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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의식의 무대를 향한 천국 커튼콜>의 줄거리 :
대제사장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그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예수님의 피가 뿌려집니다. 그러면 나타나는 일이 바로 양심의 복원입니다. 이 양심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 이외의 대상으로 흘러가는 누수 현상을 견딜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하늘로 흐름을 유지하면 그 상태가 바로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굳건히 유지되는 길은 새로 복원된 양심을 따라서 내 의식의 무대 위에 중단없이 천국을 불러내는 커튼콜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내 의식의 무대를 향한 천국 커튼콜
(히브리서 10:19~25)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본문의 핵심 단어를 하나 고르자면 소망이 되겠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양심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소망이라는 핵심 단어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피 뿌림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고, 양심은 무엇이며, 소망을 잡는다는 것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 ‘커튼콜’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커튼콜(Curtain call)은 연극이나 음악회 등에서 공연이 끝나고 막이 내린 후에 청중들의 환호에 보답하기 위해 출연자들이 다시 무대 앞으로 나와서 답례를 하는 것입니다. 역사상으로는 무려 16회의 커튼콜을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20세기의 디바이자 프리마 돈나인 소프라노 가수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1923~1977)가 1956년에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에서 토스카 역을 맡았을 때의 일입니다. 청중들의 환호에 답하기 위하여 무대 뒤에서 다시 나와 인사한 횟수가 무려 16번으로써 역사상 가장 많은 커튼콜이었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람의 의식을 무대라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천국을 커튼콜로 불러내야 합니다. 이것이 소망과 연결됩니다. 청중들의 관점에서 볼 때 공연이 끝나면 출연자들은 무대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박수를 치고 환호하면 다시 출연자들이 무대 위로 돌아옵니다. 천국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내 의식이라는 무대에서 천국이 잠깐이라도 사라졌다면 다시 불러내야 합니다.
물론 내 의식의 무대에서 잠깐의 틈도 없이 천국이 계속 머물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육체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천국을 의식이라는 무대에서 지키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을 의식하는 동안 천국은 의식의 무대 뒤로 사라지고 맙니다. 천국이 내 의식이라는 무대 위에서 사라졌음을 느꼈다면 커튼콜을 통하여 다시 불러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우려하는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를 다 받아들인 뒤에도 구원에서 영원히 떨어져 나가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예수님을 따라갈 때 천국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의 의식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가지 않고 천국을 생각하는 것은 종교적인 천국입니다. 종교적인 천국은 우리가 실제로 접근 가능한 천국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하나님께로 가자, 하나님을 갖자, 천국으로 들어가자’라고 말하며 성소를 언급해 왔습니다.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진짜 성소가 바로 천국입니다. 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번제가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 번제 사건을 의식하지 않으면 천국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번제 사건을 의식함 없이 언급되는 천국은 실제로 들어갈 수 없는 종교적인 허상에 불과합니다.
의식의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천국의 있음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식과 관계해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면 좋은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있다고 의식하는 것이 얼마나 큰 효과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천만 원이 들어있는 통장이 있는데 살다 보니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0년 만에 우연히 그 통장을 찾게 되었습니다. 통장은 실제로 있었지만, 그 통장을 의식할 때와 의식하지 못할 때의 차이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사실들에 대한 의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천만 원 통장이 실제로 존재하듯이 천국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 천국에는 보좌에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그 보좌 우편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천국에 계시면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이렇듯 천국의 있음과 하나님 아버지의 있음과 예수님의 있음과 성령님의 있음은 영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평소에 의식할 때와 의식하지 못할 때 차이를 비교해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천만 원이 든 통장의 있음이 사실인데도 의식할 때와 의식하지 못할 때 차이를 비교해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영적인 사실들을 가정과 직장에서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식하지 못하던 천만 원이 든 통장을 발견한다면 정말로 기쁠 것입니다. 이 통장이 든든한 마음의 의지처가 되어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실제로 존재하는 천국이 이 통장만큼의 의지처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천국이 의지처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무관한 일처럼 창고에 넣어두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의식과 소망에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을까요? 사람이면 누구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채움을 필요로 하는 공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공백에서는 무엇인가를 끌어당겨 채우려는 흡입력이 나타납니다. 이 흡입력은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 24시간 작동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채우기 위해 무엇을 흡입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흡입할 대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마치 같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일지라도 좋아하는 이성이 다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채우기 위해 어떤 대상을 흡입할 것인가가 결정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장 먼저 강력하게 의식하는 대상이 흡입의 대상이 됩니다.
의식함이란 흡입력으로 채워지고자 하는 마음에 대해 목표나 과녁을 설정하는 일입니다. 마음은 24시간 흡입하고자 하는데, 그 대상을 의식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 어떤 사람이 의식에 떠올랐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채워짐을 얻기를 원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의식에 돈 문제를 떠올렸을 수도 있습니다. 의식이 항상 돈에 머물고 있다면 마음도 돈이라는 대상을 흡입하는 중입니다. 이 상태가 바로 소망입니다. 소망이란 채움을 욕구하는 흡입력이 계속 발동하고 있는 상태에서, 의식이 가리키는 대상을 향해 흡입력의 흐름이 유지되는 상태입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라고 하였습니다. 본래 마음의 공백은 하나님만으로 채워질 수 있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이것이 기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식할 수 없다면 마음의 흡입력은 하나님을 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을 의식할 수 없다면 흡입력의 방향이 천국으로 향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마음의 누수 현상이며 빗나감의 죄입니다.
우리 마음의 공백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에 생겨납니다. 이로부터 흡입력이 발생합니다. 의식이 마음의 흡입력이 향할 대상을 정해줘야 하는데 그 의식이 하나님 이외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향한다면 마음도 그것들을 흡입하게 됩니다. 마음의 흡입력은 의식이 가장 먼저 있다고 느끼는 대상을 향하여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부터 평소에 무엇을 의식하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시장에서 학교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다만 어떤 삶의 현장에서든지 의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은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님이 계신 곳입니다. 이 천국을 의식이 붙잡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점검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마음의 흡입력 또한 천국을 향할 수 없습니다. 24시간 작동하는 마음의 흡입력 자체에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내가 의식하는 대상을 무조건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해 하나가 되어 계신 천국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천만 원 통장이 엄연한 사실로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의식하지 못한다면 내 마음이 갈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소망’이라는 핵심적인 주제와 연관하여 양심을 언급합니다. 22절을 보면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이 바로 소망을 가리킵니다. ‘참 마음’이란 마음의 흡입력이 작용하는 상태이고, ‘온전한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자 하나님을 의식함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채워지기 위해 욕구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할 때 마음의 욕구는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청합니다. 양심에도 악한 양심이 있고 선한 양심이 있다는 것일까요? 흔히 악한 사람을 양심이 없다고 합니다. 양심이 있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악한 일을 해도 되느냐?’라는 일깨움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에게 있는 양심이라도 좋을 수밖에 없기에 악한 양심이라는 말은 굉장히 이상하게 들립니다. 여기서 ‘악한 양심’이란 자신의 악함을 느낄 수 있도록 양심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악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악하다고 여기지 못한 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마음에 뿌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마음에 뿌려진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동일시함을 가리킵니다. 이 동일시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내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내가 죽은 것이다.’라고 동일시할 때 마음에서 양심이 생겨납니다. 양심이 생겨나면 마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소망하지 못하고 누수 현상이 일어나는 상태를 점점 견디지 못하게 됩니다. 이 양심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게 합니다. 한 마디로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되 반드시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의식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심을 따라가게 되고 천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곳에는 지금 내가 ‘주님! 예수님! 아버지! 하나님!’하고 부르면 응답할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의식하는 방법은 십자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 보좌 우편에 이르심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름으로써 우리의 의식은 천국에 도달하게 됩니다. 의식이 보이지 않는 천국의 있음을 붙잡게 되면 마음의 욕구의 흐름 또한 천국을 향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붙잡을 것을 요청합니다.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린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남에게서 계기를 찾아 자기 바람을 이루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이가 무엇인가 잘 안되어서 울고 싶은데, 마침 부모에게 혼이 나자 부모 탓을 하며 웁니다. 우리 마음은 항상 비어있음을 채우고자 욕구합니다. 그 욕구하고 싶은 마음에 뺨을 때리듯이 의식이 천국을 붙잡으면 마음은 그것을 계기로 삼아 천국을 향합니다. 욕구의 흐름이 천국을 향하는 소망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25절을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해 애써서 모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예배당 중심의 목회를 할 때 이 말씀을 무척 많이 인용했습니다. 목회자 입장에서는 예배당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나 정직하지 못한 해석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언급된 소망과 연결해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선 23~24절을 보면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25절의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여기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이란 바로 유대 종교로 돌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떠나게 된 이유는 외형적인 요소가 컸습니다. 유대 종교의 모임에서는 성전이 있었고 각 지역에서는 회당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임과 비교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보자면 가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형식이나 체계가 없는 조야한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오합지졸처럼 보였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또한 시간 낭비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유대 종교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거꾸로 이해했습니다. 오히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처럼 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이 유대 종교로 되돌아가고자 했던 이유는 지금 예배당 모임 같은 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체계와 형식이 없고 오합지졸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지금 예배당에서 하는 것과 같은 형식이 잘 갖추어지고 체계적인 모임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거꾸로 이해하여 예배당에 모이는 것을 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오합지졸처럼 보였던 이유는 모임의 목적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의 목적은 한 가지였습니다. 각자 흩어져서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보이지 않는 천국과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라는 영적 사실들이 의식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럴 때 함께 모여서 천국 현실감을 고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각자 의식의 무대에서 천국을 불러내는 커튼콜을 외치기 위해 함께 모였던 것입니다. 나는 상대방의 의식 속에서 보이지 않는 천국이 보이는 어떤 것보다도 우선적인 대상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상대방은 나에게 마찬가지로 천국의 현실감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보이지 않는 영적 사실들을 의식의 무대에 세우기 위한 커튼콜이었습니다. 보이는 것들만을 의식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양심 없는 사람들 속에서 살다 보면 마음의 누수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식의 무대에 천국을 등장시키는 커튼콜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했던 일은 간단합니다. 커튼콜을 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 되어 계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무대 위에 올라오시도록 찬양하고 박수치며 커튼콜을 외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 모임의 주목적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두의 의식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의식의 무대 정면에 천국이 들어설 수 있었고 하나님 아버지가 서실 수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식할 때 내 마음의 욕구는 저절로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유대 종교인들에게는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향하고자 하는 양심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양심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온전히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일이 뜬구름 잡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에게는 거룩하게 보이는 예배도 없었고, 성가대의 찬양도 없었고, 성전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엇하나 체계적인 것이 없는데도 천국을 이야기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 세상을 떠나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사실들이 보이지 않지만 있음이 분명한 사실들을 의식의 무대 위에 세우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모습을 오합지졸들의 모임이라 여겨서 시간 낭비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대했던 것은 지금의 예배당 모임과 같은 체계와 형식이 있는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지금까지 이 말씀을 예배당에 모이지 않는 것이 나쁘다고 이해해 왔으니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배당 모임에 관심을 두는 사람 중에는 의식의 무대에 천국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조차 이 세상에서 높은 곳에 오르는 성공과 고지를 의식 속에 세워주고자 합니다. 의식의 전면에 세상을 세워놓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까지도 동원합니다.
우리는 지금 온라인을 통해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여서 하는 일이란 의식의 무대 위에 보이지 않는 천국이 올라오도록 커튼콜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렇게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사실을 의식에 세우고 다시 불러올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은 바로 나의 주님이 계시고 나의 아버지가 계신 사실을 다시 불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망각하고 있던 천만 원짜리 통장이 의식에서 있다고 느껴질 때의 그 느낌, 그런 방향의 느낌이 천국을 되찾았을 때의 느낌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천국의 있음에 대한 느낌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시작하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이루어집니다. 의식이 하늘로 올라가서 천국을 무대에 세우는 일이 반복되지 않으면 천국의 현실감은 커질 수 없습니다. 반면에 천국을 무대에 세우는 일이 반복될 수 있다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오감을 통해 무엇이 들어오더라도 마음에서 천국의 현실감은 뭉개지지 않고 점점 더 굳건하고 단단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언급하는 소망을 굳게 잡음입니다.
의식의 무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시작하여 보좌 우편에 이르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한 끝없는 박수갈채와 함성을 보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이 가신 천국을 의식의 무대 위에 불러내면 천국의 현실감은 확실해집니다. 눈앞에 보이는 배우자보다도 천국의 현실감이 더 뚜렷하고 우선적이고 강렬하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온전한 소망입니다.
모두가 다 천국 현실감으로 가득 차서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리는 이 세상 대상들을 향한 현실감들은 종적을 감추고 자취를 감추는 일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속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나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을 향하여 오늘도 쉬지 않고 박수갈채를 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자칫 우리 의식의 무대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천국과 하나님 아버지가 무대 전면에 서시는 일이 이루어짐으로 명실공히 완전한 소망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