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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生命)의 정원
심야 - 도다 조세이는 2층 서재의 책상 앞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원고용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 원고지에는 ‘생명론 도다 조세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 뒤를 잇지 못한 채 몇 시간이나 흰 공백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에게는 드문 일이다. 집필 전에는 남보다 갑절의 숙고를 거듭하지만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단숨에 써 내려가는 것이 그의 평소 습관이었다. 그런데 오늘만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숙고는 끝났을 것이다. 넘쳐흐를 듯한 사념(思念)도 그의 가슴속에는 성난 파도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써야 할 주제의 순서는 정해져 있다. 먼저 법화경의 비유품, 화성유품, 여래수량품의 1절을 각각 인용하고 日蓮대성인의 어서에서 개목초나 선시초의 1절을 들어 ‘삼세의 생명관’을 완벽하게 설하는 것이다. 다음에 여래수량품의 간요(肝要)를 싣고 대성인의 당체의초나 삼세제불 총감문초에서, 혹은 어의구전, 십법계사 등의 어문(御文)을 빌어 생명의 영원성을 논하고 마지막 결론으로써 생명이 연속하는 실상을 구체적으로 더욱 명석하게 해명하자.
- 이것이 그에게 있어 그다지 난사(難事)라고는 할 수 없었다. 논리 정연하게 논하는 것도 마음먹으면 당장이라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지금 만년필을 손에 쥐었다가는 놓고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논리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과연 ‘생명의 실재(實在) 그 자체’에 육박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생애를 걸고 영해(領解)한 것 - 생명, 그 자체는 그의 가슴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전하기 어려운 일인가를 알고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또 다시 안경을 쓰곤 했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는 몇 번 연기를 내뿜더니 곧 그것을 비벼 끄고 다시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어느새 좁은 실내는 짙은 연기로 자욱했다.
도다는 문득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이건 너무하군.
그는 은단을 몇 개, 입에 넣고는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5월의 밤이다. 푸른 잎 내음이 흘러들었다. 창밖은 쓸쓸하고 고요하기만 했다. 그는 잠시 그 어둠을 보고 서 있었다. 마침내 허리띠에 양손을 찔러 넣고 실내를 이쪽저쪽 걷기 시작했다. 그는 넘치는 흉중의 사념(思念)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
도다는 방안을 거닐며 문득 자신을 회상했다. - 그때도 나는 이렇게 좁은 방안을 우리에 갇힌 동물처럼 걷고 있었다….
그때라고 하는 것은 5년 전의 일이다. 그는 전시 중 스가모(巣鴨)의 도쿄 구치소 독방에 사상범으로 구금되어 있었다.
그 방은 지금 그가 자유롭게 걷고 있는 2층 방보다 훨씬 좁고 음침한 방이었다. 복도와의 경계는 폭 1미터 정도의 튼튼한 쇠창살문이었다. 밖에서 자물쇠를 따고 무거운 문을 열면 낡아 빠진 다다미 2장이 깔려 있었다. 그 끝에는 다다미 한 장 정도의 마루가 있었다. 정면 벽에는 좁고 긴 직사각형의 작은 창문 하나가 동쪽을 향해 열려져 있고 굵은 쇠창살이 바깥세상과의 사이를 차단하고 있었다.
창문 밑 마루 구석에 사방 90센티의 나무상자 같은 물건이 놓여 있다. 그 문을 열면 벽장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이 나무상자 위에는 폭 50센티, 높이 25센티 정도의 선반이 있는데 이곳에는 책이나 화병을 놓아도 된다. 이 선반 밑에는 창문을 오른쪽으로 두고 책상으로 생각되는 판자가 튀어 나와 있었다. 이 판자를 들면 세면기가 나온다. 책상은 세면기 뚜껑이었다. 이 책상 앞에 의자 구실을 하는 판자가 있는데 이 판자를 올리면 수세식 변기가 보인다. 의자는 변기의 덮개이기도 했다.
이 지극히 간소한 독방에서 그는 빙빙 걸어 다니며 깊은 사색을 계속했던 것이다.
1944년 원단을 기해 그는 매일 ‘日蓮宗聖典(니치렌슈성전)’을 뒤척였으며 그 중에서 법화경을 읽기로 했다. 또, 하루 일만 번의 제목을 실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석과 구두점이 없는 순 한문으로 쓰여진 법화경은 읽기가 어려웠다. 이 책을 몇 번이나 집으로 돌려보냈으나 불가사의하게도 그의 독방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이 간수나 잡역부들의 심술궂은 조작이나 태만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단정한 자세로 나지막이 외쳤다.
“좋다, 읽자.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읽겠다. 먼저 법화경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의 이 결의는 원단부터 실행에 옮겨졌다. 순 한문으로 된 법화경을 3번 되풀이해서 읽었을 때는 이미 3월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는 매일 규칙적으로 제목은 한 번 할 때마다 목표를 두고 하루에 1만번 이상을 올리고 법화경은 하루 몇 쪽이라고 정해놓고 읽었다. 그리고 대성인의 유문(遺文)도 한쪽, 한쪽 되씹는 듯한 심정으로 읽어갔다. 추운 2개월이었다.
3월 초, 아직도 추위가 가시지 않은 어느 날, 그는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4번째 법화경을 읽기 시작했다. 법화경의 개경(開經)인 무량의경(無量義經)부터였다.
無量義經德行品 第一 (무량의경덕행품 제일)
如是我聞, 一時佛住 王舍城 耆사堀山中 (여시아문 일시불주 왕사성 기사굴산중)
與大比丘衆万二千人俱…. (여대비구중만이천인구)
도다 조세이에게는 부처가 이 덕행품(德行品)을 설했을 때의 여경(餘經)은 이미 친숙해져 있었다.
이 여경(餘經)에 이어지는 부처님을 찬탄하는 ‘偈(게)’에 들어갔을 때 - 자, 여기서 부터가 항상 막히는 부분인데 하며 진지하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大哉大悟大聖主 (대재대오대성주)
無구無染無所著 (무구무염무소착)
天人象馬調御師 (천인상마조어사)
道風德香薰一切 (도풍덕향훈일체)
……………
……………
無復諸大陰入界(무부제대음입계)
그는 여기까지의 8행은 이해했다. 요컨대 위대한 大悟大聖主(대오대성주)인 부처를 찬탄하는 형용구가 아닌가. 부처의 正覺(정각)의 상태를 찬탄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다음 줄로 옮겨가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신(身)’이라고 하여 부처의 실체를 가리키고 있는 듯하지만 그것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其身非有亦非無 (기신비유역비무)
非人非緣非自他 (비인비연비자타)
非方非圓非短長 (비방비원비단장)
非出非沒非生滅 (비출비몰비생멸)
非造非起非爲作 (비조비기비위작)
非座非臥非行住 (배좌비와비행주)
非動非轉非閑靜 (비동비전비한정)
非進非退非安危 (비진비퇴비안위)
非是非非非得失 (비시비비비득실)
非彼非此非去來 (비피비차비거래)
非靑非黃非赤白 (비청비황비적백)
非紅非紫種種色 (비홍비자종종색)
그는 이 偈(게)의 부분이 12행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 이 아니다(非)’라는 부정이 34번이나 나온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것에 이어지는 ‘戒(계), 定(정), 慧(혜), 解(해), 知見(지견)에서 생(生)하고’의 이하는 다시 부처의 크나큰 과덕을 찬탄하는 문장으로 되돌아가 여러 가지 형용구가 오랫동안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이윽고 부처의 구체적인 모습, 즉 應身(응신)으로서의 부처의 표현으로 옮겨가는데, 이것은 그다지 난해하지 않다.
다만 12행 속에 34번의 부정이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인지 확실하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 서두의 ‘그 신(身)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라는 것은 부처의 ‘그 신(身)’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는 것 같다. 불법상의 空觀(공관)을 가지고 보면 일단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실체를 명확하게 포착할 수가 없다. 또 ‘그 신(身)’이 부처의 불변의 본질, 이른바 法身(법신)이라고 한다면 그 법신이란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을 모른다면 법신이란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다.
- 그는 불법의 진수인 대성인의 불법을 단순한 관념론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12행에서는 ‘그 신(身)’의 부처가 관념의 안개에 싸여져 버리고 만다.
도다 조세이는 지금 앞에서 3번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가분하게 읽어 넘길 수가 없었다. 그의 나날의 창제와 지금 법화경을 몸으로 끝까지 읽어내고 말겠다는 무서운 기백이 자기도 모르게 이 부분을 더 이상 지나칠 수 없게 했다.
그는 생각했다.
- 34번의 ‘비(非)’는 형용구가 아니다. 엄연히 실재하는 어떤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실재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 사각형도 아니고 둥글지도 않고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다고 한다. …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구르는 것도 아니며 꼼짝 않고 조용히 있는 것도 아니다. … 마치 수수께끼 같은 이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이러한 추측의 표현을 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는, 어떤 위대한,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실재가 엄연히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색에 지쳤다. 그리고 다시 창제를 시작했다. 손에는 우유병 뚜껑으로 만든, 세상에서도 희귀한 수주를 걸고 있었다.
도다 조세이는 이 12행의 게(偈)를 마음으로부터 납득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젠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법화경에 대하여 배수진을 친 것이다. 그 결의는 이른바 관념의 결의가 아니다. 생명의 대결(對決)이었다.
◇
일본에서도 지금까지 수많은 법화경의 해설이나 강의서가 발간되어 있다. 그러나 옥중의 그에게 그런 책들을 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이 부분의 해설은 무엇 하나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해설서는 시치미를 떼고 이 부분을 생략한 채 그 전후만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끝내버렸다. 간혹 이 부분을 해설한 강의도 있지만 “부처는 유라든가 무라고 하는 세간적인 구별외(外)에 존재한다.”고 하기도 하고 “사각형도 아니고 둥글지도 않고… 길지도 않다라는 것은 일체의 물질적 관계를 떠났다는 것으로 부처의 작용은 그런 것과는 무관계이며 부처는 일체 그것들을 초월하고 있다.”라는 식으로 쓰여져 있다. 오늘날의 우리들이 보면 실로 허황한 해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여 여기서 불교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1300년 전 처음으로 법화경을 가장 잘 이해했다고 하는 천태대사조차 이 부분에 있어서는 명확한 해석을 하지 않았다. 천태종학(天台宗學)의 정당한 흐름을 따랐던 전교대사(傳敎大師)가 주무량의경(註無量義經)에서 겨우 이 12행을 1행씩 해설했다. 그러나 그는 ‘그 身’을 ‘내증신을 밝히는’ 것이라고 하고, 다시 ‘내증신의 색심’이라고만 했을 뿐, 그것으로 확실한 실체를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심삼관(一心三觀), 이(理)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인 천태종학의 범주에서는 이 이상의 해명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천태문류의 학승들에 와서는 전교의 표현만을 그대로 이어받아 ‘그 身’을 부처의 색신(色身)으로 판단하고 그 추상적인 형용사로서 ‘…이 아니다’로 해석하고 있다. 부처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할 여지도 없이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했다.
만약 ‘그 身’을 ‘대오대성주(大悟大聖主)’라 하고 대성주를 이 12행이 형용하여 찬탄하고 있다고 한다면 대성주란 관념적인 이상상(理想像)으로서의 존재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만다. 그러나 마하살(摩訶薩)이 소리를 함께 하여 부처에게 바쳤던 게(偈)이므로 ‘대성주’가 그와 같은 이상상(理想像)의 존재일 까닭이 없다.
도다 조세이가 이해할 수 없었던 12행은, 서두의 ‘그 身’이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에 있었다. 그것을 단순히 色身(색신)으로 해석하면 12행이 의미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또 그 부처의 몸(身)이 사상을 초월한, 극히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실제성을 완전히 상실해 버리고 만다.
그는 이 12행이 의미하는 확실한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직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창제를 거듭해갔다. 오로지 일편단심으로 그 실체에 육박해 가고 있었다.
34번의 ‘비(非)’를 하나하나 떠올리며 그 34번의 부정 위에 더더욱 엄연히 존재하는 그 실체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고 깊은 사색에 들어가 있었다. 시간의 경과도 의식에 없었다. 지금 어디에 있는가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돌연 앗! 하며 놀라움에 숨을 죽였다. - ‘생명’이라는 말이 순간적으로 뇌리에 떠오른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여지껏 이해할 수 없었던 12행을 완벽하게 읽었다.
‘생명’은 유가 아니며 또 무도 아니다.
인이 아니고 연이 아니며 자타가 아니다.
방이 아니고 원이 아니며 단장이 아니다.
…………………………………………………
홍이 아니고 자나 종종의 색도 아니다.
- 여기의 ‘그 身’이란 ‘생명’이 아닐까. 알고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부처란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일어섰다. 독방의 추위도 잊어버렸다. 시간도 몰랐다. 단지 깊은 숨을 내쉬며 얼굴에 홍조를 띠우고 눈을 빛내며 무한한 깊은 희열에 흐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좁은 방안이다. 그 속에 여윈 몸으로 어깨를 치켜세우고 양손을 움켜 쥔 채 방안을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 부처란 생명이다! 생명의 표현인 것이다.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목숨 안에 있는 것이다. 아니, 밖에도 있다. 그것은 우주생명의 하나의 실체가 아닌가!
그는 부르짖고 싶었다.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
순간 좁은 독방 안에 끝없이 광대하게 느껴졌다. … 마침내 흥분이 가라앉자 다이세키사 쪽을 향해 단좌하고 땅거미 지는 속에서 창제를 계속해 갔다.
◇
도다 조세이에게 전개된 이때의 일순간은 장래의 세계 철학을 변모시키기에 충분한 순간이었다고 해도 좋다. 그것은 세월의 급속한 흐름과 함께 머지않아 반드시 밝혀질 것이다.
그는 불법이 현대에서도 여전히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에 의해 근대과학과 충분히 어깨를 나란히 하여 손색이 없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불법에 선명한 현대적 성격과 이해를 부여했던 것이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니치렌 대성인의 법리를 모든 고금의 철학 위에 위치를 굳히게 한 기념해야 할 강력한 뜀틀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법화경에는 ‘생명’이라고 하는 명료하게 알 수 있는 직접적인 말은 없다. 그런데 도다는, 불가사의한 12행에 비침 된 것이 실은 진실한 생명 그 자체라는 것을 완벽하게 밝혀낸 것이다.
그는 부처의 본체를 깨달았다. 삼세(三世)에 걸친 생명의 불가사의한 본체가 저쪽 멀리에서 확실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느껴졌다.
그는 후에도 계속해서 법화경을 읽어 나갔다. 몇 군데의 난해한 문장도 정복해 갔다. 그리고 옥중에서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도 다 가고 있었다. 그 동안의 끊임없는 사색과 정진으로 적어도 문구(文句)들에 대해서는 거의 이해할 정도로까지 되었다.
하지만 석가가 대체 법화경 28품에서 무엇을 설해 밝히려고 했던 것일까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솟구쳤다. 그를 괴롭힌 제2의 문제였다.
일대성교(一大聖敎)의 간요(肝要)가 법화경에 있다면 그 법화경의 진수란 무엇인가. - 그것은 곧 니치렌 대성인의 南無妙法蓮華經이며 말법에 개현된 십계호구(十界互具)의 어본존에 귀결될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논리적인 귀결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확고부동한 실감(實感)으로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추운 독방에서 때때로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깨닫곤 했다. 작은 창문으로 맑은 가을하늘이 보인다. 그는 몇 시간이고 망연한 모습으로 줄곧 그것을 응시하는 듯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나 깨나 법화경의 진리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없었던 고민에 휩싸였다.
- 법화경을 단지 석가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인도 고대의 뛰어난 옛날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니치렌 대성인은 어서 속에서 재삼 법화경의 문자인 6만9천3백8십4문자는 모두 부처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것은 겨자씨만큼의 거짓도 없을 것이다. 대성인께서는 명확하게 알고 계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불초제자 도다 조세이가 완전하게 읽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전시중의 감옥이다. 그는 영양실조로 고생하고 있었으나 더욱 격렬한 사색을 계속해 갔다. 극에 달한 피로 속에서 마를 대로 마른 몸을 변변찮은 옷으로 싼 채 그는 오로지 창제에 면려했다.
11월 중순 원단부터 결의했던 창제는 이미 2백만 번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한 어느 날 아침 그는 조그마한 창으로 쏟아져 드는 햇살을 맞으며 쾌청한 하늘을 향해 상쾌한 목소리로 낭랑한 제목을 올리고 있었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壞滅(괴멸)의 위기에 처해 있는 사업도, 빨리 석방되고 싶다는 애타는 마음도, 곤궁에 빠져 있을 처자의 일도, 같은 감옥 속에 계시는 노체의 은사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의 일도, 이때의 그의 念頭(염두)에는 모든 것이 사라진 채로였다. 굳이 말한다면 요 며칠간 재삼 반복해서 읽고 있는 법화경의 종지용출품의 제15만이 머리 한쪽 구석에 남아 있었다.
햇살은 따스했다. 봄을 연상케 하는 미풍이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어렴풋한 환희가 어디에서부터인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일체의 고뇌를 씻어버리는 듯한 청정하고도 평온한, 그러면서도 무량한 감동에 싸여져 갔던 것이다.
- 이 모든 보살, 석가모니부처가 설하는 음성을 듣고 下(하)에서부터 發來(발래)했노라. 하나하나의 보살 모두 이는 대중의 창도의 우두머리이니라. 각각 육만항하사 등의 권속을 거느렸느니라. 하물며 5만, 4만, 3만, 2만, 1만 항하사 등의 권속을 거느린 者(자)에 있어서랴. 하물며 ….
그는 자연스러운 생각 속에서 어느새 허공에 떠 있었다. 무수한 육만 항하사의 대중 속에 있으면서 금색 찬연한 대어본존을 향해 합장하고 있는 그 자신을 발견한 것이었다.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었다. 그 순간은 몇 초였던 것 같기도 하고, 몇 분이었던 것 같기도 했으며 또 몇 시간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처음으로 알게 된 현실이었다. 희열이 온몸을 감쌌다. - 이것은 거짓이 아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라고 자기 스스로에게 외치려고 했다. 그때 또 다시 좁은 독방 속에서 아침 해를 흠뻑 받으며 앉아 있는 자신을 느꼈다.
그는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막을 길이 없었다. 그는 안경을 벗고 타월로 눌렀지만 눈물은 둑을 터뜨린 것처럼 한없이 쏟아졌다. 전율하는 환희는 전생명에 떨게 했다.
그는 눈물 속에서 ‘영산일회 엄연미산’이라는 말을 선명하게 몸으로 읽었던 것이다. 그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 이 삼대비법은 2천여년의 당초(當初), 지용천계의 상수로서 니치렌은 확실교주대각세존(確實敎主大覺世尊)으로부터 구결상승(口決相承)하였느라….
그는 기쁨에 몸부림쳤다. 그는 지금까지 니치렌 대성인의 삼대비법품승사를 배독할 때마다 항상 이 ‘구결상승’이란 무엇인가 하고 고민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사의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
- 저 6만 항하사의 대중 속에 한 사람은 바로 나였던 것이다. 틀림없이 상수는 니치렌 대성인이었을 것이다. 이 얼마나 장엄하고 선명한 구원의 의식이었던가. 그렇다면 나는 틀림없이 지용의 보살이었다!
그는 좁은 방을 돌고 있었다. 그리고 책상 앞으로 돌아오자 다시 용출품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는 책상을 치면서 ‘이대로다. 확실히 이대로이다.’라고 깊이 수긍했다.
다시 수량품으로 계속하여 차례차례 8품을 읽어 촉루품에 이르렀다. 각 품의 문자는 갑자기 넘치는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마치 옛날에 써 두었던 수첩을 되풀이해서 읽을 때처럼, 애매모호했던 의미를 지금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법화경을 이처럼 이해할 수 있게 된 자신의 마음의 불가사의함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격렬하고 깊은 감동 속에서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 좋다, 이것으로 나의 일생은 정해졌다. 오늘의 이 날을 잊지 않으리라. 나는 이 존엄한 대법(大法)을 유포하고 생애를 마치는 것이다!
그는 동시에 자신의 사명도 자각했다. 그리고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고 아득한 미래를 전망하면서 자신이 지금 45세라는 것을 상기했다.
자신의 나이를 떠올리자 그도 명치시대에 자란 사람답게, …공자가 생애를 되돌아보며 제자를 위해 연령과 사상의 이상적인 조화를 십년 단위로 설했던 도식(圖式)이 머리에 떠올랐다.
- 40에 不或(불혹)하고 50에 天命(천명)을 안다.
45세인 그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지각(知覺)한 것이다.
그는 성큼성큼 걸으며 무엇인가를 향해 외쳤다.
‘그보다 5년 늦게 불혹하고 그보다 5년 앞서 천명을 안다.’
이 외치는 소리를 들은 간수 중 한 사람이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도다 조세이의 독방을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사라졌다.
☞ 인간혁명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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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정말정말
감사드립니다 노고많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