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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생피를 들이키는 주권 범죄자들>의 줄거리 :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그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 피가 생명과 일체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생명은 하나님께서 생물에게 내리신 '살아 있으라!'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살아 있으라는 명령을 상징하는 피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권 범죄가 실제 우리 일상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요?
생피를 들이키는 주권 범죄자들
(레위기 17:1~16)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시다 하라
3. 이스라엘 집의 모든 사람이 소나 어린 양이나 염소를 진영 안에서 잡든지 진영 밖에서 잡든지
4. 먼저 회막 문으로 끌고 가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 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14.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그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
본문 말씀 중심으로 ‘생피를 들이키는 주권 범죄자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짐승을 잡아서 뚝뚝 떨어지는 생피를 들이키는 주권 범죄자들이 있습니다. 본문 앞부분에서는 피를 흘리지 말라는 내용의 말씀이 나오고, 뒷부분에는 피를 먹지 말라는 내용의 말씀이 나옵니다. 4절을 보면 “…피 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제사와 관련하여 짐승을 죽이는 일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만 제사만을 위해 짐승을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고기가 먹고 싶어서 짐승을 잡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반드시 회막으로 가서 짐승의 피와 기름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피는 번제단 아래에 쏟고 기름은 긁어내서 번제단에서 태워 화목제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화목제를 드릴 때는 짐승의 가슴 부분은 흔드는 요제로 드리고, 뒷다리는 들어서 거제로 드리면서 제사장의 몫이 되었습니다. 다만 식용으로 짐승을 잡을 때는 피를 제단에 뿌리고 기름만 긁어서 태우고 나머지 모든 고기는 헌제자 본인이 다 가져가서 먹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짐승을 잡을 때 회막에서 잡지 않으면 피를 흘린 자로 여기시리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피를 흘린 자로 여기신다는 것은 사람을 죽인 자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선민은 회막에서 짐승을 잡아야 했고 설령 다른 곳에서 짐승을 잡더라도 짐승의 피와 기름을 가져다 하나님께 예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다면 살인한 것으로 여기신다니 너무 엄격한 규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이와 관련하여 신명기 12장을 보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 고기를 먹을 때 성전으로부터 집이 멀리 떨어져 있다면 꼭 피와 기름을 회막으로 가져오지 않더라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문자 그대로 규례를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문자 속에 담긴 의미를 알라는 의도에서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어서 양을 잡았는데 왜 피와 기름은 반드시 회막으로 가져가서 하나님께 드리라 하셨을까요? 회막은 하나님의 이름을 둔 곳입니다. 이러한 회막의 의미를 염두에 둔다면 본문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여 마음을 드리지 않고 짐승을 잡는다면 살인한 것과 똑같이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함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후반부에 이어지는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 더욱 뚜렷해집니다. 14절을 보면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그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가 생명과 일체이며 모든 육체의 생명은 피라는 말씀은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다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동물을 비롯한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에게 ‘살아있으라’는 명령을 실시간으로 내리고 계십니다. 이것이 생명의 의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빛이 있으라, 바다가 있으라, 땅이 있으라고 하셨던 것처럼 생물이 아닌 것들에게도 있으라고 말씀하셨고 그대로 되었습니다. 다만 생명체에 대해서는 그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으라’고 내리시는 명령이 생명인 것입니다. 이로부터 영원한 생명의 의미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있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오고 있기에 영생은 가능합니다. 반대로 영원한 멸망은 지옥에서 영원히 살아있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이란 ‘살아있으라’는 주권자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이 왜 피에 있다고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살아있으라’고 내리신 명령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육체를 가진 동물의 새빨간 피를 ‘살아있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인 생명의 상징으로 볼 것을 제시합니다. 사람이나 동물이 꼭 피를 잃어야만 죽는 것은 아니듯이 피 자체는 생명이 아닙니다. ‘살아있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생명입니다. 그 명령을 뚜렷하게 눈에 보이도록 피로 상징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피가 생명과 일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신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선민이 고기를 먹기 위해 짐승을 잡을 때 피를 먹는다면 ‘살아있으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명령을 침범하고 반항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고기를 먹고 싶어서 양을 잡을 때 나는 양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민이라면 하나님이 나를 살아있게 하시기 위하여 짐승에게 내리신 ‘살아있으라’는 명령을 중단하셨다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29절에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지금 내 손으로 짐승을 죽이고 있기에 짐승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여길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새빨갛게 흐르는 피를 보면서 하나님이 내 손을 통하여 짐승에게 내리셨던 ‘살아있으라’는 명령을 거두고 계신다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짐승의 생명을 거두시려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룰 뿐입니다. 이처럼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잊지 말라는 취지가 있습니다.
얼핏 본문 말씀은 우리와 무관해 보입니다. 우리는 직접 짐승을 잡지도 않고,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크게 신경 쓰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스테이크를 먹더라도 웰던으로 잘 익힌 것보다는 핏기가 살짝 돌도록 미디엄으로 먹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본문의 취지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밥 먹듯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며 살아갑니다. 생피를 날마다 들이키면서 하나님의 ‘살아있으라’는 명령적 주권에 저항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때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듯이 모든 무생물은 있으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명령에 의해 존재합니다. 그 명령이 주어지는 동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포함하여 육체를 가진 모든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으라’는 주권적 명령이 유지되는 동안에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살아있으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에서 ‘살아있으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명령을 범하며 생피를 들이키는 태도를 드러내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인간관계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생피를 들이키며 ‘살아있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하고 저항하는 주권 범죄자들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본문의 피에 대한 언급은 육체를 가진 동물을 대상으로 합니다. 인간 또한 피를 흘릴 수 있는 존재로서 ‘살아있으라’는 명령에 의해 생명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내가 가족을 만나든지 이웃을 만나든지 혹은 뉴스에서 보도되는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든지 그들은 모두 육체를 갖고 있습니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젊든 늙든, 외모가 출중하든 아니든, 부자든 가난하든, 모범 시민이든 가정파괴범이든, 애국자든 매국노든 일단 육체가 살아있다면 지금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살아있으라’고 명령을 내리시는 중입니다. 심지어 가정파괴범 같은 범죄자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파괴범이라고 해서 마귀 때문에 육체가 살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귀에 씌워서 가정파괴범이 되었을지라도 그 육체가 살아있음은 주권자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살아있으라’는 주권적 명령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스스로 반응하고자 합니다. 누군가를 마주할 때 내가 주권자의 위치에 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사람을 바라보는 특정한 기준을 갖습니다. 누군가 마음에 들었다면 마음에 들여놓을 만큼 좋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마음에 안 든다면 마음에 들여놓기에 좋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모습으로 ‘살아있으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명령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누군가 내 마음에 든다고 해서 하나님의 마음에도 드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누군가 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하나님의 마음에도 안 드는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살아있으라’는 명령을 거두지 않고 계십니다. 정작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아무 소리도 안 하시는데 내가 무엇이라고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심지어 부모가 자녀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공부를 안 해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라고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것일까요? 배우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그 모습이 내 마음에 안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으로라도 지금, 이 시간 ‘살아있으라’고 명령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를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이 모습으로라도 내 앞에 있게 하신 상황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지금 이후로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에 대해 무슨 계획을 갖고 계신지도 모르면서 나의 기준을 들이대면서 마음에 들어 하거나 안 들어 합니다. 마치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주권자라도 된 것 같은 마음가짐으로 사람을 대합니다. 이것은 ‘살아있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상징하는 피를 범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생피를 들이키는 것입니다.
앞서 십계명을 살펴보며 살인 계열의 죄를 생각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21~22절에서 “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그 사람이 미련하고 바보 같다고 할지라도 우리 마음은 그것에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형제를 바보라고 업신여긴다면 그를 이러한 모습으로라도 ‘살아있으라’고 명령하고 계신 하나님을 바보로 업신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자라면서 어떻게 사람을 이런 식으로 만드시냐?’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명령하셨기에 그 사람은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내 마음에 든다 안든다 이야기하는 것은 그를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있으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을 정면으로 판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라면 눈앞에 있는 사람에 대해 판단하지 않습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습으로라도 ‘살아있으라’고 명령하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권자라도 된 듯이 누군가에 대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판단한다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치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당이라고 해서 미워하고 야당이라고 해서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내 마음에 안 드는 정치인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를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있으라’고 명령하고 계신 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든 우리의 마음은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6~27절에서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우리 마음은 그리스도로 옷 입고 반드시 하나님께 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다는 증거는 내 앞에 있는 사람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놔둘 뿐입니다. 이것은 마주하는 사람을 무관심하게 방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기에 있는 그대로 놔둘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있는 그대로 놔둔다고 해서 있는 그대로 있는 게 아닙니다. 물론 내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면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고 여길만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그 모습으로라도 ‘살아있으라’고 지금 명령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따라서 내가 마음에서 반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붙잡고 계시면 되는 것이지 내가 마음에서 붙잡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나는 그 사람에게 마음으로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으로 타인에게 깊이 개입했다면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정말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다면 땅에서 마주하는 사람에 대해 마음에 든다 안 든다는 생각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마주하는 증거는 내가 마주하는 사람에 대해 마음이 반응하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마주하여 눈앞에 있는 사람에 대해 전혀 반응하지 않는 단계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내가 죽었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만을 상대하면 하나님에 대해서만 반응합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만 살아있음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지정의육에 하나님의 마음이 내려옵니다. 부디 이것을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를 만나도 내 마음이 반응하지 않는 상태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상태입니다. 사람 앞에서 마음이 아무런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살아있으라’는 주권적 명령을 온전히 받아들인 자의 태도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 진리의 기준을 가지고 분별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될까요? 분별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진리의 기준이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기에 육체로 마주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반응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는 진리의 기준을 인간관계에 적용할 대상은 상대방이 아닌 바로 나입니다. ‘당신은 왜 십자가에서 안 죽느냐? 당신은 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느냐?’라고 따지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진리의 기준을 가지고 분별해야 할 대상은 나입니다. ‘내가 이 사람에 대해 죽었는가? 나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갔는가? 이 사람을 마주하는 이 시간에도 내 마음은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며 나에게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상대방에 대해 화낼 일도 없고 분을 낼 일도 없습니다. 모자란다고 판단할 일도 없고, 잘한다고 칭찬할 일도 없습니다. 마음에 안 든다고 내칠 일도 없고, 마음에 든다고 들여놓을 일도 없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데 타인을 마음에서 내칠 수도 없으며 들여놓을 수도 없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전했고 우리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음이란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한 증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것을 눈으로 보았고 그 사실을 전파했습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야 함을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이때 조심할 것은 우선 나에게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철저히 적용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간 것이 분명하게 느껴진다면 타인에게 반응하지 않게 됩니다. 이 상태가 확인되지 않으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내 마음은 실제로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이론으로만 붙잡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남을 향한 판단의 칼이 되고 남을 향한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지 않는 상태에서 진리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진리의 기준을 손에 들고 사람을 죽이며 생피를 들이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범하는 죄입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전하려면 내가 먼저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충실해야만 합니다. 마음이 완전히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 육체로 마주하는 사람에 대해 죽었음이 확인됩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사도들처럼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분노하셨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보듬으셨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마음이 지정의육을 통해 나타날 것입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살아있으라’고 명령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이러한 모습이더라도 일 년 뒤에, 십 년 뒤에 어떤 모습이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어떤 모습이 될지 모르는 사람에 대해 지금 뭐라고 반응할 수는 없습니다. 연쇄살인마는 천인공노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가 살아있는 한 연쇄살인마의 모습으로라도 ‘살아있으라’는 하나님이 명령이 내려오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천인공노할 마땅한 자일지라도 우리는 그에게 반응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반응한다면 내 마음에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진리를 놔버린 것입니다. 연쇄살인마에 대해 반응하느라 내 마음이 하늘로 가지 못하는 구원의 길로부터 이탈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살아있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강조합니다. 이 명령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기에 짐승을 잡을 때 나오는 피로 상징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살아있으라’는 육체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말라는 취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쇄살인마에게조차도 ‘살아있으라’는 명령을 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지 않으려면 내 마음이 반응하지 않아야 합니다. 연쇄살인마 때문에 내 마음이 예수님이 이루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마주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잃고 예수님을 잃고 구원을 잃게 됩니다. 선민에게서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 연쇄살인마에 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울이었던 시절 아무 죄 없는 초대 교인들을 죽였습니다. 이들은 죄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의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기에 유무상통과 같은 일도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세상의 이치가 아닙니다. 구제를 위해서 한 일이 아니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자 이 세상에서 돈 벌고 살 마음이 없어졌기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사울은 이러한 사람들을 잡아 죽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잔인하게 죽였는지 교회를 잔멸했다고 했습니다. 잔멸했다는 헬라어 원문을 보면 멧돼지가 잘 가꾸어진 포도원에 들어가서 마구잡이로 뛰어다니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당시 유대 종교의 법률상으로는 정당한 일을 했다지만, 영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연쇄살인마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만약 초대 교인 중의 한 사람이 분통을 참지 못하고 사울을 죽였다면 어땠을까요? 당연히 사도 바울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살기등등하여 교회를 잔멸하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인 사울을 볼 때 그 누구도 예수님의 사도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당할 뿐이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기에 사울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 현장에서 돌로 치는 자들이 용서받기를 간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항하여 저항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써 교인을 잡아 죽이는 연쇄살인범과 같은 모습으로라도 ‘살아있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명령을 아무도 어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사울은 변화하여 사도 바울이 되었고 레위기의 모든 제사의 내용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담아내는 교회의 기초가 되는 신학을 만들었고 유럽을 복음화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죄 없이 돌에 맞으면서도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에게 반응하는 대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이 내려오자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이 용서받기를 간구합니다. 그들에게 스데반을 돌로 치는 상태로라도 ‘살아있으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있는 동안 하나님의 마음이 내려와서 중보 기도를 드릴 수 있었고, 그 다급한 현장에서도 생피를 들이키는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나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내가 눈앞에 있는 사람에 대해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을 만큼 완전히 죽었는지 확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가 어떠한 모습을 보이든지 하나님을 마주하는 내 마음에 평강과 기쁨과 감사가 있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반응하지 않고 죽은 상태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내려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내려왔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에게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전하게 하실 수도 있으며, 그의 문제에 대해 말씀하게 하실 수도 있으며, 그를 질책하거나 위로하거나 이끌게 하실 수도 있으며, 그에 대해 완전히 침묵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왔을 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만나든지 예수님이 피 흘려 이루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나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고 완전히 세상을 탈출하여 온전히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가를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확인하지 않고 사람에게 반응한다면 그 모습으로라도 ‘살아있으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범하며 생피를 꿀꺽꿀꺽 들이키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된 길을 가르쳐 주셨으나 우리 죄의 체질이 고래의 힘줄같이 질겨서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조차 모른 채 하나님의 주권을 범하며 생피를 들이키는 자들로 살고 있습니다. 긍휼히 여겨주셔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우리도 온전할 수 있도록 오늘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내 심장 옆에 두게 하시고, 그리하여 온전히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는 위치를 굳건히 지켜내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