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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 때문에 내 주변이 당하는 생고생>의 줄거리: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선택하신 사람의 주변은 그 사람으로 인해서 언제나 고난 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런 뜻을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피조물들이 기대하는 바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표현하십니다. 한 사람의 선민이 하늘에 계신 창조주의 아들다운 모습으로 나타나지 못하면 그렇게 될 때까지 주변이 고생이라는 뜻입니다.
나 때문에 내 주변이 당하는 생고생
(로마서 8:18~25)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나 때문에 내 주변이 당하는 생고생>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나 때문에 내 주변이 당하는 생고생”
제목은 나 때문에 나의 육체로 만나게 되는 주변의 모든 것들은 당하지 않아도 되고 겪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한다는 뜻입니다. 본문 18절 말씀은 앞 단락의 16~17절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이라고 시작되는 19절로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현재의 고난이 장차 받게 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는 내용이 핵심적입니다.
앞서 16절에서는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 뒤에 18절의 “현재의 고난”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고난”은 이어지는 19절의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는 내용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됩니다.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성령이 친히 증언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현재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되는 신분을 얻고, 아들 되는 신분으로부터 영광을 받게 된다는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현재의 고난”은 우리가 삶에서 겪게 되는 개인적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고난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2000년 뒤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십자가 고난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에 동참할 뿐입니다. 고난에 동참할 뿐이라서 우리의 육체가 창에 찔리는 것도 아니고 가시 면류관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난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일이 우리에게는 거부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본문에서 말하는 고난이 필요 없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으로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달라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피조의 세계에 있는 것들을 의식에서 있다고 느끼고 마음에서 좋다고 열망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상태에서 아무런 장애나 고난도 없이 삶을 진행시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의식과 마음이 육체로 만나는 피조물에 대해 있음과 좋음을 느끼는 상태를 삶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여야만 합니다.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열망하는 의식과 마음은 곧 우리의 영혼에 해당됩니다. 이 의식과 마음이 육체와 달라붙어 있는 상태로부터 분리시키는 과정을 꼭 이루어 내야만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삶의 현장에서 성령님이 나의 몸을 움직이시는 행위의 법이 되어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법으로 행위를 함으로 삶이 채워져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죄와 악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리해봅니다. 현재의 고난은 영혼에 해당되는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달라붙어 있는 상태가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면서 분리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현재의 고난”이라 말한 이유는 이러한 일이 날마다 순간마다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현재의 고난”과 연관하여 19절을 보면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피조물이 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고대한다고 하였을까요? 이상하고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20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상하고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이어집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피조물이 원해서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허무한 데 굴복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을 21절에서는 “썩어짐에 종노릇 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세상의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고 싶지도 않고 썩어짐에 종노릇을 하고 싶지도 않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억지로 그렇게 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러한 내용은 해석하기 쉽지 않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는 말씀이 갑자기 등장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 허무한 데 굴복하고 썩어짐에 종노릇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피조물이란 인간이 육체를 통해서 만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과 사물은 물론이고 산과 바다와 그 가운데 사는 모든 동식물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와 그 속에 있는 모든 가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피조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허무함이란 어떤 것일까요? 베드로전서 1장 24~25절을 보면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베드로후서 3장 10절을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허무함이란 이처럼 종말의 때에 풀어지고 없어지며 녹아내릴 수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담아서 허무한 데 굴복한다는 말씀을 풀어보자면 “피조물은 잠깐 있는 것처럼 시늉만 하다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썩어짐에 종노릇한다는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구약에서도 발견됩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1장 2~3절에서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하였습니다. 허무한 데 굴복하고 썩어짐에 종노릇 함은 이러한 헛됨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의 공백이 있습니다. 이 공백을 채우는 일에 있어서 이 세상 피조물은 썩어지고 허무하기에 아무리 가져도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피조물 중에는 마음을 채울 수 있을 만한 건더기가 없습니다. 가령 결혼을 해서 남편을 갖게 된 아내가 있습니다. 이 아내는 남편으로 마음이 채워지기를 기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을 채우는 일과 연관해서 남편은 아무런 건더기가 없는 존재입니다. 돈도 마찬가지이며 어떤 피조물일지라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허무한 데 굴복하고 썩어짐에 종노릇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가져도 마음을 채우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피조물의 입장에서도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억지로 그렇게 되도록 허락하셨을 뿐입니다. 피조물도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허무함의 존재가 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져도 썩어서 없어질 존재의 상태로부터 해방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께서 세상의 피조물을 향해 “너는 허무하게 되어야 한다! 너는 썩어지는 것을 본성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강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피조물은 원치 않았지만 허무하고 썩어짐에 종노릇 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피조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탄식할만한 일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허무함의 상태가 되어야 하나? 나는 왜 썩어서 없어져야 될 것에 종노릇 하고 있는가? 정말 싫다.”라고 여기는 상태입니다.
이제 이러한 말씀이 등장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9절을 보면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면 피조물도 더 이상 허무함에 굴복하지 않고 썩어짐에 종노릇 하지 않아도 되리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면 피조물의 입장에서도 있으나마나 한 것으로 지탱될 필요가 없기에 유의미한 일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피조물 또한 허무함에 굴복하고 썩어짐에 종노릇 하고 있으면서 간절히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탄식하는 가운데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마치 인간에 의한 환경 파괴에 대한 경고처럼 받아들이는 분들도 계십니다. 죄악 된 인간들에 의해서 세상이 망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그러한 측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종말의 때에 있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표현을 염두에 둔 것도 아닙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8절의 “현재의 고난”과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정죄함이 없습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의식과 마음, 즉 영혼이 육체에 달라붙어 있는 상태로부터 분리되어서 육체에 지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 영혼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하여 흐름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모습이고 구원의 모습이고 소망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흐르고 있음이 성령의 법을 따라서 행동함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습이 나타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포인트는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의식과 마음, 즉 영혼이 육체에 달라붙어 있던 상태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육체로부터 분리의 과정이 없으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없습니다.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달라붙어 있는 동안에는 육체가 만나는 것에서 있음과 좋음을 느끼게 됩니다. 육체도 피조물이지만 육체로 만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도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의식과 마음이 본래 있음과 좋음을 느껴야 할 대상은 피조물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강조하고자 피조물을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의식과 마음으로 육체를 통해 만나는 피조물을 향하려고 하는 성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을 띠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향하여 의식과 마음이 흘러가는 상태를 드러내지 못하고, 육체를 통해 만나는 피조물에게 의식과 마음이 흘러가는 경향성을 보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육체로 만나는 피조물을 전부 허무하고 썩어질 것으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을 드러내야만 하는 선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너희는 죄의 체질 때문에 물질로 이루어진 피조의 세계에서 의식이 있음을 느끼고 마음으로 좋음을 열망한다. 너희의 영혼이 자꾸만 피조물의 세계를 향하고 있으니 너희들 때문이라도 피조물을 허무하고 썩어질 것으로 규정하겠다.”라고 하는 것이 본문에 담긴 내용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마피아의 한 조직원이 조직의 돈을 훔쳐 도망갔습니다. 이제 마피아는 배반한 조직원을 불러들이기 위해 그의 가족들을 불러다 잡아놓고 도망 간 자에게 연락을 합니다. 돈을 가지고 돌아오지 않으면 가족을 다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이 가족들은 가장이 조직을 배반함으로써 생고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선민 때문에 피조물은 허무하고 썩어짐에 종노릇 하는 것으로 규정 당하게 되었습니다. 선민들의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육체를 통해 만나는 피조물을 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민의 택하심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아들다운 모습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선민이 육체로 만나며 의식과 마음이 향하게 된 모든 것들의 성질을 허무하고 썩어짐에 종노릇 하는 것으로 속박하셨습니다. “창조주인 나에게 와야 할 의식과 마음이 육체로 만나는 피조물을 향하여 가게 하였구나. 그렇다면 나는 네가 좋아하여 의식과 마음을 보낸 피조물을 허무한 것이 되게 하고 썩어짐에 종노릇하는 것으로 규정하겠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로마서 1장 25절을 보면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의식과 마음이 조물주가 아닌 피조물을 향하게 된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허무하고 썩어질 것으로 규정하셨습니다. 이것은 피조물의 입장에서도 원치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피조물조차도 우리를 향해 “제발 하나님의 아들답게 되어라! 당신은 나를 좋아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될 사람이다. 왜 너의 아버지인 창조주 하나님을 배반하느냐! 왜 너의 아버지인 하나님께 의식과 마음을 보내지 않느냐! 왜 피조물인 나를 좋아하는 바람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허무하고 썩어짐에 종노릇하는 무의미한 것으로 되게끔 규정하시게 하느냐! 제발 나를 좋아하지 말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의식과 마음이 육체로 만나는 피조물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열망하는 상태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일입니다. 이 십자가의 고난의 사정거리는 내 주변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미칩니다. 내가 십자가의 고난을 자처해서 빨리빨리 잘 죽으면 내 주변의 피조물도 생고생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선민으로 택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죽지 못한다면 이와는 반대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이 되기 위하여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따라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자꾸만 몸으로 만나는 피조물을 의식하고 좋아하기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하심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내 주변의 모든 피조물을 허무하고 썩어짐에 종노릇 하는 것으로 규정하십니다. 피조물을 아무리 가져도 아무리 좋아해도 허무하고 썩어질 것으로 굴복시키십니다. 피조물은 본래 허무하거나 썩어질 것으로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을 내가 좋아하는 바람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규정하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으로 드러나야 할 사람이 창조주를 향하지 않고 피조물을 향하게 된 것이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마음에서 계속 버렸습니다. 이러한 행동이 나타난 이유는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의식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감이 1등이었습니다. 또 아브라함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좋음이 1등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마음에서 아내 사라조차 계속 버렸고 그것이 행동으로도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삭을 번제단에 올려놓고 칼로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이렇게 사라도 버리고 이삭도 버리며 하나님만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전에는 어땠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나 이삭을 허무하고 썩어서 없어질 존재로 강제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아브라함은 선민의 조상이 되기로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믿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유전자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태어나게 해야 될 아브라함이 창조주 하나님보다 피조물인 아내 사라를 더 좋아했다면 어떨까요? 이러한 상태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대신에 아내 사라를 허무하고 썩어짐에 종노릇 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리십니다. 이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허무하고 썩어짐에 종노릇 할 존재가 아니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위하여 속박하십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버림으로써 피조물 대신 창조주 하나님께 의식과 마음을 보내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럴 때 사라는 만민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은 백 세에 얻은 이삭을 번제로 드림으로써 피조물 대신 창조주 하나님만을 사랑함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럴 때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축복된 약속이 이루어지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서도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람과 사물까지 주변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뜻과 의도대로 쓰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계획을 위한 준비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21절의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속량(贖良)은 곧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면 내 주변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허무하고 썩어짐에 종노릇 하는 상태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본래 갖고 계셨던 창조적인 계획과 의도 속에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나 없어질 것일지라도 주어진 시간 안에서 의미가 있는 것들로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맛있는 음식도 먹고 나면 배설물이 됩니다. 음식이 결국 배설물이 된다고 해서 안 먹을 수는 없습니다. 먹는 과정에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서 언급된 대로 세상은 다 녹아서 없어질 것들입니다. 내가 그것을 좋아할 때는 그저 없어질 것들일 뿐이었습니다. 음식을 먹는 과정이 제외되고 배설물처럼 허무하게 없어질 것만이 강조되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본래의 창조적인 목적을 가지고 의도하신 대로 계획하시고 쓰시지를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 대신 이삭을 좋아하였다면 이삭을 통해 이루시려는 모든 계획도 뒤로 젖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좋아하는 바람에 이삭은 무조건 썩어서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아무리 좋아할지라도 아무런 채움을 주지 못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리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본래 돈이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쓰임새가 있도록 계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된 자가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돈을 향하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돈을 벌려고 하고 돈 문제를 끌어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돈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대로 쓰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시지 않는 한 돈은 썩어질 것이고 허무한 것이고 백해무익한 것으로 만들어버리십니다.
“현재의 고난”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필요 없는 고난입니다. 선택받지 못했다면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달라붙어 있는 상태에서 육체로 만나는 피조의 세계를 마음껏 좋아하면 됩니다. 피조의 세계에 있는 가치들을 얻겠다고 뛰어가며 살면 됩니다. 그렇게 정죄함의 삶이고 단절된 사망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시작할 수 없습니다. 육체로 만나는 것들에 대해 의식과 마음이 달라붙어서 좋아하고 열망하려고 할 때마다 “현재의 고난”을 자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고난을 자처해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할 때에 의식과 마음이 육체와 분리됩니다. 그리고 의식과 마음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 아버지 하나님만 있다고 느끼고 아버지 하나님만 좋다고 열망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입니다.
이러한 “현재의 고난”을 자처함이 원활하게 잘 되면 나의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주변의 모든 피조물은 본래의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23절에서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 나의 몸부터 괴로워집니다. 나의 의식과 마음이 몸에 붙어서 하나님보다 몸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몸에서 의식과 마음이 떨어지도록 문제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내 몸은 본래 성령의 법을 따라서 움직이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이루실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의식과 마음이 몸에 달라붙어 있는 동안에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몸이 최고인줄 알고 소중하게 여기니까 하나님께서는 몸 자체를 불편하게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을 보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을 때까지 가시 곧 사탄의 사자라고 부를 만큼 큰 지병을 끌어안고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이 병이 없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이 병이야말로 의식과 마음이 몸에 달라붙지 못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병을 감사함으로 받고 아픔이 지속됨으로서 의식과 마음이 몸에 달라붙지 않게 분리의 상태를 유지해 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의식과 마음이 육체와 분리된 상태를 유지했던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피조물을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에베소에 가면 에베소 사람들이 주변인이었고, 빌립보에 가면 빌립보 사람들이 주변인이었습니다. 현재의 고난을 자처하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주변을 복 받게 합니다. 반대로 택함을 받았음에도 현재의 고난을 자처할 수 없다면 가는 곳마다 주변이 생고생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사람이 가는 곳에서 보고 듣고 하는 일들에 의식과 마음을 향하게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배반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본래의 쓰임새가 있습니다. 적어도 나를 통해서 주어지는 고생으로 인해 본래의 쓰임새가 발휘되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될 것입니다. 물론 그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현재의 고난”을 자처하지 못했다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적어도 나를 통해서 주어지는 고생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삭 같은 경우도 택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다면 이삭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젖혀두신 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이삭을 썩어짐에 종노릇 하고 허무함에 굴복시키는 용도로 사용하실 수밖에 없으셨을 것입니다.
내가 택함을 받은 사람이 분명하다면 어떻게 하든지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내 몸과 주변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자 최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택함을 받은 사람은 현재의 고난을 자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의 고난을 자처함에 있어서 게으르거나 쉼이 있거나 문제가 생긴다면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일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 주변 사람들이 생고생을 하게 됩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이 가시는 곳마다 주변 모두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으신 본래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시려는 창조의 축복 속에 담겨지는 곳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사도 바울처럼 아예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님으로써 “현재의 고난”을 자처함이 중단되지 않아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세상에 드러나게 하여 주심으로써 내 주변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적 축복 가운데 거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