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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원본(原理原本) - 제1권
[18] 모세에 대한 하나님 역사(役事)의 노정이 예수의 노정 전모(全貌)되는 이유
위에서도 간단히 표시하였지만 하나님이 본래 지은 것이었기에 근본(根本) 책임존재(責任存在)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람이 타락(墮落)한 후에 사람 지으심을 한탄(恨嘆)하시었다<창6/6>. 하심은 여기에 기인(基因)이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성경에는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는 말씀도 있는 것을 볼 때<사사2/18> 하나님도 후회와 한탄하는 원인은 자기의 몸이 돼야 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 잃어버린 것은 자기 몸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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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사람들이 제1차 심판으로 인하여 전멸(全滅) 당한 후 하나님은 다시금 한탄하시어서 다시는 審判하지 않을 것을 宣布하심과 동시에 심판받게 된 최종 결과는 자기가 지었던 인간이었는데 타락되었음으로 심판이 생겼으나 타락하게 한 사탄도 본래 하나님 자신이 지으신 존재로부터 시작된 원인이나 전부의 책임은 하나님 자신이니 사람을 다시금 찾아 근본(根本)을 다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두고 심판(審判)한 것이지만 다시금 찾으려 할 때 하나님 자신이 직접적 목적의 길을 닦기 위하여 노아 이후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세를 통하여서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다.
즉 사람의 타락의 제일(第一) 간접적(間接的) 원인은 하나님이고, 그 다음이 아담이고 그 다음이 해와라는 본래 타락시킨 직접적 원인과는 반대로 하나님은 보게 되었다. 그래서 찾은 역사(役事)의 제일책임자(第一責任者)는 하나님이 본(本)이 되며 중심(中心)이 되어 아담 해와가 찾을 수 있는 길을 닦고자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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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만 아담 해와가 나아갈 도(道)의 표본(標本)으로 표시(表示)를 정(定)하는 동시에 사탄에 대한 승리노정(勝利路程)이 되어야 하니 이 본(本)대로 하여서 아담 해와가 승리할 수 있다는 길을 정(定)하는 것과 같은 기초(基礎)를 세워 놓으려 하는 것이 즉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役事)하시는 사실(事実)이다.
그러므로 아담 대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가르쳐 준 승리의 근본된 노정(路程)처럼 사탄에 대하여 제1차 승리의 노정을 표본으로 삼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의무(義務)가 있음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이 먼저 하신 일을 표본으로 삼고 하신다는 말씀을 요한복음 5장 19절 ~ 20절에 그 내용상으로 사실을 발표하였었다. 즉 아들이 아버지가 행하신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느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아들도 또 그와 같이 실행하시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그 하시는 것을 계시(啓示)하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시고 너희로 기이하게 여기게 하심이라 하시었다.
이와 같이 예수는 하나님을 본받아 제2차 승리노정(勝利路程)의 시작은 제1차 승리노정과 같은 노정을 취하여야 할 근본의의(根本意義)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 때에 와서 하는 모든 사명과 역할은 하나님 책임분담(責任分担) 노정에서 보인 사탄한테 더럽힌 것을 다 이루어야만 시작(始作)의 출발을 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책임분담을 모세를 세워 원수 품에서 뽑아내던 것과 같이 예수 때에 와서 전인류(全人類)를 찾아 사탄한테 빼앗아야 할 사명적(使命的) 기대(基台)를 상징(像徵)시킨 사실의 근본원리(根本原理)를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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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하나님이 하신 길을 따라서 해야 한다. 그래야 같은 목적(目的) 하나를 합(合)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분담(分担)하여 책임을 이루는 비공식노정(非公式路程)을 아는 우리 인간은 애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예수와 성신(聖神)의 역사분담(役事分担)은 사람 때문이었다.
이 모든 원리적(原理的) 근본(根本)을 아는 우리는 전(全) 정력(精力)을 뭐 아끼랴! 이와 같은 기본원리(基本原理)를 알지 못한 타락인(墮落人) 세계에 처(處)하였던 자아(自我)들을 알게 될 때 그 원리(原理)의 전부(全部)가 사탄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인간이 되었으니 사탄에 대하여 총공격(總攻撃)하여 급속(急速)한 시일(時日)을 두고 복귀(復帰)하여야 할 것을 알았구나.
이제야 참 살길의 시작을 알 것이고 인생의 뿌리를 알았고 또 하나님이 누구라는 것을 알았으니 우리는 무엇으로 보답(報答)하랴! 문제(問題)가 이제 나타난 뜻을 받들어 모시는게 최고문제(最高問題)가 되는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사실이다.
잃어버렸던 아버지는 6천 년 이전이고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 것도 6천 년간에 쉬지 못하시고 나를 찾으시려던 그 존재(存在)는 누구였는가! 즉 아버지 어머니의 존재(存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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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쁘고 고마운 소식을 널리 전할 자 세상 어디 있는가! 찾으시는 그 모습을 아는 자(者) 몇 명이었는가! 지금까지 아버지에 대하여 침 뱉고 아들로서 자식이 아버지를 모른다는 원통함을 오래 참으신 그 아픈 심정(心情)을 어느 누가 동정(同情)할 효자(孝子)가 세계의 어디에 있는가!
이 길을 닦기 위하여 세상의 효자의 길(孝子之道)과 충신의 길(忠臣之道)과 사제의 길(師弟之道)을 미리 전파(伝播)하여 그 기반(基盤)을 삼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지금 그 자체들이 없는 한탄(恨歎)할 일을 또 몰라주는 인간이 되어야겠는가!
아는 자는 직접 대하여서 효자(孝子)로 멀리 대하여서는 국가적 차원에 대하여서는 왕(王)으로 가르침은 스승으로 기본의의(基本意義)를 이루게 해야만 뜻을 세울 수 있는 사실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 대하여 이상(以上)과 같은 삼강(三綱)이라는 유교적(儒敎的) 중심체(中心体)로서 하나님을 모셨던가! 그 원리(原理)를 알지 못하므로 그렇게 못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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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같은 관계를 가르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슬프셨을까? 그것은 창조원리(創造原理)를 전부 완전히 찾아 첫 이상(理想)을 이루려니 숨은 원리적(原理的) 간격(間隔)을 두고 타락하였기에 가르쳐 주지 못한 것은 이전에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버지를 알아야 할 백성이 알지 못하고 왕으로 알아야 할 주인공을 알지 못하며 사(師·스승)이라면 이상(以上)에 없는 자로 받들어 모셔야 할 것도 알지 못하는 원수 편에 대립(対立)하여 섰던 그 자체를 대하여서 하나님은 얼마나 안타까운 심정(心情)이었을까!
무지(無知)한 백성을 찾아서 자녀(子女)로 삼으려니 모세를 세워서 바로를 직접 대립하게 하심이었다. 지금부터 모세는 그 사명에 첫 출발을 원수 사탄의 대변인(代辯人) 바로한테로 발을 옮기게 된 것이 크나큰 역사(厂史)의 희망의 초점이었다. 모세가 바로 앞에 나타나서 거듭되는 이적(異蹟)으로 바로를 굴복(屈服)하게 하는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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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에 대하여 10여 차례에 대한 이적(異蹟)을 통하여서 바로 자신이 하나님한테 범죄(犯罪)하였다는 고백과 함께 완전한 굴복(屈服)을 표준(標準)하고 역사(役事)하심이었다. 하나님이 바로를 강퍅(剛愎)하게 하심은 무슨 목적 때문이었는가 하면
1. 바로(사탄)가 다시는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에게 생각조차 못 하게 하고자 하심이고
2. 바로(사탄)는 힘이 없으니 하나님의 요구대로 스스로 복종하는 동시에 순종(順從)하여야 할 것을 자각(自覚)하게 하기 위하여
3. 원수에 모든 것을 해(害)치게 하기 위하여
4. 하나님에 반대하는 자는 망하는 것을 자각(自覚)하게 하기 위하여
5. 장자의 근본 피를 받은 자를 쳐서 원수의 피를 소멸하기 위하여
이상과 같은 것이 원수 바로(사탄)는 자각(自覚)하여 자연굴복(自然屈服)을 표준(標準)으로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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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무엇을 찾게 하기 위하여 바로를 강퍅(剛愎)하게 하였나 하면
1. 바로(사탄)는 원수로서 증오심(憎惡心)을 품게 하기 위하여
2. 바로 편은 하나님의 원수인 것을 알리기 위하여
3. 우리 편에는 절대능력(絶大能力) 하나님이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하기 위하여
4. 애급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미련을 완전 없애기 위하여
5. 애급 사람에 대하여 한 사람이라도 이스라엘 백성과 정(情)을 통하는 자가 없게하기 위하여
6. 하나님이 미워하는 정도(程度)만큼 이스라엘 백성이 올라오게 하기 위하여
7. 하나님의 뜻에 일련(一聯)된 동행(動行)을 배양(培養)하기 위하여
8. 어떤 난관(難關)이라도, 하나님은 타개하여 주실 줄 알게하기 위하여
9. 하나님에게 대립하여 반대하는 자는 누구나 영원한 원수(怨讐)로 알게하기 위하여
10. 앞선 노정의 승리적 요소를 배양(培養)하기 위하여
11. 뜻을 바라 조급(躁急)하지 않게 하여 영원히 믿음과 순종을 세우고자 하여
이상과 같은 의의(意義)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본래 연대(延滯)시켜서 하나님이 바라는 조건이 구비(具備)될 때를 보기 위하여 바로(사탄)를 강퍅(剛愎)하게 하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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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극도로 하나님을 대신한 모세와 사탄 대신한 바로와는 대립전(対立戦)을 전개(展開)함이었다. 그리하여 최후 승리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은 희망과 소망과 행복인 곳 가나안 복지(福地)를 향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작은 오늘 신앙생활(信仰生活) 출발 노정(路程)한 표시적(表示的) 노정을 바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세 앞에 굴복(屈服)한 바로는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게 되어 애급에 있는 재물(財物)을 취하여 가지고 오게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중심하고 출발함과 동시에 하나님과 직접 생활하는 한 노정(路程) 가운데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아주 내보낸 것을 알게 된 바로는 하도 분하고 원통하여 병사와 수레를 모아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追撃)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은 추격하는 애급 병사와 수레가 오는 것을 알고 소란이 일어나고 동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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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는 홍해(紅海)가 가로막히고 뒤에는 애급에서 추격해 오는 병사와 수레인 병거(兵車)가 있으니 할 수 없이 이제 죽는구나하고 전민족이 소란하고 동요하였다. 그때 모세는 여호와께 알리니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더러 손에 든 지팡이로 홍해(紅海)를 치라 하심에 쳤더니 홍해가 갈라져 육지와 같이 걸어서 건널 수 있었다. 그러므로 ...
『장자(長子)를 치심은 하나님과 사탄과의 대상전(対峠戦) 전개(展開)에 패(敗)하는 종국(終局)에는 애급에 있는 장자에 대한 재앙을 내리심이었다. 이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사탄의 어두움의 피를 받은 백성 대표의 장자들은 더욱이 그의 직접적(直接的) 먼저 받은 피의 종자(種子)니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백성 가운데 먼저 태어난 자는 무엇이거나 치게 되었다.
즉 사탄의 소유물(所有物) 중심(中心)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장자에는 양의 피로 대속(代贖)하게 하는 바는 이 재앙을 피(避)하게 하였음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는 뱀의 피를 받았던 백성을 치는 자체로 오는 동시에 예수 편에 속하는 자는 대신피(代身血)로 즉 예수의 생명을 받아 살 수 있는 언약(言約)의 표시였다. 사망의 피로 인하여 사탄의 피를, 생명의 피인 예수를 소생(蘇生)하게 하여 구원(救援)하신다는 본래의 뜻이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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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우리 과거 신앙노정(信仰路程)에서 있어 사탄 주관 아래에서 예수 품으로 돌아올 때 사탄은 바로와 같이 우리 뒤를 추병(追兵)하는 것을 표징(表徵)하는 바다.
예수를 의지하고 나아가면 즉 지팡이로 치면 홍해(紅海)를 가른 것과 같이 우리도 예수는 지팡이 대신(代身)으로 우리의 홍해와 같은 과거 세상의 고해(苦海)를 갈라서 홍해를 건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 수 있다는 표시(表示)였던 사실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에 메뚜기와 만나와 샘물을 주어서 고통(苦痛)에서 구원하심은 장차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 생명소생요소(生命蘇生要素)를 무조건(無條件)으로 주실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새로운 광야로부터 호렙산 반석(盤石) 샘물까지의 노정은 우리에게 무조건으로 만나와 메뚜기와 샘물을 주시는 것이었다. 그 생명요소(生命要素)를 받고 나아가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는 아말렉 족속(族属)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때 모세는 아말렉을 대하여서 여호수아에게 싸우라고 명령하시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서니라. 모세가 손에 지팡이를 들면 여호수아가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패하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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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론과 훌은 돌을 취(取)하여 모세를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은 양손을 들고 종일(終日)토록 아말렉을 대하여 승리하는지라 그때 여호와가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말렉을 천하(天下)에서 제거하려고 하니 너는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서 책에 기록하여 여호수아의 귀에 읽어주어라.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닛시(나의 깃발)라 하여 가라사대 여호와의 보좌(宝座)에 손을 놓은 것이 있으니 여호아 아말렉과 대대로 전(戦)하리라 한지라.』
이 사실은 무슨 의미인가 하니 무조건 보호받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승리 자격자로 세우고자 하니 아말렉의 그와 같은 전쟁을 보게 한 것이었다.
이 사실은 즉 예수에 와서 우리 인간에게 무조건(無條件)으로 사랑을 세워주신다. 예수의 생명(生命) 받아 산 자(者)에게는 원수 사탄의 한 대립(対立)을 주어 그 자체가 다시는 원수와 합하지 않게 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언제나 신앙노정(信仰路程)이 평탄(平坦)한 것이 아니고 혼자 살 수 있는 보호 시기가 있었으면 원수에 대하여 승리해야만 될 의무가 있는 것이다. 159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세의 손을 들어주는 입장과 같은 믿음의 조건을 보장해야만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원인으로 되어 있다.
즉 모세의 손을 든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품으시는 표시오, 아론과 훌은 품길 수 있도록 협조함이요, 여호수아는 신앙자 중심 대표자를 표시하면서 우리 자체들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뜻이 성립돼야만 원수 아말렉을 문제없이 승리조건(勝利條件)이 성립하는 바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후일 제2차 책임분담(責任分擔) 사명감당자(使命勘當者)로 오시는 예수와 우리가 합하여만 승리한다는 조건들의 요소(要素)를 보여주는 것이다.
모세와 지팡이는 하나님 대신(代身)을 표시하는 것이고 돌덩이는 하나님의 보좌(宝座)를 표시하심이다. 아론과 훌은 예수와 해와를 표시하는 것이고 여호수아는 믿은 신자(信者)를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일에 예수를 모시고 성신(聖神)을 오른편과 왼편에 두고 하나님을 받드는 자(者)라야만 승리한다는 표시적인 뜻이 있음이다. 그리고 사탄은 즉 아말렉은 대대로 싸우리라 하심은 돌을 쌓아서 모세를 앉히신 연고(緣故)니라.
이것은 아론과 훌이 한 것이지만 하늘과 땅을 나누어 세우신다 하는 입장에서 어렵다고 자기 스스로의 행사가 사탄이 하늘 뜻 성사(成事) 때까지 대적(対敵)할 수 있는 길을 지어주었으니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심이라 하시었다.
이와 같이 성도(聖徒)는 사탄에 대하여 서 있으므로 뜻에 속한 입장을 확고히 잡지 못하면 끝까지 싸움을 하여서라도 승리하여야 할 것을 예고(予告)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聖徒)는 아말렉과 같은 원수를 대하여 싸워 승리하여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성도를 사탄과 싸우시게 하는 이유는 사람까지 전부가 사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자(資格者)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 근본(根本)이니 이런 싸움이 있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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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하나님의 직접지도(直接指導)를 받으면서 낮이면 구름기둥 밤이면 불기둥으로 인도(引導)함을 받아 시내 광야에 이르게 하셨다. 즉 이것은 직접 품에 보호하여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내 광야산(拡野山) 앞에 머무는지라. 그때 모세는 산상에서 돌아와야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告)하며 가라사대 하나님의 말씀을 착하게 듣고 나의 규례(規例)를 지키면 축복받아 세계에 없는 제사장(祭司長)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말씀을 선포(宣布)하신지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대제사장(大祭司長)이 되어 전세계를 통치할 후일(後日)에 약속을 세우심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뜻하는 바의 이상목적(理想目的)이다.
이와 같이도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더욱 하나님한테 합할수록 사탄은 이스라엘 뒤를 따라가면서 광야(拡野)까지 따라 나와 불신(不信) 불순종(不順從)의 자체를 대하려고 시도를 여전히 계속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 뒤에는 사탄이 뒤를 따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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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금 불신 불순종이면 사망(死亡)에 처하는 것을 절절히 뼈에 느끼지 못하였다. 때맞추어 시내 산상(山上)에 70장로(長老)를 데리고 모세는 40일 40밤을 지내면서 십계명(十誡命) 말씀 석판인 석비(石碑)를 받게 된지라.
그때 6일간은 여호와의 영광(栄光)의 구름이 시내 산(山)을 덮더니 7일에는 여호와께서 구름 중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심에 여호와의 영광(栄光)의 형상(形狀)이 이스라엘의 눈앞에 화염(火焰)과 같이 비치시는 것에 모세는 그 안갯속으로 들어가 40일 40밤을 지내게 되었다.
이 기간은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가장 중대한 기간인 동시에 백성에게 가장 지루한 기간이었다. 이 십계명(十誡命) 받음과 동시에 성전건설(聖殿建設)의 시작을 보게 된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실체(實体)에 사실이었다. 성전구조(聖殿構造)를 살펴보면 지성소(至聖所)가 있고 성소(聖所)가 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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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소에는 법궤(法櫃)가 있고 그 위에 두 그룹이 있고 그 사이에 속죄소(贖罪所)가 있고 또 그 앞에 성소(聖所)가 있는지라 성소(聖所)와 지성소(至聖所)는 구별되어 있게 되었다.
즉 성전(聖殿)은 예수님의 한 몸의 건설(建設)의 한 터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성전(聖殿)으로 되는 예수님 속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 즉 지성소(至聖所) 부분이었다. 성소(聖所)는 예수의 몸 육신(肉身)을 표시함이었다.
그러므로 지성소(至聖所)는 하늘 세계를 표시하는 것이고 성소(聖所)는 지상세계(地上世界)를 상징(像徵)시키는 뜻이 있는 것이었다. 예수 한 자체(自体)에는 하늘과 땅 완성의 한 존재(存在)로 있어야 한다는 표시를 말하는 것이었다.
지성소(至聖所)를 살펴보면 법궤(法櫃)가 있고 그 위에는 이(二) 그룹이 있고 그 사이에 속죄소(贖罪所)가 있음은 무슨 뜻이냐 하면 본래 인간이 타락함에 말씀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말씀에 이상실체(理想實体)인 하나님 몸인 아담과 해와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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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해와가 타락한 후 그룹들을 두어서 하나님 세계와 서로 멀어져서 상격(相隔)하였던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예수 오시면 하늘 생명수(生命樹)를 찾아 생명나무 과실을 받을 수 있으니 하나님의 그룹 간에 나타나시어 직접 법궤(法櫃)를 메심을 말하심이니 하나님의 그룹의 간격(間隔)를 통하게 하는 것을 표시하여 이와 같은 구조를 보게 한 것이다.
속죄소(贖罪所)에 나타나심은 속죄한 곳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즉 근본창조원리(根本創造原理)를 복귀하여서 자기자신의 한 몸 예수와 성신(聖神)을 통하여 죄를 속(贖)하신 후에 각 사람의 마음까지 하나님이 계시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 기본 터를 닦는 존재로 올 것을 말함이고 그 몸 성소(聖所) 같은 그에 접(接)하여 안기게 되면 그도 역시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이상(理想)을 재건설(再建設)하고자 하는 것이 근본목적(根本目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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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예수 오신 후부터는 지성소(至聖所)와 성소(聖所) 구분이 없게 된 것은 성전(聖殿)이 쓸데없게 된 것은 예수의 한 몸을 상징(像徵)하였던 그 본(本) 자체가 출현하게 되니 성전(聖殿)은 필요가 없게 되니 구약시대(旧約時代)의 이상(理想)은 완성함을 결론지을 수 있음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때 예수는 자기가 성전(聖殿)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한 뜻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수 오셔서 그룹으로 막았던 하늘 세계와 통로(通路)를 지었고 생명과(生命果)의 이상목적(理想目的) 달성(達成)의 시작은 전우주(全宇宙)를 통하여 성사(成事)하고자 하는 중대목적(重大目的)에 뜻을 두고 성전의 건설을 하게 하였다 하시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말렉에 승리(勝利)한 후에 이 성전건설(聖殿建設) 시작이라 하시는 것은 예수를 믿는 신자(信者)들은 원수에 승리(勝利)할 수 있는 자격자(資格者)가 되면 우리 신자(信者)도 성전(聖殿) 건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약속(約束)하는 예의 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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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예수와 합하여 제2차 성전(聖殿) 자체건설(自体建設)을 할 수 있다는 뜻을 고(告)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전인류(全人類)에 대하여 고대(告待)하는 최고 목적이니 이 얼마나 귀한 소망들의 존재였을까! 즉 누구나 하나님을 직접 대(対)할 수 있는 한 몸 될 수 있는 기본원리(基本原理)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하나님은 인간과 부자지간(父子之間)인 근본을 찾은 뜻의 성립(成立)이 시작된다.
이와 같이 귀중한 성전(聖殿)의 시작을 보려고 모세는 산상(山上)에 40일 40밤을 지내는 중에 백성들은 아론을 충동(衝動)시켜서 금송아지 우상(偶像)을 지어 섬겼는지라 여기에 벌써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탄 공작(工作)의 기초(基礎)를 지어준 행동으로 나아가 그 우상을 중심 삼고 기뻐하는 도중에 시내산(山)에서 모세가 내려와 보니 전백성(全百姓)이 아론으로부터 우상을 자기들의 신(神)으로 섬기는 것을 목격한 모세는 대노(大怒)햐여 손에 쥔 두 석판(石板)을 던져 부순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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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여기에 모세는 비법적(非法的) 행동을 시작하였다. 석판 둘은 말씀을 기록한 것이었으나 이것은 아담 해와의 실체(實体)들을 표시함이다. 즉 돌비석을 깨는 행동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에 대적하고 있는 사탄에 대해서는 기뻐하는 행동이다.
즉 결과(結果)에 있어서는 사탄의 시킴을 받아서 한 행동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니 여기가 하나님께 있어 크나큰 중대한 일의 출현(出現)을 보는 사실이다. 즉 다시금 오실 존재에 대한 하나의 파괴(破壞)를 의미하는 것을 표시하는 행동(行動)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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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석판(石板)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의 몸을 표시한 것이요, 온 이스라엘보다도 귀(貴)한 자체(自体)이었기에 여호와는 대노(大怒)하여 전백성과 아론 이하 전부를 말끔히 지워버리시고 모세로 하여금 이보다 더 강하고 큰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심에 모세는 다시금 40주야를 금식(禁食)하여 하나님이 같이하지 않은 것을 돌이켜 속죄(贖罪)함을 받고 만든 두 석판에 다시금 여호와로부터 말씀을 새겨 받았으니 전과 같이 모세에게 광채(光彩)가 발하였다. 그러므로 다시금 뜻을 계승(継承)할 바를 알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탄은 이스라엘 민족 뒤를 다시금 이와 같은 원인(原因)을 통하여 침입(侵入)의 길을 엿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반대하여 애급에서 나온 것을 한탄(恨嘆)하여 마실 것이 없으므로 애급에서 나온 것을 말하니 모세는 회막(会幕) 사이에 머물며 엎드리니 여호와의 영광(栄光)이 그 위에 나타나 말씀하시되 네가 지팡이로 아론과 더불어 회막(会幕)을 모으고 그 눈앞에서 반석(盤石)을 쳐서 물을 내서 회중(會衆)과 목축(牧畜)에게 먹게 하라고 하심에 여호와의 명령대로 모세는 그 앞에서 지팡이를 들며 말씀하시되 패역(悖逆)한 백성들아 내 말을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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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저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여 너희에게 마시게 하려고 한다 하면서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차례나 치니 물이 더 많이 나오는지라.
이것이 가데스에 있어서 한 것이었는데 그때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눈앞에서 나를 거룩하게 하지 아니함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가 너희에게 주신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 이스라엘의 자손의 여호와를 향하여 대듦에 여호와 자기의 거룩함을 나타내심으로 그 물을 므리바라 하신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지 못하는 행동이 즉 므리바 물로 인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모세와 아론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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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근본 의미였는가 하면 반석(盤石)을 한번 친 것은 허락된 것이지만 두 번 친 것은 허락하지 않은 일인 동시에 또 허락할 수 없는 범죄였다. 반석을 한번 치라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너희가 순종하고 믿지 못함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몸되는 실체에 사탄의 침해를 받아 하나님의 몸을 쳐서 (아담 해와)를 죽이는 행동을 시작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반석(盤石)을 말함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면 즉 하나님의 몸을 표시한 것이다. 성경 신약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반석(盤石)은 곧 그리스도라 하신 것을 보아도 반석은 하나님의 몸인 동시에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번 치는 것을 용서한 바는 아담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깨진 것을 표증(表証)한 것이었기에 하나님 자신의 대신 몸의 표시인 반석을 치라고 하심이었는데 의외로 두 번을 친 것은 한번은 의외의 행동인 동시에 사탄이 다시금 하나님의 몸을 치는 표시적 행동을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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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더 친 것은 모세가 치셨지만 사탄이 친 것과 같은 행동의 결과로 되어 버린 것이다. 이 표시적 사실의 실패는 다시금 석판과 함께 부수고 만 행동과 같은 것이었다.
두 석판은 다시 찾을 수 있는 예수와 해와의 표시이므로 다시금 찾아서 세울 수 있으나 반석(盤石)은 석판(石板) 석(石)의 뿌리가 되는 하나님의 근본되는 것을 표시하는 바의 몸이었다.
그러므로 실체 몸과 근본 몸을 범(犯)하는 범행(犯行)이야 사탄에게 있어서는 다시금 승리할 수 있는 행동의 기초를 불순(不順)과 불신(不信)한 결과로 잡히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하나님 앞에 범(犯)한 모세와 이스라엘의 죄는 사탄의 터가 되는 시작인 동시에 다시 보내시어 제2차 책임분담(責任分担) 사명자(使命者)로 오는 예수까지에 대한 미완성(未完成)의 한 표시적 근본 실체를 범(犯)하는 행동이 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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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고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不順)과 불신(不信)은 예수까지 다시금 칠 수 있다는 근본원리(根本原理)가 시작됨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한 행동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행동은 즉 하나님 앞에서만 한 것이 아니고 사탄 앞에서 하였기에 이와 같은 사탄의 기쁨의 한 승리권(勝利圈)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탄은 더욱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침입(浸入)의 기대(基台)를 잡고 침입할 수 있는 행동이 시작됨으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뱀을 전해 받아 물리게 한 것은 다시금 그 타락시킨 본체(本体)에 침입한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 즉 뱀이었다. 이 뱀에 물린 것이 무사(無事)하게 되려면 깃대 위에 그려진 불뱀(火蛇)을 보는 것만으로도 낫게 되리라고 한 것을 표시(表示)하여 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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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모세가 반석(盤石)을 두 번 친 것이 즉 하늘뱀적(的) 예수 자체가 침범(侵犯)당하여 죽게 하는 행동의 기인(基因)을 허락할 수 있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표시였다.
이것은 즉 불순(不順)과 불신(不信)의 결과의 선물이니 이것을 막으려면 무엇보다도 실체(實体)인 예수 앞에 순종과 믿는 것 이외에 요구되는 근본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불순종(不順從) 자손들은 뱀인 사탄 편에 속한 것으로 하여 광야(拡野)에서 전멸(全滅)하게 한지라.
그러므로 가나안 땅은 믿고 순종한 자(者)만이 기업(基業)으로 받을 곳인 것을 표시함은 우리 이상천국(理想天囗)도 불순종자와 불신자와 두려워하는 자는 못 가는 곳인 것을 상징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하는 것은 가나안 복지(福地)는 우리 본래 이상하던 하늘 나라를 표시하는 행복스러운 사랑 이상(理想)의 나라인 것을 표시하여 준 것이다. 모세가 죽는 것은 불순(不順)으로 인한 실수로 인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도 그 결과를 보리라 한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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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기업(基業)을 받게 될 때 가나안 족속(族属)을 물리치는 역사가 시작하여서만 기업의 땅을 찾게 되는 것이다. 모세의 실수로 인하여 여호수아가 뜻을 세우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반석을 두 번 친 연고였더라.
여호수아는 예수의 한 표시적 존재도 되면서 모세의 뜻 성사자(成事者)도 되는지라.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룬다는 측면에서 보면 모세부터 예수까지로 되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예수도 상징한 것이고 모세 한뜻을 중심하고 보면 제2 모세 뜻을 이루는 자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은 예수께서 오셔서 승리하여야 할 기초(基礎)인 하나님적 책임분담노정(責任分担路程)이니 예수님이 세상에 와서도 즉 하늘나라 건설 중에서 원수와 뱀과 기업(基業)을 만들고 정하는 일이 남아 있음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사사(師士)들을 세워서 역사(役事)하여 기업(基業)을 완전히 성사(成事)할 수 있도록 협조하심이었다. 사사(師士)시대 이후에 왕(王)을 세우시고 왕으로 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수 오시기 전에 벌써 예수 오시면 직접 왕으로 설 수 있는 기초작업이 있다고 함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한 후에 사울 왕(王)을 세우신 것은 누구를 표시하는 것이었냐 하면은 제1차 아담격 사람의 왕위격(王位格)을 표시함으로 실패(失敗)도 그 원인을 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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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왕을 세워 하나님의 권세(權勢)를 드러내고 그 아들 솔로몬은 영광(栄光)의 왕으로 성전(聖殿) 완성왕(完成王)이라는 것을 표시한 것은 예수 오셔서 뜻을 성사(成事)하여 권세(權勢)로써 영광(栄光)으로서 본(本)뜻 성전완성이상(聖殿完成理想)이 전개될 것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 목적을 완성해야 할 사명적(使命的) 과제를 받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믿지 않고 순종(順從)하지 아니함으로 예수 자신을 죽게 함을 보여 하늘적으로는 영광(榮光)이요 땅으로는 권세(權勢)로 성사(成事)할 전체 근본이상(根本理想)을 이루지 못하고 갔기에 다시금 오시겠다고 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하나님적 제1차 책임분담(責任分担) 승리노정(勝利路程)에서 사탄에게 침범을 받았기 때문에 행동(行動)의 침범(侵犯)은 예수로 하여금 제2차 성사책임사명(成事責任使命) 분담(分担)을 이룰 수 없게 하여 다시금 실체로 이루기 위해서 오지 않으면 안 될 중대과업(重大課業)인 영광의 왕으로 나타날 수 있는 터를 예수는 권세왕격(權勢王格)으로 사탄에 대하여 승리하여 온 인류를 근본자녀(根本子女)대로 백성(百姓)대로 복귀하여야 할 책임이 남아 있기에 재림(再臨)하신다는 근본목적(根本目的)이 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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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再臨)이라는 것은 하늘 슬픔의 한 사실(事実)이고 사탄이 기뻐하는 행동의 발로(發露)의 결실이었다. 그리하여 예수 오셔서 영적(灵的)으로 이 무대(舞台)를 세계무대(世界舞台)로서 확대(拡大)하여 영(灵)으로 전인류(全人類)를 찾아서 근본(根本) 터까지 즉 타락한 인간 부분까지 영적(灵的)으로 끌어 올려야 할 책임적(責任的) 사명을 성신(聖神)과 합하여 성사(成事)하여 다시 몸으로 성사의 터를 세우심이었다. 이래서 영적으로 먼저 이루고 육신으로 이루고자 하여 남아지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육신(肉身)의 몸을 쓰고 재림(再臨)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탄에 대하여 권세(權勢)로 찾아 영광을 누려야만 근본목적(根本目的)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세계적(全世界的)으로 한 주관하(主管下)에 이루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또 근본(根本) 창조이상(創造理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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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感謝합니다 我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