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과거의 애플은 왜 실패했나
사과 밭에서의 탄생 1955년생인 스티브 잡스는 실리콘밸리의 발상지인 샌프란시스코 남부에 있는 팰러앨토에 살고 있었다. 그는 오리건주의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칼리지에 진학했지만 첫 학기 만에 학업을 포기했다. 적성도 맞지 않는 데다가 평범한 노동자 부부에게 입양된 그로서는 양부모에게 학비를 의지하는 것이 마음 편치 않았다. 그래서 학업을 중단한 그는 게임회사인 아타리(Atari)에 입사지원서를 냈다. 아타리의 인사 담당자는 긴 머리에 히피스타일인 그를 밤에만 근무하는 조건으로 채용했다. 스티브는 아타리에 근무하면서 동네 선배인 워즈니악과 함께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데 몰두했다. 당시 워즈니악은 휴렛펙커드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게임을 좋아해서 밤에는 스티브와 함께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에 매달리곤 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워즈니악이 컴퓨터의 주요 부품 중 하나인 인쇄회로기판(PCB)을 개발했다. 스티브는 인쇄회로기판의 사업가능성을 확신하고 워즈니악에게 동업을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워즈니악과 스티브는 1976년 애플 컴퓨터를 창업하게 된다. 스티브는 자신이 몰고 다니던 폴크스바겐을 처분하여 마련한 1,300달러를 가지고 차고에 사무실을 차렸다. 회사 이름은 ‘애플’로 지었다. 스티브는 사과를 좋아해서 그의 방에는 늘 일하다가 한 입 베어 먹고 남긴 사과가 몇 개씩 있었다. 그래서 애플의 로고는 한 입 깨물고 남은 사과 ‘바이트 애플’로 정해졌다. 바이트(bite)는 컴퓨터의 비트(bit), 바이트(byte)와 발음이 유사해서 사람들에게 친숙한 느낌을 주었다. 지금도 이 로고는 애플을 상징하는 최고의 가치다.
워즈니악은 기술개발을 맡고 스티브는 경영과 마케팅을 맡았다. 스티브 잡스는 샘플로 만든 인쇄회로기판을 들고 여러 회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에 이후 컴퓨터 체인 상점으로 발전하게 되는 바이트 숍(Byte Shop)의 폴 테럴에게서 드디어 첫 주문을 받게 된다. 개당 500달러에 50개를 사겠다는 주문이었다. 단돈 1,000달러도 없었던 그들에게 2만 5,000달러어치의 주문은 대단한 것이었다. 애플Ⅰ의 판매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개인용 컴퓨터 회사인 코머도어(Commodore)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해왔다. 현금 10만 달러와 스톡옵션, 연봉 3만 6,000달러 지급이 채용 조건이었다. 하지만 스티브는 제안을 거절했다. 만약에 코머도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오늘날의 애플을 없었을 것이다.
골리앗에 도전하는 다윗 1976년, 애틀랜티시티에서 열린 제1회 PC축제에 스티브 잡스와 워즈니악은 애플Ⅰ을 출시했다. 그러나 애플의 제품은 모니터도 없고 키보드도 없는 단순한 인쇄회로기판 상태였기 때문에 참으로 보잘 것 없었다. 스티브 잡스는 여기서 새로운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스티브와 워즈니악은 소프트웨어(OS)를 장치하고 키보드를 달아서 데이터 입력과 프로그래밍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완전한 PC를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인쇄회로기판과 키보드를 하나로 결합한 박스를 만들 경우 냉각팬을 달아야 하는데 이 팬 소음이 골칫거리였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열이 나지 않는 회로를 설계해야 했다. 이 일을 담당할 엔지니어를 고용하기 위해서는 고액 연봉을 줘야 하고, 개발과 마케팅을 위해서도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스티브는 사업계획서를 만들어서 투자자들을 찾아다녔다.
첫 투자자는 반도체 회사인 인텔에서 마케팅을 담당했던 마이크 마쿨라였다. 그는 9만 1,000달러를 투자했으며, 은행에서 추가로 25만 달러를 대출받을 수 있도록 사업계획서를 작성했다. 마쿨라의 동참으로 애플의 회사 지분은 스티브 잡스, 워즈니악, 마쿨라가 3분의 1씩 소유하게 되었다. 1977년 1월 3일, 애플은 주식회사로 전환하여 새롭게 출발했고, 그 해 4월 마침내 애플 Ⅱ의 상용화가 이루어졌다. 6컬러의 모니터와 키보드, 디스크드라이브와 1메가헤르츠의 프로세서, 4킬로바이트의 메모리가 내장된 애플Ⅱ는 컴퓨터산업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판매량이 몇 만 대에 머물렀지만 후속 모델이 계속 출시되면서 판매량이 백만 대를 넘어섰다. 스물 두 살의 스티브 잡스는 PC라는 새로운 상품을 개발함으로써 커다란 성공과 부를 거머쥐게 되었다.
애플의 성공은 대형컴퓨터업체인 IBM에게도 위협적이었다. 하위 층에 있는 고객들을 애플이 흡수하는 바람에 점차 대형컴퓨터 구매고객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애플을 견제할 만한 신제품 개발이 그들의 당면과제가 되었다. 8비트짜리 컴퓨터인 애플Ⅱ가 출시된 지 4년 뒤인 1981년 8월, IBM에서 첫 퍼스널컴퓨터를 출시했다. IBM에서 하드웨어를 만들고 마이크로소프트의 MS-DOS를 운영체계로 채택한 이 컴퓨터는 인텔의 16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인 8088과 16킬로바이트의 메모리, 그리고 디스크드라이브를 장착했으며, 흑백 모니터에 80글자로 24줄을 표시할 수 있었다. 가격은 1,565달러(최저 기준)였다.
스티브 잡스가 보기에 IBM의 신제품은 크고 투박했으며 새로운 기술이랄 것도 없는 데다 사용법도 어려웠다. 반면 애플의 제품은 더 작고 저렴하며 성능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스티브는 IBM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는 곧바로 《월스트리트 저널》에 전면광고를 냈다. “IBM의 PC 시장 진출을 환영하며, 개인용 컴퓨터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애플이지만, 보다 많은 개인들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책임 있는 경쟁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IBM의 10분의 1 크기밖에 안 되는 회사의 광고치고는 꽤나 오만한 것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사람들에게 거대한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의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스티브의 예상대로 애플은 이 광고로 인해 높은 인지도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성공은 애플이 아닌 IBM이 거머쥐었다. 비즈니스 고객들은 크기보다는 소프트웨어에 관심이 있었고, 가격도 기존의 것보다 저렴해진 IBM PC를 선호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작은 회사인 애플보다는 IBM이라는 브랜드를 신뢰했다. IBM의 추격으로 1983년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 애플의 시장 점유율은 26퍼센트, IBM이 17퍼센트였으나 다음해에는 1, 2위가 역전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기술 집착의 좌뇌경영 이제까지 애플 제품은 워즈니악이 설계한 제품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설계한 PC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스티브는 개발 중이던 매킨토시(Macintosh) 프로젝트를 직접 책임지고자 했다. 그는 매킨토시 개발팀을 별도의 건물에서 운영했고 모든 디자인과 운영체제 등을 직접 결정했다. 스티브와 개발팀은 사용자가 그래픽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를 채택했다. 당시만 해도 컴퓨터는 조작에 필요한 명령어를 키보드로 입력해야 했기 때문에 작동이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명령어를 상징하는 아이콘(icon)이 처음으로 매킨토시에서 등장된 것이다. 즉 초보자들도 그림으로 상징화된 아이콘을 마우스로 클릭만 하면 작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로선 대단히 획기적인 기술이었기에 스티브 잡스는 성공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킨토시의 개발이 끝나갈 무렵인 1983년 말, 스티브는 대규모의 광고계획을 세웠다. 그는 <에이리언>의 영화감독 리들리 스콧에게 광고제작을 의뢰했고, 광고 효과를 높이기 위해 미식축구 슈퍼볼 경기 때 첫 광고를 내보내기로 했다. 슈퍼볼 텔레비전 광고는 1회에 100만 달러였으니 대기업들도 부담스러워할 만한 금액이었다. 애플은 광고제작비로도 75만 달러를 썼다. 스티브는 제작진에게 ‘따귀를 맞은 듯한 충격을 줄 수 있는 광고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광고는 그의 바람대로 단숨에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광고는 조지 오웰(George Owell)의 소설 《1984년》을 차용한 것으로, 제복을 입은 노동자들이 강당에 앉아 있고 빅 브라더(오웰의 소설에 나오는 감시자)가 대형 스크린을 통해 명령을 내리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때 경비대에 쫓기는 한 소녀가 강당으로 뛰어 들어와 스크린을 망치로 내리치면서 다음과 같은 멘트를 한다. “1984년 1월 24일은 애플이 매킨토시를 소개하는 날입니다. 여러분은 왜 우리의 ‘1984년’이 조지 오웰의 《1984년》과 다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매킨토시의 스펙터클한 광고는 대성공을 거두어 뉴스에서까지 소개되었다. 수백만 달러의 홍보 효과가 ‘공짜’로 이루어진 셈이다. 다음 날부터 사람들은 애플 매장으로 몰려들었다. 주문은 폭주하였고 출시 100일 만에 7만 대 판매도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막상 결과는 기대했던 것보다 초라했다. 매킨토시를 보러 온 사람들이 IBM으로 눈길을 돌렸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개발자의 기술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실제 컴퓨터 사용자를 얼마나 만족시키느냐 하는 점이었다. 고객들은 크기보다는 소프트웨어에 관심이 있었고 작은 회사인 애플보다는 IBM이라는 브랜드를 신뢰했다. 스티브는 기술이 뛰어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좌뇌(左惱) 중심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가뜩이나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애플에게 매킨토시의 실패는 치명적인 손실을 안겨주었다.
설립자가 축출되다 스티브는 CEO가 되기를 원했지만 이사회에서는 그를 CEO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인물을 물색했다. 스티브는 CEO가 될 수 없다면 자신이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차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떠올린 사람이 펩시콜라의 회장인 존 스컬리(John Sculley)였다. 그는 마케팅 전문가였지 컴퓨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가 회사를 운영한다면 기술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할 것이라는 생각에 스티브는 스컬리의 영입을 추진했다. 스컬리는 연봉 100만 달러, 보너스 100만 달러, 그리고 100만 달러 상당의 스톡옵션과 장려금을 받으며 영입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그는 2년 뒤 스티브 잡스를 애플에서 쫓아낸다.
스컬리가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 애플의 경영 상태는 좋지 않았다. 애플 Ⅱ의 후속으로 개발한 애플Ⅲ의 실패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이어서 개발한 1만 달러짜리 비즈니스용 PC인 ‘리사(Lisa)'마저 참담하게 실패하고 만다. 주가는 절반 이상 곤두박질쳤다. 1985년 4월 11일, 스티브 잡스를 제거하기 위한 이사회가 열렸다. 당시 스티브는 이사회 의장이었다. 스컬리는 이 자리에서 자신에게 회사운영의 전권을 달라고 요구했고, 이사회는 스티브에게 사무실을 옮겨달라고 요구했다. 스티브는 보유 주식의 10퍼센트인 85만주를 판 1,100만 달러를 가지고 고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음해 초, 달랑 한 주만 남기고 애플의 모든 주식을 처분했다. 한 주를 남겨둔 것은 연례 경영보고서를 계속 받아보기 위해서였다. 스티브가 떠난 뒤에도 애플의 상황은 계속해서 절망적이었다. 비즈니스 세계는 성능이 훨씬 향상된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를 운영체제로 채택한 최신형 IBM PC로 몰려갔다. 애플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존 스컬리는 결국 CEO에서 물러나야 했다(1993). 이후 애플은 파격적인 조건으로 CEO들을 영입했다. 존 스컬리 다음의 구원투수로는 애플의 유럽 사장으로 탁월한 판매실적을 보여주었던 마이클 스핀들러(Michael Spindler)였다. 그는 디젤이라는 별명에 맞게 하루에 열여덟 시간을 일하는 건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애플을 회생시키지는 못했다.
그 다음은 물리학 박사이자 경영자였던 길 아멜리오(Gil Amelio)였다. 그는 항공우주산업체인 로크웰 인터내셔널에서 잭 웰치의 경영방식을 도입하여 회사에 기록적인 수익을 안겨주면서 월스트리트의 영웅으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이후 그가 쓴 경영서는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멜리오는 명령과 통제의 낡은 관리기법으로 인해 직원들의 팀워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보다 더한 문제점은 소비자시장에서 물건을 팔아본 경험이 없다는 점, 성공적인 광고나 마케팅을 운용해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그는 직원들도 장악하지 못하고 뾰족한 대안도 없이 1년을 고군분투하다가 해임되었다. 존 스컬리, 마이클 스핀들러, 길 아멜리오, 이렇게 세 명의 선장이 거쳐 가면서 애플은 점점 침몰해가고 있었다.
제2장 좌뇌에서 우뇌로, 기술에서 디자인으로
감성의 세계로 들어서다 애플을 떠난 스티브 잡스는 1986년 말, 넥스트(NeXT)라는 회사를 창립했다. 애플에서 함께 일했던 직원 여럿이 그를 따라왔다. 그는 기관과 개인투자자들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 그리하여 카네기멜론과 스탠퍼드를 비롯한 미국 유수의 대학이 넥스트에 출자했다. 1988년 10월, 넥스트는 넥스트큐브(Next Cube)를 출시했다. 이 컴퓨터는 검은색 외장으로 큐빅형 CPU와 스피커가 내장된 17인치 사각 모니터를 갖추었다. 또한 팩스 모뎀, DSP(digital signal processor)에 의한 음성인식 기능, 350메가바이트의 광자기 디스크드라이브 등 뛰어난 기술로 주목받았다. 학생들에게는 6,500달러의 특별가로 판매되었으나 이는 다른 PC보다 높은 가격이었다.
스티브는 자신감에 넘쳤다. 그러나 상황은 스티브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넥스트의 컴퓨터가 혁신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지만 시장에서는 여전히 생소한 제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시장에는 두 부류의 경쟁업체들이 나타났다. 하나는 기능은 훨씬 떨어지지만 가격을 대폭 낮춘 PC였고, 다른 하나는 워크스테이션으로 더 비싸지만 성능이 뛰어난 제품이었다. 넥스트의 총 생산량은 5만 대에도 미치지 못했다. 1993년, 스티브 잡스는 하드웨어 생산을 중단하고 소프트웨어에 전념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하드웨어 분야를 캐논에 매각하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구조조정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스티브 잡스가 소프트웨어 쪽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 것은 거듭된 실패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럴 만한 계기가 있었다. 스티브는 넥스트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스타워즈>를 만든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 루카스는 재정난으로 필름을 매각하는 상황에 있었다. 그때 스티브가 본 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컴퓨터그래픽의 광신도들이 거기 모여 있었고,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선명한 디지털 사진과 3D 영상물을 제작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욕심이 생긴 스티브는 오랜 협상 끝에 1,000만 달러라는 낮은 가격으로 루카스 필름을 인수했다. 이는 루카스가 애초에 제시한 금액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루카스 필름을 인수한 스티브 잡스는 회사명을 픽셀(pixel, 화소)과 아트(art, 예술)를 합친 픽사(Pixar)로 정했다.
루카스에서 일하던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픽사로 영입되었고 직원은 44명이었다. 초기에 픽사가 취급한 사업은 ‘랜더맨(Renderman,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인 렌더링rendering을 도와주는 소프트웨어)'이었다. 그러나 랜더맨의 매출은 매우 저조했기 때문에 픽사는 지속적으로 인력과 경비를 감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투자가 필요한 내부 프로젝트가 하나 올라왔다. 존 래세터(John Lasseter)가 3D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래세터는 원래 디즈니에서 일하던 애니메이션 전문가였는데, 루카스 사단에 들어온 후 컴퓨터 기술을 익혀서 3D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존 래세터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수십만 달러의 지출을 의미했다. 스티브는 개인 자금을 몽땅 투자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5분짜리 3D 애니메이션 <틴토이 Tin Toy>로 훗날 <토이스토리Toy story>의 원형이 된다. 이 작품은 1989년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수상작이 되었다. <틴토이>의 성공에 힘입어 래세터는 디즈니사를 찾아가 크리스마스 특집물로 30분짜리 3D 애니메이션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그때까지 손으로 그리는 2D 애니메이션만 제작해온 디즈니에게 이 제안은 새로운 영역이었다. 게다가 외부에 제작을 의뢰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디즈니의 경영진은 회의 끝에 단편이 아니라 장편을 만든다는 조건으로 픽사에 제작을 의뢰했다.
디즈니와 계약을 체결한 픽사는 시나리오 구상에만 몇 개월 동안 매달렸다. 회사 복도의 좌우 벽에는 온통 스토리보드판이 내걸렸고, 스토리 작가들과 애니메이터들이 즉석에서 떠오른 아이디어를 적은 메모장과 스케치들로 가득 찼다. 제작기간 동안 디즈니가 제작비를 지원하기는 했으나 픽사의 재정 상태는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4년 동안의 노력 끝에 탄생한 <토이스토리>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1995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영화가 개봉되면서, 첫 주에만 제작비와 맞먹는 2,9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으며, 세계 전역에서 2억 5,0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여기에 비디오 판권으로 1억 달러가 추가로 들어왔다. 총 수입은 3억 5,8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스티브 잡스는 <토이스토리>를 디즈니와 공동 제작하는 4년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우선 히트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누구를 목표로 하여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가라는 콘셉트 기획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또한 어린이와 여성 고객을 움직이려면 기술보다 감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이 4년 동안 디자인과 그래픽의 세계 속에서 살면서 디자인이 기술을 표현하는 또 다른 언어임을 깨닫게 된 것은 커다란 성과였다. 디즈니에게서 우뇌(右惱) 중심적인 감성의 세계를 배운 것이다. 창조적인 경영을 하기 위해서는 좌·우뇌를 같이 사용하는 전뇌적 사고(whole brain thinking)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뼈아픈 실패를 통해 배웠다. 즉 픽사의 성공을 가능케 했던 두 가지 요소는 창조성과 기술의 결합이었다.
행운의 복귀 스티브 잡스가 <토이스토리>로 성공을 거두고 있을 때, 애플은 여전히 고전하고 있었다. 핵심인력은 이미 회사를 떠났고, 남아 있는 직원들은 자신감을 잃은 상태였다. 당시 경영을 책임지고 있던 애플의 3대 CEO, 길 아멜리오는 애플의 차세대 컴퓨터에 들어갈 운영체제의 공급선을 찾고 있었다. 그러자 선마이크로시스템스, 비, 마이크로소프트, 세 회사가 매각 경쟁을 벌였다. 이 소식은 스티브 잡스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는 길 아멜리오를 만나 넥스트에서 추진하고 있는 운영체제에 대해 브리핑했다. 이사회에서는 넥스트에 최고 점수를 주었다. 이리하여 넥스트는 현금 3억 7,750만 달러와 애플 주식 150만 주로 애플에 인수되었다. 현금은 넥스트의 투자자들에게 배분되었고, 주식은 모두 스티브 잡스의 몫이 되었다.
1997년 여름, 스티브 잡스는 300명의 엔지니어와 함께 애플의 고문으로 컴백했다. 12년 만에 돌아온 애플은 거의 죽어가는 상태였다. 얼마 후, 길 아멜리오가 해임되고 스티브 잡스가 임시 CEO로 결정되었다. 임시 CEO란 말 그대로 임시직으로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다는 의미다. 스티브는 애플의 CEO로 취임하면서 연봉 1달러만을 받기로 하고 회사를 다시 살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임시 직함을 뗀 2000년 1월 이후에도 연봉 1달러를 고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스티브가 애플에 복귀해 첫 번째로 내놓은 작품은 아이맥(iMac)이다. 스티브는 넥스트에서의 경험을 통해 젊은이들의 취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젊은이들이 컴퓨터와 인터넷을 즐기고 가방에 항상 음악 CD를 가지고 다닌다는 것에 주목하고, 기존의 디스켓을 제거하는 대신 그보다 용량이 크고 오디오 기능을 겸한 CD드라이브를 장착했다. 그리고 외형 디자인도 기존의 사각 박스스타일이 아닌 곡선형으로 부드럽게 디자인했다. 또 하나의 발상 전환은 안이 투명하게 보이도록 누드 형태로 케이스를 디자인한 것이다. 색깔도 핑크, 노랑, 블루, 초록, 자주 다섯 가지를 출시해 소비자 선택의 폭을 넓혔다. 1999년, 드디어 1,300달러짜리 아이맥이 출시되었다. 아이맥은 1년 만에 200만 대가 팔렸다. 고객들은 다시 애플에 호감을 갖게 되었고 주주들은 신뢰를, 직원들은 자신감을 회복했다. 스티브가 복귀한 지 2년 반 동안에 애플의 총자본은 20억 달러에서 160억 달러 이상으로 여덟 배나 증가했다.
경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는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경영자원이 제한되어 있기에 모든 것을 다 시도해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임시 CEO로 취임하면서 몇 개 제품의 생산라인을 없앴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세계 최초의 실용 PDA인 뉴턴이었다. 다른 기업들이 PDA 사업을 새로운 비즈니스로 관심을 가지는 상황에서 애플은 생산 중이던 PDA를 철수하고 음악 사업을 시작했다. 스티브가 갑자기 음악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한 사건에 주목하게 되면서부터였다.
1999년, 음악 다운로드 시장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숀 패닝이라는 대학생이 MP3 다운로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 무료로 배포한 것이다. 그가 무료 배포한 지 며칠 만에 1만 명 이상이 다운을 받았다. 그 후 숀팬은 대학을 중퇴하고 투자자를 모아 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3,200만 명이 숀팬이 만든 사이트의 사용자로 등록하자 음반회사와 가수들의 반발이 거세졌다. 결국 숀팬은 고소를 당해 서비스를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유료다운로드가 확고해진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스티브 잡스는 온라인 음악시장이야말로 애플이 새로 나아갈 방향이라고 감지하고 과감한 승부수를 띄우게 된다.
우선 스티브는 C&G라는 회사를 인수했다. 이 회사는 ‘사운드잼(Sound Jam) MP'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었다. 사운드잼은 컴퓨터에서 음원을 MP3 파일로 다운받을 수 있는 소프트웨어였다. C&G는 초창기 직원이 고작 세 명에 불과했으나 사운드잼으로 550만 달러의 연 매출을 올리면서 40명 가량을 거느리는 회사로 성장하고 있었다. 애플은 이 회사를 인수하여 MP3 다운로드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아이튠스 뮤직스토어(iTunes Music Store : iTMS)이다. 아이튠스 뮤직스토어는 서비스 시작 후부터 2005년 2월까지 다운로드 기준 3억 건을 초과하면서 이 분야에 신기록을 세웠고, 현재는 전 세계 온라인 유료 음악시장의 7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제3장 창조적 혁신의 결정체, 아이포드의 탄생
스티브 잡스는 MP3 다운로드 소프트웨어인 아이튠스를 통해 디지털 음악 분야에 작은 입지를 마련하자 비로소 음악시장 전반을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당시 디지털 음악시장은 이미 형성돼 있었으나 소비자들의 반응은 생각만큼 신통치 않았고, MP3 플레이어의 판매는 지지부진했다. 당시의 MP3는 아날로그 기기인 카세트레코더나 CD플레이어를 작게 만들었다는 것말고는 별 차이가 없었다. 즉 초기의 MP3는 카세트레코더가 가지고 있는 재생, 녹음, FM라디오 기능을 집어넣은 상태에서 크기만 줄인 것이었다. 게다가 아날로그 세대는 디지털기기 조작을 어려워했다. 스티브 잡스의 머릿속에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MP3는 음악기기이기도 하지만 디지털 IT기기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MP3와는 다른 디지털 뮤직 시스템을 만들자.”
스티브 잡스가 이런 구상을 하고 있을 때 하드웨어 기술자 토니 파델(Tony Fadell)이 애플을 찾아왔다. 그는 필립스에서 몇몇 제품을 개발한 적이 있는 있었는데, 창업을 하기 위해 여러 회사를 찾아다니고 있던 중이었다. 파델이 보여준 설계도는 애플이 찾고 있던 아이디어였다. 스티브는 파델을 영입하고 개발팀을 구성했다. 토니 파델이 이끄는 개발팀의 MP3 모델은 ‘아이포드’였다. 파델은 이 신제품의 콘셉트와 디자인은 내부에서 하되 기술적인 개발은 외주를 주는 방법을 택했다. 이미 전문 업체에서 개발한 플랫폼을 선택함으로써 제품을 소형화하고 개발 시간을 절약하고자 함이었다. 이리하여 도시바와 소니, 샤프 전자, 영국 울프슨마이크로와 같은 회사의 제품들이 아이포드의 하드웨어로 채워졌다. 즉 이미 설계해 놓은 플랫폼에 유능한 부품들이 레고 블록을 조립하듯 디자인된 것이다.
하드웨어 개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아이포드의 소프트웨어는 실리콘밸리에 있는 벤처기업 픽소(Pixo)에서 맡았다. 픽소는 아이포드 화면의 그래픽 기능, 메모리 관리, 데이터베이스 기능 등을 개발했다. 그리고 연락처, 달력, 스케줄 관리와 같은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했다. 하지만 기능을 추가만 한 것은 아니었다. FM 라디오 기능은 제거했다.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은 라디오를 듣기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많이 저장하고 싶어 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다. 또 하나 제거한 것이 녹음 기능이다. 많은 MP3 기기에 녹음 기능이 장치되어 있지만 실제로 MP3를 이용해서 녹음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판단에서다. 이처럼 아이포드는 슬림한 디자인을 위해 버릴 것은 확실히 버리고 선택한 기능은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 출시 8개월 만에 최고 히트작이 되었다.
애플에 다시 돌아온 스티브 잡스는 모든 혁신의 중심을 디자인에 두었다. 기술의 발달로 비슷한 제품이 많이 출시되는 상황에서 소비자의 선택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간파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는 디자이너에게 ‘CDO'라는 직위까지 두어 전폭적인 재량권을 부여했다. 애플을 디자인회사로 이끈 주역은 조너선 아이브다. 그는 모니터와 본체를 하나로 만든 아이맥, 작은 반구형의 아맥 등의 히트작을 내놓았다. 특히 그가 디자인한 아이포드는 우아하고 세련된 심플함이 돋보인다. 그의 독특한 점은 기술설계를 마친 다음에 디자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디자인을 하고 그 안에 기술 설계를 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탄생된 아이포드는 가전제품 사상 가장 성공한 제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소니의 워크맨이 처음 출시되었을 때 3년간 총판매량은 300만 개였으나, 아이포드는 발매한 지 5년 만에 5,000만 대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제4장 애플의 부활에서 배우는 창조의 힘
애플의 창조 혁신의 세 가지 키워드 한번 무너진 기업이 다시 살아나서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것도 설립자가 실패를 자초하였다가 다시 돌아와서 재기한 경우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유일할 것이다. 그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재기의 과정에는 우리 기업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과정이 압축되어 있다. 따라서 그가 왜 실패했으며 다시 돌아온 그는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진정한 혁신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준다. 스티브 잡스가 초기에 애플에서 했던 방식과 복귀 후에 보여준 방식은 크게 차이가 있다. 그가 애플을 부활시킨 창조 혁신의 키워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고객의 아이콘이 될 수 있는 아이코닉 디자인 제품의 개발이다. 아이콘(icon)은 그림을 뜻하는 그리스어 에이콘(eikon)에서 유래한 말로 요즘에는 주로 우상, 상징, 대표성의 의미로 쓰인다. 한 시대의 우상, 즉 아이코닉 제품이 되려면 뛰어난 디자인과 기술이 결합되는 창조성이 관건이다. 과거의 매킨토시는 기술적으로 매우 뛰어난 제품이었다. 키보드 대신 이용할 수 있는 마우스, 한 화면에 여러 개의 창을 띄울 수 있는 윈도우,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등이 최초로 시도되었다. 하지만 애플은 이런 기술들을 자신들의 하드웨어에서만 쓰기를 고집하여 제품이 널리 보급되는 길을 차단했다. 몇 년 후, 마이크로소프트가 이런 기술을 채택하여 일반인들에게 보급함으로써 결국 시장의 최강자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되었다. 다행히 스티브 잡스는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그는 MP3 사업에서 기술에 집착하기보다는 고객가치의 창조에 주력하여 고객이 가지고 싶은 멋진 상품, 즉 아이포드를 만들어냈다.
두 번째는 창조적 마케팅이다. 애플에 돌아오기 전 많은 경험을 한 스티브는 하드웨어 사업을 소프트웨어 사업으로 전환했다. 그래서 음악 사업을 시작하기로 한 그는 우선, MP3 다운로드 소프트웨어인 아이튠스를 무료로 배포했다. 이로 인해 PC고객과 MP3 이용자들은 너나없이 아이튠스 소프트웨어를 자신의 컴퓨터에 설치했다. 비유하자면 아이튠스는 트로이의 목마와 같았다. 음악을 좋아하는 고객들은 아이튠스에서 다운받은 음악을 MP3에 저장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이포드의 구매로 이어졌다. 또한 아이튠스는 수백만 곡을 확보하여 사용자층을 넓혔다. 음악애호가들이 오프라인 레코드가게에서 구할 수 없는 음반과 노래를 쉽게 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더욱이 99센트라는 다운로드 가격은 수요를 자극했다. 이로 인해 음악마니아들은 매일같이 뮤직스토어에 들락거리면서 애플에 대한 충성도를 높였다.
세 번째는 문화 창조다. 과거의 애플 고객들은 공급자가 제공해주는 소프트웨어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의 애플 고객은 음악을 다운로드 받는 동시에 직접 음악의 배열과 구성을 편집할 수 있다. 사용자는 자신의 음악실을 만들 수도 있다. 오디오 파일은 물론 텍스트나 그래픽 정보도 함께 처리할 수 있어 문자, 업무, 사진이나 게임 파일을 원하는 대로 재구성할 수 있다. 이렇게 애플은 오픈시스템을 채택하여 사용자를 만족시킴으로써 그들의 입소문을 통해 고객층을 넓히게 되었다.
스티브 잡스의 창조 리더십 스티브 잡스가 창조 경영으로 재기에 성공하게 된 데에는 그가 지닌 다음과 같은 특별함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는 도전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매킨토시 개발 이후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소프트웨어 사업을 강화하여 결국 애플 복귀의 길을 마련했다. ‘다르게 생각하라’는 정신도 그가 지닌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컴퓨터에 디자인 개념을 도입하여 누드 디자인의 아이맥 PC를 만들었고 PC에서 플로피디스크를 제거하고 CD드라이브를 장착했다. 또한 컴퓨터회사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온라인 음악시장을 개척했다. 스티브 잡스가 MP3플레이어 아이포드를 통해 디지털 음악세계를 개척한 것도 MP3는 음악기기가 아니라 IT기기라는 창조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의 성공 뒤에는 그를 돕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 처음에 애플 컴퓨터를 창업할 때는 천재적인 엔지니어 워즈니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재기의 발판을 만들어준 <토이스토리>는 존 래세터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100여 명의 직원과 함께 힘겨운 조건 속에서 4년을 견뎌야 할 때는 그만큼 팀원의 열정을 이끌어내는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스티브가 애플을 디자인 회사로 만들게 된 것도 조너선 아이브에게 애플의 CEO와 맞먹는 CDO(Chief Design Officer : 최고 디자인 책임자)라는 지위를 주어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이러한 마인드를 스포츠에 비유했다. “예술가는 혼자의 열정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지만 스포츠는 팀원 모두의 열정을 이끌어내야 한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에서 해고된 뒤에도 결코 실리콘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스탠퍼드 대학의 언덕을 산책하면서, 또는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찾아 읽으면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선불교에 심취해 있던 그는 집에 명상하는 장소를 따로 마련해놓고 명상을 즐겼다. 이런 시간들을 통해 그는 절망의 시기를 꿋꿋하게 극복할 수 있었다. 보통사람들은 조금 어려워지면 낙망하고 조금 성공하면 교만해지게 마련인데 스티브는 성공과 실패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그가 골프를 치며 소일했다거나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커다란 성공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모두 새로운 사업에 쏟아 부었기 때문에 파산위기에 놓인 적도 있었다. 이렇듯 그의 인생과 사업은 한길을 갔다고 볼 수 있다.
제5장 아이포드의 시장 정복, 아이콘의 힘
CEO가 마케팅 매니저 히트 상품을 보면 상품이 좋은 탓도 있지만 마케팅의 힘이 발휘된 경우가 많다. 애플의 경우는 기획에서부터 개발을 거쳐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스티브 잡스의 리더십이 크게 작용했다. 스티브 잡스는 1984년 매킨토시를 출시하면서 1회에 100만 달러짜리 슈퍼볼의 TV광고를 했다. 광고는 성공적이었으나 결과적으로 판매에 실패했다. 그래서 아이포드를 개발했을 때는 마케팅 방법을 바꾸었다. TV나 신문 같은 매스미디어에 광고하는 매스마케팅을 제한적으로 실시하고 홍보와 온라인 마케팅, 고객 입소문을 통한 마케팅을 구사했다. TV에도 제품 광고보다는 ‘실루엣 댄서’ 광고를 했고, 같은 이미지를 간판이나 판촉물에 이용했다.
신제품이 출시되기 전에는 정보를 비밀로 하는 것도 홍보 효과에 한몫을 했다. 2001년 10월 23일 아침, 실리콘밸리에 있는 애플 본사의 컨퍼런스 룸에는 200명의 기자와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스티브 잡스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검정색 터틀넥 셔츠와 청바지 차임으로 무대에 등장했다. 그리고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트럼프 카드 박스만 한 하얀 제품 하나를 꺼내며, “하드디스크형의 뮤직 플레이어를 소개합니다”라고 외쳤다. 그것이 바로 아이포드였다. CEO가 직접 제품을 홍보하는 것도 특별하지만, 특히 그의 프레젠테이션 능력은 화젯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는 상품을 소개할 때 제품기능을 설명하기보다는 제품의 탄생에 대한 전반적인 과정을 설명한다. 이처럼 스토리 중심의 화법을 구사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은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듣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된다.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자료는 애플의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볼 수 있다.
스티브 잡스가 음악 산업에서 채택한 마케팅 방식은 작은 고객을 많이 잡는 롱테일(long tail)법칙이다. 롱테일 법칙은 긴 꼬리 부분의 다수인 80퍼센트의 적은 매출들이 모여 20퍼센트의 머리 부분의 매출을 압도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파레토가 주장한 80:20원칙과 상반되는 것이다. 기업들은 20퍼센트의 핵심고객으로부터 80퍼센트의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마케팅 활동을 20퍼센트에 집중했다. 그런데 애플은 핵심고객이 아닌 다수의 고객층을 겨냥했다. 즉 유명가수들의 미발매곡까지 포함하여 수백만 곡을 보유함으로써 계층의 구분 없이 아이튠스를 찾게 만든 것이다. 오프라인 레코드가게에서는 구할 수 없는 음반도 아이튠스에서 구할 수 있다는 입소문은 아이튠스 뮤직 스토어를 세계 음악 다운로드 시장의 70퍼센트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파이프라인을 깔아라 MP3 플레이어를 처음으로 만든 회사는 애플이 아니다. 한국의 레인콤에서 만든 아이리버(iRiver)가 미국 시장에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고, 또 음반시장에서는 소니가 컬럼비아 음반사를 인수하여 미국 시장에서 발을 넓히고 있다. 그런데도 애플이 순식간에 MP3 플레이어와 음반시장에서 리더로 부상하게 된 것은 컴퓨터와 MP3, 음반을 하나로 이어주는 새로운 가치사슬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애플은 MP3를 단지 음악기기가 아니라 IT기기로 보고 인터넷과 연결했다. 즉 음악애호가들이 자신의 컴퓨터에 MP3파일을 다운받고 편집할 수 있는 파이프라인, 즉 아이튠스를 마련해준 것이다. 아이튠스 스토어에서는 아이포드 관련 액세서리들도 인기리에 판매된다. 고객들은 아이포드를 사러 왔다가 액세서리를 사기도 하고, 액세서리를 사러 왔다가 상위 기종의 아이포드를 구입하기도 한다.
애플이 깔아놓은 또 하나의 파이프라인은 ‘포드캐스팅’이다. 이는 아이포드를 이용하여 개인방송국을 만들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를 지원한 시스템을 말한다. 애플은 MP3가 단순히 음악을 듣는 기계가 아니라 자신의 음성이나 음원을 방송할 수 있는 도구가 되도록 하였다. 아이포드를 방송(broadcasting)으로 연결한다는 ‘포드캐스팅’이라는 용어는 최근 널리 쓰이는 신조어가 되고 있다. 예를 들면,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는 다른 사람이 만든 콘텐츠를 끌어올 수 있고 자신의 콘텐츠를 다른 사람에게 송출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써 포드캐스팅을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제 아이포드는 하나의 아이콘이자 자기표현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BMW에는 운전 중에 아이포드의 조작이 가능하도록 특수 장치가 부착되어 있고, 프라다, 구찌와 같은 명품 패션회사들은 아이포드 케이스와 액세서리를 내놓고 있다. 2006년 6월에는 나이키에서 아이포드를 내장한 조깅슈즈를 발표하기도 했다. 운동화 밑에 내장된 센서가 발에 닿는 압력 등을 측정해 무선으로 아이포드에 보내면, 사용자는 음악을 들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멀리 달렸는지, 또 칼로리는 얼마나 소모됐는지 등을 아이포드의 스크린이나 헤드폰으로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운동량이 부족하면 아이포드에서 코치의 음성이 흘러나와 운동을 더하도록 한다. 이렇게 아이포드에 전달된 내용은 나중에 컴퓨터로 옮겨져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거나 비교하는 것도 가능하다.
제6장 창조경영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창조 공식은 ‘C=I+N'으로 비교적 간단하다. C는 Creative이고, I는 Idea, N은 Needs이다. 즉, 새로운 아이디어와 고객니즈가 만날 때 창조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엔지니어는 기술개발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고객을 관찰하고 고객의 리얼 니즈(Real Needs)가 무엇인가를 알아내야 한다. 즉 고객창조 혁신은 휴머니티와 기술을 연결하는 감성과 기술의 결합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디자이너에게는 그래픽 디자인을 기술로 연결시키는 엔지니어적인 마인드가 필요하고, 엔지니어에게는 디자인 감각을 살릴 수 있는 감성적 마인드가 필요하다. 이러한 고객창조혁신은 감지, 아이디어 발상, 스토리텔링, 개발생산, 마케팅 이렇게 다섯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다.
먼저 첫 번째 단계인 감지(Sensing)는 외부로부터 시장의 변화와 고객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감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자료들을 숫자로 나타나기보다는 관찰과 대화를 통하여 이미지나 스토리로 수집되어야 한다. 즉 사용자를 온몸으로 느낀다는 의미에서 감지라고 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아이디어 발상(idea creative)단계로, 수집된 정보를 해석하는 일을 말한다. 같은 정보라도 해도 해석하기에 따라서 유용성이 달라진다. 따라서 고객들이 미처 표현하지 못한 리얼 니즈를 읽어내고 고객의 스토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을 떨쳐버려야 한다.
세 번째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 단계다. 이 단계에서는 모든 것을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디자인해야 한다. 실제로 어떤 시나리오로 고객 니즈를 구현할 것인가를 기술적으로 개발하고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연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개발생산 단계다. 개발단계에서부터 고객의 니즈가 반영되면서 디자인 혁신이 이루어져야 한다. 즉 기술개발에 들어가기 전에 고객 니즈를 어떻게 디자인에 반영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이렇게 설정된 기능을 기술적으로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때 외부 전문가와의 협력개발은 개발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 이러한 단계들을 거쳐 제품이 탄생하면 마지막 단계인 마케팅에 들어간다. 고객 관찰이 출발점이라면 마케팅은 다시 고객에게 다가가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대량생산 시대에는 광고가 중요한 판촉 수단이었고 점포 개설이 유일한 유통방법이었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과거의 매스마케팅에 의존하는 방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전략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애플은 MP3하드웨어를 판매하기에 앞서 노래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소프트웨어 아이튠스를 제공하는 한편 음악을 온라인으로 구매할 수 있는 온라인 숍을 개설하여 아이포드 판매로 연결시켰다. 또한 오프라인 매장에는 가전제품인 스피커, 액세서리, 타사 비디오 제품도 같이 파는 멀티브랜드 숍을 개설했다. 그리고 아이포드와 이어폰의 색깔을 흰색으로 고수하면서 흰색 이어폰을 끼고 가면 그의 호주머니 속에 아이포드가 들어있다는 상징적 판촉 효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단계들이 조직의 유전자가 됨으로써 애플은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2006년 4분기에 MP3 매출만 48억 달러였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27퍼센트 성장한 결과이다. MP3 플레이어 시장이 이처럼 확대되자 세계 초일류 기업들이 이 분야에 뛰어들고 있다. 제일 먼저 도전장을 내민 것은 삼성전자다. 삼성전자는 이미 7~8년 전부터 MP3 플레이어를 만들었으나 실적이 좋지 않아서 계열사에서 생산해왔다. 그런데 최근 직접 신기종을 개발하고 마케팅에 뛰어들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MP3시장에 뛰어들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이렇다 할 경쟁자 없이 독주해 오던 애플은 새로운 도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애플은 휴대전화 사업을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휴대전화 시장은 노키아, 모토롤라와 같은 강자가 버티고 있어서 애플의 도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주목되고 있다.
[ Apple's Way ]
1. 일관성을 유지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컴퓨터는 도구일 뿐이다. 당신은 주어진 업무를 손쉽게 처리하려고 컴퓨터를 사용한다. 지금까지 애플의 접근방식은 개인용 컴퓨터를 쉽고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이타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분명히 컴퓨터를 더 많이 팔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위해 애플은 첫째 사용자가 요구하리라 생각되는 작업 대부분을 예측하여 그러한 요구에 인간처럼 대응할 준비가 된 OS(운영시스템)를 개발하고, 둘째 모든 응용 프로그램 패키지들이 준수해야 하는 일련의 규격을 확립하고, 셋째 외부 개발자들이 그러한 규격을 지키도록 통제하고, 넷째 고객에게 인도하기 적합한 컴퓨터를 설계하고 개발하였다. 이것은 바로 사용자의 편익 증진을 의미한다.
풍부한 경험을 가진 매킨토시 사용자는 새 S/W 패키지를 뜯어보기도 전에 그것을 사용 및 설치하는 방법을 항상 알고 있다. 아이콘을 더블클릭하고 뒷짐 지고 앉아 있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프로그램에 제공되는 매뉴얼을 일일이 읽어보는 수고를 덜 수 있다. 맥의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을 마스터하면 회계 프로그램, 세금 신고 프로그램, 심지어 데이터베이스 관리 프로그램도 쉽게 사용할 수 있다. 윈텔(윈도 S/W +인텔 칩) 사용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뭐가 특별한가. 내 PC도 프로그램 간 작동법이 대체로 동일하다.” 이에 두 가지 반박을 할 수 있다. 첫째 ‘대체로’와 ‘항상’은 같은 말이 아니다. 사용자들이 윈도 환경에 좌절을 느끼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윈도 환경이 점점 일관성을 추구하는 이유는 애플이 그러한 좋은 예를 오래전부터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매킨토시 하드웨어는 일관성 있게 구성요소들이 항상 같은 위치에 있다. 따라서 당신이 특정 맥을 사용하는 방법을 안다면 모든 종류의 맥의 사용법을 알 수 있다. 애플 방식의 다른 장점은 연속성이다. 맥 OS X 운영체제가 출시되기 전까지 애플은 특정 세대 매킨토시에서 다음 세대 매킨토시까지 놀라운 연관성을 보여주었다. OS 업그레이드가 특정 기능을 삽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음매 없이 짜 넣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OS X로 OS가 바뀌면서 요즘에는 과거만큼 연속성이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큰 목적은 여전히 훼손되지 않았다. 즉 맥을 사용하는 것이 여전히 쉽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애플이 직접 맥을 통제하고, 맥에서 사용되는 핵심 명령어를 규제하며, 외부인의 작업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직접 관리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애플은 제품에 비싼 가격을 매겨 높은 매출총이익률을 기록하는 전략을 사용해 왔다. 사용자의 요구를 염두에 두고 설계된 독특한 케이스에 담긴 독특한 OS로 제품을 차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매킨토시 환경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특함을 잃어가고 있으며, 윈도 OS 업그레이드 버전을 갖춘 레이몬드의 거인(마이크로소프트)이 사용자 친화적이고 직관적인 컴퓨터 환경을 조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매출총이익률을 중시하는 애플의 오래된 전략은 공식적으로 효력을 상실한 것인가? 가전제품 시장 진출(아이팟)과 이익률이 낮은 보급형 컴퓨터(맥미니) 출시가 미래의 물결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애플의 미래는 무엇인가?
2. 미래를 찾아내라
혁신은 돈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혁신은 불가능하다. 특히 하이테크 산업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경쟁업체에게 인재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그들을 지속적으로 만족시킬 만한 자금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애플은 R&D에 많은 투자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3년 R&D 투자액 5억 달러 가운데 48%는 하드웨어 개발에 쓰였고, 29%는 맥 OS 개발에, 나머지는 응용 프로그램 개발에 투자되었다. 이처럼 애플은 R&D 투자의 절반을 하드웨어 혁신에 써야 한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소프트웨어 기업은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비용이다. 동시에 애플은 OS S/W를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이것은 델 같은 하드웨어 기업은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비용이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기도 하고 나쁜 소식이기도 하다. 애플은 MS나 델이 추구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혁신을 도모해야 하는 올가미에 걸려 있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러한 R&D 예산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투자를 하기 때문에 애플은 계속 미래를 찾아낼 수 있다.
전략적 혁신은 돈과 인재뿐 아니라 전략도 필요로 한다. 애플은 항상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고객의 요구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데 항상 능숙했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중반 애플은 고객의 요구에 부응한다면서 80여 개의 복잡한 제품군을 선보였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고객들이 제품을 사러 왔다가 당황하여 등을 돌린 것이다. CEO가 되어 애플에 복귀한 스티브 잡스는 제품 혁신을 위한 간단한 지침을 제시했다. “일반 소비자용 제품과 전문가용 제품을 판매한다. 그리고 두 가지 영역 각각을 위한 데스크톱 제품과 휴대용 제품이 필요하다.” 그의 수학식은 간단했다. 2*2=4, 결국 네 가지 종류의 제품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간단한 계획에 따라 각 플랫폼을 맡은 전담팀들이 네 가지 영역에서 혁신을 도모했다. 그 결과 파워맥 G3(전문가용/데스크톱), 파워북 G3(전문가용/휴대용), 아이맥(일반용/데스크톱), 아이북(일반용/휴대용) 등 인기 제품들이 잇달아 출시되었고 애플은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에 복귀한 지 일 년 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언제쯤이면 애플을 회생시켰다고 느낄 것입니까?”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우리의 목표는 회사를 회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편히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애플이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세계에서 활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미래를 찾아내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다른 기업들보다 애플이 훨씬 더 자주 미래를 찾아냈다고 말할 수 있다.
3. 놀라움에 숨 막히게 하라
애플 II(1977년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겨 시장에 출시된 최초의 컴퓨터)는 디자인에 대한 스티브 잡스의 생각을 처음 반영하고 있다. 그는 컴퓨터의 외관이 고객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확신하고, 사람들이 애플 II를 토스터처럼 친근한 물건으로 상대하길 원했다. 그의 디자인 비전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것은 1984년 매킨토시가 계기가 되었다. 맥은 스크린과 본체가 하나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케이블이 줄어들고 외관이 통일성을 지니게 되었다. 맥은 낯익은 가전제품처럼 보였고 인간적인 분위기를 풍겼는데 바로 그것이 스티브가 추구했던 것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예술이나 디자인 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소니, 브라운, 메르세데스 등 고가 하드웨어로 명성을 얻은 기업들이 어떤 식으로 마술을 부리는지 조사하였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는 애플이 소니, 브라운, 포르쉐처럼 탁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1983년 프로그디자인(frogdesign, Inc)과 디자인 공급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동사의 디자이너들은 독특한 활자체, 활자 크기, 색상을 선택했고 그것을 애플 전체에 침투시켰다. 제품에서부터 각종 인쇄물과 매뉴얼에 이르는 애플의 모든 것에 디자인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1985년 9월 스티브가 애플을 떠난 이후 새로 상품개발팀장을 맡은 장루이 가세는 대중에 맞게 디자인된 스티브의 가전제품 개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제품 가격을 올려 이익률을 높이기 위해 맥에 갖가지 기능을 추가하도록 엔지니어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애플의 정체성 상실을 가져왔고 1980년대 후반 애플 쇠락의 원인을 제공했다. 높은 미적 안목을 지닌 강력한 리더가 없는 가운데 애플은 계속 허우적거리면서 무능한 기계에 맞는 무능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그러나 1997년 스티브가 복귀하면서 그의 주도 아래 애플은 발포 플라스틱으로 만든 TV 모니터와 자전거 헬멧을 합쳐놓은 것 같은 흰색 물체를 제시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바로 그것이 아이맥이다. 푸른빛을 필두로 다섯 가지 색상의 반투명 아이맥이 출시되면서 애플은 수요를 맞추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히트를 쳤다.
애플의 생존에서 우수한 디자인과 영리한 마케팅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아이맥이 출시되기 이전부터 빌 게이츠는 애플의 빠른 OS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오류 많은 OS 간의 격차를 서서히 좁혀왔다. 그래서 애플은 핵심 부문 이외의 부문에서 혁신을 도모했는데 그것은 때로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을 하는 실수, 기능을 생각하지 않고 모양만을 생산하는 실수를 간혹 범한 것이다. 그렇지만 애플은 계속 한계에 도전하면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 2000년 G4 큐브가 출시되었을 때 뉴욕 현대미술관은 영구 소장용으로 큐브 한 대를 구입했다.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잡스는 미술관의 결정을 환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디자인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사용자들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싶은 바람 때문입니다.”
《비즈니스위크》에 따르면 현재 활동하는 기술 기업들 가운데 모든 디자인 업무를 내부에서 처리하는 기업은 애플밖에 없다고 한다. 스티브는 제품 디자이너, 산업 디자이너, 기계 전문가, 전자 전문가, 소프트웨어 전문가 등 모든 전문가들을 한자리에 몰아넣는 것이 전체주의적 시각에서 제품을 개발하는 길이라 믿고 있다. 한 비평가는 스티브가 즐겁고 친근한 소형 가전의 미학에 관심을 기울일 때는 애플이 번창했으나, 절제되며 차갑고 미니멀 한 미적 감각을 발휘하면서 애플이 벽에 부딪혔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절제되며 미니멀 한 애플의 아이팟은 젊은 세대에게 인생을 즐기는 쿨한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4. 가보를 지켜라
마이크로소프트는 그들의 OS 소프트웨어를 널리 라이선스함으로써 세계 PC시장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다. 반대로 애플은 그들의 OS를 다른 하드웨어 업체에 라이선스하기를 거부했다. 그것은 다음 이론에 따른 것이었다. 첫째 그것은 사용자의 경험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제하는 것을 포기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둘째 라이선스한 맥 OS를 이용하는 저가 컴퓨터 생산업자들이 시장에 진출하면, 가격하락 압력으로 인해 이익률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빌 게이츠가 애플에게 OS를 라이선스할 것을 촉구한 이래 10년이 지난 1995년에 가서야 애플은 파워컴퓨팅과 맥 OS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다. 맥 OS를 산업 표준으로 확립시킬 기회는 이미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CEO 아멜리오는 애플이 복제품 한 대당 50달러의 라이선스를 받는 대신 이익률이 높은 애플 컴퓨터와 OS를 동일 고객에게 팔았다면 그보다 10배나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복제품에 매출을 빼앗기고 있을 뿐 아니라 라이선스 사용료를 너무 적게 받아서 그에 따른 손실도 보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10년 전에 빌 게이츠가 애플에 제시했던 방법, 즉 OS 개선 및 유지비용을 사용자 확대로 보충하는 방법은 애플에 소용없게 되었다. 장기적으로 애플은 무엇을 하든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다.
1993년 애플은 맥 OS의 최대의 문제점(메모리 부족, 에뮬레이션을 통한 PC칩 실행)을 해결할 코플랜드 OS를 윈도 95가 시장에 나오기 전에 소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5억 달러를 투자하였음에도 이렇다 할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대안을 모색하던 CEO 아멜리오는 애플을 떠나 넥스트 컴퓨터를 경영하던 스티브 잡스에게 중대 제안을 했다. 그리고 1996년 12월 애플은 3억 5천만 달러에 넥스트를 인수하고 스티브는 애플에 복귀했다. 복귀한 스티브는 우선 맥 OS를 복제품 제조업체들에 라이선스하는 것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코플랜드 프로젝트를 백지화하고 새로운 맥 OS(랩소디) 개발에 착수했다. 1999년 1월부터 애플은 매년 대폭 수정한 업그레이드 버전을 출시하고 그로부터 6개월 뒤에 부족한 부분을 수정한 업그레이드 버전을 출시한다는 일정을 따르면서 오랫동안 맥 OS를 괴롭히던 문제를 바로잡아 나갔다.
2000년 9월 애플은 OS X를 출시했다. 이것은 기존 OS들과 달리 유닉스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OS이다. OS X는 스피드와 유연성 외에 안정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애플은 2000년부터 2005년 사이에 다섯 차례 OS X 업그레이드 버전을 출시했다. 그리고 기존 OS에 익숙한 사람들과 소프트웨어 개발자에게 새로운 OS를 사용하도록 설득하였다. 아이맥을 포함하여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는 몇 가지 맥 신제품들로 인해 설득하는 것은 한결 쉬워졌다. 스티브 잡스는 OS X가 지구상에서 가장 발전된 OS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뇌 이식과 다름없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20년 동안 애플을 재확립할 혁명입니다.”
5. 지지자들과 돈독히 하라
1982년 스티브 잡스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응용프로그램 개발 사업에 진입하려 애쓴다는 것을 알았다. 스티브는 빌 게이츠를 만난 곧 출시될 매킨토시에 사용할 일부 응용프로그램을 개발할 의사가 있는지를 물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워드, 멀티플랜(엑셀의 전신), 파일(Access의 전신)을 포함하여 맥에 사용할 몇 가지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1984년 맥이 출시될 준비가 되었을 때 빌 게이츠는 애플과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맺고 싶어 했다. 빌 게이츠는 이례적인 요구를 했다. 응용프로그램을 공급하는 대가로 맥 OS, 특히 GUI(graphic user interface)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마이크로소프트의 PC 제품들에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 것이다. 당시 점점 커지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영향력에 맞설 수 있는 외부 개발자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던 애플은 결국 손을 들었다. 빌 게이츠에게 그들의 가보를 이용하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그것은 치명적인 결정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그 귀중한 수집물을 이용하여 윈도 1.0을 출시한 것이다. 그것은 훗날 맥 OS와 동등한 입장에 설 프로그램의 첫걸음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값비싼 응용프로그램이 설치된 맥이 출시된 이후에 애플은 계속해서 다른 독립적인 개발자들을 물색했다. 그것은 점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마이크로소프트를 견제하는 의도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영향력은 점점 더 확대되었고 애플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공격적인 빌 게이츠에게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맥 프로그램들은 윈도 프로그램이 출시되고 일 년이 지난 뒤에 출시되었다. 워드의 서류들은 윈텔에서는 거의 즉각 열렸지만 맥에서는 30초 정도 걸렸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애플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스컬리 시대에 애플은 독립적인 개발자들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외부 파트너로서가 아니라 수입원으로 대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인이 음식을 가져온 손님을 비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한마디로 공생관계에 해가 되는 일이었다.
1997년 여름 애플에 복귀한 스티브 잡스는 개발자 관계관리 부문에서도 자신이 적임자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세련되고 새로운 아이맥과 “다르게 생각하라”라는 눈에 띄는 광고 캠페인이 흔들리는 개발자의 기운을 북돋우고 새로운 개발자를 유치하는 데 효과가 있으리라 추측했다. 또한 그는 주요 기업고객들 안에는 전도사(evangelist)들이 있어서 애플을 지속적으로 주시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실제로 전도사들의 활동이 활발한 기업고객들은 변화를 곧 알아챘다. 어도비 시스템즈의 수석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믿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스티브 잡스가 돌아온 이후 180도 변화했다.”
스티브가 직면한 과제는 기존의 애플 OS에서 차세대 OS로 항구적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계획이 기존 OS에서만 실행할 수 있는 응용프로그램을 퇴물로 만들기 때문에 많은 개발자들이 맥을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애플은 새로운 OS를 출시하는 데 단계적인 접근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접근방식에 대해 많은 이들이 불평을 하고 있지만 개발자의 환심을 사려는 스티브의 주도면밀한 노력은 점진적으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여기에는 새롭고 강력한 개발 도구를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최근 애플이 보여준 문제점을 솔직히 인정하는 태도 또한 효과를 거두었다.
6. 약속을 지켜라
사람들은 갑자기 어떤 일이 발생하여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용서한다.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처음부터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했던 것으로 훗날 밝혀진다면 사람들은 참지 못한다. 속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지난 몇 십 년에 걸쳐 애플은 수많은 약속을 깨뜨렸다. 그런데 애플은 약속을 깨뜨렸을 경우 대부분의 회사들이 치르는 것보다 더 커다란 대가를 치른다. 그 이유는 애플이 약속한 제품을 공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산업에서 업계의 표준을 한 단계 높이려 지속적으로 노력했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애플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이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것보다 친구나 가족이 그릇된 행동을 하면 배신감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대하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사례> 있을 수 없는 제품의 약속 1984년 맥이 대성공을 거두었을 때 애플은 연달아 우수한 제품을 선보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문제는 1985년에는 애플이 선보일 상품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애플은 건너뛰는 대신 짜깁기를 했다. 있을 수 없는 상품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해 애플이 공급하기로 한 것은 ‘매킨토시 오피스’였다. 전체적으로 그것은 좋은 아이디어였다. 워크그룹이 생산적으로 작업하는 데 매킨토시 오피스의 네 가지 구성요소를 모두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구성요소는 맥, 응용 프로그램, 레이저프린트, 그리고 사용자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네트워크(애플톡)였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사람들이 데이터를 공유하고 직접 통신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필요한 하드웨어/소프트웨어 결합체인 파일 서버가 준비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언론은 비즈니스 사용자 입장에서 애플톡 네트워크가 중대한 한계(데이터 전송속도가 IBM의 1/10)를 가진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매킨토시 오피스가 가진 치명적인 결함에 주목했다. 즉 없는 것을 있다고 했던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비판했다. “애플은 몇 십 년 동안 출시되지도 않을 혁신적인 제품에 대한 비전으로 고객들을 현혹시켰다. 비전과 기존 제품의 현실 격차로 인한 신뢰 저하로 애플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애플톡의 부족한 부분이 메워지는 데는 단 2년이 걸렸다. 그렇지만 그것은 매우 긴 2년이었다.
컴퓨터 제조업체와 사랑에 빠질 경우 당신은 아마 실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딛고 서 있는 땅은 매우 복잡하면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밖으로 유출된 기록에 따르면 2000년 2월 윈도 2000이 출시되었을 때 잠재적 결함이 6만 3천 개나 있다고 한다. 6만 3천 개의 버그가 있는데도 마이크로소프트는 그것을 선적했던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점이 그렇게 많은 제품을 파는 것은 기업이 자신이 했던 약속을 어기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컴퓨터 제조업체가 당신에게 안정된 미래를 약속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지킬 수 없는 무엇을 약속하는 것이다.
7. 컬트를 구축하라
애플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공짜 광고판 역할을 하도록 부추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사용자들이 다른 어떤 제품보다 월등하다고 느끼는 제품에 무한히 헌신하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들은 월등한 제품을 사용하는 것에서 부분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나는 애플 파워북 G4를 사용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은 또한 작은 회사 애플이 시장점유율을 높이고 전통적으로 부족한 마케팅과 유통채널을 보강하려고 사용자 기반을 신중히 구축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컬트 구축은 훌륭한 제품의 부산물이자 매우 계획적인 기업 전략의 결과였다.
애플 컬트의 뿌리는 197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애플은 출시되는 모든 제품에 로고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애플 제품 안에는 로고 스티커가 한 개가 아니라 두세 개가 들어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 전략이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무지개 줄무늬가 있는 애플 로고 스티커를 여기저기(자동차 뒤창, 기숙사 창문, 기타 케이스 등)에 붙인 것이다. 그들은 비주류를 위한 컴퓨터 사용방식에 협조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애플에 합류한 가와사키는 컬트를 ‘소비자 커뮤니티에 맥을 파는 소규모의 열혈집단’으로 정의했다. 이들 열혈집단은 고급 사용자, 지식인층, 우수 고객과 줄이 닿아 있는 판매원을 말한다. 애플은 이렇게 판단했다. “이들을 설득시켜라.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또한 애플은 맥을 ‘지식 근로자들의 생산력을 개인적으로 향상시킬 선진 도구’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지식 근로자는 과장된 마케팅 표현이었지만 그것은 자신이 마치 소수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 될 것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효과를 발휘했다.
과장된 마케팅 문구만 이용해서는 컬트를 구축할 수 없다. 애플은 몇 년에 걸쳐 훌륭한 제품들을 선보였다. 그 제품들은 강력하고, 직관적이며, 디자인이 뛰어나고, 융통성 있으며, 바이러스에 저항력이 있고, 가격도 비싸지 않았다. 또한 그 제품들은 시장에 출시된 어떤 제품보다도 우수했으며 사용자들의 삶의 여러 측면에 이용되었다. 즉 생계, 작품 제작, 데이터베이스, 사진 컬렉션, 음악 라이브러리 등으로 다른 제품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용자들의 삶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컬트의 일원들은 성벽을 향해 기꺼이 달려가고 또 달려갈 것이지만 그들은 궁극적으로 훌륭한 제품의 지원사격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선진국 대도시나 미국 대학의 컴퓨터를 찾아가 보면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MUG(맥 사용자 그룹)이다. 1990년대 중반 MUG는 미국에 약 750개 존재했으며 소속 인원이 약 2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사용자 그룹은 하이테크 기업이 여론을 선도하는 리더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입소문을 퍼뜨리는 데 이용하는 표준화된 방법이다. 특히 애플과 같이 마케팅 자금이 부족하고, 기술지원 서비스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고, 특수한 제품을 공급하는 기업에 적합하다. MUG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점은 애플이 그들을 위해 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애플은 웹사이트를 통해 MUG 목록을 제공하고, 맥 월드에서 MUG 행사를 주최하며, 맥을 구입한 이들을 MUG에 연결시키며, 애플 사용자 고문단(Apple user group advisory board)을 지원한다. 그렇지만 “고문단 구성원들에게 특전을 제공하는가?”라고 물으면 애플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들은 행사 참석 비용을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 이 자리는 자원봉사직이다.” 이처럼 MUG는 무관심 속에서 성장했지만 애플이 잘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이 정말로 헌신적이라면 스스로 비용을 부담할 것이기 때문이다.
스콧 켈비는 맥 사용자는 고객이라기보다 팬클럽에 가깝다고 말한다. 모든 이들이 알다시피 팬클럽은 마음이 잘 변한다. 그리고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애플 파워맥 G4 큐브의 실패를 애플 팬클럽의 반대 탓으로 해석했다. 다시 말해 단순히 제품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컬트가 들고 일어나 제품을 타도한 것이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컬트를 구축하는 것은 아기 악어를 키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악어 이빨(강력한 견해)이 점점 자라서 악어가 당신을 물어버릴 수도 있다.
8. 판매에 나서라
1980년대에는 소매업체들이 애플의 인기 있는 제품을 취급하려고 애플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했다. 그렇지만 1990년대에는 힘의 균형이 눈에 띄게 소매업체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PC 구매자들이 윈도를 원했던 것이다. 애플은 중대한 조치를 취했다. 기존의 한정된 유통채널을 개방하여 모든 이가 맥을 판매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맥은 사무용품 체인점이나 Sam's Club 같은 도매점에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맥에 적합하지 않은 새로운 매장에서 맥은 IBM과 컴팩의 바다에 잠겨버렸다. 매장에 전시된 모델은 어둡고 습기 찬 구석으로 밀려났으며 판매원들은 맥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 스티브 잡스가 1997년 애플로 복귀했을 때 애플은 유통 측면에서 허우적거렸고 강력한 처방을 필요로 했다.
스티브는 소매점 진열대에 제품이 쌓여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애플과 소매업체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 유통업체를 다섯에서 둘로 줄였다. 그리고 소매업체들과 협력할 영업 및 지원 담당자들을 추가로 100명을 고용했다. 또한 웹사이트를 통해 직접 맥을 소비자들에게 판매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아이디어는 신생기업 델 컴퓨터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애플의 시장점유율은 낮아졌다. 1998년 애플은 모든 소매업체와의 관계를 끊고 오직 컴프유에스에이하고만 거래하겠다고 발표했다. 컴프유에스에이가 선택받은 것은 매장에서 남은 공간을 맥에 할애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점포 안의 점포였다. 그러나 거인 윈텔과 경쟁하는 상황에서 점포 안의 점포 개념은 애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기업인지만 확인시켜 주었다. 판매원들은 맥을 판매하는데 관심이 없었고 맥을 다루지도 못했다. 그래서 고객들에게 맥을 구매하도록 설득하지 않았으며, 맥은 더욱 팔리지 않았다.
모든 방법이 실패로 돌아가자 스티브 잡스는 승부수를 던졌다. 버지니아 주에서 애플 최초의 직영 소매점을 개점한 것이다. “고객들이 몇 걸음만 걸으면 우리 상점에 갈 수 있도록 애플 소매점을 만들 겁니다. 고객들이 일단 상점에 들어오면 우리는 제품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 가르쳐 줄 겁니다.” 직영점 전략은 성공이었다. 2001년 5월 1호점 개점 행사가 열렸을 때, 줄을 섰던 사람들은 “애플, 애플”을 외쳤다. 2008년 8월 애플이 맥 OS X의 업데이트 버전을 선전하려고 특별 판매 행사를 열자, 미국 전역의 애플스토어에 수천 명이 줄을 섰다. 군중을 통제하기 위하여 경찰이 출동했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기술했다. “애플의 전략은 스타벅스가 커피를 위해 했던 일을 컴퓨터 쇼핑을 위해 하는 것이다.” 즉 참신함, 세련됨, 그리고 스타일로 유명한 애플의 전설적인 명성을 이용하여 쇼핑 경험을 창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커다란 도박이었다. 미국 경기가 침체되면서 컴퓨터 매출이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박은 성공을 거두었다. 2004년 애플은 81개 소매점을 통해 연간 12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며 이익을 내었다. 그리고 그것은 국제적인 현상이 되었다. 2003년 11월 애플스토어가 도쿄에서 문을 열었을 때 수천 명이 상점 앞에 줄을 섰다. “브랜드의 신비함과 로고를 이용하라. 그러면 고객들이 상점 문을 두드릴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쇼핑 경험을 창출하라. 그러면 당신은 매주 상점 앞에 줄을 서서 당신 회사의 이름을 외칠 백만 명의 고객들을 얻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비전을 갖고 있었고, 그 비전을 실행에 옮겼다. 그리하여 지금과 같은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9. 쿨함을 잃지 마라
애플은 끝없는 혁신과 더불어 쿨함을 판다. 애플이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 사실 애플은 따뜻함을 팔았다. 그것은 차가운 조직 IBM과는 상대되는 것이었다. 애플 로고는 그러한 점을 강조했다. 차갑고 험한 컴퓨터 세계에서 애플은 당신이 함께 나가서 맥주 한잔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는 점 말이다. 애플은 비주류, 즉 아웃사이더, 길동무, 반체제주의자를 위한 컴퓨터이다. 그랬다. 애플은 주류를 이루는 가치관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쿨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평가했을 때 애플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렇지만 애플은 점점 더 변했다. 애플은 히피족, 그리고 반문화적인 다른 뿌리들과 이별했다. 더 세련되고 더 쿨한 애플이 되기 위해 무지개 빛 로고를 버렸다. 그렇다. 새로운 애플은 여전히 한 잎 베어 먹은 사과 모양이지만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대신 쿨한 분위기를 풍긴다.
1998년 스티브 잡스는 아이맥을 출시하면서 1억 달러 규모의 광고 캠페인을 시작했다. 캠페인의 표어는 이랬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아이맥이다.” 그리고 아이맥(단순함)과 PC(복잡함) 두 제품을 직접 비교할 때 쟁점이 되는 특징에 광고의 초점을 맞추었다. 광고를 보면 카메라가 늘어져 있는 케이블을 피해가며 정체 불면의 윈도 기반 컴퓨터의 뒷면을 비춘다. 그때 남자 내레이터가 시를 읽듯 말한다. “PC 영원히 복잡할 것인가? 케이블이 많은가? 외관이 눈에 띄는가? 특별히 값이 싼가? 이제는 새로운 아이맥이 있습니다. 아이맥은 당신이 구입할 수 있는 非 PC입니다.” 맥이 기존 컴퓨터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 사람을 매료시키는 것은 분명했다. 그중 일부는 아이맥의 단순함을 강조한 마케팅의 성공 덕이었다. 그러나 쿨함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성공 뒤에 스티브는 애플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개선시킬 기회를 확보했다. 1998년 시작된 “다르게 생각하라” 캠페인은 전적으로 쿨하다는 개념을 토대로 했다. 그것은 피카소, 아인슈타인, 존 레논, 달라이라마 같은 문화적 아이콘을 이용했다. 그들은 인습에 저항하고, 한계를 뛰어넘었으며, 세상을 변화시킨 사람들이었다. “다르게 생각하라.” TV 광고에서 내레이터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열정적인 사람들이 바로 세상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 캠페인은 장애물에 부딪히기도 하였다. 아시아 시장을 공략할 때 중국의 감정을 고려하여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라마를 제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품격 있었던 그 캠페인은 애플이 과거 잃었던 쿨함을 되찾는 데 기여했다.
“바꾸세요”는 “다르게 생각하라” 이후에 전개된 캠페인으로 사람들에게 윈텔에서 애플로 컴퓨터를 바꾸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이 캠페인은 유명인사가 아닌 보통 사람을 주인공으로 했다. 그들은 윈도 사용의 끔찍한 경험을 이야기했고, 애플로 바꾼 뒤 행복해진 자신들의 삶을 소개했다. 그런데 2002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캠페인에 등장한 엘렌 파이스라는 대학생이 스타가 되어버린 것이다. 카메라를 보며 학기말 리포트를 먹어버린 윈텔 컴퓨터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녀는 마치 꿈을 꾸는 사람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컴퓨터는 졸작이에요.” 이후 그녀는 각종 신문 기사의 주제가 되었으며, 팬 사이트, 아이콘, 데스크톱 배경화면의 주제가 되었다. 그녀 모습이 찍힌 티셔츠와 프리스비 원반이 출시되었고 유명 토크쇼에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할리우드에서도 전화를 걸어 텔레비전 쇼와 영화 출연을 제의하였다. 이처럼 쿨하다는 평가를 받음으로써 얻는 이익은 영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애플이 한다고? 그렇다면 그것은 쿨한 것임에 틀림없어”라는 식으로 말이다.
10. 악당을 매도하라
컬트를 구축하라. 판매에 주력하라. 제품에 대해 세상에 말하라. 이것이 애플이 스스로를 마케팅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애플의 마케팅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그들은 누구를 악당으로 규정하고 스스로를 착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러한 수고를 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컬트를 구축하는 좋은 방법이자 광고 캠페인과 홍보에 써먹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수를 하여 엉망이 되었을 때도 탓할 누가 있다는 것은 꽤 괜찮은 일이다.
<사례1> 첫 번째 악당 IBM 1984년 1월 슈퍼볼 기간에 애플은 놀라운 광고를 했다. 광고는 조지 오웰의 집회처럼 시작하는데 회색 빛의 좀비 같아 보이는 까까머리 남자들이 경기장으로 들어와서 벤치에 앉는다. 그리고 경기장 정면에 설치되 거대한 흑백 모니터상의 빅브라더같이 생긴 인물을 쳐다본다. 빅브라더는 사람들에게 열변을 토한다. “우리는 하나의 의지, 하나의 결의, 하나의 명분을 가진, 한 사람이다.” 하지만 잠깐! 애플 로고가 박힌 흰 운동복 셔츠에 빨간색 반바지를 입은 젊은 여자가 경찰에 쫓기면서 달려온다. 그녀는 손에 긴 손잡이가 달린 망치를 들고 있다. 그녀는 힘을 모아 큰 소리를 지르며 망치를 획 집어던진다. 쾅! 빅브라더가 연기 속으로 사라지면서 좀비들이 정신을 차린다. 새로운 목소리가 이렇게 말한다. “1월 24일 애플이 매킨토시를 출시합니다. 여러분은 1984년이 더 이상 1984년 같지 않은 이유를 볼 것입니다.” 이것은 IBM을 겨냥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미국의 아이콘인 IBM이 빅브라더란 말인가? 그때부터 애플의 제1호 악당 IBM의 7년 역할이 시작되었다. 당시 ‘1984년’ 광고는 완전히 흥분을 불러 일으켰다. 《TV가이드》가 최고의 상업광고라 불렀던 그 광고를 애플이 다시 돈 주고 방송한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크게 반향을 불러일으킨 그 광고는 그 후 몇 년 동안 애플이 우려먹을 주제를 확립시켰다. 즉 IBM은 획일적이며 융통성이 없고 인간정신을 파괴한다는 것, 그러므로 IBM PC 사용자들은 몰개성적이고 둔감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사례2> 실패한 악당전략 ‘1984년’ 광고 성공 이후 애플은 또 다른 악당 캠페인을 전개했는데 대상은 애플의 잠재 고객들이었다. 이번에는 1985년 슈퍼볼 캠페인의 ‘레밍’ 광고로 시작되었다. 여기서는 정장을 입고 눈가리개를 한 사업가들이 한 줄로 서서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배경음악은 디즈니 영화에서 힘을 돋을 때 나오는 “헤이호, 헤이호” 멜로디이다. 마침내 인간적인 레밍이 줄을 벗어나서 눈가리개를 벗으며 이렇게 묻는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악당 매도 전략의 시각으로 보면 사업가들은 레밍과 같다. 그들은 우두머리를 따라 떼 지어 다니고 혼자 힘으로는 생각할 줄 모른다. 증거는? 그들이 매킨토시 오피스를 살펴볼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훗날 맥 전도사 가와사키는 이렇게 기술했다. “광고는 애플의 자기기만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맥 오피스는 공유 파일을 저장하고 네트워크 액세스를 통제하는 파일 서버 같은 결정적인 구성요소들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파일 서버의 실행 속도는 IBM PC 네트워크 속도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레밍이 결코 레밍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제품(IBM)을 선택할 수 있는 분별력 있는 고객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을 대상으로 한 애플의 악당 캠페인에 분노했다.
11. 리더들을 정비하라
1983년 존 스컬리가 애플의 CEO로 취임한 후 간부들이 3일간의 오프사이트 미팅에 참석했다. 당시 마흔 네 살의 스컬리는 서열을 중시하고 사무실에서 딱딱한 분위기를 풍기며, 행동이 예측 가능한 펩시 출신이었다. 애플 역사에서 그때는 섭정 시대라 할 수 있다. 나이 먹은 노련한 카운슬러가 왕자(스티브 잡스)로 성장하여 왕위에 오를 때까지 왕권을 행사한 시기 말이다. 미팅이 시작되었을 때 스컬리는 애플에서의 삶이 펩시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공식적인 의제를 갖고 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젊은 간부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갖가지 안건을 자유롭게 토론했다. 사방에서 무례한 말들이 오갔다. 스티브 잡스도 그런 무례한 행동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스티브가 무엇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하자 동료들이 그를 맹공격한 것이다. 스컬리는 애플의 광고 대행사의 한 간부가 했던 농담을 떠올렸다. “애플과 보이스카우트의 차이점? 보이스카우트는 어른이 감독을 한다는 것이다.”
스컬리는 스티브 잡스와 사이좋게 지내겠다는 생각으로 애플에 발을 디뎠지만 그들의 관계는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스티브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맥은 잘 팔리지 않았고 신제품은 제때 출시되지 않았다. 또한 IBM과의 경쟁격화로 애플의 자산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1985년 스컬리는 자신 아니면 스티브 둘 중 하나는 사업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이사회에 말했고, 이사회는 맥 사업부 운영권을 스티브에게서 빼앗아 스컬리 손에 쥐어주었다. 스티브는 자신이 가진 애플 주식을 매각하고 즉각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스컬리는 8년 동안 애플을 이끌었고 1993년 애플을 떠났다. 그의 재직 기간 중 애플의 매출은 연간 8억 달러에서 80억 달러로 증가했지만 시장점유율은 20%에서 8%로 하락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윈도와 인텔 칩을 선택하는 상황에서도 독특한 OS와 모토롤라 칩을 끈덕지게 고집한 결과 호환성의 문제가 발생했다.
스컬리의 후임으로 애플 경영을 맡은 이는 독일 출신의 마이클 스핀들러였다. 그는 1990년대 애플을 맡은 CEO 중 가장 무능한 CEO로 평가받는다. 좀더 공정하게 말하면 그는 거의 방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애플에 합류했다. 애플은 윈텔과의 전쟁에서 패했고 시장점유율 20%라는 성배를 찾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맥 OS를 라이선스하려고 했지만 시기적으로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재정적인 압박이 심해지면서 애플은 계속해서 근로자들을 정리해고 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 공백기의 세 번째 CEO는 아멜리오였다. 그는 1994년 애플 이사회 멤버가 되었고 1996년 CEO로 임명되었다. 이사회 멤버로 활동하던 어느 날 스티브 잡스가 그를 찾아왔다. 아멜리오는 스티브의 제안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자신이 애플의 CEO로 복귀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애플은 파산의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애플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강력한 리더입니다.” 이 일화는 스티브 잡스가 왕좌를 되찾기를 원했고 오직 그만이 애플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멜리오가 CEO 재직기간(1996년 1월 ~ 1997년 6월) 동안 자리만 지키다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변화관리자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관리자들에게 채찍을 휘둘렀고 상당수를 몰아냈다. 파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자금을 보충하고, 품질을 강조하여 멀어진 고객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애플이 직면한 중대한 위협인 차세대 OS의 부재 문제에 맞섰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진영으로 돌아온 것도 그가 스티브가 설립한 넥스트를 매입했기 때문이다.
아멜리오가 사표를 제출한 이후의 이야기는 어렸을 때 들어온 동화처럼 귀에 익은 것이다. 왕자가 돌아와서 칼을 휘두르고 약간의 마법을 부려서 소왕국을 어둠의 세력에서 구해낸다는 이야기 말이다. 실제로 전설은 허구가 아니다. 스티브 잡스는 전임자들이 아끼던 프로젝트에 칼을 휘둘렀다. 스핀들러의 복제 프로그램과 스컬리의 뉴턴을 중지시켰으며, 대신 차세대 맥과 오랫동안 출시가 지연된 OS 제품 개발에 주력했다. 또한 그는 애플에 기강을 부여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애플이 누리지 못했던 특성이었다. ‘꼭대기부터 새는 배’로 유명했던 애플이 철저한 통제가 이루어지는 팀 중심적인 조직으로 바뀐 것이다. 1999년 초 잡스는 애플을 회생시켰을 뿐 아니라 5분기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 그는 극적인 성공을 이루어냈다. 또한 칼을 단 한 번 휘둘러 한때 적대적이었던 방대한 땅을 정복했다. MP3 플레이어 판매에서 세계의 다른 모든 기업의 판매량보다 애플의 판매량이 더 많았던 것이다. 이제 애플은 신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12. 미래를 창조하라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교수이자 전략 전문가인 데이비드 여피는 10년 전 인텔의 앤디 그로브와 존 스컬리의 만남을 주선했다. 전설적인 인물인 그로브와 얼굴을 마주하면 스컬리가 혹독한 현실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로브는 스컬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IBM은 당신이 필요로 하는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만들 수 없습니다. 인텔만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스컬리는 그로브의 프레젠테이션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자신이 들은 바를 곰곰이 생각해 보겠다고 여피에게 약속했다. 일주일 뒤 여피가 애플의 수석 책임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할 때 책임자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인텔은 많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토스터에 장착하여 판매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여피가 당황하여 말했다. “무슨 뜻입니까?” 책임자가 대답했다. “그들이 그 많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컴퓨터에 장착하여 판매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렇지만 그 마이크로프로세서들은 모두 몇 백만 대의 윈텔 컴퓨터에 설치되어 있었고, 애플은 이미 PC 산업에서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있었다.
이 일화는 애플 컴퓨터가 겪은 오랜 혼란에서 여피가 도출해낸 전략적 교훈 가운데 첫 번째인 “경쟁 환경을 정확히 이해하라”로 우리를 이끈다. 당시 애플은 대부분의 기업들보다 더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윈텔에 대해서는 보지도, 귀 기울이지도,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여피의 교훈 “경쟁 환경을 정확히 이해하라. 최고가 되었다고 자만하지 마라. 표준이 승리할 것이다. 타이밍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쟁우위가 사라진다. 성공이 성공을 낳는다”는 혁신이 극히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여피는 다음과 같은 분석을 했다. 새로운 OS를 제시하는 데 약 10억 달러가 든다. 만약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당 60달러에 연간 1억 5천만 개를 판매한다면, 단 6주 만에 투자 금액을 회수할 수 있을 것이다. 애플의 계산은 좀 복잡하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쪽에서 수익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 분석하면 애플이 해마다 4백만 개를 판매할 경우 10억 달러의 투자 자금을 회수하려면 3년이 걸릴 것이다. 당신은 어느 회사에 투자하겠는가?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나는 애플이 가진 네 가지 이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를 감안하면 계산은 훨씬 복잡해질 것이다.
첫째, 애플에는 스티브 잡스가 있다. 스콧 켈리는 말했다. “그는 천재이다. 안 되는 일을 되게 만드는 사람이다. 다른 선한 리더들이 침몰을 막지 못할 때 애플의 침몰을 막아낸 사람이다.” 110억 달러가 넘는 기업이 천재성을 지닌 특정인에게 의존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큰 일이다. 그러나 그는 젊고 건강할 것이며 막대한 이익이 되는 제품들을 계속 만들어낼 것이다. 둘째, 애플은 다소 여유가 있다. 은행에 50억 달러의 현금이 있고, 주요 수입원을 다각화했기 때문이다. OS X 출시, 가전 시장 진출, 인텔칩으로의 전환을 포함하여 최근 스티브 잡스가 취한 극적인 조치들은 여유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셋째 애플은 활력을 되찾는 강력한 브랜드를 가지고 있다. 특히 아이맥과 아이팟의 성공으로 20년 만에 처음으로 애플 브랜드는 승리자로서 재투자를 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애플에 행운이 따르고 있다. 역사상 중요한 때에 빌 게이츠가 법무부의 추적을 받고 있었던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아이맥이 시장에 출시되었을 때 컴퓨터 산업 전반이 2년간의 호황기에 접어들었다는 것도 커다란 행운이었다. 아이팟이 계속해서 높은 매출을 올린 것도 애플과 스티브 잡스에게 행운이었다. 애플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애플 역할을 할 누가 항상 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스마트한 사람들로부터 이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무시할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훌륭한 도구를 공급하려고 열심히 일하는 정말 스마트한 집단이 있음을 믿고 있다. 그것은 애플이 항상 해왔던 일이고, 애플이 제대로 한다면 앞으로 계속할 일이다.
애플과 스티브 잡스는 정말 브랜드 자체로도 엄청난 성공 신화로 전세계 사람들에게 각인이 되어 있다 모든 성공 신화는 거품과 과장이 있지만 애플과 스티브 잡스도 예외는 아니며 지금도 애플의 미래나 스티브 잡스없는 애플의 미래에 대한 의구점이 많은 투자자나 전문가들로 부터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략적 혁신의 대표적인 case로 끊임없는 bench marking을 해 볼 만한 대상이라는 점이다 웅진 코웨이가 세계적인 초 일류 기업이 되기 위해서도 역시 시사점이 많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