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조선시대의 巫敎
序 : 조선시대의 문화와 종교적 상황
조선왕조의 문화적 변천은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創業大成期이다. : 태조(1392)~성종말(1494). 약 백년 간. 문화적 황금시기.
①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영토의 확정
② 훈민정음의 선포에 의한 민족문화의 정립
③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제반 제도의 근간이 될 「경국대전」의 편찬
둘째는 停滯混亂期이다. : 연산군(1495)~경종(1724) : 약 230년 간
① 사대사화, 당쟁
② 왜란(1592-1600)과 호란(1636-1645)
셋째는 新舊衝突期이다. : 영조(1725)~조선말(1910) : 약 200년 간
① 신ㆍ구 문화의 충돌 : 주자학의 비판하고 일어난 실학.
② 동서 문화의 충돌 : 서구의 문물을 동반한 천주교의 도입에 대한 전통문화 세력의 반발
정치적 문화적 쇄국주의가 세계의 문화와 세력으로부터 도전을 당한 시기
③ 상하 간의 충돌 : 무능한 지배층에 대한 민중들의 반란 : 홍경래 난, 유계춘의 난, 동학란
무능한 지도자들의 학정과 부패에서 오는 사회불안과 민중의 인권에 대한 자각이 공통된 배경
신라와 고려의 약 천년에 걸친 두 왕조는 불교문화 시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와 함께 급속히 유교주의 시대로 전환하게 된 데에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큰 요인이 되어 있다. 곧 고려 말에 정권을 잡고 있던
승려 신돈 일파의 정치적 타락이 그 원인이었다. 이에 반항하여
유교 계통의 정도전이 이성계와 결탁하여 혁명운동을 일으켰고
유교국가인 조선을 건국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종교사는 유교만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표면상으로는 유교주의 국가였으나 그것은 지도층의 남성사회를
중심으로 빚어진 현상에 불과했다. 조선시대 문화의 이면에 흐르고 있었던
종교사는 유교가 아니라, 巫, 佛, 仙으로 불리우는 재래종교들로 되어 있었다.
특히 민중과 여성사회가 그러했다.
고려에서 성행했던 도교의 醮祭는 조선에 와서도 계속되었다.
정조21년(1796)에 靈星과 老人星에 제사를 지낼 것인냐 아니냐를 궁에서
논의한 것을 보면, 왕실의 도교초제는 18세기 말까지 진행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도교의 부대학문이라는 풍수지리설은 신라 말 道詵에서 시작된 이후
고려 일대는 물론 조선 일대에 걸쳐 신봉된 俗信이었다. 地德을 찾아 궁터를 정하고,
住家나 묘지 역시 吉地를 찾아 정하려는 것이 그 중심 관심사였다. 이러한 풍수지리
사상은 실로 상하를 막론하고 가장 보편화된 俗信으로 계속되었다.
불교는 무교와 함께 유신들의 배척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천여 년에 걸쳐 두 왕조를
이끌어온 종교가 급작스런 배척으로 쉽게 사라질 리는 없었다. 더구나 조선시대의
모든 왕들이 排佛政策을 쓴 것은 아니었다. 세조와 문정왕후와 선조 그리고 정조는
불교의 꺼져 가는 불길에 생기를 불어 넣으려 했다.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되자 뜻있는 승려들은 勤王을 통해 불교의 위치를
회복하려 했다. 승병을 이끌고 나선 서산대사(1520-1604)나 사명당(1544-1610)의
의거로 한 때 승려들의 신원이 보장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상하를 막론하고 사람이 죽었을 때엔 길한 묘지를 찾아 풍수지리 사상을 따랐으며,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는 49제나 백일제 등을 베풀던 것이 이조 시대의 보편적인
풍속이었다. 그뿐 아니라 消災道場, 水陸齊, 구병기도 등 除災招福을 위해
供佛祈禱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억불정책 속에서도 불교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특히 민중의 신앙은 쇠퇴되지 아니하고 계속 진행되어 갔다.
12세기 이후 고려에서 성행했던 무격신앙은 다분히 불교와 혼합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를 맞이하자 무격신앙은 불교와 그 운명을 같이 해야만 했다.
공적으로는 불교와 함께 탄압되었으나 사적으로는 불교와 함께 일반의 신앙
대상으로 살아 있었다. 특히 민중 속에서 무격신앙은 더욱 성행되는 경향을 가졌다.
민중들은 儒敎喪禮를 행하기보다는 귀신제사를 더욱 성대히 했으며,
불교보다는 무격을 더욱 숭상했다고 했다.
공적인 면에서 본다면 조선초에 이미 정책과 법령으로 승려와 무격을
억압했으나 민중의 기본적인 신앙으로서는 억압할 수가 없었다.
결국 조선시대를 통해 가장 성행한 민간신앙은 무교였다.
이미 신라와 고려 시대의 巫敎史를 보았거니와 조선 시대의 무교
역시 세 유형으로 전개되었다. 그 하나는 단순전승의 유형이다.
곧 천지신명과 산천에 祭지내고 조상에게 제사하는 흐름이다.
둘째 유형은 복합전승이다. 이것은 시대적 문화상,
특히 외래종교문화와의 習合을 통해 전개되어 가는 무격의 양상이다.
곧 신라시대에는 화랑도의 형태로 전개되었고, 고려 시대에는 팔관, 연등회와
팔성신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것이 조선 시대에 와서는 중국문화를 배경으로
한 나례와 창의적인 혼합 현상인 동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조선시대는 표면상으로는 유교문화국이었으나 내면을 흐르고 있는 종교사는
무교를 바탕으로 한 무불선 혼합종교사였다.
여기서 밝히려는 것은 조선시대의 민중의 종교 신앙사인 무교사이다.
그리고 그 자료로서는 주로 「이조실록」에 의거하기로 한다. 「이조실록」은
「삼국사기」나 「고려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왕실을 중심한 국정기록이다.
따라서 민중의 신앙에 관한 직접 자료를 여기에서 기대하기란 어렵다.
다만 이에 반영된 일반의 신앙사를 보려고 하는 것이요, 한편 이를 뒷받침할
보조자료들을 다소 참작하려고 한다.
유동식,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 중에서...인용
첫댓글 좋은정보 감사드립니다.^^~
낙천님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