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3월 남도문화를 찾아 화순으로의 여행>
◈ 세량지 봄.......전남화순군 화순읍 세량리 97번지
화순세량지의 풍광은 멋진 곳으로 매년 4월 중순 산벗 꽃 필 때면 사진을 취미로 하는 전국의 사진애호가들이 한번쯤 꼭 들리는 곳이라 합니다. 세량지는 세량재라고도 하며 농업용수를 공급하기위해 1969년도에 만들어진 아주 평범한 시골의 저수지로 2004년 광주의 모교사가 발견하여 2005년도에 인터넷에 작품을 올려서 비로소 전국으로 유명세로 알려진 곳이라 하며, 이러한 자연의 좋은 조건과 멋진 풍광이 공동묘지로 개발하여 사라진다는 말에 사진을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화순군에 단체진정서와 함께 항의하여 비로소 화순군에서도 그곳을 살렸답니다.
◈ 정암 조광조선생 적려 유허비...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174
조광조유배지에는 정암 조선생 적려유허 추모비’와 영정각, 3칸 초가, 애우당이 있고, 애우당 천장에는 여러 개의 현판이 있습니다.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 절명시(絶命詩), 애우당기(愛憂堂記), 역모무고공술(逆謨誣告供述) 등 그 중 역모무고공술(逆謨誣告供述)이라고 써진 현판은 조광조 최후의 진술이 적혀 있으며, 추모비는 현종 8년(1667)에 능주 목사였던 민여로가 세운 것입니다. 뒷면에는 우암 송시열이 지은 비문이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로 새겨져 있으며, 비석 아래의 거북이 오랫동안 땅에 묻혀 있었는데 보수하면서 파 올렸고, 강당 쪽에 있는 문은 원래 비각 정면에 있던 것이라고 합니다. 초가와 영정각 등은 근래에 복원한 것이랍니다.
조광조[趙光祖]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한양. 자(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 붙이는 이름)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입니다.
어천찰방(魚川察訪,지금의 평안북도 영변)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연산군 4년)로 유배 중인 김굉필에게 수학하였으며, 중종 5년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 여러 가지 종이를 제조하는 사무를 관장하는 일, 종육품)에 임명되었습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조선시대에 궁중의 경서·사적의 관리, 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에 들어갔으며 전적· 감찰· 정언· 수찬· 교리· 전한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오늘날 검찰총장)이 되었습니다.
정암 조광조선생은 적으로부터 ‘광인’ 혹은 ‘화태(화를 낳은 근원)’라 불린 급진주의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조선 최고의 급진적 개혁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 이상주의를 조선 땅에 뿌리내리고자 한 철저한 원칙주의자였으니 적 또한 많았을 것입니다.
정암 조광조선생이 죽으면서 남긴 시입니다. .
愛君如愛父(애군여애부)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 하였고
憂國如憂家(우국여우가)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근심하듯 하였네
白日臨下土(백일임하토) 밝은 해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昭昭照丹衷(소소조단충) 거짓 없는 이 내 충정을 환하게 비추리라
조광조는 금부도사가 사약을 가지고 내려오자, 주위에 종이와 붓을 청하여 이 시를 짓고는 단숨에 사약을 받아 마셨습니다. 조광조와 함께 동문수학했던 친구 학포 양팽손은 정암이 유배를 당할 때, 그를 위한 상소를 올렸다가 훈구파의 미움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인 능주로 내려왔습니다. 끈 떨어진 조광조를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으나, 학포는 주변의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암의 적거지를 날마다 찾아다니며 말동무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을 때는 금부도사가 조광조의 시신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시신을 수습하여 쌍봉사 골짜기(조대감골)에 장사지내고 서운태(서원터)마을에 집을 짓고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 주었습니다.
의리 때문에 삼대가 멸할 수 있음을 학포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손의 멸절보다 더 큰 것이 친구인 정암과의 의리였습니다.
삼대 멸할 위험 속에서도 정암과의 의리 지킨 학포 양팽손.
세월이 흘러 1568년, 정암의 죄가 풀렸고 선조는 그를 영의정에 추증하였으며, 문묘에 배향하였습니다. 사후약방문이었으나 어찌되었건 그는 사면되었고, 1677년에 능주 목사였던 민여로는 그를 추모하는 비를 그가 살았던 초가삼간 앞에 세웠습니다. 당시에 잘나가던 노론 3인방이 비석을 세우는 데 앞장섰던 것입니다.
예학(禮學)의 대가였던 동춘당 송준길은 비석의 앞면에 들어갈 ‘靜庵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를 해서체로 썼으며, 적려는 ‘귀양 갔던 곳’을 말하고 유허비는 ‘한 인물의 옛 자취를 살펴서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를 말함이니, 정암 조광조가 능주에 유배 온 행적을 적은 비라 할 수 있습니다.
둔촌 민유중은 뒷면의 위에 들어갈 ‘靜庵趙光祖先生追慕碑(정암조광조선생추모비)’를 전자(篆字)체로 정성을 다해 쓰고,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은 뒷면 전체에 들어갈 조광조 선생의 행장을 지었습니다. 뒷면 글씨 또한 동춘당이 일필휘지했습니다. 자신들의 학문적 스승이자 선배에게 바치는 최대한의 예의였던 것입니다.
조선의 개혁가, 정암 조광조! 그는 불우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도 능주골에는 그가 살았던 적거지 한 자락에 노론 3인방의 필적이 담긴 추모비가 서 있습니다.
◈ 영벽정........전남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 산 1
영벽정은 계절에 따라 변모되는 연주산의 경치를 맑은 지석강물에 투영되어 운치 있게 바라볼 수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능주팔경 (영벽상천(映碧賞泉)중 하나입니다. 2층의 팔작지붕에 한식골기와를 얹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 형이며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양팽손(l488~l545)의 제영, 신증동국여지승(148I~1531신증), 김종직 (1431~1492)의 시로 보아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조 10년(l632)에 능주목사 정연이 아전들의 휴식처로 개수하였다고 전하며 고종 9년(1872)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이듬해 고종 l0년(l873) 목사 한치조가 중건하였습니다. 이후 보수를 거듭해 오다가 1982년, l983년에 각각 보수하였으며 l988년에 해체 수리하였습니다. 지석강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운 경승지에 자리하고 있어 행락객들의 휴식처로 널리 이용되고 있습니다. 정내에는 9개의 시문이 있습니다. 기단위에 주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으로 누하주를 세웠는데 원래는 목조기둥이었으나 l988년 해체 복원시 영구성을 위해 석조로 대체하였다. 이 기둥위에 마루를 깔아 중층 누각형 정자를 만들었습니다. 마루의 사방에는 계자 난간을 돌려 장식하였고 처마밑에는 활주를 세웠습니다. 누상주의 기둥머리는 익공형식의 공포를 하었고 천정은 연등천정이나 중앙부는 우물천정을 설치하였습니다. 지붕을 3겹으로 한 것은 아주 보기드문 일로 주목됩니다.
◈ 삼충각....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 산 33-1
임진왜란 중에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논개와의 사랑 충의군 최경회와 문홍헌 장군, 을묘왜변 때 전라남도 해남 지방에 침입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조현 장군 등 세 충신의 애국 충정을 추모하기위하여 건립한 것입니다.
「진주 3장사」의 한사람으로 불린 충의공 최경회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큰형 경운, 둘째형 경장과 더불어 고사정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 금산전투와 무주대첩에서 혁혁한 전승을 거둡니다. 진주성이 왜적에게 포위되었다는 경상우순찰사 김성일의 구원요청을 받은 최경회 의병장 은 진주성 구원의 결정을 내렸는데 이때 일부가 '호남을 버리고 머나먼 영남을 구하러 가는 일이 옳지 못하다'고하자 '호남도 우리 땅이오 영남도 우리 땅인데 의로써 뭉친 우리들이 어찌 멀고 가까움을 가리겠는가'하며 진주성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경상우병사에 임명된 후 첫 번째 진주성 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하였으나 두 번째 전투 에서는 물밀듯 밀려오는 왜적에 대항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최경회와 주논개는 어떤 사이였을까요?
장수땅 대곡리 주촌마을이 논개의 고향이고 성은 주씨입니다. 태어나기를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 곧 개해 개달 개날 개시에 태어나서 논개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논개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 집에서 자랐는데 건달인 외삼촌이 그를 지방 토호에게 첩으로 팔려고 했습니다. 이에 논개가 어머니와 함께 장수 현감인 최경회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였습니다. 논개 모녀로부터 전말을 들은 최경회는 이들을 무죄 방면하였습니다. 이후 논개는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최씨 부인의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논개의 재색에 감탄한 현감 부인이 최경회에게 논개를 소실로 맞이할 것을 권유한 뒤 지병으로 숨을 거둡니다. 이렇게 해서 논개가 18세 되던 해 1591년 봄, 최경회와 부부의 인연을 맺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회는 진주 병사로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였다가 패하게 되자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습니다.
◈ 죽수서원.....전남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산15-3
정암 조광조(1482∼1519)와 학포 양팽손(1488∼1545)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 조광조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도록 하였고 현량과를 처음 실시하였으며 위훈삭제사건으로 반정공신들의 반발을 사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조광조는 선조 1년(1568)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습니다. 양팽손은 조선 중기 문신입니다.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항소하다 삭직되었습니다. 회화에도 일가견을 보여 안견의 산수화풍을 계승하였습니다. 죽수서원은 선조 3년(1570) 조광조를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가 같은 해에 나라에서 ‘죽수’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인조 8년(1630) 양팽손을 추가로 모셨는데,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어 단(壇)만을 마련하고 제사지내 왔습니다. 이후 1971년 능주의 유림과 제주 양씨 후손들이 월곡리에 죽수서원을 복원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83년 다시 조광조 선생 후손들이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지어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경내 건물로는 3칸 크기의 사우, 내삼문, 외삼문, 3칸 크기의 강당 등이 있습니다. 배치 형태는 내삼문과 좌우로 둘러진 담장에 의해 제사지내는 곳과 교육하는 곳으로 분리된 전학후묘의 형태입니다.
*** 배향인물
1)주벽-조광조(趙光祖, 1482∼1519)
정암(靜庵)은 17세때 어천 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중이던 김굉필문하에서 수학하였습니다. 학문은 소학, 근사록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 연구에 응용하였으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는데,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에는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에 초임되었습니다. 그 해 가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감찰·예조좌랑 등을 역임하면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는데, 그는 항상 유교로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습니다. 그 뒤 정언·수찬·정랑·교리·부제학·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여씨향약의 실시, 소격서의 혁파, 현량과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 삭제 등과 같은 많은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습니다. 이 같은 급진적인 개혁은 마침내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 시켜서 기묘사화의 실마리로 작용하였고,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가 사사되었습니다. 당시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대한 주창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러한 주창을 계기로 하여 당시의 학풍은 변화되어 갔으며 뒤에 이황·이이 같은 학자가 탄생될 수 있었습니다.
2)양팽손(梁彭孫, 1488∼154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 능성(綾城) 출신입니다. 1510년 조광조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으며, 또 현량과에 발탁되었습니다. 이후 정언·전랑·수찬·교리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호당(湖堂:독서당을 고쳐 부른 이름)에 뽑혀 사가독서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언으로 재직할 때 이성언을 탄핵한 일로 인해 대신들의 의계로써 직책이 갈렸지만, 조광조·김정 등 신진 사류들로부터는 언론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였습니다.
1519년 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와 중조산 아래 쌍봉리에 작은 집을 지어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하였습니다. 이 무렵 친교를 맺은 인물들은 기준·박세희·최산두 등의 기묘명현들이었습니다. 특히, 능주로 유배되어온 조광조와는 매일 경론을 탐구하며 지냈습니다.
1539년에 다시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544년 김안로(金安老)의 사사 후 용담현령에 잠시 부임했다가 곧 사임하고 다음해에 58세로 죽었습니다. 13세 때 송흠에게 나가 공부했으며 송순·나세찬 등과 동문으로서 학문을 연마하였습니다. 항상 ≪소학≫·≪근사록≫ 등으로 처신의 지침을 삼았고, 당시 신진 사류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습니다. 회화에도 일가견을 보여 안견의 산수화풍을 계승하였습니다. 1630년(인조 8) 김장생 등의 청으로 능주 죽수서원에 배향되었으며, 1818년(순조 18) 순천의 용강서원에 추향되었습니다. 작품으로는 <산수도> 1점이 전하며, 저서로는 ≪학포유집≫ 2책이 전합니다. 시호는 혜강(惠康)입니다.
경내는 중앙에 정명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내삼문과 좌우로 둘러진 담장에 의해 제향구역과 강학구역으로 분리되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1989년 동재, 1994년에 관리사를 신축하였습니다.
중요물건(관련유적)
1)정암적려지(靜庵謫廬址)-전라남도기념물 제41호(1979.08.03지정)
조광조가 능주에 유배되어 살았던 집은 당시 관노 문후종(文厚從)의 초가 3간 집이었다고 하는데 현재 능주면 남정리 174번지 일대입니다. 현재 이 초가를 복원하여 1979년 8월 3일에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41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 적려지 초가 옆에는 조광조의 영정각과 강당도 새로 지어져 적려경내를 새로 단장하였습니다.
중요물건(관련유적)
1)정암적려지(靜庵謫廬址)-전라남도기념물 제41호(1979.08.03지정)
조광조가 능주에 유배되어 살았던 집은 당시 관노 문후종(文厚從)의 초가 3간 집이었다고 하는데 현재 능주면 남정리 174번지 일대입니다. 현재 이 초가를 복원하여 1979년 8월 3일에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41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 적려지 초가 옆에는 조광조의 영정각과 강당도 새로 지어져 적려경내를 새로 단장하였습니다.
2)유허비(遺墟碑)
능주면 남정리 174번지 적려지에 유허비각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조광조 유배지의 대표 상징유적입니다. 이 유허비는 1667년(현종 8)에 당시 능주목사 민여노(閔汝老)가 세운 것으로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비문글씨는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비액전서(碑額篆書)는 민유중(閔維重)이 썼습니다. 처음에는 비문만 세워져 있다가 비각은 정조대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분명치 않으며 다만 비각중수기(정암의 11세손 趙性敬 撰)에 의하면 1876년(고종 13)에 양정환(梁廷煥)이 주력하여 비각의 중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3)죽수서원유지추모비(竹樹書院遺址追慕碑)
죽수서원이 사액서원이지만 대원군 때에 훼철된 것은 조광조의 고향인 경기도 용인의 심곡서원과 겹치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떻든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훼령 이후에 죽수서원이 철훼되자 그 서원유지에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양재경(梁在慶)의 주선으로 비문은 최익현(崔益鉉)이 짓고 음기는 송병순(宋秉珣)이 썼습니다.
4)중수죽수서원기 : 조찬한이 찬한 중수기.
5)조광조신도비 : 노수신이 찬한 정암조광조의 신도비.(노수신문집 소재집)
6)양팽손신도비 : 홍량호가 찬한 학포양팽손의 신도비.(홍양호문집 이계집)
◈ 임대정원림 ...화순군 남면 사평리 599 (상사1길 48)
임대정 원림은 조선조 철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을 지낸 사애 민주현(1808∼1882)선생이 1862년에 초가를 짓고 원림을 조성, 여생을 지낸 곳입니다. 이곳은 그전부터 풍광이 수려해서 선조대의 문인인 고반 남언기가 정자를 세우고 수륜대라 일러 원유생활을 하였으나 그 후 황폐되었던 것을 사애 선생이 다시 주변에 수림을 조성하고 연못도 파 다듬어 임대정이라 한 것입니다. 임대정의 뜻은 송나라 주돈이의[종조임수대여산=아침 내내 물가에서 여산을 대한다]이라는 시구에서 그 이름을 취하여 임대정이라 하였습니다. 임대정은 바위 언덕위에 자리하며 길에서 시냇물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 언덕에 다다르면 평탄한 마당에 정자가 있고 작은 방지(方池)가 있습니다. 방지 뒤편에는 대나무 숲이 덮여 있어서 정원의 소쇄한 분위기를 돋우고 있습니다. 정자에서는 멀리 사평 천과 그 너머 광활한 평야가 보이고 절벽 아래에는 두 개의 큰 연못이 부분적으로 보입니다.
◈ 둔동마을 숲정이.... 화순군 동복면 연둔리 472-1
푸르른 대자연의 축복이 내린 땅! 동복면 연둔리 둔동마을에 조성된 숲정이는 빽빽이 들어선 갖가지 종류의 나무들로 풍성함이 더해 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관광 명소입니다. 동복면 연둔리 동복천을 따라 1km에 걸쳐 남북으로 길게 늘어 서 있는 둔동마을 숲정이는 왕버들, 느티나무, 서어나무, 검팽나무 등 230여 그루의 아름드리나무들이 어우러져 대단위 숲을 이루고 있는 탓에 천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숲속을 산책하다보면 마치 터널 속을 거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1500년경 마을이 형성되면서 마을을 보호하고자 인공으로 조성한 이래 연둔리 마을 사람들이 울력으로 가꾸고 키워 온 이 곳에는 숲정이가 조성된 연유와 관련해 한 가지 전설이 전해옵니다. 그 내용인 즉, 연둔리의 둔동마을 뒷산에 큰 바위가 있는데 동복 천 건너에 있는 구암리 규암에서 그 바위가 보이면 마을에 큰 재앙이 생긴다 하여 450여 년 전 당시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한 강씨라는 성을 가진 만석꾼이 뒷산의 큰 바위를 가리기 위해 나무를 심었으며 그 이후 지금까지 자라고 자라 오늘날 울창한 숲이 되었다합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나무에 부딪쳐 ‘쉬~익’ 하는 바람의 파공음 뒤로 목청껏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가 경쾌하다고, 여기에 터벅터벅 낮은 발자국 소리가 묘한 하모니를 이뤄 숲은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정원이라고합니다.
◈ 방랑시인김삿갓....화순 동복면 구암리 74-1
김삿갓 유적지는 2009년 안채, 사랑채, 사당을 비롯한 정비하였습니다. 김삿갓은 본명이 김병연으로 1807(순조7년)에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에서 안동김씨 김안근과 함평이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병연(炳然), 자는 성심(性深)이며 호는 난고(蘭皐)입니다. 다섯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전후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김병연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당시 평안도 선천 부사로 있던 할아버지 김익순이 홍경래의 반란군에 항복하였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립니다. 삼족이 멸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나 다행히 김익순의 항복으로 정상이 참작 되어 멸족을 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역적의 집안이 되자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자식들이 역적의 자식으로 손가락질 받을까봐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니며 살았습니다.
김병연이 10살(1816년)때 어머니가 아들들의 장래를 위해 영월 산중으로 숨어 들어가 자식들을 공부시켰습니다. 어린 김삿갓은 다섯 살 때부터 어머니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전후에 이미 사서삼경에 통달하였으며 글재주가 있어 시를 잘 지었다고 합니다. 스무 살 되던 해 과거시험을 보러갔는데 그때 김병연이 쓴 글은 바로 자기 할아버지인 김익순을 꾸짖는 시였습니다. 어머니로 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김병연은 “나는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는 역적의 자손이다. 게다가 조상에게조차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 어찌 하늘아래 머리를 들고 살아가겠는가?”라고 탄식을 하며 심한 죄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 뒤로 죽장망혜로 시를 지으며 방랑자로 떠돌아다니던 김병연은 별명으로 김삿갓이 되었습니다. 20대부터 시작된 기나긴 방랑생활 끝에 몸이 쇠약해진 그는 마침내 1863년(57세) 3월 29일 57세를 일기로 동복면 구암리 창원정씨 댁 사랑채에서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여 구암 마을 동편 동뫼등(洞山)에 초장 되었다가 3년 후(1866년) 후손 익균에 의해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와석리(노루목골)로 이장했습니다. 조선팔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양반귀족들의 부패상과 죄악상을 해학적으로 풍자한 방랑시인 김삿갓은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곳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 1850년 동복 관아에 있는 협선루에서 시상을 얻어 지은 시.
藥經深紅蘚 山窓滿翠微(약경심홍선 산창만취미)
羨君下花醉 胡蝶夢中飛(선군하화취 호접몽중비)
郡樓乘曉上 盡日不能回(군루승효상 진일불능회)
晩色將秋至 長風送月來(만색장추지 장풍송월래)
道光三十年 蘭皐金炳淵同福旅所試墨也
약캐러 가는 길가엔 붉은 이끼가 깊고 산창에는 푸르름이 가득한데
그대 꽃아래 취해 있음이 부럽구려. 나비는 꿈속에서 날고 있겠지.
군 루에 아침 일찍이 올라 진종일 돌아 갈 줄 몰랐네.
석양빛은 가을이 이르려 함인지 긴 바람이 스쳐 가더니 달이 솟아오는구나
◈ 화순적벽 : 전남 화순군 이서면 장항리 일원
▲ 절경의 화순 적벽, 그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던 두 곳이 전두환정권에 의해 건설한 댐에 의해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화순에서 적벽은 모두 네 군데. 노루목적벽, 이서적벽, 물염적벽, 창랑적벽입니다. 가파른 옹성산(572m) 자락이 활처럼 휘어져 흐르는 동복천 물길과 만나는 곳에 네 개의 적벽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4개의 적벽 중에서도 가장 비경이 뛰어난 곳은 노루목적벽과 보산적벽입니다. 그런 경치가 동복 댐이 들어서면서 절벽 중 49미터가 물속에 잠겨버렸답니다. 댐을 만드는 바람에 그 아름답던 적벽 절벽을 호수 속에 수장시켜버린 것이지요. 역사적 유적이고 세계적인 명승지를 수장시키는 것을 화순 주민들과 광주시민들이 반대를 하고 데모를 하였는데 그만 광주항쟁이 터져 잡혀가는 바람에 군인들이 불도저로 밀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거기다가 공사를 위해 막아 놓은 가물막이 댐에 비가 와서 물이 차 마을이 물에 잠기기 시작하여 주민들은 결국 가재도구도 다 두고 몸만 빠져나왔답니다. 주민들이 반대를 한 것은 아예 댐 공사를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500미터만 올라가서 댐을 만든다면 아름다운 절벽은 살리는 것이라고 위에다 하라는 주장이었답니다.
광주항쟁 이후 전두환은 무등산을 쪼개버리고 도로를 내겠다는 계획도 발표하였는데 그 놀보 심보는 지역감정을 악화시키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노루목 적벽은 그 후로 상수원 보호구역이라고 그런 절경을 국민들이 보지 못하게 출입금지 시켰답니다. 광주보다 훨씬 큰 서울 시민의 상수원인 팔당댐은 양 옆으로 고속도로가 쭉쭉 뚫려 씽씽 달리고 능내, 두물머리 유원지 등 쌍쌍 다정한 연인들과 서울 시민들이 얼마든지 접근해서 돌을 던져 물수제비도 뜨고 놀 수 있는데, 노루목 적벽은 동복 댐이 만들어지면서 상수원 보호구역이라는 명목아래 출입통제가 되어버렸답니다. 후일 김대중 대통령이 실향민들을 위하여 노루목 적벽 앞에 망향정을 세우고 휴식 공간과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지만 이것도 광주시청에 허락을 구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답니다. 근초고왕 등 드라마를 노루목절벽 망향정에서 찍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 년에 딱 하루, 음력 시월 초하루 무렵에 문이 열린답니다. 주민들은 이날 고향 마을 기슭인 적벽 아래 모여 잔치를 열며 망향의 그리움을 달랜답니다. 절차가 까다로워 정작 화순군민들도 제 땅인데도 가볼 생각을 못하는 그곳에 최근 광주시와 화순군, 이서면 번영회 등이 협의하여 일주일에 한두 차례 한정된 인원에 한해 제한적으로 탐방을 허용할지를 고민하고 있답니다.
이렇듯 수많은 시인 묵객이 그 아름다움을 노래한 화순 적벽의 경치를 접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할 정도라 하는 화순적벽, 옛 선조(1519년 기묘사화 때 화순에 유배된 신재 최산두)들이 중국의 절경이라는 양쯔강 적벽 못지않다고 해서 ‘적벽’이라 이름 붙였다고 하는데 전국을 방랑하던 김삿갓(김병연) 시인도 이 적벽을 와서 보고서는 방랑생활을 접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 김삿갓이 화순적벽을 보고 지은 시
將遊赤壁 歎有客 無酒(장유적벽 탄유객무주)
古跡回間簫歌夜(고적회간소가야)
고적을 돌아보는 사이 통소로 노래하는 밤이 되니
䲵飛烏去蒼茫洲(작비오거창망주)
참새와 까마귀가 날아 가버리고 없는 창망한 섬이로구나.
秋風岳陽上詩杜(추풍악양상시두)
추풍에 악 양에서 시를 짓는 두보 같고
夕陽滁亭歸醉歐(석양저정귀취구)
석양에 저 정 에서 만취해 돌아가는 구양수 같네.
虛汀八月不見人(허정팔월불견인)
허정(한가한) 팔월인데도 사람은 볼 수 없고
露葭蒼蒼江水悠(로가창창강수유)
이슬 맞은 갈대만 창창하고 강물은 아득 하네
江山何處觀之無(강산하처관지무)
강산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곳이므로.
好酒嘉賓方勝遊(호주가빈방승유)
술 좋아하는 사람들과 놀기 좋은 곳 이 로 세.
蕉臯酬句度陵閣(초고수구도능각)
파초 핀 언덕에서 시를 주고받으며 능각을 건너
竹溪携樽采石舟(죽계휴준채석주)
죽계 곡에 술통 들고 들어가 돌을 캐 배에 실었으면
如干知己不相待(여간지기불상대)
여간 나는 알았으니 서로 기다릴 필요 없고
跡盈湖南名勝州(적영호남명승주)
유적으로 가득 찬 호남의 이름 높은 고을 일세
烟霞倘息問無處(연하당식문무처)
어정거리는 사이 연하에 가려 물을 곳이 없으니
福州丹江各海陬(복주단강각해추)
복주고을 붉은 강물 각 해변의 모퉁이 같구나.
東坡以後北路仙(동파이후북로선)
소동파 이후 처음으로 북에서 내려 온 선비이며
壬戌之餘辛丑秋(임술지여신축추)
임술 년이 얼마 남지 않은 신축년 가을 일세(1841)
中央宛在好箇人(중앙완재호개인)
가운데가 굽어있어 사람들이 샅샅이 보기 좋고
庶哉良宵同唱酬(서재양소동창수)
서민 양반 밤에 함께 노래를 주고받기 좋네.
虛舟欲解滿江月(허주욕해만강월)
욕심을 버리니 빈 배에 江月이 가득하고
寂寞無人水渡頭(적막무인수도두)
사람 없어 적막하니 물머리로 건너가세
漁鹽囂市往來者(어염효시왕래자)
어염전에는 왕래자들로 시장이 왁자지껄하고
樵牧荒村生長儔(초목황촌생장주)
황촌에는 초동모수가 짝지어 오래 사네.
文章浪遊視餘事(문장낭유시여사)
글 짖고 낭유하는 사람 여사로 가볍게 보고
與誰吾歸江自流(여수오귀강자류)
강물은 스스로 흘러가니 나는 누구와 같이 돌아갈 가?
蘭槳己斷望美歌(난장기단망미가)
난장과 아름다운 노래 소리는 이미 끊어 졌고
斗酒全空歸婦謀(두주전공귀부모)
술통은 다 비었으니 돌아가 부녀자나 꾀해보세
江亭勿染亦無聯(강정물염역무연)
강변 물 염정은 역시 연관이 없으니
主去多年花木幽(주거다년화목유)
주인 떠난 다년동안 꽃나무만 그윽하네.
浮雲萬里浪跡通(부운만리낭적통)
뜬구름 만리에 물결 자취만 두루 미치니.
明月千年虛影留(명월천년허영류)
명월은 천년동안 빈 그림자 만 머무르네.
적벽..........노산 이은상
산태극 수태극 밀고 당기며
유리궁 수정궁 눈이 부신데
오색이 떠오르는 적벽 강물에
옷 빠는 저 새아씨 선녀 아닌가.
화순적벽에는 가슴 아픈 사연도 있습니다. 조선 중종때 유학자이자 개혁 정치가였던 조광조는 사약을 받기전 25일 동안 배를 타고 다니며 화순적벽의 절경을 감상하면서 한을 달랬다고 합니다.
****옹성산은 장항적벽의 뒷산으로 흡사 독그릇을 세워 놓은 듯 이어져 있어 옹성산이라 하였답니다.
◈ 화순물염정....전남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 373번지
중국의 소상적벽에 버금간다는 화순적벽에는 물염정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물염(勿染)은 세상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고 티끌 하나 속됨 없이 살겠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물염정은 김삿갓이 즐겨 찾던 정자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물염정(勿染亭)은 동복호의 상류 물염적벽이 바라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정자로, 물염(勿染) 송정순이 16세기 중엽 건립한 정자입니다. 물염적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해 예로부터 위락 공간으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무등산 장불재를 넘은 김삿갓이 처음으로 전남 화순 땅을 밟은 것은 34세 되던 해(1841년)였다. 화순적벽의 절경에 취해 1850년 두 번째로 화순을 찾았던 김삿갓은 50세 되던 1857년에는 아예 이곳 동복 땅에 안주하면서 길었던 방랑생활을 마감했습니다. 이후 1863년 동북면 구암(龜巖)마을 정시룡 사랑방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적벽을 소요하며 지은 시들이 거의 친필로 오늘까지 남아 전하고 있습니다.
無等山高松下在 (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 아래에 있고)
赤壁江深沙上流 (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위로 흐르는구나)
현재의 물염정의 정자는 정면 3칸·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966년과 1981년에 걸쳐 중수하고, 1996년 지붕을 교체하였으며, 정자 내부에 조선 중·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들인 김인후(金麟厚)·이식(李栻)·권필(權韠)·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이 남긴 시문(詩文) 등 20개가 넘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물염정은 풍광이 수려하고 유서 깊은 광주전남 8대 정자를 선정되었는데 그중에 제1호가 물염정이라고 하는데 송정순의 호를 따서 물염정(勿染亭)이라 하였습니다. ‘물염’이란 ‘속세에 물들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 담양면앙정(俛仰亭)......전남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402
1533년(중종 28) 송순(宋純:1493~1583)이 건립하였는데, 이황(李滉:1501~1570)을 비롯하여 강호제현들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길러내던 곳입니다. 봉산면 제월리 제봉산 자락에 있는데, “내려다보면 땅이, 우러러보면 하늘이, 그 가운데 정자가 있으니 풍월산천 속에서 한 백년 살고자 한다”는 곳입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추녀 끝은 4개의 활주가 받치고 있습니다. 목조 기와집으로 측면과 좌우에 마루를 두고, 중앙에는 방을 배치하였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여러 차례 보수한 것이며, 1979년에는 지붕의 기와를 교체하였습니다. 최초의 모습은 초라한 초정으로 바람과 비를 겨우 가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송순은 면앙정에서 면앙 정가단을 이루어 많은 학자·가객·시인들의 창작 산실을 만들었습니다. 정자 안에는 이황·김인후·임제·임억령 등의 시편들이 판각되어 걸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곳은 송순의 시문활동의 근거지이며, 당대 시인들의 교류로 호남제일의 가단을 이루었던 곳입니다.
면앙정가,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백발가, 민농가 등 가사(歌辭) 들이 모두 담양에서 지어졌는데 왜 유독 담양이 가사(歌辭)의 중심지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영남은 땅이 메말라 배가 고프니 ‘공부나’ 열심히 했고 호남은 기름진 곳이라 살기에 풍족하여 즐기면서 놀기를 좋아하여 가사가 성행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영호남 비교론-영남 척박, 호남 비옥에 따른 기질 비교는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도 여러 차례 비슷하게 나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오래 전부터 그리 알고 있다고 해서 꼭 사실인 것은 아니겠지요.
역사 연구에서 어떤 문화가 어디서 시작되고 전파되었는가를 경위야 어쨌든 조선조 시대 가사 중 걸작(傑作)은 대부분 담양에서 나왔으니 문화의 기원지점 특질이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의 특성 때문이라 할까요. 특질이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이 문화의 기원지점이라는 것은 백지에 잉크 한 방울 떨어뜨릴 때 어디에 떨어뜨리는 지 미처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자욱이 가장 두텁게 번져 있는 곳이 처음 떨어진 곳임을 알아보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는 것과 같은 원리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