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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노동 우박 재앙, 두려움 메뚜기 재앙>의 줄거리 :
일곱 번째 우박 재앙과 여덟 번째 메뚜기 재앙은 완악한 노동과 완악한 두려움에 대해서 가해졌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만물이 있게 되는 우주적 방향을 거스르는 완악함에는 완악한 노동과 완악한 두려움의 성분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과 두려움이 사람들에게서 전혀 완악함으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히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완악함을 벗어난 참으로 선하고 좋은 노동과 두려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노동 우박 재앙, 두려움 메뚜기 재앙
(출애굽기 9:13~10:20)
17. 네가 여전히 내 백성 앞에 교만하여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느냐
18. 내일 이맘때면 내가 무거운 우박을 내리리니 애굽 나라가 세워진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
19. 이제 사람을 보내어 네 가축과 네 들에 있는 것을 다 모으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릇 들에 있어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게는 우박이 그 위에 내리리니 그것들이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20. 바로의 신하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종들과 가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였으나
21.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의 종들과 가축을 들에 그대로 두었더라
24. 우박이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나라가 생긴 그때로부터 애굽 온 땅에는 그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
25. 우박이 애굽 온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막론하고 밭에 있는 모든 것을 쳤으며 우박이 또 밭의 모든 채소를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꺾었으되
26.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그곳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
14. 메뚜기가 애굽 온 땅에 이르러 그 사방에 내리매 그 피해가 심하니 이런 메뚜기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라
15. 메뚜기가 온 땅을 덮어 땅이 어둡게 되었으며 메뚜기가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애굽 온 땅에서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남지 아니하였더라
16.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 이르되 내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죄를 지었으니
17. 바라건대 이번만 나의 죄를 용서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
18. 그가 바로에게서 나가서 여호와께 구하매
19. 여호와께서 돌이켜 강렬한 서풍을 불게 하사 메뚜기를 홍해에 몰아넣으시니 애굽 온 땅에 메뚜기가 하나도 남지 아니하니라
20.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일곱 번째 우박 재앙과 여덟 번째 메뚜기 재앙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동 우박 재앙, 두려움 메뚜기 재앙’이라는 제목의 본래 의미를 말씀드리면 ‘완악한 노동에 내린 우박 재앙, 완악한 두려움에 내린 메뚜기 재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완악한 노동이 있습니다. 우박 재앙은 이 완악한 노동에 내려진 재앙입니다. 또 완악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메뚜기 재앙은 이 완악한 두려움에 내려진 재앙입니다.
우리는 열 가지 재앙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민을 애굽에서 구해내시는 것이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스스로 있는 자이심을 강하게 드러내십니다. 내용 면에서 보자면 출애굽은 선민을 바로의 완악함으로부터 꺼내신 사건이기에 출(出)완악함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출애굽 사건은 구원의 상징입니다. 인류 전체가 죄와 저주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인격적으로 지니고 있는 완악함을 바로가 대표하게 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선민조차도 바로와 똑같은 완악함이 인격적으로 체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통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얼마나 지독한 완악함을 드러내게 되는지 이제 나타날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란 죄와 저주로 인하여 완악함이 체질이 되어버린 나로부터의 탈출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완악함으로부터의 구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완악함으로부터의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완악함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합니다. 완악함의 내용을 알 수 없다면 구원은 그저 말뿐이 되고 맙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이 당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손에게도 전해져야 함을 언급하십니다. 10장 2절에서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3,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바로가 보였던 완악함은 여전히 우리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완악함이 도대체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아는 것이 우리의 구원과 직결됩니다.
일곱 번째 재앙은 우박 재앙입니다. 우박 재앙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기억해야 할 절대 진리가 있습니다. 죄와 타락 이전에 본래 인간의 모든 행동의 이유는 하나님의 지시여야 합니다. 내 행동의 이유가 하나님의 지시가 아닌 다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피 재앙의 맥락과 일치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곧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고 행동해야 할 동기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생명입니다. 피 재앙은 이러한 생명이 누출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이유와 다른 동기에 의해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삶이 피바다가 되어버린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피바다가 되어 살고 있는 중에 우박 재앙이 임합니다.
우박 재앙은 노동이라는 인간의 특정한 활동에 집중합니다. 노동이라는 활동이 그만큼 중차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박 재앙은 다른 모든 재앙과는 달리 애굽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나 주택가가 아닌 밭과 들에 임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미리 피신하라는 경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들과 밭에 나간 사람과 짐승은 우박을 맞아 죽었고, 밭과 들의 채소와 나무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미리 경고를 듣고 들과 밭에서 피신한 사람과 가축은 애굽에 속했음에도 다 살았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이러한 우박 재앙이 목표로 하는 대상은 밭이나 들에 있는 사람과 가축입니다. 노동을 멈추고 피신하면 살았지만 그대로 있던 사람과 가축은 죽고 말았습니다.
당시 애굽 사람들이 밭과 들에 나간 이유는 농사를 짓고 먹거리를 장만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 시간에 밭과 들에 우박이 폭탄처럼 쏟아집니다. 이러한 우박 재앙을 우리 시대에 적용하자면 직업 활동에 내려진 재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밭과 들이란 결국 직장입니다. 사람이 밭과 들에 나가서 일하는 이유는 먹고 살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우박 재앙은 먹고 살기 위한 노동 현장에 내려진 재앙입니다. 우리식으로 바꾸자면 내 육체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먹고 살 비용을 버는 노동에 대해 내린 재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해 완악함의 뚜렷한 성분 하나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려고 노동을 합니다. 그리고 ‘내가 노동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완악함의 한 성분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노동을 하더라도 ‘내가 노동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다.’라는 생각은 없어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직장에서 월급을 기대하며 일한다면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여전히 완악함이 활발하게 활성화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점을 뚜렷하게 깨닫기 위해서 에덴동산의 삶을 돌이켜 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노동에 대해 본래 갖고 계셨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판단과 생각을 받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생각을 따라 살며 활동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활동이란 무의식적인 몸짓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뜻이 있기에 목적을 가진 활동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는 그 생각과 뜻을 하나님께 받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본래 모든 인간의 활동은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을 따르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시 이외의 이유와 동기로 인해 하는 활동은 전혀 없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노동을 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서 활동하는 본래 사람의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먹어야 사는 존재임을 아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노동과는 별개로 먹거리를 준비해서 먹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애초에 노동과 먹거리는 별개의 것으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에 노동과 먹거리가 묶였습니다. 스스로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면서 저주가 임했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과 19절을 보면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타락한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서 스스로 벌고자 하였습니다. ‘내가 노동하고 수고해야만 먹고 살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완악함으로 보십니다.
이와 대비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1~32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로서 직장에 나가서 활동을 합니다. 노동의 대가로 월급을 받는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노동의 대가로 먹고 산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해서 그 누구도 의문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완악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절대 진리는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할 때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아버지를 직면합니다. 이것이 하늘 아버지를 소유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주기도문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결정하신 뜻을 내 지정의 육에 지시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이 땅에 내려오는 하나님의 뜻만이 인간 활동의 유일한 이유이자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 외에는 내 활동의 이유와 동기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월급을 받기 위해 노동과 직업 활동을 한다고 여기는 것은 완악함의 성분입니다.
여러분은 왜 직장에 나가 일을 하십니까? 월급 때문도, 승진 때문도, 그 일이 좋아서 하는 것이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가 끼어들어서 월급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라고 속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찾아도 월급을 많이 받기를 바랍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은 구원받아야 될 완악함의 상태입니다. 그대로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내 목숨은 하나님이 있게 하시는 대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내 목숨이 유지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그러나 완악함의 상태에서는 내가 내 목숨을 책임지고자 합니다. 내 목숨을 살리기 위한 먹거리의 비용을 벌기 위해 노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노동을 이렇게 생각하는 한 구원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무노동 무임금을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는 시스템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 안에 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는 아닙니다. 구원의 삶인 십자가 생활화를 해보면 직업 활동을 위하여 직장에 나갈 때도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몸이 움직이면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 됩니다. 내 마음이 돈을 원해서 직업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철저히 해보신 분이라면 이미 다 아실 것입니다. 월급을 받기 위해서 직장에 나간다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일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삶에서는 나의 직업 활동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는 확신이 생깁니다. 사명은 돈을 대가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기 때문에 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악함 안에서 만들어진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인간 사회의 시스템을 선하게 이용하셔서 우리에게 먹고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임금은 내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마련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형들이 요셉을 판 악함을 선하게 이용하셔서 근동 지역의 모든 사람들을 기근으로부터 구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완악함에 의해서 만들어진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십자가 생활화를 실제로 해보면 하나님의 의도가 밝혀집니다. 내가 직장에 나가서 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이 됩니다. 나는 직업 활동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셨으니 하는 일이지 대가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 노동과는 별개로 완악함에 의해 만들어진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시스템을 이용하셔서 내 몸이 먹고 살 수 있는 먹거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우박 재앙은 이 완악함의 내용을 가르쳐줍니다.
여덟 번째 메뚜기 재앙은 두려움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메뚜기 재앙이 일어나자 바로는 특별히 강한 두려움을 보입니다. 16~17절을 보면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 이르되 내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죄를 지었으니 / 바라건대 이번만 나의 죄를 용서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앞서 나타났던 다른 재앙에 대해서도 바로는 일시적으로 완악함의 강도를 누그러뜨리는 태도를 보이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메뚜기 재앙에 있어서는 다급함을 보이며 이 죽음만은 떠나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러한 메뚜기 재앙은 완악함 성분 중의 하나인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줍니다.
두려움에는 완악한 두려움이 있고 선하고 좋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람의 소유 욕구는 마음이 무엇인가를 가지고 누리려는 본능으로써 본래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인격적 본질입니다. 무엇을 소유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존재가 결정되는 무척 중요한 본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두려움도 하나님이 넣어주신 본능입니다. 다만 소유 욕구와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본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공포심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함이 가장 큰 복이듯이 소유 욕구는 대상이 정확하다면 좋은 것입니다. 두려움이라는 심리 작용도 대상이 정확하다면 좋은 것입니다. 두려움의 좋은 점은 상실의 가능성을 미리 방지함에 있습니다. 쉽게 말해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잃는 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을 잃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이삭과 하나님 중 잃어버렸을 때 더 두려운 대상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금도 지체함 없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릴 것을 결정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의 상실은 너무나 슬프고 괴로운 일이지만 죽지 못해 견딜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상실은 잠시도 견딜 수 없는 두려운 일입니다. 창세기 22장 12절에서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보였던 하나님 상실의 두려움을 보시고 하나님 경외가 완성 단계에 이르렀음을 인정하십니다.
이렇듯 두려움은 어떤 대상을 향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대상이 바뀐다면 완악함이 되어버립니다. 사람이 가진 두려움은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변화를 겪습니다. 타락하기 전 에덴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죽음은 사람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판단과 생각과 실시간으로 연결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하심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을 죽음이라 여기며 두려움을 가지라는 의도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선악과를 따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아담과 하와를 유혹합니다. 실제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고도 육체가 죽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궁극적인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죽음의 의미를 바꾸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죽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육체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속인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인간은 두려움이라는 좋은 본능을 잘못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목숨이 끊어지는 두려움을 갖고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육체는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있게 됨이 끝나면 없어질 것으로써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자기 목숨을 스스로 있게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완악함의 성분 중 하나입니다. 본래 인간이 유일하게 두려워할 일이란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15절을 보면 메뚜기 재앙의 참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메뚜기가 온 땅을 덮어 땅이 어둡게 되었으며 메뚜기가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애굽 온 땅에서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남지 아니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바로는 이 상태를 무척 두려워하여 급하게 모세와 아론을 부릅니다. 그리고 17절에서 “바라건대 이번만 나의 죄를 용서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라고 말합니다. 바로는 먹거리가 싹 없어져서 목숨이 끊어지게 된 상황을 죽음이라고 표현하며 두려워합니다.
한편 출애굽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막으로 데려가십니다. 사막은 메뚜기 떼가 아니라도 애초에 초록이라고는 볼 수 없는 땅입니다. 그리고 그 사막에서 사십 년을 살게 하십니다. 바로는 메뚜기 떼가 와서 초록이 없어진 상황을 보며 죽음의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초록이 없는 사막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죽음의 두려움을 가질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초록이라고는 없는 사막에서 무려 사십 년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고 입고 살게 하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무척 대조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십 년 생활을 통해 ‘내가 있게 하려는 동안에는 사막에서조차 너희를 있게 할 것이다.’라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선민이 스스로 살겠다고 농사를 짓고 노동을 한다든지, 몸이 죽을까 두려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있게 되는 우주적 방향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선민이 두려워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과의 실시간 연결이 끊어지는 것을 생명이 끊어지는 것으로 알고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만 유지된다면 메뚜기 떼가 오든 사막에서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무에서 유로 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실시간으로 살아계신 분으로써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있게 하려는 의지를 거두지 않는 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면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바로가 보인 완악함의 성분에는 육체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아직 출완악함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육체의 죽음이란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영이시고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과 연결되었다는 의식이 분명하다면 육체의 죽음이란 입던 옷을 벗는 정도의 의미 이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체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바탕에 놓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바뀐 완악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네가 스스로 생각하고 뜻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이 죽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죽음의 의미를 육체의 죽음으로 바꾸었습니다. 실제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도 육체가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죄와 저주에 빠진 완악함으로 육체의 죽음만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본래 육체의 죽음이란 하나님이 있게 하신 때까지 있다가 끝나면 그뿐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하나님과 연결된 내 마음도 영원함을 안다면 육체는 잠깐 썼다가 벗는 가면과도 같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른다면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완악함을 벗겨내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고, 이를 통해 내 마음이 실시간으로 하나님과 연결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십자가를 놓침으로써 내 마음이 하나님과 연결이 끊기는 것을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의 몸에 병이 났어도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나이가 들어서 여기저기 아파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시는 그때까지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두려워해야 할 일은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의 존재감을 느끼고 있는가, 하나님의 좋음에 대한 소망이 가득한가, 하나님을 소유하고 하나님께 마음이 닿아서 누리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는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연결을 늘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출애굽 사건이 상징하는 출완악함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바로의 완악함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바로의 완악함은 모든 인간의 완악함을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나의 완악함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이 완악함의 성분 속에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함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귀에게 속아서 갖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셨고, 하나님이 있게 하고 계시고, 있게 하시는 그때까지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육체가 이 땅에서 언제까지 있을지는 마음이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 붙잡고 하나님과의 연결에만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허락하신 출완악함의 길인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의 몸을 입고 오늘도 아버지를 직면하는 가운데 우리의 모든 활동과 노동은 아버지의 지시가 유일한 이유와 동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와 연결이 끊어지는 생명의 절단을 두려워할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