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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영이 왜 더럽게 물질을 먹냐?>의 줄거리 :
공백의 영인 마음이 육체에 유착하여서 그 흡입구가 이 세상으로 방향이 고정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육체로 만나는 것들 중에는 공백의 영인 마음이 빨아들여 공백 안에 들여놓아도 괜찮을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영인 마음은 영이신 하나님만을 직접 받아들여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끊어지게 하는 더러움은 내 공백의 마음이 영이면서 물질을 먹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러면 영인 내 마음이 왜 자꾸 더럽게 물질을 먹으려고 할까요? 죄와 저주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를 흘리신 거지요. 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만 내 마음은 깨끗한 마음이 되어서 영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영이 왜 더럽게 물질을 먹냐?
(신명기 14:3~29)
3. 너는 가증한 것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
4. 너희가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곧 소와 양과 염소와
5. 사슴과 노루와 불그스름한 사슴과 산 염소와 볼기가 흰 노루와 뿔이 긴 사슴과 산양들이라
6.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 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7. 다만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낙타와 토끼와 사반, 그것들은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니 너희에게 부정하고
8.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한 말씀 이후에는 정한 물고기와 부정한 물고기에 대한 말씀과 정한 새와 부정한 새에 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사체를 먹어서는 안 되지만 성에 거류하는 이방인 객이나 장사꾼들이 원한다면 주어도 된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22절 이후에는 십일조 규례가 나오는데 여기서 언급되는 십일조는 레위인과 제사장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제2의 십일조, 제3의 십일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헌금하라는 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하고 부정한 짐승에 대한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제2의 십일조와 제3의 십일조에 대한 규정이 제정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영이 왜 더럽게 물질을 먹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하나님을 관계함에 있어서 문제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 문제에 따라서 하나님을 관계할 수도 있고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관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깨끗함과 더러움의 문제입니다. 공백의 마음인 영이 깨끗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과 실질적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공백의 마음인 영이 더럽다면 교황이든 교단의 총회장이든 하나님과 실질적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시골에서 농사짓는 할머니일지라도 마음이 깨끗하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과 실질적 관계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영을 공백의 마음인 영, 공백의 영인 마음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이자 마음이 공백을 가지고 있어서 채움을 위하여 24시간 365일 무엇인가를 빨아들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실제로 대면하여 관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지 마음에 조금이라도 오점이 생겨서 더러워지거나 얼룩지면 하나님과의 실질적 관계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더러워진 나를 깨닫고 깨끗해진 상태에 도달해야 하나님과의 관계는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3~8절에는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해 언급합니다. 정한 짐승의 고기를 먹으면 깨끗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선민으로 살 수 있으나, 부정한 짐승의 고기를 먹는다면 더러워져서 하나님과 끊어진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절 이후에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정한 물고기와 부정한 물고기에 대한 말씀과 정한 새와 부정한 새에 대한 말씀이 언급됩니다. 이러한 정함과 부정함에 대한 규정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7장 18~19절에서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민은 하나님과 관계하는 자들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실시간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자들이 선민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리새인들은 몸을 위생적으로 관리하는 일에 많은 수고와 노력을 기울였고 그에 대한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관계하는 선민다움을 결정하는 것은 육체의 위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깨끗함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음식을 먹는 것은 마음의 깨끗함과는 무관함을 가르쳐주십니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는 먹을 수 있으면 먹고 못 먹겠으면 안 먹을 뿐이지 정한 것을 먹었다고 해서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깨끗함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부정한 것을 먹었다고 해서 하나님과 관계할 수 없는 더러움이 생기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0절을 보면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의 말씀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본문을 마태복음 15장 18절에서는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단 공백의 마음인 영이 더러워졌다면 마음에서 나오는 기운이 생각과 말과 행동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더러워진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말과 행동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러운 마음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은 마치 내 속에서 나온 똥을 손에 들고 사방에 범벅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이와 같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가장 깨끗하게 몸을 위생적으로 관리하며 하나님께 나갈 자격을 충분히 얻었다고 자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향해 ‘마음에서 나오는 더러움이 너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 더럽히고 있으니 하나님께 나갈 자격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7~8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을 유익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안 이후에는 그렇게 좋게 여겼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이전에는 똥 기운이 생각과 말과 행동에 배어 나오는 삶을 살았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이 지적하신 바리새인들의 현실이자 지금 지구상에 사는 80억 인구가 공통으로 가진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한 규정의 상징적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 공백의 마음은 영입니다. 그리고 이 공백이야말로 마음이 제일 무서워하는 상태입니다. 공백에서 발생하는 불안과 공허를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공백이 있는 한 마음은 24시간 무엇인가를 자동으로 빨아들이고자 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먹성은 어마어마한 대식가라 할 수 있습니다.
가끔 TV에서 동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동물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먹이만 찾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의 마음도 다르지 않습니다. 동물은 배를 채우기 위한 먹거리를 24시간 찾아 헤매지만, 사람은 마음을 채우기 위한 먹거리를 24시간 찾아 헤맵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마음 채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정치, 경제, 과학, 기술, 보건, 교육, 예술을 비롯한 모든 활동의 근간은 마음의 만족을 위함입니다. 만족이란 마음의 공백을 채우려는 욕구입니다. 만족하기를 소망하고 희망하고 바라고 기대하는 욕구가 각종 활동을 하는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선민은 공백의 마음이 영이기 때문에 영은 영으로만 채울 수 있음을 아는 자입니다. 죄와 저주 속에 살고 있는 자들은 영인 마음을 몸으로 접하는 물질로 채우려고 합니다. 이것은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지배하에서 영인 마음이 몸에 붙어버린 상태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격을 대하는 것이지만 결국 몸이라는 물질을 매개로 삼아 관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영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영을 물질로 채우려고 함에서 더러움이 발생합니다.
이로부터 선민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민이란 공백의 마음이 영인 것을 알고 영이신 하나님으로 채운 다음에 하나님으로 생긴 만족감을 에너지 삼아 정치, 경제, 과학, 기술, 보건, 교육, 예술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활동을 해나가는 자들입니다. 선민이 아닌 자들은 각종 활동을 통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하지만, 선민은 마음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빨아들여 기쁨과 만족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각종 활동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방인은 물질로 만족하려 일을 하고, 선민은 이미 영으로 만족한 상태로 물질세계에서 일을 합니다.
그렇다면 선민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절대 조건이 영인 마음의 청결입니다. 문제는 영인 마음이 물질을 좋아하여 빨아들이고 소원하여 가지고 싶어 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더러움이 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청결은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불결은 없어야 할 것이 없어야 할 자리에 있는 상태입니다. 공백의 마음은 영입니다. 영이기 때문에 영 안에는 영만이 있는 것이 청결입니다. 반대로 물질을 좋아해서 영 안에 물질을 빨아들였다면 불결입니다. 이러한 더러움의 상태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실질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마음의 더러움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신앙은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한심하고 불쌍한 자신에 대한 연민의 표현일뿐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하나님을 불러봐야 하나님과의 실질적 관계는 불가능합니다.
마음의 더러움의 전형적인 예가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은 자타공인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생각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25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탐욕이란 공백의 마음인 영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빨아들이지 않고 물질을 빨아들인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소원하는 상태가 탐욕입니다. 또한 방탕이란 공백의 마음인 영이 영이신 하나님 말고 물질을 좋아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입니다.
또 누가복음 16장 14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유대인이 5년 동안 십억을 벌겠다는 소원을 가졌습니다. 유대인들이 근면하고 성실하게 장사를 잘하기로 유명하듯이, 이 사람도 십억을 모으기 위해서 외식을 삼가고 술도 금하며 철저히 근검절약을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성실한 삶이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탐욕스럽고 방탕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세상에는 기대나 욕구나 비전 없이 탐욕스럽고 방탕한 삶을 사는 자들이 있습니다. 돈을 흥청망청 낭비하고 게으르고 말초적인 쾌락과 재미만 추구합니다. 이러한 사람들과 십억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근검절약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을 탐욕이라는 동일선상에 놓는 것이 정말로 옳은 일일까요? 우리는 ‘탐욕을 부림’과 ‘탐욕에 빠짐’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표도 없이 흥청망청 말초적 쾌락만 추구하는 삶이 마음을 똥통으로 만든 ‘탐욕에 빠짐’의 상태라면,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근검절약하고 성실하게 사는 삶이란 마음의 금고에 똥을 질서정연하게 쌓는 ‘탐욕을 부림’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똥을 만지고 있는 것은 똑같기에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세상 것을 얻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근검절약을 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올바른 선민의 모습이 아닙니다. 근검절약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면 세상에서 더 사야 될 것도 없고 더 필요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근검절약이 저절로 나온다면 올바른 선민의 상태입니다. 반대로 세상 목표가 있어서 근검절약을 하고 성실하게 산다면 마음의 금고에 똥을 차곡차곡 질서정연하게 쌓아가는 ‘탐욕을 부림’의 상태일 뿐입니다. 똥을 만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똥통에서 허우적대는 ‘탐욕에 빠짐’의 상태에 비해 특별히 더 나을 바가 없습니다. 악이 더 의도적이고 인위적이라는 측면에서는 근검절약하고 성실한 것이 더 못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생활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공백의 마음은 24시간 돌아가는 진공청소기와 같아서 무엇인가를 빨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흡입구의 방향입니다. 공백의 마음은 영이기 때문에 빨아들이는 흡입구를 물질세계에 들이대서는 안 됩니다. 물질을 좋아해서 빨아들일 때 영인 마음은 더러워집니다. 물질과는 차원이 다른 영이 물질화되는 것이 제일 더러운 일입니다.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한 말씀 이후에는 짐승의 사체를 먹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다만 이것도 선민에게만 해당합니다. 이방인이 짐승의 사체를 만지거나 먹는 것까지 막지는 않습니다. 사체란 하나님의 뜻이 끊어진 대상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마태복음의 말씀을 봅니다. 25절에서는 바리새인의 탐욕과 방탕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7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탐욕과 방탕은 정해진 대상을 향하여 마음의 흡입구를 들이댄 상태를 가리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영이신 하나님이 아닌 물질세계에 마음의 흡입구를 들이대고 있는 상태를 시체가 들어있는 무덤으로 비유하십니다. 마음의 흡입구를 세상에 대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에 없는 일을 계획하여 이룸으로써 만족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 뜻에 있지 않는 일을 시체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사업을 하려고 합니다. 사업을 하려는 이유는 돈을 벌어 만족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 뜻에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 안에 썩은 시체가 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봅니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여러 가지 일들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없는 것이라면 부모의 마음에 시체가 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21절을 보면 매우 특이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라고 했습니다. 당시 이방 민족들에게는 어미 염소의 젖으로 새끼를 삶으면 풍작이 이루어진다는 주술적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삶은 고기를 더 맛있게 여겼습니다. 새끼를 키워야 할 어미의 젖으로 새끼를 삶는다는 행위가 무척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행위를 금지하신 것에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게 하심에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를 살리고 있는 생명줄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 때문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없는 일만을 함으로 자기 인생을 죽여버립니다. 이러한 모습이 마치 어미의 젖으로 새끼를 삶는 것과 같기에 선민이라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살려두고 있는 것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왜 내 뜻에 없는 일을 함으로써 인생을 죽이느냐? 왜 시체를 만지고 있느냐? 그러지 말아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을까요? 공백의 마음인 영으로 영이신 하나님만을 빨아들여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만의 존재감과 만족감을 가져야 합니다. 이처럼 존재감과 만족감을 하나님만으로 빨아들일 때,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은 알려집니다.
한편, 22절 이후에는 매우 특이한 제2의 십일조, 제3의 십일조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본래 십일조란 내게 하나님을 날마다 새롭게 증언해 주고 있는 성전의 기능과 의미를 위해 일하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먹고 살기 위한 비용입니다. 이처럼 레위인과 제사장의 업무란 결국 공백의 마음인 영이 영이신 하나님을 빨아들일 수 있도록 날마다 새롭게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증언이 필요한 이유는 살다 보면 마음이 삶에 매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2의 십일조가 언급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소득의 십 분의 일을 뗀 십일조는 성전으로 가지고 갑니다. 나 이외에 이웃과 친지들도 십일조를 가지고 성전으로 갑니다. 이들이 먹고 마시고 축제를 하기 위해 제2의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십일조를 영어로 타이드(Tithe)라고 하는데 본문에서 언급되는 제2의 십일조는 특별히 축제를 위한 십일조라는 의미에서 페스티벌 타이드(Festival Tithe)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또 제3의 십일조가 언급됩니다. 7년마다 찾아오는 안식년을 기준으로 3년째와 6년째에는 축제의 십일조를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을 구제하는 용도로 쓰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제2의 십일조와 제3의 십일조를 규정하신 하나님 마음속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내 공백의 마음은 영이기에 오직 영이신 하나님만을 빨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만으로 마음의 만족을 끝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삶은 축제의 성격을 띤다는 것을 제2의 십일조를 통해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축제의 십일조를 말씀하시는 이유는 단순히 축제를 벌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공백의 마음인 영은 영이신 하나님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럴 때 삶은 축제가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가르쳐주십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삶을 축제의 기분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마음의 흡입구가 세상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한 죽음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좋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좋음으로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의 흡입구가 다른 대상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항상 마주하는 여성은 집사람뿐입니다. 그렇기에 집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예쁩니다. 항상 마주하는 사람이기에 제일 예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한 죽음이 철저해서 마음이 예수님 안에 머무는 자에게는 하나님뿐이기에 하나님을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은 돈이나 건강을 비롯한 세상의 대상을 좋아하는 것과는 질이 다릅니다. 하나님만이 진짜 좋음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진짜 좋음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하나님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귀가 에덴에서 한 일이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보게 한 것입니다. 마음의 흡입구의 방향을 바꿔버렸습니다. 공백의 마음은 채워지기 위한 흡입력을 갖고 있기에 향하는 대상을 빨아들이고자 합니다. 흡입구가 향하는 대상을 좋은 줄로 알고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흡입구를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하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정확하게 방향을 정해놓고 하나님 한 분만을 보면 마음의 흡입력은 하나님만을 향할 수밖에 없고 진짜 하나님의 좋음도 느껴지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좋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내 마음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축하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을 스스로 축하하게 됩니다. 삶이 경축 행사가 됩니다. 공백의 마음인 영이 영이신 하나님을 계속해서 갖습니다. 공백의 마음인 영은 하나님 크기로 만들어져 있기에 엄청난 대식가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영원히 먹는 자들이 선민이고, 선민의 삶은 이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몸이 살아있을 때부터 무한하신 하나님을 먹기 시작해서, 최소한 죽기 전까지는 세상 것은 조금도 빨아들일 필요가 없을 만큼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죽고 나서는 하나님 품에 안기고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심판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나만의 고유한 신령한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영원히 먹고 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먹기는 죽은 다음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유일하게 바라볼 대상으로 삼아 마음으로 먹기 시작하면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삶은 축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 축제가 된 모습이 잘 드러난 사건이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는데 흰색의 발광체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빛의 덩어리와 같은 순백의 영이십니다. 우리의 영인 마음이 세상의 물질을 빨아들인 얼룩진 상태에서는 도저히 순백의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의 모양은 각종 보석빛으로 묘사됩니다. 보석은 보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1절에서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질세계에 마음의 흡입구를 들이대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보물입니다. 일시적이라도 보물을 가졌을 때의 좋음이 있을 것입니다. 보석으로 비유되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영원히 가져도 가져도 사그라지지 않는 보물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보물을 가지려면 마음의 흡입구가 하나님만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철저한 죽음이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세상에 대해 철저하게 죽을 때만 마음은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 드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좋음을 느낄 때 삶은 축제가 됩니다. 그리고 축제가 된 삶에서는 제3의 십일조의 의미가 이루어집니다. 제3의 십일조의 의미는 구제입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구제는 단순히 다른 사람의 처지를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겨서 베푸는 활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민의 구제 활동이란 한 턱 내는 모습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기쁘고 축하할 일이 생기면 돈을 써가며 사람들을 불러 한턱을 냅니다. 우리의 구제의 이유는 이와 같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기 이전에 내 마음에서 영이신 하나님으로 만족함을 경축할 일로 여겨서 벌어진 축제 때문에 한턱내는 것이 구제입니다. 이것이 선민의 삶의 성격입니다.
본문을 정리해 봅니다. 먼저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도 먹어야 하는데 영이기 때문에 영을 먹어야 합니다. 물질을 먹으면 더러워집니다. 더러워진 상태에서는 아무리 하나님을 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바리새인처럼 마음에 시체만 쌓이고 온갖 더러움과 방탕만 생길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철저히 죽어야만 합니다. 그동안 겹겹이 더러워지고 주홍 같던 마음이 백설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예수님 안에 머물 때 하나님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대상일 때 비로소 하나님의 좋음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좋으면 내 마음은 기뻐합니다. 나 자신을 축하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고 삶은 축제가 됩니다. 나를 축하하고 싶을 정도의 기쁨의 기운으로 사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대해도, 자식을 길러도, 살림을 살아도, 직장 일을 해도, 무엇을 해도 나 자신을 경축하는 마음 상태로 살아갑니다.
경축할 일이 생겨 마음이 풍족한 사람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 반드시 한턱내고 싶어 합니다. 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합니다. 내 마음의 채움을 위해서 타인에게 무엇인가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2의 십일조, 제3의 십일조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공백의 마음인 영의 깨끗함을 유지한 채 영이신 하나님을 빨아들여 나타나게 되는 삶의 분위기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공백의 마음은 영입니다. 영이기 때문에 물질을 받아들이면 더러워져서 영이신 하나님과 끊어집니다. 아무쪼록 오늘도 영이신 하나님을 끝없이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소원과 바람이 생기고 세상일 때문에 불평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무조건 십자가에서 죽는 겁니다. 우리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 죽음을 삶의 모든 순간에 철저히 적용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만이 대상이 되시고, 그 하나님만을 먹는 것이 축하할 일임을 느끼고, 그 축하를 같이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한턱내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공백의 마음인 영이 영이신 하나님을 날마다 먹음으로써 하루하루를 경축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경축일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는 나를 위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서 한턱내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