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에 부인하고 순종할 때 영원한 집이 지어집니다. / 2023년 4월 30일 주일 오후 예배
본문 / 고린도전서 3:1-23
대천에도 짓다가 공사가 중단된 집들이 있습니다. 해수욕장으로 가는 곳과 남포에 공사가 중단 된 그 집들은 제가 목회를 시작하기 전부터 있었으니 최소 28년 이상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이 천국에 관한 책에 천국에도 공사가 중단 된 집이 있더라는 겁니다. 지금 천국에서 내 집은 잘 지어져 가고 있을까? 천국에 내 집이 있기는 한 것일까? 아예 천국에 터도 닦지 못한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오래 전에 기초만 쌓고 중단된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정말 이게 문제입니다. 이 세상 집이야 아무리 좋아도 그 집에서 떠나야 할 날은 날마다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는 이 세상을, 내가 살던 그 집을, 육체를 그 모든 장막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살다가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스쳐지나 가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인생을 나그네와 외국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육체를 풀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영광은 풀의 꽃이라 하시고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고 하신 겁니다.
너희는 안개라고 하셨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라 하시고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하셨습니다. 육은 무익하다고 하시고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성도들이 영생을 위해 삽니까? 하나님 나라에 내가 영원히 살집을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짓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에 영원한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잠시 살다가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어떻게든 다른 사람보다 크고 화려한 집을 지으려고 환장을 한 것입니다.
정말 이 세상에 자기 집을 마련하려고 준비하는 그 정성과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영원한 집을 짓는 성도들은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미련한 인생들입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성도들을 보며 답답해하실까요? 불에 타 없어질 그 육신의 집에는 환장에서 허리를 졸라매며 빚을 내고 대출을 받아 집을 준비하면서 정작 영원한 집을 위해서는 시큰둥하며 관심도 소망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의 집, 그 육신의 집에 환장하며 사는 성도들에게 집 없이 살던 병든 거지 나사로와 대궐 같은 집에서 살던 부자가 죽은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그들의 영원한 세계에 대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대궐 같은 집에서 살았지만 죽은 다음에는 집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집을 짓지 못한 것입니다.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집이 없는 노숙자로 불쌍하게 살았습니다. 개들이 그 곪은 상처를 핥았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그 병들고 가난한 삶에도 하나님 나라에 집을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불구덩이에서 고통을 받는 그 부자에게 이 세상에서 대궐 같은 곳에 살았던 그 과거가 무슨 위로와 영광이 됩니까? 지금 하나님의 품에 안겨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던 나사로에게 이 세상에서 겪었던 그 가난과 배고픔과 질병과 외로움이 고통이 됩니까?
정말 이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어떻게든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데 그것을 말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잠시 왔다가는 곳임을 알아야 하고 영원한 세계가, 진짜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팽이 중에 집 없는 징그러운 민달팽이가 있습니다. 집이 없이 몸이 다 나와 있으니 보면 징그럽습니다. 잠시 살다가는 이 세상에서도 집 없으면 불쌍하고 서럽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환장하고 자기 집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교훈으로 영원한 세계를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잠시 살다가는 이 세상에서도 내 집이 없으면 가장 서럽고 고통스러운데 이 세상을 떠난 저 영원한 세계에서 내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안식할 집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말입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집 없는 그 서러움과 고통과 그것이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집이 없는 그 고통을 이 세상에서 집 없는 그 고통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아무리 이 세상에 집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도 뭐는 있습니까? 누울 자리는 있고 옷은 입고 삽니다. 이 세상에서 누울 곳도 없고, 옷을 안 입고 사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노숙자도 길이나마나 누울 곳이 있고 냄새나고 다 떨어진 옷이라도 입고 사는 것입니다.
집이 없어도 부끄러운 곳은 가리고 추위와 더위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집 없이 살아도 누울 자리는 있고 옷 없이는 안사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에 집을 짓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믿음의 옷, 흰 옷,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집을 짓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의 옷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흰 옷이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과 하나님과 재물과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함께 섬기는 회색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 회색 옷은 심판대에서 불에 타버립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집을 짓지 못하고 집 없는 자가 되어 지옥에 떨어지는 자들은 영원토록 눕지도 못하고 옷을 입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옥은 영원토록 벌거벗고 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고 산다고 해보십시오. 부끄러운 것을 가리지 못하고 말입니다. 부끄러워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래서 천국에서 안식할 집을 짓지 못하고 집 없이 지옥에 떨어지는 이 불쌍한 자들은 영원한 옷을 입지 못하기 때문에 영원히 고통당하면서 영원히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세계를 생각하며 반드시 이 세상에 있을 때 하나님 나라에 집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내가 살 집은 어떻게 짓는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지어야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언제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위해 집을 지어주십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을 송금하면 됩니다. 그 믿음이 건축자금과 건축 재료가 됩니다. 어떻게 건축비와 재료가 되는 이 믿음을 하나님 나라로 송금하겠습니까?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면 되는 겁니다. 어떻게 믿음으로 사는 겁니까? 이 세상에서 내가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는 것을 하나님은 믿음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을 위해 어떻게 집을 짓는지 본문에서 증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집이다! 성전이다! 선언하고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을 어떻게 집어야 한다고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곧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집을 지어야 불에 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는 말씀과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믿음의 집을 짓지 않으면 다 불에 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집을 지어야만 하나님을 모신 하나님의 집과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 집을 지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집을 짓는 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타락한 인간은 자기 집을 짓는 자들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지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 영혼과 마음과 몸에 하나님을 모신 집을 짓고 살아야 하는데 내가 하나님이 되겠다고 타락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자기 집을 지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아숭배가 인생의 방향과 목적과 가치관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로 부름을 받고 나와도 그 타락을 십자가에 못을 박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이 세상에 자기 집만 짓다 가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자신의 종교적인 열심과 행위와 자기 의로 집을 짓고, 물질주의와 기복주의로 자기 집을 짓는 것입니다. 목사들도 만찬가지입니다. 목회가 자기 집을 짓는 것이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위한 집이었지만 나중에는 타락하여 자기 집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고, 처음에는 하나님을 위한 목회였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육신을 위한 직업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자기 집이 되었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한국교회의 세습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 아닌 자기 집으로 만든 그 타락으로 인한 것이 대부분일 겁니다. 물론 십자가를 물려준 사람들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오전에도 말했지만 저도 하나님의 교회에서 내 집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과 몸으로 하나님이 집이 아닌 나를 위한 집 즉 자아숭배의 제단을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헌 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내 몸과 인생으로 즉 내 영혼과 마음에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면 뭐가 있어야겠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로 성도와 목사로 부름을 받고서도 여전히 자신을 위한 집, 내 집을 짓겠다는 그 타락을. 그 헌집을 십자가의 못을 박는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헌 집 안에 새 집을 지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헌 집을 놔두고 그 터 위에 어떻게 새 집을 짓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내가 주인이 되어 내 자아를, 그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섬기는 자아숭배를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가 나를 위한 집을 지겠다는 그 자아숭배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나를 위해 지신 대속의 십자가를 만나서 내 인생은 나를 위해 집을 짓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지금까지 지어온 내 헌 집을 주님 앞에 내려놔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왔으니 이제는 인생이 나를 위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 짓는 것임을 알았으니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타락을 대속해주신 그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자신의 인생과 몸으로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짓기 위에 세상에 온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과 마음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성도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는 믿음을 보시고 내가 하늘에서 네가 영원한 안식할 집을 너를 위해 지어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안식할 그 집을 어떻게 짓는 것인지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님 나의 이 말을 듣고 순종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이 때문에 즉 예수 그리스도의 터, 십자가의 은혜와 그 믿음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으로 그 집은 심판에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이기 때문에 즉 자기 자신을 위한 자아숭배의 터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그 집은 심판에 무너지고 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친 것이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한 것입니까? 그들은 겉으로는 대단한 하나님의 사람들 같았지만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으로 즉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 것이 아닙니다. 형식은 주님의 이름으로 하였지만 속으로는 다 자신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 자신이 영광을 다 가로채어 받은 것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몸으로 행하는 육체의 행위가 순종은 아닙니다. 반드시 자신의 죄를 대속해주신 그 십자가에 자신의 주인 됨을 부인하는 은혜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순종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에서 나오는 그 순종이 내 몸을 하나님의 집과 성전으로 지어져 가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때에 하늘에서 내 집을 지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순종하는 믿음으로 내 몸을 하나님을 위한 집으로 지으면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가 영원히 안식할 나를 위한 집을 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십자가에 나를 날마다 부인하며 말씀에 순종하여 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겁니다. 죽은 다음에 하나님 나라에 내가 살 집이 없다면 이것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앞에서 말했듯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 고통이 어떤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절대로 나를 위해, 육신대로 살면 안 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합니다. 영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성도들의 문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고 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대속의 은혜를 알고 받았다고 말하지만 자신을 십자가에 부인하며 자신이 원치 않아도 하나님이 원하고 기뻐하는 그 뜻에 순종하는 열매는 없는 것입니다. 저주를 받아 죽은 열매가 없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찍어 불에 던진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죽은 지식만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의 30년 전 일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정말 그때에도 밥을 굶고 목회를 했답니다. 먹을 게 없어서 굶는 날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분이 백만 원을 보내준 것입니다. 돈도 없고 먹을 게 없어서 밥을 굶는데 백만 원이 생겼으니 이게 얼마나 크고 귀한 돈이겠습니까? 일단 쌀이며 라면이며 먹을 것을 잔뜩 사다놔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한 목사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태풍에 교회 지붕이 다 날아갔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필요한데 그러느냐 하니 백만 원은 있어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런 제기랄 이런 소리가 나오더랍니다. 내가 내일 한 번 가보겠다고 하고 찾아갔습니다. 한 쪽 봉투에는 삼십만 원을 담고 한 쪽 봉투에는 칠십만 원을 넣었습니다.
조금 부셔졌으면 삼십만 원을 주고 많이 부서졌으면 칠십만 원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는 봉투 두 개를 다 주고 온 것입니다. 또 밥을 굶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는 겁니다. 너는 주리지 않을 거야! 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목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하나님, 나는 그렇게 못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나는 십만 원이라도 줄 수 있을까요? 밥을 먹으면서 백만 원을 주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먹을 게 없어 나도 밥을 굶고 있을 때 남을 도와주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겁니다.
아니, 내가 누굴 도와줘? 나도 힘든데 이러지 않습니까? 울면서 회개하고 기도하면서 제발 나도 십만 원이라고 줄 수 있는 자가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 집을 작게라도 지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고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죽어야 할 죄인을 대속해주신 주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내 이웃을 용서하고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잘 안 되어도 십자가에 날마다 날 부인하며 용서하고 사랑하며 나눠주고 섬기며 말씀에 순종하는 십자가의 좁을 길만을 가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영원한 새 집을 짓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