 아빠랑 같이 본 티모시 달튼이 제임스 본드로 나오는 007시리즈의 그 영화를 잊지 못한다.
내가 처음 본 발레 공연도 아빠랑 같이였다. 지금은 유니버셜아트센터로 이름을 바꾼 그 당시 리틀엔젤스 회관의 로코코 양식의 화려한 내부도 인상적이었고 빨간색의 벨벳의자도 아직 내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가사도 없는 발레공연이었지만 유니버셜 발레단의 호도까기 인형은 충분히 아니, 아주 많이 재미있었다.
내 아버지는 목수셨다. 현장에서 일하는 일명 노가다라고 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다. 예술에는 문외한에 가까운 분이기도 하다. 그저 고등학생의 딸이 좋아할 거 같아 발레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그 표를 지인께 얻어 온 것이었다. 내 아버지는 그런 분이다.
활자중독에 가까운 딸을 위해 출퇴근 하시며 지하철 신문을 신문사별로 걷어서 가져다 주시는 분이셨다. 그런데 욕심많은 나는 그 정성도 모르고 비오는 날은 출근하시지 않아 걷어오지 못한 신문을 아쉬워 하는 말은 면전에서 투덜거리는 철없는 딸이었다. 그 특별한 배려를 당연한 듯 그렇게 받아들였었다. 그 것이 얼마나 흔하지 않은 일인지를 더 나이가 들고 내가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어서야 알았다.
남편과 많이 다투었던 것 중 하나는 내 아버지 같은 모습이 그에게서는 발견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보고 배운다는 것이 있다. 남편은 그런 아버지를 본적이 없으니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가 아버지로서 딸들에게 뭘 해줬으면 하는 것을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유별난 내 아버지의 딸 사랑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자식이 나 하나뿐인 것은 아니다. 남들이 귀하다고 하는 아들도 있다.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은 사실 좀 아빠한테는 찬밥 취급을 받는 신세이긴 했다. 그게 그 녀석에겐 마음에 남은 앙금이 있었는지 어느 날 술에 취해 나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했다. 그 날은 동생이 결혼 11년만에 시험관을 통해 어렵게 아들을 얻은 지 얼마되지 않은 날이었다.
“누나, 누나 이제 누나의 시대는 갔어.”
“뭔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누나가 아버지가 연우를 바라보는 눈빛을 못봐서 그래. 아버지 눈빛을 보니 이제 누나의 시대는 갔어.”
나는 그저 헛웃음을 웃었다.
“40년 넘게 내 시대 했으니까 이제 안해도 돼.”
나는 동생에게 가진 자의 만용에 가까운 소리를 해줬다.
얼마 후 친정에 가게 된 날 우스개소리 전하듯 그 날의 통화를 아버지께 전했다. 아버지도 “에이~ ” 하면서 웃어 넘기셨다. 하지만 그 날 아버지는 내 옆에서 한발짝도 떨어지지 않으셨다. 낮잠이 든 내 옆에 앉아 내 손을 만지작 거리셨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난 아버지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이니까.
세상에는 많은 아버지가 계신다. 돈이 많은 아버지도, 배운게 많은 지식인 아버지도, 더 자상한 아버지도, 친구 같은 아버지도, 인생의 멘토 같은 아버지도. 하지만 난 내 아버지가 제일 좋다.
‘아빠 사랑합니다.’ 이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지고 있다. ‘아빠 그립습니다.’ 이 말을 하게 될 날이 올까봐 겁이 난다. 하지만 가는 시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시간이 있으 때 많이, 자주 사람한다는 말을 해드리고 싶다.
“아빠. 난 다시 태어나도 아빠의 딸로 태어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