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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 잉태를 다시 생각하다
― 동정녀 탄생과 교리의 성벽 너머
나는 최근 M. 데이비드 리트와의 책을 읽으면서 조금 불편한 질문 하나를 만나고 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정말 처음부터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의미였을까?
물론 나는 오랫동안 그렇게 배워왔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께서 태어나셨고, 이것은 예수의 신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며, 예수께서 죄 없이 태어나셨다는 것과도 연결되고, 결국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신학적 설명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리트와의 책을 읽으면서 조금 다른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신적 잉태(divine conception)’라는 이야기가 예수에게만 나타나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는 신적 잉태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특별한 인물, 영웅, 통치자 또는 신적 존재와 관련된 인물의 특별한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던 하나의 문화적·문학적 언어였다. 리트와는 플루타르코스가 플라톤의 탄생을 설명하면서 아폴론의 pneuma와 dynamis를 이야기하는 사례 등을 통해 이런 문화적 배경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누가가 예수의 탄생을 신적 잉태의 이야기로 기록했다면, 누가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1. 신적 잉태는 예수에게만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예수의 신적 잉태가 특별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누가의 주장은 분명 특별하다.
문제는 그 특별함을 표현하는 방식 자체가 고대 세계에서 예수에게만 독점적으로 사용되었던 언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들으면 곧바로 기독교 교리를 떠올린다.
하지만 1세기의 사람들은 달랐을 것이다.
그들에게 신적 잉태라는 이야기는 낯선 언어가 아니었다.
오히려 특별한 인물의 신적 기원을 설명할 때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익숙한 문화적 코드였다.
그러니까 누가가 신적 잉태 이야기를 사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예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났다.”
라는 의미를 자동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누가는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여 예수의 특별한 기원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리트와가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고대의 신적 잉태 이야기는 단순히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라기보다, 당시 사람들이 특별한 인물의 기원을 설명하고 그 인물에게 신적 지위를 부여하는 데 사용하던 하나의 문화적·문학적 형식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달라진다.
“예수에게 동정녀 탄생이 있었는가?”라는 질문만 붙들 것이 아니라, “누가는 왜 예수의 탄생을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2. 그렇다면 누가는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그렇다고 해서 누가의 이야기를 단순히 “당시에도 이런 신화가 있었으니 누가도 그것을 베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너무 단순한 결론이다.
리트와가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고대 세계의 공유된 지적·문화적 환경이다. 복음서 저자들도 그 세계 밖에 살고 있지 않았다. 복음서의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신화적·문학적·역사서술적 형식을 사용한다.
그런데 누가는 그 형식을 아무렇게나 가져온 것이 아니다.
누가가 사용하는 배경에는 이스라엘의 성경 이야기도 있다.
사라와 한나, 그리고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와 같은 전통들이 누가의 서사 속에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누가의 메시지는 단순히
“예수도 다른 영웅들처럼 신에게서 태어났다.”
정도가 아니다.
누가는 자신의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던 문화적 언어를 사용하면서 예수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인물이며, 하나님의 구원 행위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가진 인물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문화적 형식과 그 형식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구별해야 한다.
신적 잉태라는 형식은 당시 세계에서 공유되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가 그 형식을 가지고 무엇을 말하느냐는 누가의 신학이다.
3. 신적 잉태와 동정녀 탄생은 같은 말인가?
이 지점에서 나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신적 잉태’와 ‘동정녀 탄생’을 거의 같은 말처럼 사용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같은 말이 아니다.
Divine Conception은 ‘신적 잉태’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리고 Virgin Birth는 ‘동정녀 탄생’이다.
신적 잉태라는 말은 훨씬 넓다.
신적인 존재가 인간의 탄생에 특별한 방식으로 관여했다는 이야기 전체를 포함할 수 있다.
반면 동정녀 탄생은 그 가운데 하나의 특정한 형태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에서는 이 둘이 점점 하나의 교리적 묶음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그 교리의 의미를 다시 성경 본문 속으로 가져간다.
바로 여기서 내가 최근 계속 생각하게 된 질문이 나온다.
복음서가 교리를 만들어낸 것일까?
아니면 교리가 복음서를 읽는 방식이 된 것일까?
4. 복음서가 교리를 만들었는가, 교리가 복음서를 해석했는가?
물론 이것을 양자택일로 만들 필요는 없다.
아마 실제 역사는 훨씬 복잡했을 것이다.
어떤 전승이 있었고, 그것이 복음서에 기록되었고, 교회가 그것을 해석했고, 그 해석이 교리가 되었고, 그렇게 형성된 교리가 다시 복음서를 읽는 렌즈가 되었다.
즉,
전승 → 복음서 → 해석 → 교리 → 다시 복음서 해석
이라는 순환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복음서를 읽으면서 본문 자체가 말하는 것과 후대의 교리가 그 본문에 덧입힌 것을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예를 들어 동정녀 탄생을 생각해 보자.
처음에는 예수의 특별한 신적 기원을 말하는 이야기였을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에 여러 신학적 의미가 연결되었다.
예수의 신성.
예수의 무죄성.
원죄.
대속.
그리고 마침내 정통 기독론.
물론 이런 신학적 연결들이 모두 아무 근거 없이 만들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본문의 처음 의미와 후대의 교리적 해석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후대의 교리는 본문을 단순히 발견한 것이 아니라, 본문에 대해 하나의 해석을 제공했다.
그리고 그 해석이 다시 본문을 읽는 기준이 되었다.
5. 1세기의 ‘신적 지위’와 오늘의 ‘신적 지위’는 같지 않다
여기에서 더욱 중요한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1세기의 문장을 읽으면서 너무 쉽게 4세기의 교리를 집어넣는다.
예를 들어 누가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거의 자동적으로 니케아 이후의 의미를 생각한다.
‘하나님의 아들’
→ 삼위일체
→ 성부와 동일 본질
→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
하지만 누가의 독자가 처음부터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고대 세계에서 ‘신적 기원’, ‘신의 아들’, ‘신적 지위’라는 표현은 오늘날의 삼위일체적 존재론과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았다.
황제나 영웅에게도 신적 기원이나 신적 지위를 부여하는 표현이 사용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후대의 교리를 성경 본문 안으로 거꾸로 집어넣는다.
그리고 나서
“성경이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쩌면 순서를 뒤집어야 할지도 모른다.
본문이 처음 어떤 세계에서 어떤 언어로 무엇을 말했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그다음에 교리가 어떻게 그 본문을 해석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
이것이 내가 말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기다.
6. 사실성보다 진실성
이 지점에서 나는 리트와의 ‘계보’에 관한 논의와 ‘신적 잉태’에 관한 논의가 서로 연결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계보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계보를 보면 먼저 묻는다.
“이 이름들이 역사적으로 정확한가?”
그러나 고대인들에게 계보는 단순히 현대적인 의미의 가족관계증명서가 아니었다.
계보를 통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의미를 가진 사람인지를 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계보의 가치는 단순한 사실성에만 있지 않다.
진실성이라는 차원이 있다.
신적 잉태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읽으면서 곧바로
“현대 과학의 기준으로 이것이 실제 생물학적 사건이었는가?”
를 묻는다.
물론 그 질문 자체를 금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고대의 저자가 그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가장 먼저 의도했던 질문이 과연 그것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
누가는 예수의 생물학적 출생 과정을 설명하는 현대의 산부인과 의사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 통용되던 문화적·문학적 언어를 통해 예수가 누구인가를 말하고 있다.
리트와가 말하는 신적 잉태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면 바로 이 지점이 보인다.
7. 그래서 나는 ‘동정녀 탄생’을 다시 읽어보려 한다
그렇다면 동정녀 탄생을 믿지 말자는 것일까?
나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더 깊이 읽어보자는 것이다.
교리의 문장 하나를 붙잡고 그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를 결정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왜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었는지,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누가는 어떤 문화적 언어를 사용했는지,
그리고 교회는 그 이야기를 수백 년 동안 어떻게 해석해 왔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한 걸음 물러나면 오히려 복음서가 더 흥미로워진다.
복음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교리를 반복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증언한 책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교리는 그 증언을 이해하기 위해 교회가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 온 해석의 결과로 보인다.
8. 여기에서 ‘메타적인 기독교’가 가능해진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가 나아갈 길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기독교가 계속해서
“우리의 교리만 절대적으로 옳다.”
라는 방식으로 자신을 방어한다면, 결국 교리는 성벽이 된다.
동정녀 탄생도 그렇게 사용될 수 있다.
처음에는 예수에 대한 신앙의 한 표현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기독교인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경계선이 되어 버린다.
미국 근본주의가 근대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응하면서 동정녀 탄생 같은 항목을 기독교 신앙의 근본으로 내세웠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동정녀 탄생은 더 이상 예수가 누구인가를 증언하는 이야기만이 아니다.
기독교와 비기독교를 가르는 경계표지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한 걸음 더 물러서고 싶다.
왜 이것이 경계표지가 되었을까?
어떻게 하나의 복음서 이야기가 교리가 되었을까?
어떻게 그 교리가 다시 성경을 읽는 기준이 되었을까?
그리고 왜 어떤 시대에는 그것이 기독교 정체성을 지키는 핵심적인 기준이 되었을까?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내가 말하는 ‘메타적인 기독교 해석학’이다.
거창한 새로운 신학 학파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기독교가 무엇을 말하는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어떻게 그렇게 말하게 되었는지를 보는 것.
성경만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어 온 기독교의 역사까지 함께 읽는 것이다.
교리만 믿는 것이 아니라,
그 교리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성경 해석의 렌즈가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9. 이것은 교리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이런 작업을 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결국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는 것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리를 우상화하지 않기 위해 교리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다.
교리는 필요하다.
교회는 자신의 신앙을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하지만 교리는 복음 그 자체와 동일하지 않다.
교리는 복음에 대한 교회의 해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리를 존중하면서도 교리보다 한 걸음 앞선 자리, 곧 복음서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에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우리가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으면 진짜 기독교인이 아니다.”
라는 방식으로 기독교의 문을 닫는 것보다,
“1세기의 사람들은 왜 이런 방식으로 예수의 기원을 이야기했을까?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누가는 예수에 대해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라고 질문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다.
그렇게 질문한다고 해서 예수에 대한 신앙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10. 교리의 성벽을 넘어
돌이켜보면 나의 지난 14년의 구도 여정도 결국 이런 방향으로 흘러온 것 같다.
처음에는 내가 믿는 교리가 진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성경을 더 읽게 되면서 교리와 성경 사이에 미묘한 간격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역사와 과학을 공부하면서 성경이 기록된 세계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교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을 다시 해석해 보는 것.
나는 이것을 ‘메타적인 기독교’라고 불러보고 싶다.
기독교를 버리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안에 있으면서 기독교를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믿는지뿐 아니라,
왜 그렇게 믿게 되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내가 성경에서 무엇을 읽는지뿐 아니라,
왜 성경에서 그것을 읽게 되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이 정말 복음 그 자체인지, 아니면 오랜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교리적 해석까지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전달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다시 생명의 바다로
그래서 나는 이제 동정녀 탄생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그것을 단순히 현대 과학과 싸우는 기적의 교리로 붙잡고 싶지 않다.
또 그것을 단순한 고대 신화라고 폐기하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그 이야기가 탄생했던 세계로 돌아가 보고 싶다.
신적 잉태라는 고대의 언어를 통해 누가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듣고 싶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이후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교리가 되고, 다시 성경을 읽는 기준이 되었는지도 살펴보고 싶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구도의 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교리의 성벽 안에서 안전하게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기보다,
진리를 향해 다시 항해하고 싶다.
복음서를 읽고,
그 복음서가 태어난 세계를 읽고,
교회의 역사를 읽고,
내가 가진 신앙의 틀까지 다시 읽으면서.
그러다 보면 어쩌면 우리는 기독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처음 증언하려 했던 그 복음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성을 붙잡기 전에 진실성을 묻고,
교리를 붙잡기 전에 복음서를 다시 읽고,
교리의 성벽을 세우기 전에 그 성벽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
나는 그것이 오늘의 기독교가 다시 배워야 할
구도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