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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휘는 우원(宇遠), 자는 군징(君徵), 호는 남파(南坡)이고, 그 선조는 남양인(南陽人)이다. 고려 금오위(金吾衛) 별장동정(別將同正) 홍선행(洪先幸)이 그 시조이다. 후대에 내려와 이조 참의 홍한(洪瀚)이 문장과 절행이 있었으나 연산조 무오년(1498, 연산군4)에 화를 당하고 후에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니, 이가 공에게 5대조가 된다. 증조 홍온(洪昷)은 장원서 장원으로 영의정 익녕부원군(益寧府院君)에 증직되었다. 조부 홍가신(洪可臣)은 학행으로 벼슬에 나와 홍주 목사(洪州牧使) 때 역적을 평정하여 청난 공신(淸難功臣)에 책훈되고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졌으며, 형조 판서로 치사하고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호는 만전(晩全)이다. 선고 홍영(洪榮)은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이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선비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이조 판서 허성(許筬)의 따님으로 만력 을사년(1605, 선조38) 7월 29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단정하고 중후하여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고, 10세에 이미 문예가 이루어져 명성이 드러났다. 갑자년(1624, 인조2)에 부친 판서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예를 지킴에 허물이 없었다. 병자년(1636)에 오랑캐의 난리를 피하여 형 두곡공(杜谷公 홍우정(洪宇定))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영남으로 넘어가 문수산(文殊山) 아래 우거하며 어머니를 봉양하고 글을 읽었다.
을유년(1645) 과거에 등제하였다. 다음 해 괴원(槐院)에 뽑혀서 정자, 저작을 거쳐 승정원 주서가 되었다. 정해년(1647)에 시강원 설서에 제수되고 예문관 검열에 천거되어 제수되고, 봉교와 대교를 역임하였다. 무자년(1648)에 규례대로 성균관 전적에 승진하였다. 기축년(1649)에 병조 정랑을 거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고,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예안 현감(禮安縣監)을 맡았다. 정사가 청렴하고 송사를 잘 다스렸으며 상소를 올려 민전(民田)의 허세(虛稅)를 제거하니, 강좌(江左)의 여러 고을이 모두 그 은택을 입었다.
임진년(1652, 효종3)에 모친상을 당하여 형이 살고 있는 문수에서 빈소를 지키며 상중의 슬픔과 예를 극진히 하였다. 갑오년(1654)에 상제를 마치고,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경연하는 자리에 들어갈 때마다 정밀하고 간절히 대답하여 상이 주의 깊게 들었다.
당시 조 숙원(趙淑媛)이 죄를 받아 죽었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아들도 섬에 갇혀 있었다. 상이 재이로 인해 구언하자, 공이 상소하여 강직한 말과 간절한 뜻으로 이들을 사면해 풀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가상히 여기고 장려하는 내용으로 온화한 비답을 내렸다. 상소가 나오자 조야가 놀라 진동하였고 혹자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으며 심지어 언문으로 번역해 전하고 외우는 자까지 있었다. 승지 이행진(李行進)이 상소 중의 말을 집어내어 공더러 역적 조씨를 신원하는 바탕이 되었다고 하고, 양사(兩司)가 연이어 공을 멀리 유배 보낼 것을 청하였다. 당시 황해도 관찰사 김홍욱(金弘郁)이 상소하여 강빈(姜嬪)의 억울함을 신원하였다가 심문을 받고 죽었는데, 연석에서 미안한 하교가 여러 차례 공에게 미치니, 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하여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태연히 명을 기다렸다. 겨울이 되어서야 대간의 계사가 비로소 중지되었고, 얼마 뒤에 두 왕자와 소현세자의 아들을 방환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이는 공의 말을 채택한 것이었다.
병신년(1656, 효종7)에 전적에 제수되었고, 얼마 뒤에 북청 판관(北靑判官)으로 나갔다. 정유년(1657)에 돌아와 성균관 직강이 되었다. 무술년(1658)에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고, 기해년(1659)에 예조 정랑에 제수되었고, 얼마 뒤 다시 병조 정랑이 되었다. 여름에 현종이 새로 즉위하자, 수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겨울에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나갔다. 다음 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임인년(1662, 현종3)에 의정부 사인에 임명되었다. 계묘년(1663)에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가 금방 다시 수찬이 되었다.
당시 효종의 상 때에 예를 의논하는 자들이 장렬대비(莊烈大妃)의 복제를 기년으로 정하였는데, 허목(許穆) 공이 상소하여 그 잘못을 지척하고 마땅히 삼년복을 시행해야 한다고 말하였다가 죄에 걸려 배척당해 폐해졌다. 윤선도(尹善道) 공이 또 상소하여, 상례를 논한 자들이 효종을 비하하고 통서(統緖)를 분리한 죄를 극언하였다가 변방에 유배되었다. 공이 상소하여, 윤선도의 말이 비록 과격하였으나 그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에 대한 설은 분명하여 바꿀 수 없는 것이며 또 선왕의 사부(師傅)이니 마땅히 방환하는 은혜를 내려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대간의 논계가 엄준하게 일어나 마침내 파직불서(罷職不敍)되었다.
기유년(1669)에 통례원 상례에 임명되고, 얼마 후 고성 군수(高城郡守)에 임명되었다. 공은 자신을 단속하고 백성을 위무하여 폐단을 제거하고 메마른 민생을 소생시켜 주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임자년(1672)에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해 조정의 명령을 받아 임소로 돌아갔다가 갑인년(1674)에 임기를 마치고 돌아갔다. 8월에 현묘(顯廟)가 훙서하고 숙종이 즉위하여 부교리로 불렀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이어서 고성 군수의 해유(解由)를 탕척하라는 명을 받았다.
을묘년(1675, 숙종1)에 부응교에 제수되자 또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여 마침내 사은하였다. 얼마 있다가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로 오르고, 금방 홍문관 부제학으로 옮겼다.
당시 이정(李楨), 이남(李枏) 형제가 옥사에 연루되었다.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상소하여 그들의 죄를 논하면서 맹모(孟母)의 일을 인용하였는데 특별히 지적하는 의도가 있는 듯하였다. 신하들이 부원군과 여러 대신을 불러 변론해 묻기를 청하였는데, 부원군은 대죄하고 입대하지 않고, 명성대비(明聖大妃)가 어좌의 뒤에 임하여 창 너머로 하교하여 이정 등의 죄를 들추어 헤아리니, 입시했던 신하들이 놀라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공이 물러나 상소하여 《주역》 〈가인괘(家人卦) 단(彖)〉과 〈고괘(蠱卦) 구이(九二)〉를 인용하여 가도(家道)에서 내외(內外)의 분변과 어머니를 유순하게 섬기는 의를 밝히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으로 유시하였다. 좌상 김수항(金壽恒)이 그 상소 중에서 인용하고 비유한 말이 마땅하지 못하다고 배척하니, 공이 또 상소하여 경서의 가르침을 인용해 밝히고, 이어서 체차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허락받지 못하였다.
얼마 뒤 이조 참의로 옮기고 실록찬수청 당상, 승문원 부제조를 겸하였으며, 또 성균관 대사성을 겸하였다. 상소해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가선대부로 오르고 사헌부 대사헌이 되어 예문관 제학, 동지경연사를 겸하였다. 공이 나이를 이유로 물러가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또 소를 올려 제도(諸道)의 밀린 환자를 탕척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군신들은 안 된다고 버티었으나, 상이 특별히 공의 말을 따라 탕척해 준 수효가 십만 섬이나 되니, 팔로(八路)가 모두 춤추며 기뻐하였다. 이윽고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몇 개월 만에 예조 판서에 탁배(擢拜)되었다.
병진년(1676, 숙종2)에 우참찬, 행 대사성에 제수되었다. 상소하여 학문에 힘쓰고 욕심을 절제하라는 경계를 올리니, 상이 가납하여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고 소는 궁중에 놔두었다.
정사년(1677)에 공이 조정에 있는 것을 즐기지 아니하여 외직으로 나가기를 구하여 강도 유수(江都留守)가 되었는데, 연석의 신하가, 공은 청렴 정직하고 문학하는 선비이니 조정에서 멀리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머물러 있게 하기를 계청하였다. 실록을 찬수한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의 자급에 오르고 얼마 뒤에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여 마침내 직무에 나아갔는데 주의(注擬)가 공평하니,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 청탁하지 못하여 문정(門庭)이 적막하였다.
무오년(1678) 봄에 세 번이나 상소하여 체직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니, 정고(呈告)하여 성묘하고 분황(焚黃)하기를 청하였다. 떠나기에 앞서 또 상소하여 병을 삼가고 몸을 보중하라는 경계를 올렸다. 여름에 돌아와서 일곱 번이나 사직하는 상소를 올려서야 겨우 체차되었는데, 금방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공이 늙었다는 이유로 체차되기를 매우 간절히 청하였으나, 상은 너그러운 비답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휴가를 얻어 온천에 목욕 가기를 청하니, 상이 비로소 허락하여 내의(內醫)에게 수행하도록 명하였는데, 공이 이번에 가면 영영 조정을 떠나려는 뜻이 있다고 연신(筵臣)이 아뢰니, 마침내 떠나는 것을 중지하도록 명하였다.
기미년(1679, 숙종5)에 다시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두 번 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니 마침내 사은하였다. 얼마 뒤에 상소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예조 판서에 임명되어 세 번 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다시 두 번 소를 올려 체직되어서, 마침내 안성(安城)으로 돌아왔다.
상소하여 소회를 진술하였다. 당시 영상 허적(許積)이 바야흐로 권세를 잡고 있었는데 상소 중에 대신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이 있으니, 상은 그 말이 영상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크게 화를 내고 삭출할 것을 명하였다가 대신의 말로 인해 관직과 자급을 도로 내려 주었다.
경신년(1680)에 허씨가 패망하고 시사가 크게 변하였다. 김수항, 민정중(閔鼎重)이 재상이 되어 공의 비리를 캐려고 하였으나 얻은 바가 없자, 공이 전에 올린 상소 중에 《주역》 단사를 인용한 것을 죄안으로 삼아서 상에게 아뢰어 명천(明川)으로 유배하였다. 계해년(1683) 우상 김석주(金錫胄)가 아뢰어 풀어 주고자 하니, 상이 그 말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는데 민상(閔相)이 안 된다고 버티어 마침내 문천(文川)으로 양이(量移)하도록 명하였다.
정묘년(1687, 숙종13) 7월 27일에 유배지에서 졸하니, 향년 83세였다. 공을 사모하던 경외의 사대부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고 돈과 재물을 내어 상에 필요한 물품을 갖추었다. 북청(北靑)과 고성(高城)의 백성들로 병을 묻고 상에 부의하는 이가 끊이지 않았다. 다음 해 2월 16일 안성 소만리(蘇萬里)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하였다. 기사년(1689)에 관작을 회복하라고 명하고 영의정에 추증하였으며,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하고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공의 전 부인은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부원군 이광정(李光庭)의 따님이다. 후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통덕랑 권겸(權謙)의 따님이다. 5남 6녀를 두었다. 장남 면(冕)은 직장이다. 차남은 지(篪)이다. 딸은 진사 채명귀(蔡命龜), 장령 윤상형(尹商衡), 현감 정적(鄭積), 김정수(金鼎壽)에게 시집갔다. 이상은 모두 이 부인(李夫人)의 소생이다. 세 아들인 담(䒞)ㆍ경(璄)ㆍ항(沆)과 성항(成沆)ㆍ강필대(姜必大)에게 시집간 딸 둘은 모두 권 부인(權夫人)의 소생이다.
면의 후사는 일지(日知)이고, 지는 후사가 없다. 담의 아들로는 일엽(日燁), 생원인 일환(日煥), 일휴(日休), 문과 급제해 찰방을 지낸 일항(日恒)이 있다. 경의 사자는 일인(日寅)이다. 항의 아들은 일빈(日賓), 일인(日寅)이다. 일지의 아들은 임(任)이고, 임의 아들은 효전(孝全)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일환의 아들 간(侃)은 생원과 진사에 모두 입격하였고, 천(儃)은 진사이다. 일휴의 아들 집(偮)은 생원이다. 일항의 아들 위(偉)는 진사이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강직한 데다 기국이 맑고 대범하여 쇠처럼 강하고 옥처럼 온화하며 빙벽(氷檗)의 지조라 할 만한 청고(淸苦)함을 지녔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를 극진히 하였고, 다른 사람을 사귐에 온화하면서도 절개가 있었다. 각고의 노력으로 학문에 힘써서 경전의 뜻을 깊이 궁구하였으며, 몸가짐이 빼어나 부화뇌동하여 다른 사람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면서는 청렴 정직으로써 스스로 갈고닦아 마음속에 지키는 바가 있으면 비록 맹분(孟賁)ㆍ하육(夏育)과 같은 장사라도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었으며, 분의상 말해야 할 것이라면 비록 임금의 뇌정 같은 위엄일지라도 피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고난과 낭패를 만났으나, 열성께서 그 충성을 살피시고 너그러이 용납하셨다. 만년에 더욱 임금과 뜻이 잘 맞아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니, 공은 임금의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극진히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특히 본원을 맑게 하고 바로잡는 논의와 재황(災荒)을 구휼하는 정사에 정성을 쏟아 여러 차례 소장을 올려 반복해서 뜻을 보였다. 그러나 세도가 통합되지 못하여 끝내 그 뜻한 바를 행하지 못하니 나이를 핑계로 예에 의거하여 치사하기를 청하는 글을 자주 올렸는데, 이윽고 경신년(1680, 숙종6)의 화가 일어난 것이다.
중하게 법망에 걸려 전후 8년 동안 궁벽한 변경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끝내는 고생스럽게 세상을 마쳤으니, 슬프다,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공의 숭고한 말과 올바른 의론은 역사에 남아 있고 맑고 높은 이름은 사대부 마음에 남아 있으며 그 근심하고 불쌍히 여겨 돌봐 주던 은혜는 인심에 남아 있으니, 공과 같은 자야말로 어찌 이른바 도로써 임금을 섬기는 대신(大臣)이 아니겠는가. 당파가 달라서 비록 호오가 다른 자라 할지라도 공더러 정직하고 깨끗한 군자라고 칭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얼마 안 있다가 성상의 감식(鑑識)이 거듭 밝아져서 노여움이 풀리자, 관직을 회복하고 작질을 증직하여 뒤미처 신하를 예우하는 은혜를 극진히 하였으며, 선비들이 거듭 호소하여 길이 사당에 제향을 모시게 되었다. 공의 도가 또한 신후(身後)에 펴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의 증손인 홍천(洪儃)이 5백 리를 건너와 나에게 그 유택의 지문을 청하였다. 내 생각건대 학식도 없는 후배가 어찌 감히 성대한 덕을 모의(模擬)하여 분수를 돌아보지 않는 잘못을 범할 수 있겠는가. 다만 깊이 생각해 보면, 당세에 따로 이 붓을 잡을 자가 있을 것인데 욕되게도 보잘것없는 나의 글을 요구하는 것은 아마도 질박하고 부화하지 않아서 선생의 뜻에 부합한다고 여겨서일 것이다. 행적을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밝고도 진실한 만전(晩全) 선생 / 顯允晩翁
일찍이 퇴계 문하 종유했네 / 早游陶門
덕업이 높고도 빛나서 / 德尊業光
후손에게 복을 남겼지 / 垂裕後昆
공이 만전의 손자가 되어 / 公爲孫子
그 가문을 훌륭히 이어서 / 克世厥家
정제된 금 고결한 옥과 같이 / 金精玉潔
안팎으로 조금도 흠이 없네 / 表裏無瑕
홀을 바로잡고 조정에 서선 / 正笏立朝
풍우 속에서도 홀로 외쳤고 / 風雨孤雊
임명받아 고을을 다스릴 땐 / 分符莅郡
은택이 미쳐 백성이 살졌네 / 膏澤下腴
예문관에 홍문관을 거치고 / 鑾坡玉署
마침내 이조의 총재가 되어 / 遂長東銓
상의 은총이 한창 융성하나 / 睿眷方隆
노신의 힘은 이미 쇠하였네 / 臣力旣愆
예에 근거하여 벼슬 그만두고 / 引禮告老
호연히 고향에 돌아가렸더니 / 浩意歸臥
상의 말씀에 “경이 아니면 / 上曰匪卿
누가 내 허물 보필하리오 / 孰弼予過
그대는 멀리 떠나려 말고 / 爾無遐心
내 좌우에 있으라” 하니 / 在予左右
성상의 지우에 감격하여 / 感激知遇
물러갔다가 다시 나왔네 / 旣退旋就
고충을 스스로 다짐하매 / 孤忠自結
뭇 시기와 노여움이 일어났네 / 衆怒旁妒
은총이 끝까지 마치지 못하여 / 際遇靡終
멀리 궁벽한 변경에 유배되니 / 遠投窮塞
늙은 몸으로 귀양살이 당해도 / 白首行吟
한 조각 충정은 고침이 없었네 / 丹心無改
운이 말년에 다하니 / 運極濛汜
나라의 운이 병든 것이라 / 邦國之瘁
송 백기 당 경여와 / 伯紀敬輿
세상은 달라도 행적은 같네 / 異世同軌
성심(聖心)이 화란을 후회하여 / 天心悔禍
뇌우가 일어나 해괘가 되었네 / 雷雨作解
공에게 작질을 추증하고 / 秩贈上公
기호의 유생이 사당에 모셨네 / 祠許湖紳
한때의 굽힘이 / 一時之屈
만세의 펴짐이라 / 萬世之伸
소만리의 언덕에 / 蘇萬之原
우뚝한 봉분 있네 / 有封若堂
감히 훼상치 말지니 / 毋敢毁傷
군자가 쉬는 곳이라 / 君子所藏
[주-D001] 청난 공신(淸難功臣) : 대본에는 ‘靖難功臣’으로 되어 있는데, 정난 공신은 1453년(단종1)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김종서(金宗瑞) 등의 세력을 제거한 한명회(韓明澮)ㆍ권람(權擥) 등 세조의 측근들을 봉한 것이고, 청난 공신은 선조 때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한 홍가신(洪可臣) 등을 책훈한 것이다. 본 기사는 선조 연간의 사건이므로 ‘靖’을 ‘淸’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2] 조 숙원(趙淑媛)이 …… 죽었고 : 조 숙원은 인조의 후궁인 조 귀인(趙貴人)이다. 김자점(金自點)의 손자인 김세룡(金世龍)을 사위로 삼아 여러 세력과 결탁하고 아들인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을 추대하고자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로 1652년(효종3) 사사되었으며 아들은 모두 유배되었다. 《孝宗實錄 3年 3月 4日》[주-D003] 김홍욱(金弘郁) : 1602~1654. 자는 문숙(文叔), 호는 학주(鶴洲),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654년 효종의 구언 교지에 응하여 당시 가뭄이 강빈(姜嬪)의 억울한 죽음 때문이라고 하였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서 곤장을 맞고 죽었다. 1718년(숙종44) 강빈의 위호를 회복한 뒤에야 복관되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주-D004] 두 왕자 : 역모로 사사된 조 귀인의 두 아들인 숭선군 이징과 낙선군(樂善君) 이숙(李潚)을 말한다.[주-D005] 공이 …… 말하였는데 : 송시열(宋時烈)이 예를 잘못 적용했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윤선도(尹善道)를 변호한 이 상소로 홍우원(洪宇遠)은 이후 서인들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소의 자세한 내용은 한국문집총간 106집에 수록된 《남파집(南坡集)》 권5 〈사수찬겸부소회소(辭修撰兼附所懷疏)〉에 실려 있으며, 《현종실록》 4년 4월 19일 기사에도 전문이 실려 있다.[주-D006] 이정(李楨) …… 연루되었다 :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인 복창군(福昌君) 이정,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 형제는 삼복(三福)으로 지칭되었는데 종친으로서 남인들과 연합하여 권세가 있었다. 이때 명성대비(明聖大妃)의 부친인 김우명(金佑明)이 상소하여 복창군 형제가 궁중의 나인들과 사통하였다고 고발하여, 금부에서 조사하게 하였다. 《肅宗實錄 1年 3月 12日》 이 사건은 나인들만 처벌을 받고 묻혔으나 후에 결국 경신대출척 때 역모에 연루되어 허견(許堅)에 의해 추대되었다는 혐의로 남인 정권과 함께 몰락하였다.[주-D007]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 인용하였는데 : 김우명(金佑明)이 복창군의 죄상을 논하며 올린 차자에 “여러 사람의 참소하는 말이 어미로 하여금 증자(曾子) 같은 자식도 의심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은 예전에도 있었으나, 맹모삼천(孟母三遷)의 가르침이 이간하는 말을 초래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여, 자전과 임금 사이를 이간하는 무리가 있다는 말을 비치고 임금이 효성으로 자전의 뜻을 받들 것을 강조하였다. 《肅宗實錄 1年 3月 12日》[주-D008] 공이 …… 밝히니 : 이 상소는 한국문집총간 106집에 수록된 《남파집(南坡集)》 권5에 〈인가인괘소(引家人卦疏)〉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주-D009] 상소하여 소회를 진술하였다 : 홍우원이 마지막으로 〈다시 겸직을 체차해 주기를 청하고 이어서 소회를 첨부한 상소〔復乞遞兼帶仍附所懷疏〕〉를 올린 것을 말한다. 허적(許積)과 대립하다가 물러난 청남(淸南)의 영수 허목(許穆)을 두둔하는 내용이다. 한국문집총간 106집에 수록된 《남파집》 권8과 《숙종실록》 5년 7월 18일 기사에 소의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주-D010] 공이 …… 것 : 1675년(숙종1)에 〈인가인괘소(引家人卦疏)〉를 올려 명성대비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자제하게 할 것을 요청했던 것을 말한다.[주-D011] 성상의 …… 되었다 : 1689년(숙종15) 기사환국으로 정국이 바뀌자 관작을 회복하고, 다음 해 영의정에 추증하였으며, 1692년 홍우원의 거주지였던 안성(安城)의 유생들이 백봉서원(白峯書院)에 위판을 봉안하였다.[주-D012] 홀로 외쳤고 : 시속을 따르지 않고 절개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한유(韓愈)가 “어지러운 비난을 만났으나 어두운 새벽에 홀로 울었으니 저 소인들의 부언이 아무리 많다 하나 어찌 욕이 되리오.〔遭唇舌之紛羅 獨陵晨而孤雊 彼憸人之浮言 雖百車其何詬〕”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韓愈文集 卷22 祭郴州李使君文》[주-D013] 노신의 …… 쇠하였네 : 《서경》 〈진서(秦誓)〉에 “늙고 어진 선비는 힘이 이미 쇠했으나 내 오히려 둘 것이요.〔番番良士 旅力旣愆 我尙有之〕” 하였는데, 용맹 있고 구변 있는 신하보다는 나이 많은 모신(謀臣)의 말을 따르겠다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75세가 넘어 이조 판서가 된 홍우원의 형세가 고립된 퇴조기였음을 가리킨다.[주-D014] 백기(伯紀) : 송나라의 충신 이강(李綱, 1083~1140)의 자이다. 휘종(徽宗) 때 금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해 유배를 가기도 한 강경파인데 당시 태학생과 군민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宋史 卷358, 卷359 李綱列傳》[주-D015] 경여(敬輿) : 당나라 육지(陸贄, 754~805)의 자이다. 덕종(德宗) 때 한림학사로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내상(內相)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주자(朱泚)의 반란 때 하루에 몇백 통의 조서를 맡아서 조금도 막힘이 없이 처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후인들이 이를 모아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를 만들어 소차의 전범으로 삼았다. 《新唐書 卷157 陸贄列傳》[주-D016] 뇌우가 …… 되었네 : 《주역》 〈해괘(解卦) 상(象)〉에 “우레와 비가 일어남이 해이니 군자가 보고서 과실을 용서하고 죄를 너그러이 처리한다.〔雷雨作解 君子以 赦過宥罪〕”라고 하였는데, 보통 죄과를 용서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기사환국으로 정국이 바뀌어 임금이 홍우원을 용서하는 은혜를 내린 것을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